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런데 왜..." 윤서는 혼자 중얼거리며 지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은은 일어선 채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자,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둘 몸을 돌렸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느껴지자 지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평범해서 그랬어." 지은의 말에 윤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평범해서 그랬다고?" 그녀는 그저 지은의 말을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지은은 다시 윤서의 커피잔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윤서는 지은의 설명을 기다렸지만, 지은은 조용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윤서는 다시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더니, 지은에게 말했다. "평범한 게 싫은건지 모르겠지만, 넌 절대 평범하지 않아." 그녀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지은과 함께 창밖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해."
윤서는 커피를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 카페를 나갔다. 지은은 그 자리에 더 남아있었다. 윤서의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지은은 엷은 미소를 띄며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래봬도 그녀는 하우스메이트 중 유일하게 가출을 시도해 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녀를 보고싶어했다. 생각을 마친 지은은 어깨를 펴고 당당한 자세로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 셰어하우스로 돌아가 밀린 잠을 청하고 싶었다.
“우울증이 별거야?" 효성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지은이 돌아온 날 밤, 그녀는 대학가의 한 술집에 있었다. 좁은 공간에, 맥주는 싸구려맛이었지만 학생들의 얇은 지갑을 열기엔 충분했다. 효성은 가끔 대학 동기들과 이곳을 찾았다. 집에서 대충 저녁식사를 하고 술집에 모여 요기를 해결할 정도의 간단한 안주와 맥주를 마구 시켜대는 것이다. 그리곤 30분마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태웠다. 효성은 여성성이 넘쳐나는 셰어하우스에서 벗어나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녀 옆에 서 있던 동수가 말했다. “별거지. 집을 나갈 정도로 큰 일인 거야.” 두 사람은 지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실 ‘나간 건’ 아니지. 그냥 우리를 피해 다닌 것뿐이야!” 효성이 동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명확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래, 가출은 하지 않았지. 그렇지만 지은의 ‘그 행동’의 이유를 너희가 들여다봐줘야 한다는 거야.” 동수가 맞받아쳤다. 효성은 다시 한번 담배를 빨아들였다. “심지어 우울증인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너도 가정을 하고 있는 거야.” 효성이 말했다. 그녀는 실로 이 모든 게 피곤하게 느껴졌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지내다 졸업을 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도무지 하우스메이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자신은 예외였다. 효성은 자연스럽게 ‘평범함’에서 자신을 배제시켰다. 하지만 때때로 하우스메이트들에게 허락된 자유를 관망했다. '저 어린 영혼들의 무너짐을 직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따라서 신애를 제외하고 가장 형편이 좋은 지은의 가출은, 효성에게 그저 철없는 투정에 불과해 보였다.
“뭐,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이번엔 동수가 담배를 물며 말했다. 그는 어설프게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치직. 치직. 엄지손가락이 라이터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줘봐.” 효성이 동수의 손에서 라이터를 낚아챘다. 그녀는 능숙하게 동수가 문 담배 끝을 손으로 감싸며 불을 붙여주었다. 타들어가는 담배에 동수는 기침을 마구마구 해댔다. "콜록! 콜록! 케엑!" 동수는 서둘러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효성은 그를 한심하게 보며 물었다. “피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담배를 사 오는 거야?” “배워보고 싶어서, 콜록!” 동수가 마지막 연기를 내뱉으며 답했다. 그는 손으로 목을 감쌌다. 애당초 인간들은 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까,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왜? 몸에도 안 좋은걸? “ 효성은 동수의 마음을 더욱 알 수 없었다. 매번 오만상을 찌푸리며 목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면서도 동수는 항상 담배를 꺼내 들었다.
"너도 피우잖아. 일단 보기에 멋지기도 하고." 동수가 해맑게 답했다. 이제 상태가 조금 괜찮아졌는지 웃고 있었다. 효성은 잠시나마 자신이 이 어리숙한 동수의 모습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멋져 보여서 피우진 않았어. “ 효성이 말했다. “어쩌다 피우게 됐는데?” 동수가 물었다. 담배를 집을 수밖에 없는 어떤 대단한 사연일지 궁금했다. 효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뜸을 들였다. 그녀의 반응이 익숙한 동수는 가만히 기다렸다. 효성은 간혹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스스로 정적을 만들 때가 있었다. 그녀의 의도에 맞게 큰 반응을 준비하던 동수는 효성의 담담한 답변에 얼어붙고 말았다. “빨리 죽고 싶어서.” 5초 정도의 정적이 끝나고 동수는 효성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에이, 장난치지 마.” 효성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효성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동수를 한사코 뿌리치고 술집을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그녀는 혼자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 위 별이 보일까, 고개를 들어보았지만 까맣기만 한 하늘이었다. 게다가 고개를 들고 걸으려니 자세가 영 불편했다. 그녀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별을 보는 일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면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감동적인 장면은 조건이 꽤나 많은 일이었다. 우선 환경오염과 거리가 먼 공기가 맑은 지역이어야 한다. 주변에 방해되는 불빛이 없는 한적한 동네여야 하고, 주인공은 고개를 들고 걸을 수 없으니(각도가 나오지 않거나 자세가 불편하다) 서 있는 채로도 무리 없이 하늘이 보이는 높은 지대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버스만 겨우 다니는 촌동네는 안된다. 주인공은 나름 세련된 옷차림과 화장을 하고, 화려한 파티에서 나와 집으로 가고 있는 설정을 고수해야 한다. 파티장에서 봤던 화려한 조명빛이 반짝이는 별들과 겹쳐 보이는, 그런 아련한 감성이 느껴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의 사색을 마친 효성은 새삼 스스로가 참 희한한 것 같았다. 그녀는 항상 자신을 특이한 부류로 여겼다. 언제나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이야기들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어릴 적 만화를 그려나간 것도, 그 덕에 재혁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특별했다. 아, 이젠 재혁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불륜을 알게 된 것, 그 일만은 보탬이 되지 않았길 바랐다.
집으로 돌아온 효성은 뒷마당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작은 동작만을 반복하며 가만히 서 있었다. 효성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집 주변을 돌아갔다. 그림자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효성은 두 손으로 벽을 짚으며 천천히 발을 떼었다. 이제 효성과 그림자의 주인은 한 걸음을 남겨두고 대치중이었다. 효성의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용기를 내어 벽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효성아!” 효성의 앞에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윤서가 서 있었다. 효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괴한이라도 온 줄 알았잖아. 여기서 뭐 해?” “아, 그게… 잠이 안 와서.” 윤서는 대답과 함께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무언가 숨기는 걸 눈치챈 효성은 재빨리 윤서의 팔을 잡았다. “뭐야?” 효성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윤서가 효성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순간 효성은 자신의 손에 끈적한 무언가 묻은 걸 느꼈다. 효성은 이번엔 더욱 세게 윤서의 팔을 잡아끌었다. “뭔데!”
효성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과 윤서의 손을 보았다. 윤서의 검지손톱 끝부분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윤서는 서둘러 자신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너도 묻었겠다. 가서 손 씻어.” “다친 거야? 손이 왜 그래? “ 효성이 물었다. “손톱 뜯어내다가 실수한 거야. 괜찮아.” 윤서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실수치고는 살벌하네.” 효성이 말했다. 그녀는 윤서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담담한 척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윤서가 민망한 듯 웃었다. 효성은 이때다 싶어 윤서에게 물었다. “버릇이야?" “응. 그런 것 같아.” 윤서가 답했다. 그녀는 부끄러운지 피나는 손가락을 자꾸만 문지르고 있었다.
효성은 윤서와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지 고민했다. 윤서의 모습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고 해야할까, 효성은 윤서야말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혹여 이로인해 윤서와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게 두렵지는 않았다. 또, 윤서는 허튼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만큼 입이 가볍거나 친구가 많은 아이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들릴진 몰라도, 손에 피가 철철 흐를때까지 손톱을 뜯는 아이가 감당할만한 내용일 것 같았다.
“나는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그리고 하루빨리 집에서 독립할 거야. 가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거거든.” 효성이 말했다. “그래도 가족과 연을 끊을 건 아니지?” 윤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효성은 예상외로 덤덤한 윤서의 반응에 조금은 놀랐다. 효성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끊어야 한다면 끊을 거야. 나는 우리 가족을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 넌 모를 거야. 나는 화목한 가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 가족 중에 가장 의지되는 사람은 넷째 언니뿐이야. 가능하다면 언니와 함께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어. 여자는 태어나 부잣집에 시집을 가야 성공한 거라 믿는 엄마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바람을 피우는 아빠와 보낸 유년시절은 참….”
효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곤 심호흡을 했다. 콱 막히면서 아파온 목구멍이 다시 진정되었다. 효성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부모님의 마지막 시도였어. 아들이 아니면 지우려고도 했대. 좀 웃기지 않니? 뱃속에 그 아기가 살고싶다고 빌기라도 했나봐. 그래도 태어나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난 그래서 빨리 죽고 싶기도 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인 것 같아서. “
효성의 말이 끝나고, 두 사람은 잠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윤서는 효성이 진정된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윤서의 키가 한참 작아서 되려 그녀가 효성에게 안긴 것처럼 보였지만, 윤서의 손은 효성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