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할까.
이제 2년 남짓 세상을 보고 알게 된 아이지만, 사춘기 청소년을 지나 벌써 어른 한 명이 그 작은 몸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 인생을 짊어지고 가는 속사정과 이유가 한가득인데 말이 안 나와서 답답해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아이가 하는 말에 내가 이해한 대로 “아, 이게 이렇다고?” 대답하면, “아니이이이“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말해준다. 그러다 정답을 맞히면 ”응“ 도 아닌 ”어어어“. 그래, 몇 번을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너도 얼마나 답답하겠니.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짜증 나니까 소리를 한번 꽥 질러본 것뿐인데 혼나니까 그건 또 얼마나 억울했겠니.
점점 자아가 생겨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이런 면은 남편을 닮고 저런 면은 나를 닮았다 이야기하지만, 그 시각은 너무 우리 자신에게만 국한된 이해일뿐 이 아이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내 어릴 적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생각하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다. ‘내 어릴 적 싫었던 이것이 너도 싫지 않을까, 내 어릴 적 좋았던 이것이 너도 당연히 좋겠지.’ 자연스럽게 내 취향이 너의 취향이 되고, 나의 기호가 너의 기호가 되도록 강요되며 키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를 개월별 연령별로 어떻게 대하면 좋다, 지금 이런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런 자극을 주면 좋다는 정보는 많지만, 막상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가끔은 지금 뭘 원하는지 선명하게 보이는데도 내 몸이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할 때도 있다. 이럴 거면 잠 줄여가면서 육아책은 왜 봤는지. 차라리 잠을 자고 체력을 비축하지. 결국 밤에 잠이 들기 전 생각한다. “에휴 그거 뭐 별거라고 그걸 못해줬을까.”
바쁜 일상 속, 아니 어쩌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바쁜 일상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오늘 너는 무엇을 보았을까. 엄마의 지속시간 짧은 그 찰나의 따스함이 잠시라도 너에게 전해졌을까.
아이가 “엄마, 이것 좀 봐봐요” 하며 나를 부르고, 작은 손으로 내 고개를 돌려 나와 눈맞춤하고 싶어 할 때, 지금 이때, 더 열심으로 나의 시선을 내어주어야지 결심해 본다.
그래도, 나의 어떤 굳은 결심에도 내 행동과 열심이 따라주지 않는 날에는 이 말을 떠올리며 너무 자책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부모는 모두 좋은 부모라고 생각해요. 더 돼야 할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아이를 키우면 되는데 ‘잘’ 키우고 싶어 하는 게 문제예요. ‘잘’을 빼면 진짜 좋은 부모인 것 같습니다. “ (유퀴즈 온 더 블럭, 조선미 교수)
오늘도 너를 잘 몰라서, 그래서 너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못했다면 미안해.
염치없지만 오늘도 “엄마 좋아” 하며 미소 지어줘서, 안아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