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2화 밤의 숨결과 정유의 발견
1. 밤의 숨결
터널 속은 밤이 되자 더 깊은 어둠에 잠겼다.
전기는 아직 들어왔지만, 불빛은 불안하게 깜빡였다.
벽을 타고 흐르던 물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이들은 담요를 나누어 덮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서로의 체온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유리 언니, 선생님은 아직 그대로죠?”
하린이 속삭였다.
“응. 지금은 그냥 잠들어 있는 것 같아.
아침이 되면… 다시 한 번 가볼게.”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숨결들이 터널 벽에 부딪혀 작은 파동처럼 번져갔다.
누군가는 졸음에 겨워 유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누군가는 조용히 울었다.
어디선가 전자시계의 초침 소리 같은 규칙적인 물방울이 들렸다.
유리는 눈을 감지 않았다.
터널 위쪽에서 흘러드는 은은한 향기가
그녀의 의식을 놓아주지 않았다.
새벽의 공기가 축축했다.
전등 몇 개가 꺼지고, 불빛이 희미해졌다.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언니… 배고파요.”
“우리, 빵은 다 먹었어요.”
“라면 하나 남았는데, 다섯 명이 나눠 먹을 수 있을까?”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잇따랐다.
고등학생들 특유의 허기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유리는 조용히 일어나 가방을 확인했다.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 손수건, 립스틱.
먹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리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배가 비어 있는데도 속이 고요했다.
밤새 향기에 잠겨 있었던 때문일까.
몸이 가볍고, 머리가 맑았다.
그녀는 벽에 기대 앉아
아이들이 나누어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 다투는 얼굴,
그러다 금세 화해하는 모습.
잠시 후 하린이 라면 반쯤을 들고 와서 말했다.
“유리 언니, 이거 같이 먹어요.”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상하게… 배가 안 고파.”
하린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언니, 그럼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드신 거예요?”
“응.”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도 괜찮아. 몸이 오히려 편해.”
2. 빛의 잔향과 유리의 마음
하린은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다가
라면을 들고 돌아섰다.
그녀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 언니는, 무언가 달라지고 있었다.
유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빛이 번졌다.
“너는 빛의 냄새를 품었다.”
“배고픔은 사라지고, 대신 깨달음이 채워질 것이다.”
낯선 음성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울렸다.
유리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아이들은 웃으며 빵 부스러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리는 손가락을 들어 코끝에 대보았다.
은은한 향기가 손끝에서 났다.
어제, 백합나무를 만졌던 바로 그 손이었다.
유리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빛의 일부가… 내 안에 들어온 걸까?’
터널 위쪽에서 희미하게 또 빛이 일렁였다.
그 빛은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밤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새벽,
유리는 천천히 일어났다.
아이들은 담요에 싸여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평화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유리는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은, 이 터널의 끝을 찾아야 해.”
벽 틈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터널 안은 고요했지만, 그 속에는 억눌린 숨결들이 흘렀다.
누군가의 배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
바스락거리는 비닐담요의 마찰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금속성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유리는 작은 랜턴을 들고 천천히 학생들 사이를 걸었다.
비닐담요 속에서 웅크린 아이들, 울다 지쳐 잠든 얼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꿈꾸는 듯한 학생들 모습.
그녀는 조용히 한 무리의 아이 곁에 멈춰 섰다.
“혹시… 유진이나 유경이라는 이름 들어본 적 있어요?”
아이들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유리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졌다.
“너희는… 어디에 있는 거니.”
그녀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길게 흘렀다.
어디선가 또 하나의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소리가 터널 벽을 타고 멀리까지 번져갔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가방주머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조금 젖은 구겨진 모서리를 펴니,
그곳에는 웃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바닷가의 햇살 아래,
유진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혀를 내밀었고,
유경은 파도에 젖은 발을 가리키며 깔깔 웃고 있었다.
사진 속의 유리는 두 동생을 양팔로 감싸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날의 바다 냄새… 기억나.
이렇게 햇살도 따뜻했는데.’
사진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그들의 얼굴을 번지게 만들었다.
유리는 서둘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살아 있다면, 반드시 찾을 거야.
어떤 어둠 속이라도…”
그녀는 사진을 조심히 가방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3. 정유의 발견
벽을 따라 걷던 손끝이 차가운 감촉에 멈췄다.
손바닥에 닿은 그것은 물이 아니었다.
기름처럼 미끄럽고, 달콤하고, 진한 향이 났다.
그 향기는 익숙했다 —
어제 위쪽에서 봤던, **빛의 정유**였다.
묘하게 중독되는 느낌의 향기.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 향은 벌레를 막았지…
혹시 이걸 이용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향기는 단순한 냄새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존재처럼 그녀의 손끝을 타고 올라와
온몸의 맥박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유리는 재빨리 하린을 불렀다.
“하린아, 이리 와봐.”
하린이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얘들아, 이 향을 조금씩 몸에 발라보자.”
유리가 말했다.
“향이요?”
한 아이가 물었다.
“어제 봤던 그 빛나는 물이에요.
벌레들이 근처에도 못 오더라고.”
아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수군댔다.
“그걸 왜 발라요?”
“냄새가 이상하지 않을까?”
유리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밖에 나가야 하니까.”
순간, 아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밖에요…?”
“그래.”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내 동생들이 있을지도 몰라.
너희도 가족을 찾고 싶잖아.”
침묵이 터널을 감쌌다.
아이들의 눈동자가 랜턴 불빛에 반짝였다.
두려움, 기대,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희망이 함께 섞여 있었다.
“무섭지만… 해볼게요.”
하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은 차례로 정유를 손등과 목에 발랐다.
그 향기가 공기 속에 흩어지자,
터널 전체가 마치 숨 쉬는 듯 미묘하게 흔들렸다.
유리는 속으로 속삭였다.
“유진아, 유경아…
언니가 간다.”
4. 동생들은 어디에
그녀는 등 뒤의 가방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연필과 스케치북,
그리고 동생들의 사진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세상이자 목적이었다.
하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진짜 내일 나갈 거예요?”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응. 내일 새벽에 나가자.
터널 속에는 내 동생들이 없는 거 같아.
새벽에 나가야 빨리 돌아올 수 있을거야.
햇볕이 있을 때 빨리 다녀오자.”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유리는 하린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 하지만 겁이 나면 언제든 돌아가.
두려움은 나쁜게 아니야.”
“괜찮아요.”
하린의 눈빛이 조금 단단해졌다.
터널 안의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해졌다.
누군가는 속삭였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두가 한 가지를 믿었다 —
이 어둠은 끝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하나둘 잠들었다.
유리는 천천히 일어나 터널 벽에 손을 대었다.
벽의 차가움 너머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마치 살아 있는 심장의 박동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만약 이 빛이 거짓이 아니라면…
제 동생들을 이 향기 안에서 만나게 해주세요.”
터널 천장 틈에서 바람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향기와 빛이 섞여 공기가 흔들렸다.
유리는 그 바람을 느끼며 속삭였다.
“내일은 반드시, 길을 찾을 거야.
내 동생들을 꼭 찾을거야.
애들아 내일은 꼭 만나자.”
과연 유리는 동생들을 만날 수 있을까
— 2화 끝.
“황명터널은 웹툰으로도 연재를 시작했어요.
링크는 댓글에 남겨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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