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 윤서를 제외한 하우스메이트들은 동네의 유일한 꽃집을 찾았다. 가게가 비좁은 탓에 네 사람은 겨우 발을 붙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꽃집 사장은 밝은 미소로 그들을 환영했다. 신애는 꽃집을 둘러보며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임에 내심 설레었다. 양쪽 벽을 가득 채운 진열장의 꽃내음이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꽃다발을 사러 왔어요. 화려한 걸로요." 효성이 말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가격표들을 확인했다. 네 사람이 나눠 내는 조건이면 나쁘지 않은 금액이었다. "아, 카드도 있나요?" 민지가 물었다. "네, 물론이죠. 여기서 골라보세요." 꽃집 사장이 대답과 함께 카드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건넸다. 네 사람은 옹기종기 모여 바구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꽃집 사장은 그들의 뒤통수에 대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데, 꽃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카드에 정신이 팔린 하우스메이트들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윤서가 좋아하는 꽃이 있나?" 지은이 물었다. "그것보다 좋아하는 색이 뭐지?" 신애가 물었다. "카드 이걸로 할까?" 민지가 노란색 카드를 뽑아들며 물었다. "글쎄, 모르겠네..." 효성이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사람은 문득, 윤서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각자 숙연해졌다.
"오, 그렇다면 이 튤립은 어떠세요?" 꽃집 사장이 네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노란 튤립이 들려있었다. "네, 그걸로 주세요." 효성이 재빨리 답했다. 어차피 네 사람이 아무리 고민해 봐도 결론이 나지 않을 문제였다. 이어서 효성은 민지의 손에 들린 카드를 낚아채 사장에게 말했다. "카드는 이걸로 할게요."
윤서는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불편한 옷과 신발 때문에 몸이 더욱 굳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남색의 원피스에 검정 구두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올려 묶었고, 화장까지 했다. 손에 땀이 나는 탓에 들고 있던 종이가 점점 눅눅해져가고 있었다. 윤서는 다시 한번 종이를 펼쳐 적힌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한 달 사이 전시장으로 둔갑한 작업실은 이전에 느끼지 못한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벽과 바닥을 새하얀 페인트로 칠하고, 책상과 의자, 그 외 작업실에 나뒹굴던 쓰레기들을 모두 치웠다. 그리고 학생들은 각자의 지정된 자리에 작품을 걸고 이름표를 붙였다. 본격적인 졸업 전시회를 시작하며 교수는 사회자까지 섭외해 (물론, 학과생이지만) 작품 발표회 추진을 밀어붙였다. 나름의 개최 행사로 말이다.
"이어서 회화과 김윤서 학생의 작품 발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학생들과 교수는 모두 윤서의 작품 앞에 모였다. 윤서는 점점 차가워지는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눈앞의 관객을 맞이하는 순간, 윤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효성, 민지, 지은, 신애는 가장 앞장서서 윤서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회화과 김윤서입니다. 작품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윤서는 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손가락이 다시 따뜻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귀까지 두근거리던 심장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그녀 앞에 서 있는 네 사람의 얼굴은 전시장을 셰어하우스로 둔갑시켜 주었다. 윤서는 마치 하우스메이트들에게 수다라도 떨 듯, 편안하게 말을 이어갔다.
"본 작품은 제가 어린 시절 겪었던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게 되었어요. 처음엔 작품의 제목을 '극복'이라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제가 극복해 낸 건 없더라고요. 저는 아직도 그 사건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화가 나요. 그런데, 저는 지금 제 상태가 정말 좋아요. 두 다리로 땅을 딛고, 두 팔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하우스메이트들과 수다를 떨 수 있음에 행복합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이제야 찾아가는 것만 같아요. 그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제 작품의 제목은 '적응'입니다."
말을 마친 윤서는 몸을 틀어 자신의 뒤에 있는 그림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커다란 캔버스에는, 검은 배경 속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회색빛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동자는 희망을 품은 듯 또렷하고, 눈썹으로 찌푸려진 미간에서는 의연함이 보였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입술은 살짝 미소를 머금은 듯 한 입가를 만들어냈다. 윤서의 설명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왔다. 그와 함께 하우스메이트들은 그녀에게 다가가 꽃다발과 카드를 전해주었다. 윤서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해댔다. "정말 고마워! 이런 건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데!" 윤서의 말에 효성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