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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Mar 16. 2018

난 그냥 사랑 초보였다

<이터널 선샤인> X <사랑의 기술>


#1 운전의 기술(The art of driving)


나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면허를 땄다. 그래도 매일 운전하면 장롱면허보다 낫다며 부모님께 받은 중고차를 열심히 끌고 다녔다. 그때 내 차를 얻어 탄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혹시...... 초보는 아니시죠?”

“저...... 주차할 때만 빼면 괜찮은데요.”

“원래 주차할 때, 그리고 골목길에서 초보 티가 나는 법이죠.”


그 사람 말이 맞았다. 나는 일렬 주차를 해야 하는 골목길에선 늘 쩔쩔맸고, 그 와중에 보행자가 한 명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면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뿐만 아니라 순간의 어이없는 판단 착오로 사고를 내기도 했고, 사고 후 피해자와 대면은 늘 당혹스러웠다.


몇 번의 사고로 운전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한데, 나는 운전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운전을 하면 나만의 작은 공간이 생기고,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꽉 채운 채 사색에 잠길 수도 있으며, 내가 원하는 곳은 (비록 기름 값이 들지만)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그랬기에 난 운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17년 간 거의 매일 운전을 했다. 좁은 면적에서 주차가 가능하려면 어떤 판단과 핸들링이 필요한지, 보행자와 내 차와의 간격은 차창에서 봤을 때 대략 어느 정도면 안전한지, 사고를 내지 않으려면, 그리고 사고를 내고 난 후에는 어떤 마음가짐과 행위가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난 매일 크고 작은 기술을 익혀갔다.


물론 지금도 배워야 할 게 많지만, 운전을 하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운전이 ‘종합 기술’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주차나 골목길에서가 아니라, 운전이 종합 기술임을 모르고 운전대만 잡으면 운전을 할 수 있다고 보는 단순한 접근에서 초보 티가 나는 건지도 모른다.




#2 소울 메이트와 ‘꽁냥꽁냥’


클라이언트와 만나면 그 분의 정체성에 맞는 옷을 찾기 위해 버킷리스트를 듣는다. 그렇게 듣게 된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속 주인공들처럼 소울 메이트와 함께 북유럽 꽁꽁 언 강에 누워 ‘꽁냥꽁냥’ 이야기를 나누며 오로라를 보는 것. 며칠 후, 난 줄거리조차 희미했던 이 영화를 다시 찾아보았다.


귤색 스웻셔츠, 초록 머리의 클레멘타인과 무채색 옷, 갈색 머리의 조엘은 몬탁 해변에서 처음 만났다. 둘의 관계가 권태에 접어들던 발렌타인데이 즈음, 클레멘타인은 이별을 결심한다. 그리고 아픈 기억을 지워준다는 회사 ‘라쿠나’를 찾아가 조엘에 관한 기억을 지운다.


조엘은 연락이 끊어진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이미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고통스러워하다, 이내 같은 방법으로 자신도 그녀와의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라쿠나’의 기술자들이 삭제 작업을 시작하자, 잠든 조엘의 머릿속에는 그녀와 함께한 순간들이 재현된다. 맨 처음 나타난 기억은 그녀와 헤어지던 날 밤이다.


깊이 파인 블랙 드레스에 퍼 재킷, 진한 화장, 그리고 귤색 머리. 새벽 3시, 만취한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집으로 들어온다. 걱정하며 그녀를 기다리던 조엘은 본의 아니게 클레멘타인에게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그녀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떠나 버린다.


조엘은 그녀를 쫓아가며 소리친다. 다음 날 아침이면 그의 기억도 그의 기억 속 그녀도 사라질 거라고, 이게 바로 ‘같잖은 러브 스토리’에 딱 맞는 결말이 아니냐고.


다음은 마지막 날 낮 벼룩시장의 장면이다. 거기서 둘은 크게 싸우고 서로를 밀쳐낸다. 그리고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기억에서 조엘은 둘의 관계가 말없이 중국 음식이나 먹는 딱한 사이가 되어 가고 있음을 목격한다. 이별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즈음, 조엘은 자신이 잊고 있던 아름다운 순간 앞에 당도한다.


침대에서 조엘과 사랑을 나누던 귤색 머리 클레멘타인은 그에게 묻는다.

“조엘, 나 못생겼어?”

아니라고 답하는 그에게 그녀는 고독 가운데 고통스러워하던 8살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장 못생긴 인형에게 클레멘타인이란 이름을 붙인 후, 못생기지 말고 예뻐지라고 주문을 걸었던 이야기. 그 인형이 예뻐지면 자기도 마법같이 예뻐질 거라 믿었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에게 조엘은 입을 맞추며 다정히 속삭인다.


“너무 너무 너무 예뻐.”


어느 새 그녀가 사라지고 허공에 입을 맞추던 조엘은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꽁꽁 언 찰스 강. 어두운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은 조엘은 핫핑크 바지와 새파란 점퍼를 입은 클레멘타인의 손에 이끌려 얼음판 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녀를 따라 반신반의하며 누운 얼음 위. 클레멘타인이 아니었으면 가지 않았을 그곳에서 조엘은 잠시나마 새로운 자신이 되어 본다. 그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백한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이런 기분 처음이야.”



이제 둘의 이야기가 ‘같잖은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조엘은 온 힘을 다해 삭제 작업에 저항한다. 그러나 ‘라쿠나’의 사람들은 조엘의 저항으로 인한 문제를 우여곡절 끝에 해결하고 작업을 지속한다.

 

삭제 작업은 막바지에 이르러 결국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몬탁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순간을 마주한다. 조엘은 귤색 스웻셔츠를 입은 클레멘타인에게 묘하게 끌리던 감정을 떠올린다. 그녀가 다가와 조엘의 치킨 한 조각을 가져간 순간의 설레임. 그런 추억도 곧 사라질 거라며 아쉬워하던 조엘은 이젠 그 기억들을 음미하기로 한다.


몬탁에서의 기억은 다시 이어지고, 클레멘타인은 바닷가 빈 집에 들어가자는 돌발 제안을 한다. 조엘도 따라 들어가지만 이상하게 부끄러워진 나머지 그 집에서 나와 버린다. 마지막 순간, 도망치던 조엘을 돌려 세운 클레멘타인은 작별 키스를 하며 이렇게 속삭인다.

 

“다시 만나, 몬탁에서......”


다음 날 아침, 결국 조엘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조엘은 출근길 기차역에서 충동적으로 반대 방향인 몬탁 행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몬탁에서, 파란 머리 귤색 스웻셔츠의 클레멘타인을 발견한다. 그리고 결국 둘은 다시 연인이 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이 영화의 메시지를 ‘사랑은 운명이다’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을 지운 두 사람이 운명처럼 다시 만나고, 사랑이 새롭게 기억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으니까. 그러나 10년이 지나 다시 보니, 이 영화는 그 이상을 담고 있었다.


공드리 감독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거슬려했던 클레멘타인의 옷과 머리색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사랑하기’란 무엇인가?




#3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우리가 사랑에서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를 정신분석학과 사회철학, 그리고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종종 고독 때문에 자책하기도 하는 내게 그는 먼저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인간의 가장 심원한 욕구는 고독이란 감옥을 떠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에게 분리로 인한 고독 상태는 그 자체로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을 유발하는 공포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하나 됨(oneness)’을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다만, 프롬은 누군가를 만나기 이전 부모로부터 분리되었던 자신을 부모의 마음으로 사랑할 것을 당부한다. 자존감부터 준비하라는 것이다. 내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받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며, 상대방에게 부모 역할을 떠맡기는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생산적이고 건강한 ‘하나 됨’이다. 사랑을 명사형(love)이 아닌 동사형(loving)으로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 프롬은 사랑이란 능동적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사랑하기(loving)’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로, 우리가 ‘사랑하기’를 ‘사랑에 빠지는 것(falling in love)’으로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했다. 우린 반복적으로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을 쉬운 일로 착각하고 ‘사랑하기’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아닌 다른 기술을 떠올려보면, 우린 실패할 때마다 먼저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한 후, 그것의 해결을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우리는 유독 사랑이라는 영역에 이 관점을 적용하지 않는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사랑을 ‘사랑하기(loving)’보다 ‘사랑 받기(being loved)’로 본다. 또한 자신의 ‘능력(faculty)’ 계발에는 무관심한 채 적합한 ‘대상(object)’을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비합리적 신념을 고수한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면(falling in love)’ 아무런 노력 없이도 ‘영원한 사랑을 유지할 것(the permanent state of being in love)’이라 착각한다.


프롬은 우리가 영원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려면, ‘사랑받기’ 위해 매력을 가꾸기 보단 ‘사랑하기’의 능력을 가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하기’ 위한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사랑에 빠지던 처음의 그 감동과 흥분은 권태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만약 처음의 감동을 되살리기 위해 ‘대상’을 바꾸어도, ‘사랑하기’의 ‘능력’을 함양시키지 않는 한 권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하는 ‘사랑하기’의 정점에는 ‘용기(courage)’와 ‘믿음(faith)’이 있다. 믿음은 누군가의 성장을 기대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이때 믿을 만하다고 검증(?)된 누군가를 택하는 건 믿음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누군가로부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무언가를 예견하고, 아무 것도 검증되지 않는 상황에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용기’를 갖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한 사랑의 가장 높은 경지인 ‘믿음’이었다.


이럴 수가. 사랑은 한 순간 누구에게 빠져드는 로맨틱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행동이며, 운전보다 몇 배나 차원 높은 ‘종합 기술’이었다. 중간에 발생할 고통을 견뎌낼 인내, 상대방의 성장을 믿고 두 사람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보려는 신념까지 필요한 ‘종합 기술’.


초보 운전이냐 아니냐는 골목길 운전과 주차에서가 아니라 운전을 ‘종합 기술’로 보느냐에서 판가름 나듯, 초보 사랑이냐 아니냐는 변태 나르시시스트를 피해 소울 메이트를 찾는 능력에서가 아니라 사랑을 ‘종합 기술’로 보느냐 아니냐로 판가름 나는 게 아닐까. ‘소울 메이트를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빠지겠노라’고 자신했던 난 그냥 초보였다.




#4 그녀의 귤색 스웻셔츠와 귤색 머리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언제부터 ‘사랑하기’ 시작했을까.


‘라쿠나’의 직원 매리는 어린 아이일 때의 기쁨과 순수가 어른이 되면 슬픔과 고통으로 덮인다며 그 고통을 지워주는 하워드를 존경한다. 그러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어린 시절에서 엿볼 수 있듯, 우리는 어릴 시절부터 분리가 주는 고독의 고통을 이미 안다.




조엘은 처음 본 클레멘타인에게 두 번이나 끌린다. 흥미롭게도 클레멘타인은 두 번 다 귤색 스웻셔츠를 입은 채 등장한다. 조엘의 눈에는 그 스웻셔츠가 정말 쿨하다. 나는 괴기한 그림으로 그날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는 것에서 조엘이 조용함 이면에 과감함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라 보았다. 검정 코트에 회색 비니, 검정 가방에 검정 구두를 신은 평범한 갈색 머리 조엘이지만, 형광 귤색 스웻셔츠의 그녀를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외쳤을 것이다.


‘저 여자가 나를 구원해 줄지도 몰라’


영화에서 귤색(Tangerine)으로 표현된 주황색은 희망의 색이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할 때 생기있는 에너지를 연상시키는 주황색에 끌린다. 조엘은 자신에게 에너지를 줄 클레멘타인의 도움을 받아 무채색의 자신의 틀을 깨고, 그녀와 ‘하나 됨(oneness)’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고 비로소 그는 어린 아이일 때부터 갇혀 있던 고독의 감옥에서 나올 용기를 내 본다.


그런 모습은 찰스 강에서 보낸 둘의 시간에서 엿볼 수 있다. 반신반의하며 찰스 강에 발을 들이지만, 조엘이 걱정했던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둘만의 시간은 멈춰버린 듯 조엘은 그녀와 ‘하나 됨’을 경험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구해주고 완성시켜줄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간다.


클레멘타인 역시 고독의 감옥에서 고통스러워했긴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어릴 때 못난이 인형에게 ‘예뻐지라’고 주문을 걸 만큼 여린 자신을, 세 보이는 옷으로 감추고 살아왔다. 그런 그녀는 ‘착한’ 조엘에게 끌린다. 어쩌면 그녀가 그를 만난 후 스웻셔츠 색에 맞춰 염색한 것은 조엘에 의해서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누다 말한다.


“조엘, 나를 버리지 말아줘.”


그와 그녀가 실제로는 두 번째로 처음 만난 날. 그녀는 자기 머리의 염색약 이름이 세련됐다며 색상 이름을 열거하다, 자신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름인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를 덧붙인다. 에이전트(agent)는 화학 용어로 ‘촉매제’이다. 클레멘타인에게 귤색 머리는 두 사람이 만났다는 짜릿함을 배가시키기 위해 필요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통했는지 조엘은 그날부터 그녀를 ‘귤’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클레멘타인’은 작은 귤을 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럼, 두 사람은 기억을 지우기 전 ‘사랑하기’를 경험했던 것일까? 프롬이 말한 ‘사랑하기’의 관점에 비추어 본다면, 여기까지는 각자의 고통과 결핍에 두려워 떨던 두 사람이 만나 ‘하나 됨’의 열망과 반가움을 확인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두 사람은 꼭 맞는 대상을 찾는데는 성공한 듯하다.


그러나 벼룩시장에서 둘은 크게 싸운다. 조엘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클레멘타인의 말을 듣고 당황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클레멘타인에게 ‘키울 수나 있냐’고 공격한다. ‘소울 메이트’라 믿었던 조엘이 자신의 잠재력을 불신하자, 클레멘타인은 이성을 잃는다. 결국 그녀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조엘의 두려움을 헤아리지 않은 채 그를 ‘게으르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날 밤 조엘은 그녀와 자신을 확실히 ‘분리’ 시키는 한 마디를 그녀에게 던진다.


‘친해지려면 아무나와 잠을 자고 보는 여자’


각자는 다시 고독이란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떠나는 그녀를 향한 그의 고함은 그녀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단, 에덴동산을 떠나 고독이라는 들판으로 쫓겨야 하는 한 남자의 절규에 가까워 보인다. 그와 헤어진 클레멘타인은 블루 루인(Blue ruin)으로 염색한다.


프롬은 우리가 ‘사랑하기’에 이르려면 상대방이 꿈꾸는 세계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분노 이면의 두려움을 알아차릴 줄 알며, 상대방의 잠재력을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으나, ‘사랑하기’의 능력은 갖추지 못한 셈이다.


그는 그녀의 귤색 스웻셔츠에 끌렸고, 그녀는 귤색 머리로 그와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사랑 초보자들일 뿐이었다.





#5 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s)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무의식에는 ‘사랑하기’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한다

명언으로 가득 찬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유독 내 머리를 강하게 내려친 문장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사랑받지 못함’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그런 마음의 이면에는 ‘사랑하기’에 수반될 성장의 고통을 감당할 용기가 없음에 대한 인정이 숨어 있다.


프롬은 강하지만 따뜻한 어조로 조언한다. 사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왜 하필 나에게?’와 같은 부당한 처벌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리고 그 고통을 사랑하기에 더 노련한 사람으로 자신을 성장시킬 도전으로 받아들이라고.


돌아보면, 내가 크고 작은 사고와 실수에도 운전을 멈추지 않았던 건 그걸 훈련의 기회로 삼아야 결국 운전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 사랑받지 못할까 두려워했던 난, ‘사랑하기’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고통을 피할 생각만 했다. ‘사랑하기’에서 결국 맛보게 될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라쿠나’의 직원 매리는 공포와 슬픔을 지운 마음에 햇살이 영원히 비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알렉산더 포프의 시를 읊는다. 어른이 되며 경험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공포와 슬픔을 지우면 우리가 다시 아이 때처럼 행복해진다며. 그러나 매리는 기억을 삭제해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음을 다름 아닌 자신의 삶에서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매리는 모든 고객들에게 삭제 전 인터뷰가 담긴 테이프를 발송한다.


다시 만난 두 사람.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서로의 테이프를 듣고 둘은 혼란에 빠진다. 그러다 결국 다시 마주한다. 물론 그 때의 두 사람은 ‘사랑하기’의 능력을 온전히 갖춘 상태로 보긴 어렵다. 그러나 둘은 안다. 클레멘타인이 조엘을 지루해 할 것이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충동을 당혹스러워할 것임을. 그리고 그들은 ‘사랑하기’로 나아가기 위해 겪게 될 고통 또한 알고 있다.



“그래도 난 괜찮아요.”

“나도 괜찮아요.”


서로는 그 고통이 오더라도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한다. ‘블루 루인’ 머리 클레멘타인은 귤색 스웻셔츠의 생기발랄함 이면의 슬픔을 간직한 그대로 조엘을 마주하고, 조엘은 그녀의 있는 그대로 모든 게 좋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도망치면 자신을 밀쳐내는 게 아니라 부끄럽거나 당황스러운 나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함을 이해할 것이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충동적인데가 있더라도 따뜻한 엄마가 되려는 마음이 있음을 지지할 것이다. 그렇게 둘은 매일매일 함께하며 크고 작은 ‘사랑하기’의 기술을 익힐 것이다.


흠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

영원한 햇살이 비치는 흠 없는 마음이란 고통을 지운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원한 햇살은 고통스런 기억을 지운 마음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용기’와 ‘믿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겪어내며 성장해가는 고결한 사람들의 마음에 비치는 게 아닐까.


다시 눈 덮인 바닷가에서 즐거워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은 머지않아 영원한 햇살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에서 조금 더 다듬어진 버전으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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