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7년 만의 연락이었다. 윤서는 그간 하우스메이트들과 연락을 끊고 지낸 것이다. 무슨 이유였는지, 효성은 묻지 않았다. 윤서는 그런 효성이 고마웠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효성은 윤서를 배려해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마 윤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나’라는 존재는 없어. “ 효성의 한숨 섞인 그 말에서 묘하게도 상실감과 성취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윤서는 효성을 달래며 말했다 ”다시 찾게 될 거야. 일도 다시 시작하면 네 삶이 돌아올 거야. “윤서의 말을 들은 효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지. 이미 엄마가 되어버린걸.’ 긴 꿈이라도 꾼 듯, 대학 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출산까지 해낸 효성에게는 정말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었다. 윤서와의 통화로 효성의 예전 기억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왔다. 셰어하우스로 가는 좁은 골목길, 온갖 냄새로 가득했던 주방, 조용하고 포근한 방, 아침마다 화장실 앞에서 투닥거리던 그때 그 순간들. 효성은 윤서에게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윤서에게 보내며 말했다."어때?"
"세상에, 정말 귀엽다. 너를 꼭 빼닮았는걸?"윤서는 사진 속 작은 아기를 보며 답했다. 아기의 눈매와 코는 재혁, 앙다문 입술과 하관은 영락없는 효성이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 아이의 성질머리를 눈치챌 수 있었다. 효성은 이어서 아기가 소파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는 동영상을 보냈다. 가지고 놀던 인형이 소파 아래로 떨어지자, 아기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고함쳤다. 윤서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아기가 네 성격도 닮은 것 같은데?" "맞아. 재혁이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아." 효성과 윤서는 한참을 웃었다. 아, 재혁의 아이로구나, 라며 윤서는 혼자 생각했다.
“너는 요즘 어때?" "음...." 효성의 물음에 윤서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냥 그래. 어떤 기준에도 맞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어. ” 이제는 윤서가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 안 창문의 커튼을 걷으며 말을 이어갔다. "기쁘지도 않고,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슬프거나 우울한 것도 아닌, 그저 그런 하루들을 보내는 중이야." 윤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번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잔잔한 바람과 함께 크고 작은 소음들이 들어왔다. "네 하루일과가 어떻게 되는데?" 효성이 물었다. "나? 음.... 늦은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밥을 챙겨 먹어. 그리고 구인구직 공고를 뒤적이거나 책을 읽지. 그림을 조금 그려보기도 해. 그러다 운동을 가. 운동을 하고 오면 배가 고프니 다시 밥을 차려먹고, 다시 하던 일들을 해. 밤이 되면 티브이를 좀 보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들지." "조금 부지런해도 될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은걸?" 효성이 말했다. "맞아. 한편으론 남들이 부러워할 일상이야." 윤서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윤서는 백수로 생활하고 있었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이 세 마디가 윤서의 입에서 나오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4년의 시간 속에서 참아온 불안함, 우울감 그리고 스트레스는, 그동안의 성취감, 풍요로운 삶, 우정 그리고 의리와 맞서 처음으로 이겼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던 '참음'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윤서는 그렇게 원망과 투정 섞인 사직서를 던지고, 회사를 나왔다. 그녀의 걸음 뒤에는 동료들의 응원이 있었다. "윤서 씨, 힘내요! 아주 용감한 선택이었어요!""언제나 응원합니다! 좋은 소식 있으면, 꼭 알려줘요.""다음에 웃으며 봐요." 그녀는 언제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어쩌면 영원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많이 힘들었지?” 윤서가 화제를 돌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정말 힘들었어. 아프기도 하고. ” 효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윤서는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서가 답을 채 하기 전에, 효성이 말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어. “ 윤서는 효성이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생활하던 여대생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진 것 같았다. 윤서는 감탄하며 말했다. “네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엄마’가 될 줄이야. 정말 놀랐어.” 윤서가 말했다. “그러게.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 효성이 웃으며 말했다. “재혁 씨는 어때? “ 윤서의 물음에 효성은 속으로 기뻐했다. 사실 그녀와 재혁의 재회는 예상외로 간단했다.
졸업식 날, 효성은 객석에 앉은 부모님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효성이 말했다. “아니다.” 효성의 아빠가 답했다. 그는 무삼한 얼굴로 효성을 이리저리 살폈다. 조금은 핼쑥해진 그녀의 모습에 효성의 아빠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뭐든 잘 챙겨 먹어라.” 효성은 아빠의 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그녀의 엄마가 효성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놈도 왔니? “ 효성은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말했다. “아니요. 헤어졌어요.” 그녀의 말에 효성의 엄마는 큰 소리로 말했다. “거 봐! 내가 뭐랬니. 그런 놈은 만나봤자 너만 불행해져. 잘된 일이다. “ 그때, 효성은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식순이 어느덧 신애의 소감발표까지 왔을 때, 그녀는 이미 생각을 마치고 결심을 한 뒤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하우스메이트들은 학사모를 던지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각자 부모님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효성은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다. 하우스메이트들을 차례대로 부모님께 소개하던 윤서는, 되려 효성을 찾겠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를 달래 드려야 했다. 물론, 효성의 아버지는 의연함을 유지했다. 결국 졸업을 하지 않은 민지가 대표로 효성의 부모님을 배웅하게 되면서 정신없던 졸업식날이 끝이 난 것이다.
한편 효성은 온 힘을 다해 기차역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무작정 재혁이 있는 곳으로 갔다. 효성에게는 아직까지도 그 순간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온 신경이 한 곳만을 향해있었다. 기차에서 버스로, 아니, 그러다 택시로 갈아타고는 기사님을 재촉했다. 그의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땐,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수없이 해댔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머지않아 재혁이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꽉 껴안았다.
“아주 행복해해. 걘 아빠가 되는 게 꿈이었잖아. “ 효성이 말했다. “맞다. 그랬구나.” 윤서는 지금 이 순간의 대화가 진정한 어른의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셰어하우스에서 옹기종기 모여 과제, 학점, 연애 이야기를 운운하던 시절을 지나, 사회의 일원에서 어느덧 부모가 된 ‘어른’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윤서의 마음속에서는 뿌듯하고 설레는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다른 애들하고는 연락하고 지내? 어떻게들 지내고 있을까? “ 윤서가 물었다. “응. 최근 민지랑 통화했어. 다음 달에 놀러 오겠대.” 효성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정말?” 윤서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힘들어하던 사이에도 셰어하우스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되려 그것이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도 오면 좋겠다. 동수도 온다고 했거든.” 효성의 말에 윤서는 섣불리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처지는 남들과 비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렇구나… 알겠어. “ 윤서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다들 보고 싶어. “효성은 애틋한 말과 함께 손으로 아기의 배를 어루만졌다. 윤서와의 통화로 잠시나마 시간을 되돌아간 듯해 기분이 묘했다. 효성의 감상도 잠시, 아기는 잠에서 깨며 온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보채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효성은 다급하게 말했다. “야, 애 깼다. 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