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 터널》1화 사라진 아침 그리고 남은 향기
1. 재난문자와 사라진 아침
4월 초, 해운대구 어느 동네의 아침.
햇살은 따뜻하지만, 바람은 아직 선선했다.
멀리서 바다의 파도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유리는 오늘따라 늦잠을 잤다.
새벽에 ‘휴강’ 문자 알림을 보고는 마음이 느슨해졌던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한 번 확인하고는,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어젯밤 늦게까지 과제를 하느라 잠을 설쳐서 피곤했다.
창문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에 유리는 살며시 눈을 떴다.
“으~~! 시간이 벌써 9시가 넘었네.”
일어나면 바로 보이는 벽시계는 9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부시시 일어나서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이상했다. 재난문자가 몇 개나 와 있었다.
"밖에는 지금 이상한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나가지 마세요."
'에이~ 뭐 이런 문자가 다 있어! 오늘은 만우절도 아닌데..ㅋㅋ'
정말 이상한 문자였다. "아직 잠이 덜깼나~ 뭐지?"
책상을 바라보았다. 전날 펴둔 과제물들과 연필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 옆의 벽에는 유리의 1호 가방이 걸려있다.
방 바닥에는 동생들이 살며시 몸만 빠져나간 잠자리가 그대로 있다.
창문을 열고
차를 한 잔 마실까 하고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렌지 위에 물을 담은 주전자를 올렸다.
그 순간, 무심결에 내다본 밖의 풍경이 묘했다.
뭐지? 다시 휴대폰을 켜서 재난문자를 보았다.
냉장고는 돌아가고, 시계를 쳐다보니 움직이고 있었다.
세상은 작동 중인데, 사람의 기척이 사라져 있는 느낌이었다.
지금 시간이면 골목에는 사람들이 오가야 할 시간인데, 분명히.
유리는 벽시계를 봤다.
9시 12분.
휴대폰은 8시 02분에서 멈춰 있었다.
그 순간, 유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이상해. 전화가 되지 않아.”
통화 버튼을 계속 눌러 보았지만,
신호음도, 연결음도 들리지 않았다.
“설마… 내가 잘못 누른 건가?”
이번엔 재난 문자함을 열어보았다.
여러 개의 문자 알림 중 마지막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전국 통신망이 순차적으로…”
거기서 문장이 뚝 끊겨 있었다.
마치 누군가 보내던 중에 갑자기 멈춰 버린 것처럼.
유리는 스크린을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밀어 올렸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 메시지도, 어떤 알림도 없었다.
“아니… 뭐야… 왜 여기서 끊긴 거야?”
침묵이 답했다.
세상은 멈춘 듯 조용했고,
유리의 휴대폰 화면만이 어색하게 밝게 빛났다.
2. 쓰러진 사람 속에서
지금까지 온 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연결이—끊긴 것이다.
유리는 숨을 들이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느낌 때문에 빨리 움직였다.
동생들은 이미 나가고 없다. 시간이 몇 시인데, 당연하다. 하지만...
유리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하늘색 얇은 스웨트를 입고 청바지와 검정색 운동화를 신었다.
긴 머리를 뒤쪽으로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습관처럼 크로스 가방을 메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문을 열었다.
그 가방 안에는 유리의 일상이 들어 있었다.
학생증이 꽂힌 카드지갑, 현금 십만원, 손수건,
작은 거울과 립스틱 하나, 휴대용 휴지,
그리고 낡은 천으로 된 연필통과 작은 스케치북.
그녀는 어디를 가든 그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 안의 물건들이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골목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신문과 낙엽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리는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가게 불은 켜져 있었고, 자판기 불빛도 반짝였지만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골목 끝에서 한 남자가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옷차림은 평범한 트레이닝복.
유리는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남자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남자가 쓰러진 그 순간,
유리의 후각이 먼저 반응했다.
썩은 것도, 피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부패한 냄새.
남자의 옷 사이로 어둠 같은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처음엔 그림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었다.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멀리서 다른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아무도 없는 도시에서, 비명만 흩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방을 움켜쥐었다.
‘유진이, 유경이….’
동생들이 생각났다.
둘 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유리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가방이 몸에 부딪히며 리듬을 만들었다.
정류장의 전광판은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엔 멈춘 버스와 열린 차문들, 쓰러진 자전거.
멀리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군데군데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
유리는 무서웠다. 그래도 동생들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소중한 내 동생들, 빨리 찾아야 한다."
3. 조용한 학교와 남은 향기
헉헉! 학교 앞에 도착했을 때,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가방, 도시락, 체육복이 흩어져 있고,
교실 커튼만 바람에 펄럭였다.
복도 벽에 낡은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체육관 쪽 위험. 학교 뒤쪽 황명 터널로 피신 중.”
유리는 떨리는 손으로 메모를 손에 쥐었다.
“황명터널…?”
그녀는 다시 달렸다.
가방 속 스케치북이 ‘툭’ 하고 흔들렸다.
그게 이상하게 심장소리처럼 느껴졌다.
학교 뒤편 도로 끝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입구가 있었다.
황명(黃明) 터널로 가는 지름길이다.
황명터널은 오래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터널이었다.
그래서 그 터널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곳으로 가다보니
멈춰 선 차, 버려진 가방, 떨어진 교복.
그 안쪽에서 은은한 향기가 새어 나왔다.
비누도 아니고, 흙냄새도 아니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코끝을 감싸는 냄새.
유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야,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볼을 살짝 꼬집어보니 아프다. 현실이 믿기지 않지만,
보이는 모든 상황이 유리를 정신이 들게 했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
그녀는 가방끈을 고쳐 매고,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터널 안은 축축했다.
벽면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젖은 종이컵과 빵 포장지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터널 속에는 웅성웅성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빛이 흔들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하얀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이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유리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는 하린이에요.
밖은 위험해요. 다들 안쪽에 있어요.”
그녀의 눈빛은 불안했지만 따뜻했다.
유리는 그 불빛을 따라 걸었다.
공기 속 향기가 점점 짙어졌다.
본래 유리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친구들이 개코라고 놀리기도 하는 후각이 발달해 있었다.
한때 놀림이었던 그 후각이,
오늘은 유리를 이끄는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다.
그 냄새 속에는 이상하게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유리는 그 향기를 따라 천천히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유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향기는 참 이상해. 마음이 편안한 향기야.
무슨 향길까. 처음 맡아보는 향기야.
무엇으로도 설명하기가 힘든 향기야.
누군가의 숨 같은, 따뜻한 흔적이야.”
4. 터널 속 사람들
터널은 생각보다 깊고 넓었다.
유리는 하린이의 손전등 불빛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바닥에는 고인 물이 흘러가고 있었고, 그 물 위로 조용히 빛이 반사되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어딘가 달콤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조심하세요. 여긴 물이 깊어요.”
하린이 말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속 스케치북이 걸음마다 ‘툭, 툭’ 부딪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랜턴 불빛이 깜빡였다.
그 아래에는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몇몇 어른들이 담요를 덮고,
라면과 빵을 나누어 먹으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더 안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다들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거예요.”
여학생 하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은 위험해요. 벌레들이 돌아다니고… 그때부터 아무도 나가지 않았어요.”
유리는 계속 사람들 틈을 살폈다.
하지만 터널은 생각보다 길고 넓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웅성이는 사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혹시나 동생들이 있을까 싶어 불렀지만,
목소리는 금세 다른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버렸다.
유리는 차츰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벽에 손전등 불빛이 닿을 때마다,
낡은 벽돌 사이로 빛나는 덩굴이 드러났다.
그 덩굴은 천장 가까이까지 뻗어 있었고,
그곳에서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건 뭐예요?”
유리가 묻자, 옆에 있던 남학생이 말했다.
“오늘 아침에 선생님이 저쪽으로 올라가셨어요.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 가보신다고….
그런데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터널 안쪽, 관리 구역으로 이어지는 계단 위쪽.
그곳에서 희미한 하얀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유리는 그 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위험하지 않아요?”
“모르겠어요.”
하린이 답했다.
“냄새는 좋은데… 이상해요.
우리는 겁이 나서 가까이 못 갔어요.”
유리는 한 걸음 다가서려 했지만, 하린이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요. 다들 말렸어요.”
그 순간, 벽 틈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고인 물 위로 기름 같은 막이 번지며,
그곳에서 향기가 더 짙게 피어올랐다.
유리는 향기가 스며드는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순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 냄새… 마음이 편해져요.”
하린이 조용히 말했다.
“우린 그걸 ‘향수’라고 불러요.
냄새를 맡으면 잠시 불안이 사라지고,
몸에 닿으면 상처도 덜 아픈 것 같아요.”
5. 치유의 향기
유리는 무릎을 굽혔다.
바닥의 물에 손을 대자,
손가락 끝의 상처가 서서히 사라졌다.
“……치유가 돼요.”
그녀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그때, 멀리서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식량이 얼마 안 남았대.”
“내일은 어떡해…”
아이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터널 안을 울렸다.
곧이어, 터널 끝 어딘가에서 드드득—
벽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동시에 숨을 죽였다.
유리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손이 떨렸지만, 연필을 꼭 쥐었다.
덩굴, 빛, 향기, 그리고 벽의 그림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뭘 그려요?”
하린이 물었다.
“그냥… 이게 진짜라면, 그 증거를 남기고 싶어요.”
그녀가 그림을 완성하자,
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향기가 더 짙어지고,
아이들의 얼굴에 잠시 평온이 스쳤다.
유리는 그림의 뒷장에, 이 상황을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잠시 후, 계단 위쪽에서 빛이 더 강하게 번졌다.
그 빛이 벽면의 물기를 따라 흘렀다.
유리는 시선을 들었다.
그곳에서 먼지 입자들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기요.”
유리가 속삭였다.
“저기서 나는 거예요, 그 향기.”
하린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침에 선생님도 그랬어요.
조금만 본다고 올라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유리는 그 말을 들었지만,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빛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어딘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천천히 가방끈을 고쳐 매며 말했다.
“누군가는, 그 빛을 확인해야 해요.”
하린은 겁에 질린 눈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그러나 유리는 이미 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터널 안 공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
빛이 유리의 뺨에 닿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였다.
유리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고 살짝 안을 들여다보다가 놀라서 달려갔다.
어떤 빛나는 나무 아래에 선생님이라는 분이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선생님의 코에 손을 대어보니
잠이들어 있었다.
유리는 일어나서 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나무의 줄기가 유리의 접근을 거부하면서
줄기로 밀어냈다.
놀란 유리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아이들 곁으로 내려왔다.
“그날 밤, 유리는 처음으로 알았다.
빛이 주는 온기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그 나무와 연결된 무언가의 의지였다.”
— 1화 끝.
“황명터널을 웹툰으로도 연재를 시작했어요.
링크는 댓글에 남겨둘게요.”
#황명터널 #장편창작동화 #창작소설 #감성판타지 #유리작가 #빛과향기 #브런치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