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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파북쓰 Dec 03. 2021

1.1 놀이가 좋은 아이

남(男) 다른 아빠의 육아 도전기 - 1. 나는 노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때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에 큰 놀이터와 운동장이 있었다.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에서는 보기 힘든 규모였다. 놀이터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고 그 안에 나도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고 공터에서 롤러스케이트도 탔다. 해 떨어지고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놀이터에서 노는 일이 다반사였다.     


부모님 교육열 덕분에 많은 학원에 다녔다. 웅변, 주산, 바둑, 서예 등 다양한 학원이 끝나면 항상 놀이터였다. 놀이터에 가면 많은 아이가 있었다. 친구부터 모르는 아이들까지 친하지 않아도 같이 놀면 친해졌다. 친해지지 않더라도 노는 순간은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다. 아파트 안에 있는 놀이터라 부모님도 걱정하지 않은 것 같다. 해가 지고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부른 적이 없으니까.


놀이터에 한 명이라도 있었기에 혼자 논 기억은 없다. 둘이 놀면 놀이터 그네, 미끄럼틀, 구름다리 등을 타고 놀았다. 여러 명이 있으면 다방구, 술래잡기, 돈가스, 오징어 등을 하고 놀았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놀이는 축구와 야구였다. 혼자 하기 힘든 놀이지만 놀이터에 항상 친구, 형, 동생들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 집 앞 놀이터에 축구를 할 수 있는 넓은 공터가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지금 만들어지는 아파트에는 넓은 공간이 없다. 풋살을 할 수 있는 아파트도 있지만, 축구를 하거나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은 못 봤다. 진짜 야구장처럼 큰 것은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아이들이 하기에는 충분한 넓이였다. 야구까지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아였는지 지금은 알 수 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때는 야구를 많이 했다. 친구 중 야구방망이, 글러브, 공 1개씩만 있으면 야구가 가능했다. 글러브는 포수를 주고, 타자는 방망이만 있으면 되니까. 장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싶어서 아버지께 졸랐다. 아버지께서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면 사주겠다고 하셨다. 열심히 연습은 했으나 어려웠다. 근데 아버지께서 야구방망이를 사주셨다. 왜 사주셨는지는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그냥 기뻐했던 기억만 있다. 젓가락질은 오랜 시간이 걸려 터득했다. 만약 젓가락질을 잘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야구방망이를 받았다면 성취감이라는 걸 얻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야구방망이는 결국 잃어버렸다.

뭘 해도 재밌던 나

공으로 하는 운동은 잘하는 편이다. 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 매일 공을 가지고 놀아서 자연스럽게 잘하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고는 아니다. 같이 축구하고 야구 경기를 하면 친구들이 잘한다고 칭찬해줬을 뿐이다. 한 번은 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방과 후에 친구를 가르쳐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두 번 가르쳐줬다. 초등학교 때 한번, 고등학교 때 한 번이다. 초등학교 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50원인가 100원을 받고 알려줬다. 뭘 알려줬는지 모르겠다. 아마 공을 차는 방법을 알려줬을 것 같다. 왜 돈을 받았는지는 지금도 이해를 못 하겠다. 선수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없는데 돈을 받고 가르쳐줬다고 생각하니 부끄럽다. 두 번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골대 앞에서 골을 잘 넣는 친구였는데, 공을 높게 멀리 차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차는 방식으로 알려줬는데 친구가 해보더니 고맙다고 했다. 그때는 참 뿌듯했다. 그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알려준 적이 없다. 나도 전문적으로 배워서 하는 게 아니다 보니 어떻게 가르쳐줘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은 풋살을 한다. 가끔 같이하는 동료들이 알려달라고 할 때도 있는데 그때마다 난감하다. 대충 얼버무리며 지나가곤 하는데 가르치는 것은 참 어렵다.


중학교 때는 축구화를 신고 학교에 다닌 적도 많다. 흙 운동장은 미끄러우므로 축구화를 신으면 편했다.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도 축구화를 신으면 오래 서 있어서 편했다. 축구는 시도 때도 없이 했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하는 것은 기본이고, 점심시간, 학교 끝나고도 했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되면 하는 것은 축구였다. 학원을 가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축구를 하고 집에 들어갔다. 새로 생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선배도 없고, 동아리도 없고, 심지어 운동장도 없었다. 근처 중학교에서 축구를 하곤 했다.


C.A. 활동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친구들과 함께 축구 C.A를 만들었다. 축구 동아리를 만들면 중학교에서 눈치를 안 보고 할 수 있고, 공식적으로 더 많은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들 동의를 받으러 다녔고, 운동장은 공사 중이었기에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결국, 근처 중학교와 한강 둔치 운동장을 빌릴 수 있었고 동아리도 만들었다. 덕분에 한강 축구장에서 축구 C.A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동아리를 만든 우리는 정말 축구를 좋아했다. 눈 내리는 날에도 축구를 했다. 눈이 쌓여있으면 넘어져도 덜 아프다는 이유로 오버헤드킥 연습도 했다. 머리에 눈이 쌓이고 얼었는데도 골을 넣겠다면서 다 같이 뛰어다녔다. 눈이 오면 아직도 그때 장면들이 생각난다. 방학 때도 축구를 하기 위해 아침부터 만나서 놀았다. 정말 축구를 좋아했는데, 그 많은 친구 중에 축구선수가 된 애들은 없다. 생각해보면 참 희한하다. 한 명쯤은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할 법도 했을 텐데. 축구를 하는 것보다 친구와 축구를 하는 게 좋았던 것 같다.


군대에서도 축구만 했다. 어디 가서도 축구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군대에서도 축구를 잘하니 선임들이 축구 경기를 할 때마다 불렀다. 덕분에 마음 편히 축구를 했다. 일병을 달고 상병, 병장에 진급해서도 축구를 많이 했다. 부대 내에서 축구대회를 하면 미친 듯이 했다. 보통 전역 날이 가까워지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라’라고 한다. 괜히 다쳐서 전역하면 얼마나 손해인가. 부대에서도 전역 날이 가까워져 온 병장들은 많은 배려를 해준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축구를 했다. 축구공에 맞아 안경테가 부러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역 전날에도 축구를 하니까 후임들이 말리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전역을 하면 축구를 할 수 있는 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왼쪽은 나, 오른쪽은 동생

축구 외에도 다양한 놀이를 하고 놀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밖에서 노는 것보다 안에서 노는 것을 더 많이 했다. 게임, 당구 등 안에서 많이 놀았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있다. 밖에서 놀면 활동 범위도 넓고 마음껏 뛸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내 세상이 된다. 그 세상에서 모험하고 도전을 한다. 관계를 키우고 협력을 배운다.


아이를 키우면서 안에서 노는 일도 많아졌다. 아이가 어릴 때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만 놀았고,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실내 활동이 많아졌다. 덕분에 안에서 노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밖에서 놀 수 있을 때는 밖에서 놀려고 한다. 우리 애들한테도 이왕이면 밖에서 놀라고 한다. 코로나 초기에 놀이터 가면 우리 애들밖에 없었다. 집에 있으면 낮은 천장과 답답한 공간에 막혀 생각이 좁아지는 것 같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천장 높이가 높아질수록 잘 떠오른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것처럼 밖에서 놀면 놀수록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상상력이 커지지 않을까? 밖은 천장이 없으니까.


노는 걸 좋아하는 아빠라 육아도 공부보다 노는 것에 중점을 뒀다. 너무 놀기만 해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를 닮아서 그런지, 아이들은 노는 걸 참 좋아한다. 안이든 밖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논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마음껏 노는 아이들을 보면 재밌다. 놀면서 다양한 것을 배우고 습득하면 좋겠다. 놀면서 배운 것들이 작은 씨앗이 되어 먼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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