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버리지 못하는 마음들의 컬렉션
렌티큘러 작업을 위해 닫혀 있던 찬장 문을 '디지털'로 활짝 열어젖히면, 그 안에는 깨알 같은 사물들의 우주가 펼쳐진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가장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시간이 바로 이때다. 매끈한 문짝을 그리는 건 10분이면 끝나지만, 그 안에 꽉 차 있는 자잘한 살림살이들을 그리는 데는 꼬박 며칠이 걸린다. 나는 모니터 화면을 최대치로 확대(Zoom-in)해 놓고, 타인의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집집마다, 공간마다 꼭 하나씩은 '도대체 이걸 왜 안 버리고 가지고 있지?' 싶은 물건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 댁 거실 서랍을 볼 때였다. 가지런히 정돈된 겉모습과 달리,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는 10년도 더 된 폴더폰 충전기, 알이 빠진 돋보기, 그리고 어딘가에서 받아온 판촉용 볼펜 뭉치가 엉켜 있었다. 우리집 부엌 찬장 구석에는 이가 살짝 나간 머그컵이, 냉장고 문 쪽에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수제 잼이 반쯤 남은 채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옥에 티'들을 그림에서 뺄까 고민했다. 기왕이면 예쁜 그릇, 세련된 와인잔만 채워 넣는 게 그림상으로는 훨씬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나는 굳이 펜 툴(Pen Tool)을 찍어 그 찌그러지고 낡은 물건들을 공들여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라, '미련'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이가 나간 컵을 버리지 못한 건, 그 컵을 선물해 줬던 사람과의 추억이 묻어 있어서일 것이다. 유통기한 지난 잼을 치우지 못한 건, 언젠가 달콤한 브런치를 해 먹으려 했던 과거의 다짐이 아쉬워서일 것이다. 부모님이 고장 난 충전기를 껴안고 사는 건, 빠르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익숙한 것들을 놓지 않으려는 작은 저항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겉으로는 '미니멀리즘'을 동경하며 깔끔한 인테리어를 자랑하지만, 보이지 않는 수납장 안쪽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집착을 '맥시멀'하게 쌓아두고 산다.
그래서 나의 렌티큘러 속 '열린 풍경(Reality)'은 조금 너저분하다. 하지만 그 너저분함이야말로, 우리가 로봇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오늘도 나는 픽셀 단위로 깨진 컵의 모서리를 다듬고, 낡은 라벨의 주름을 그린다. "이것도 당신의 삶이군요." 라고 속삭이며, 버려지지 못한 마음들을 액자 속에 영원히 수집한다.
그렇게 나의 그림은 누군가의 분리수거함이 되지 못한, 가장 내밀한 박물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