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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림 Feb 11. 2022

엄마가 된 나

나는 누구인가

<반짝반짝>, 35 x 27cm, Digital Painting, 2022


이십 대 때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정해질 때마다 그것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지만, 대부분 만족할 만한 선에서 성취하며 빛나는 미래를 희망했다. 인생의 방향이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삼십 대를 맞이했다. 해가 갈수록 눈앞의 현실에 허덕이며 하루 살기 바빴다.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것을 추구하며 빛나게 살아갔다. 그러던 중 좋은 사람을 만나 미래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한 아이까지 만나게 되었다. 흔히들 출산 전 후로 인생이 달라진다고들 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난 다시 '예전의 나' -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마음껏 쓸 수 있었던 나 - 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다른 나이다. 과거 당시 나의 모든 것을 끌어 모아 미래의 나를 상상했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를 예상할 수는 없다. 삶을 살면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경험은 나를 성장하게 해주는 좋은 양분이 되어 주었다. 나는 아이도 나에게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며 살고 있는 남편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아이는 나와 남편의 관계보다 조금 더 밀착된 그 정도 관계로 예상했던 것 같다. 과거의 나는 그저 그때까지 겪었던 경험으로만 아이가 있는 나를 상상할 수밖에 없기에 내가 어느 정도로 변화될지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는 내가 경험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달랐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내가 먼저 존재하고 타인과 관계를 연결하며 지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곧 나(엄마)라 생각했다. 무언가 불편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울었다. 주양육자인 나는 아이의 울음을 듣고 불편함을 해결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이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기에 자신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주양육자인 나는 아이의 손과 발이 되어 아이가 조금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기도,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주면서 일상을 함께 한다. 심지어 누구와 공유하지 않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했던 몸을 씻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그런 행위까지도 나와 아이는 함께 한다. 물론 이런 시간이 평생 지속되지 않는다. 나와 아이는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시간이 더 지나면 아이와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고, 양가 부모님들하고도 잘 지내면서 나의 시간을 조금씩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금의 시간으로는 내가 일을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라도 확보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조금씩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다시 아이와 밀착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반복되었다. 한두 번은 그럴 수도 있지 생각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언제면 내가 오로지 나로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애착육아의 3년의 시간이 끝나면?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면?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과연 그럴까. 난 앞으로 모든 것을 오로지 나에게만 쏟아부으며 살았던 그 예전의 나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아이가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없고, 혹은 나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부모가 그렇듯 자신의 아이를 무척 사랑한다. 나 역시 나의 죽음을 기꺼이 내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란다. 사랑으로 이어진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나(엄마)의 일부 혹은 전부를 언제든지 아이에게 내어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사랑으로 난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너'가 있기에 '내'가 된다, 'I' become 'mine' with 'you'>, Acrylic on paper, 2014


사랑을 알게 된 난, 나의 시간 대부분을 내가 주체가 아닌 아이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삶을 살아간다. 가끔은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말 나는 사라지고 없는 것일까. 나는 나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누구이며,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뜬금없이 예전에 작업했던 그림이 떠올랐다. '나'는 '너'가 있기에 '내'가 된다. 나라는 사람은 당신이 있어야 나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었다. 과거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수많은 '너'로 인해 내가 존재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해 주는 '너'는 아이, 남편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크다. 과거의 날 존재하게 해 줬던 사람들이 다르고, 지금 나를 존재하게 해 주는 사람들이 다르고, 앞으로도 나를 존재하게 해 주는 사람들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가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빛나는 이십 대를 살았던 나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던 삼십 대의 나도,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사십 대의 나도, 나는 계속 변화하며 나로 존재하고 있다. 내가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과거에도 지금도 계속 나로 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로 살고 있다. 많은 시간을 나의 일에 쏟아부었던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누군가의 아내이기도, 딸이기도, 며느리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 또한 아주 조금이지만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쓸 수 있는 나로도 살고 있다. 이런 역할과 시간들은 또 변화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변화에 적응하며 앞으로도 계속 나로 살아갈 것이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기르며 자꾸 나의 존재가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시작으로 이 글을 작성했다. 글을 완성한 후 우연히 읽게 된 잡지, 'NewPhilosopher'. 여기에 실린 톰 챗필드의 말이 나의 마음에 와닿아 한 줄 적어 본다.


‘나’라는 존재가 더이상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게 된 이 순간이 어떤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기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톰 챗필드 Tom Chatfield,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 NewPhilosopher KOREA vol.12,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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