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2화

by 유수 Oct 29. 2024

눈 깜박할 사이에 윤서는 학사모를 쓴 채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는 학과 동기들이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가 학회장에게 졸업증을 받아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순서에 윤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서 1주일 동안 하우스메이트들과 갖은 회의와 연구를 했다. 우선, 쇼핑몰을 들락거리며 가운 안에 입을 옷과 구두, 그리고 가방을 샀다. 비교 분석을 통해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시간이 모자라니, 하루에 한 명의 의상을 고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액세서리는 각자의 재량에 맡겨졌다. 효성은 피어싱이 있었고, 지은은 귀를 뚫지 않았고, 윤서는 금속알레르기가 있었다는 등.) 윤서는 3일째 되는 날에 쇼핑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지은을 위해 다음날에도 쇼핑몰을 찾았다. 민지는 학점이 모자란 탓에 졸업이 미뤄졌지만,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했다. 쇼핑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 그리고 졸업식의 관객으로서 적합한 옷이 필요하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의상에 맞는 화장법을 연구하는 단계였다. 하우스메이트들은 가장 넓은 신애의 방을 놔두고 효성의 방으로 모여들었다. 항상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이라인을 그려내는 효성에게 화장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5명의 여자들은 효성의 좁은 거울 앞에 모여 온갖 화장품을 발라보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립스틱,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블러셔, 하이라이터 등등. 화장에 큰 관심이 없던 윤서와 지은마저 진지해지던 순간이었다. 민지는 그저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빌려야 했다. 하우스메이트들은 예상보다 비싼 대여료에 눈이 번쩍 뜨였다. 민지는 미래의 자신이 감당해야 할 금액에 암담해졌다. 윤서와 효성은 다행스럽게도 졸업전시와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려 돈을 충분히 모아두었다. 신애는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내면 되었다. 하지만 지은의 사정은 달랐다. 옷과 가방 등 치장에 쓰인 지출이 커서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은은 고민스러운 마음에 할 일을 미루고 방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신애에게 돈을 빌려볼까 했지만, 그건 신애의 부모님에게 빚을 지는 것 같아 너무 부담스러웠다. 민지에게 손을 벌리자니 졸업도 못하는 아이에겐 가혹행위 같았다. 효성에게 털어놓으면 큰 소리로 화만 낼 것 같았다. 그렇게 지은의 머릿속에 남은 사람은 윤서뿐이었다. 지은은 결심한 듯 방을 나서서 윤서에게로 향했다. 


똑. 똑. 똑. 지은은 조심스럽게 윤서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윤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천천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 지은이 작게 인사했다. 윤서는 침대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윤서는 영화를 멈추며 말했다. "응, 안녕." 지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 저. 졸업식 준비는 잘 돼가?" 윤서는 황당하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우리 다 같이 했잖아." 지은도 머쓱한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맞아." 윤서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지은의 모습에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윤서의 말에 고개를 든 지은이 잠깐 눈을 마주쳤다. 지은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나, 돈이 조금 부족해. 가운이랑 학사모를 빌려야 하는데..." "얼마 필요해? 빌려줄게." 지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서가 말했다. 놀란 지은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윤서를 바라보았다. 윤서는 지은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인물들이 초라해지는 게 싫었다. "빨리 말해." 윤서가 지은을 재촉했다. "어, 한 30만 원..." 지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윤서는 곧바로 노트북을 이용해 지은에게 돈을 송금했다. "보냈어. 천천히 갚아도 돼." 윤서가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지은이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이건 잊지 않을게." 윤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됐어. 얼른 가서 학사모나 빌려. " 지은은 그렇게 웃으며 윤서의 방을 나왔다. 


당당히 고개를 들고 방을 나서는 지은의 뒷모습을 보던 윤서는 곧바로 영화를 재생시킬 수 없었다. 사실 그녀도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경우의 수를 놓고 고민 끝에 자신을 찾아온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윤서는 지은이 돈을 갚을 확률을 따져보았다. 그리고 그런 계산을 두드린 자기 자신이 미워졌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졸업식 이후에는 셰어하우스의 방을 빼야 했고, 새로 들어갈 월세방의 가격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한 푼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의리를 우선으로 한 멍청이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윤서는 사정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좋지 못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털어내야 한다. 고개를 멈춘 윤서는 영화를 다시 영화를 틀었다. 그렇다고 교활하고 편협한 사회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맞이한 졸업식 날. 하우스메이트들은 객석에 앉은 민지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무대 뒤편으로 갔다. 꽃다발을 4개나 준비해야 하는 민지의 물음에 모두들 정중히 사양한다는 답을 줬다. 민지는 대신에 가장 크게 박수를 치겠다 약속했다. 무대 뒤의 신애, 지은, 효성 그리고 윤서는 각자의 학과에 맞춰 줄을 섰다. 신애는 다른 대기줄에 서 있었다. "마케팅학과 최효성." 그리고 한참 뒤 "그래픽 디자인학과 이지은." 효성과 지은을 지나 이윽고 윤서의 차례가 되었다. "회화과 김윤서." 사회자의 말과 함께 그녀는 힘차게 단상 위에 올랐다. 적응이 덜 된 뾰족구두 때문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윤서는 미소와 함께 학회장과 악수를 하고 졸업장을 받았다. 단상에서 내려온 그녀는 미리 졸업장을 받고 기다리던 효성과 지은을 부둥켜안았다. 고작 열 걸음 정도로 손발이 차가워질 정도로 긴장을 했다는 게 우습기도 했다. 


수석졸업인 신애는 특별히 짧은 소감발표를 하게 되었다. 그녀가 밤을 새워가며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는 공모전 입상과 더불어 일간지에 소개글이 실리기도 했다. 단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는 데다 세간의 주목을 받는 성과까지 더해지니, 학교에서는 그녀를 가만 둘 수 없었다. 신애는 무대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대본이 적힌 종이를 든 그녀의 왼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우스메이트들은 하나같이 양손을 모으고 그녀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셰어하우스에서 수 없이 연습해 오던 대로만, 신애의 혓바닥이 갑자기 꼬이지 않길 바라면서. 


"안녕하세요." 인사 후 신애는 침을 한번 삼켰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저는 애니메이션학과 서신애입니다." 소개를 마치자 신애는 긴장이 풀린 듯,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만큼 했더니, 더 좋은 결과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학생분들과 다르게 좋아하는 걸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여유로운 형편이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저의 노력이 무의미했다는 건 아닙니다. 한 가지 자부한다면, 저는 언제나 도서관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가장 늦게 떠나는 학생이었으니까요.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렇게 학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점도 보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꾸준함의 성과를 증명한 사람이에요. 무엇이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포기하지 않고 그것에 열중하면,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가 여러분에게 영감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애니메이션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저의 영감은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또 치열하게 살아가던 학우 여러분이었거든요.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모두들 졸업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발표를 마친 신애의 시선은 하우스메이트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크게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이전 21화 21화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