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환자실, 일반병실 — 그리고 21일째 새벽

죽음과 삶 사이에서 붙잡은 손

by 산여울 박유리



먼저, 힘든 시기였기 때문일까요. 그때의 기억은 부분적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 머릿속의 방 안에서 “그래도 괜찮아” 하며 숨 쉬고 있는 그 시절의 세포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합니다.

100%는 아닐 수 있지만, 기억을 더듬어 적는 이 글은 지난 13년이 아닌,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의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2012년 3월 1일, 남편은 새 학기를 맞아 출근을 앞두고 이사한 주택의 창문마다, 그리고 현관에도 방범 샤시를 설치했습니다.

하루 종일 옆에서 지켜보며 간섭하지 않았지만, 주인의 눈길을 무시할 수 없었던 작업자분들은 성의껏 일을 해 주고 가셨습니다.

남편은 “자물쇠를 채워야 끝이지” 하면서 언덕 아래 열쇠 가게에서 자물쇠를 몇 개 사 왔습니다.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여닫이 샤시와 현관, 다용도실로 통하는 작은 샤시문에도 자물쇠를 하나씩 달았습니다. “나는 갇힌 느낌이 싫다”는 제 말에 남편은 기꺼이 제 말대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을 먹은 후, 남편은 화장실로 갔다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내 쿵 소리가 들렸고, 아들과 저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그 순간, 13년 전의 기억이 교차되었습니다. 남편은 41세에 첫 뇌출혈로 응급실에 실려갔었습니다.

그때는 지인들과 학교 선생님들만 알고 한 달가량 입원한 후, 완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기쁨에 젖은 채로 2학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무렵이었거든요.

당시 중환자실에서 일주일간 깨어나지 못하다가 기적처럼 회복된 그는 빠르게 몸을 회복했습니다.


그 후 13년간, 직장생활과 더불어 굳이 먼 곳의 국문학 대학원에 다시 도전했습니다.

저는 그의 뜻을 존중하며 말없이 지켜보았지만, 늘 걱정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둘째 출산 후 생긴 스트레스 장애와 1차 갑상선염 수술의 후유증으로 반대편 갑상선이 재발해 다시 수술을 받았습니다.

유치원 교사였기에 방학을 이용해 수술을 받았고, 감사하게도 담당 의사 선생님의 배려로 염증 부위만 제거해 남아 있는 갑상선이 80~90% 정도 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날씨에 따라 컨디션이 요동치지만, 그래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김해로 2년간 이사를 갔지만 남편이 건강 문제로 힘들어하던 시기, 저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올 결정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형편을 아시죠. 그래도 저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찾은 곳에서 건축사 사장님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저는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 저희는 가진 돈이 많지 않습니다.

김해에 있는 빌라도 팔아도 큰돈이 되지 않아요.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교회 다닙니다. 반갑습니다. 901호가 앞뒤로 트여서 전망도 좋고, 살기 좋을 겁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있는 돈을 다 털어 마음에 드는 집으로 이사했고, 둘째 아들은 옆 고등학교에, 큰아들은 대학에 들어갔고, 남편의 직장도 가까워 모든 조건이 딱 맞았습니다.

그때 저는 두 번째 갑상선 수술 후 회복 중이었고, 가끔 뒷산에 올라 운동하며 평온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둘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을 하고 싶다며 입시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결국 대학은 일본 유학을 결정했습니다.

1년간 일본에서 공부하며 지내는 동안 큰아들은 군대에 있었고, 생활비는 항상 빠듯했습니다.

남편과 상의해 승학산 아래 오래된 단독주택을 구입했고, 학교에서 대출을 받아 리모델링 후 이사했습니다. 저는 마당 있는 집을 좋아했고 생활도 점차 안정되어 갔습니다.

큰아들이 제대 후 복학하고, 저는 오후 종일반 유치원 교사로 다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평온해 보이던 날들 속에서 방사선 문제가 일본 도쿄 인근에서 터졌다는 뉴스가 들려왔고, 둘째는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돌아와 군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계산된 듯한 타이밍으로 2012년 3월 1일, 남편이 쓰러졌습니다.

우리 집도 함께 기울어졌습니다.

이미 한 번 겪은 일이었기에 대학병원 응급실로 바로 갔고, 골든타임도 놓치지 않아 중환자실에 들어갔지만 차츰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머리에는 피를 빼는 관이 몇 개나 꽂혀 있었지만 10일쯤 지나 신경과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때부터는 저와 큰아들의 전쟁 같은 간병이 시작됐습니다.

낮에는 휴학한 아들이, 밤에는 제가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땐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병상 옆에서 쪽잠을 자고, 집에 와서 두 시간 정도 눈 붙이고는 출근하고, 그렇게 21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모두가 “이제 괜찮다”고 말했지만, 제 마음 깊은 곳에 묘한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제가 간병을 하는 날 새벽 2시경, 남편 머리에 심어진 관에서 선홍색 피가 흘렀습니다.

간호사는 “고여 있던 피가 나오는 것”이라 했지만, 저는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4시쯤, 담당 의사를 불러 달라 했고 그날 새벽, 남편은 다시 응급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휴가를 내고 중환자 대기실에 앉아 남편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면회 시간이 되어 들어갔는데, 그는 깨어나 있었지만 그 눈빛이 이상했습니다. 저는 “다시 봐 달라”고 했고, 결국 뇌에 고여 있던 피가 시신경을 건드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에 남편은 다시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 후 15일 정도의 기간, 저는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아가며 남편이 깨어나길 기다렸습니다. 중환자실 침대는 다행히 구석이었고, 머리맡에 성경책을 놓고 아들과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남편이 다시 깨어나길 기도드렸습니다.


의사는 말했습니다.

“폐렴이 올 수 있으니 기도에 관을 심자”고. 저는 두말없이 사인하면서 담당 선생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 손으로 선생님의 손을 잡겠습니다. 선생님의 손으로 남편을 잘 보살펴 주세요.”


정확한 날짜는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남편은 결국 깨어났고, 기도 삽입관으로 말을 하지 못한 채 눈만 깜빡이며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그 후 신경과에서 전쟁 같은 3개월을 보낸 뒤, 6월에 재활병동으로 옮겨졌습니다.


남편은 뇌출혈이란 병명으로 그렇게 머리를 세 번이나 열었습니다.

혈관 우회술 2번, 뇌수액 펌프 삽입술 1번, 관 시술(여러 개)… 그렇게 살아낸 시간이 하나님의 기적 같았습니다. 저는 그 모든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데도, 글을 적다 보니 새롭게 기억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제 머릿속의 세포들이 모두 저장해서 기억해 두었나 보다 싶습니다.

이제는 웃으면서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필명으로 지은 내 이름처럼, 맑게 밝게 환하게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 길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AI그림: 중환자실에서 간절한 기도





이전 03화2. 부부, 그리고 재활과 진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