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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by 유수

차 안의 민지와 동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날씨 좋다.” 정적을 깨는 민지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동수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네.” 이후 공간을 가득 채운건 라디오 방송뿐이었다. 두 사람은 오래간만의 대면은 굉장한 쭈뼛거림을 유발할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실제 둘은 전화 통화를 할 당시만 해도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잘 지내?” 떨리는 동수의 목소리에 민지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었다. “그럼! 너는?” 그녀의 화답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동수가 답했다. “응! 나도 잘 지내.” 간단한 안부인사로 시작된 통화는 30분을 훌쩍 넘겨버렸다. 분위기를 보던 동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 위해 민지에게 물었다. “우리 만날까?” 그의 물음에 민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진상 고객을 만났을 때의 떨림과는 결이 다른 설렘이었다. “그래. 그러자.” 민지의 수줍은 대답에 동수는 뛸 뜻이 기뻤다. 하지만 막상 단 둘이 만나는 데이트를 상상하니 걱정이 앞섰다. 동수는 대학생 민지와 나눈 마지막 인사를 떠올려보았다.


시험을 코앞에 둔 효성, 동수, 민지는 어느 주말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동수는 그날 아침 미적거리며 집밖으로 나오길 꺼려하는 민지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 입구로 향하는 효성의 뒤에서 민지의 가방을 몰래 잡아당겼다. 놀란 민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동수는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두 사람은 조금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효성과의 거리를 넓혔다. 효성이 멀어짐을 확인한 동수가 민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지?” 그의 물음에 당황한 민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아니 없어.” 동수는 고개를 숙여 민지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있는데?” 그러자 민지가 발걸음을 멈췄다. 동수는 혹여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민지는 끝까지 시선을 바닥에 두며 말했다. “나 사실, 낙제야. 이번에 졸업 못해.” 그녀의 말에 동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그의 말에 발끈한 민지가 되물었다. “다행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동수는 날카로워진 민지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 아니 내 말은! 큰 일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이란 거지.” 동수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의 말에 민지는 더욱 황당해하며 물었다. “낙제가 큰일이 아니야? 졸업이 6개월, 아니 길면 1년이나 미뤄질지도 모르는데? “ 민지의 발갛던 얼굴은 이제 분노로 가득했다. 동수는 어떻게든 민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말했다. ”나도 어차피 내년 졸업이야! 우리 나이에 졸업이 빠르고 늦는 건 중요하지 않아. 설마 졸업 한번 미뤄졌다고 인생이 망하겠어? 어차피 학점만 채우면 되니까 학교 생활도 바쁘진 않을 거고, 그 사이 취직 준비를 하면 되잖아. 별거 아니야. 눈 딱 감고 재수강하면 돼! “


“넌 참 쉬워서 좋겠다. “ 청산유수와도 같았던 그의 언변에 돌아오는 건 비아냥 뿐이었다. 민지는 동수를 흘겨보고는 빠르게 그를 지나쳐갔다. 그렇게 민지와 동수는 졸업식이 있기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우스메이트들이 떠나고, 새로운 자취방에서 다시 개강을 맞이한 민지는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는 동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동수는 식당에서 홀로 밥을 먹는 민지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지나치곤 했다. 도서관에서도, 식당에서도, 학교 근처 카페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의 뒤통수 혹은 옆통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사이 민지는 하우스메이트들의 소식들을 전해 들었다. 아직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윤서와 효성의 소식이 나름의 위안이 되기도 했다.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가 되었다는 지은의 근황에 역시 종잡을 수 없는 아이임을 확신하기도 했다. 민지가 가장 부러워한 사람은 신애였다. 그녀는 민지가 꿈도 꾸지 못할 수석졸업을 이룬 데다, 당장 졸업 후 돈벌이를 걱정하는 신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민지는 결국 호텔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호텔을 소유해야 한다는 현실과 직면하고 말았다. 남들은 다 알고 있던 걸 왜 이제야 깨달았냐 묻는다면, 그저 긴 꿈에서 헤매었다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호텔리어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가는 수순 대신, 민지의 계획에는 언제나 자신이 주인공이었다. 사실 계획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언젠가 이루어질 자신만의 꿈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자신만의 호텔을 짓고, 사장의 자리에서 직원들에게 경영 철학을 강의하고,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가끔 실전에도 나서보는, 그런 멋진 호텔 경영인이 되는 꿈이었다. 하지만 허황된 꿈은 길을 잃기 마련이었다. 민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을 꿈을 두고 단지 바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강의는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의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 같지도 않은 이론을 공부해 봐야 소용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은 그녀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민지가 처음 꿈에서 깬 순간은, 졸업이 미루어짐을 알고 엄마와 눈물의 통화를 나누었던 그날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웃으며 위로를 건네던 동수의 얼굴에 침을 뱉던 그날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동수를 마주할 면목도, 명분도 없었다.


그런 민지 앞에 거짓말처럼 동수가 나타나게 된 이유는 운명도, 우연도 아니었다. 졸업식 이후 재혁을 만나러 간 효성은 대학 행정실로부터 성적표를 수령해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성적표 같이 중요한 서류를 본가로 보낼 리 없었던 효성은, 64번지 셰어하우스를 주소지로 적어놓았고 성적표는 결국 반송이 되어버린 것이다. 효성의 방문으로 마침내 동수와 민지는 서로의 옆통수, 뒤통수도 아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효성의 부름은 거절하기가 참 어려웠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학교 근처의

싸구려 호프집을 찾았다. 때마침 효성은 명품매장 판매직 면접을 보았다고 말했다. 세 사람은 그녀의 합격을 기원하며 맥주잔을 부딪혔다. 효성은 반드시 돈을 많이 벌어 이 싸구려 맥주 따위 마시지 않겠노라 호언장담을 했다. 대화가 무르익으며 세 사람의 웃음소리는 점차 커졌다. 민지와 동수는 눈 맞춤이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효성이 돌아간 뒤 민지와 동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둘은 가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서 만났다. 또는 우연을 핑계로 도서관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점심을 함께 먹기도 했다.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이해와 포용을 목적으로 두기 시작했다. “넌 나와 비슷해.” 동수가 민지에게 말했다. “넌 가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걸 회피하곤 해. “ 그의 말을 들은 민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비겁하다는 말을 돌려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동수 자신의 모습 또한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있으니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것과 닮은 장점이 있어.” 동수가 민지를 보며 다시 말했다. “최고의 순간이 닥쳤을 땐, 그게 영원하길 바라면서 헤어 나오지 않지.” 민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꿈을 꾼다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 동수는 잠시 민지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해 답했다. “뭐 그런 걸 지도? 이상주의라 해야 할까…” 그는 고민에 빠진 듯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회피하고 있던 순간은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 학점을 모두 채운 민지는 교정을 떠나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 곧바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아직 채워야 할 학점이 남은 동수는 민지를 배웅했다. “또 보자. “ 그의 말에 민지는 이번에도 역시 자신이 꿈속에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 다음엔 더 길게 보자. “ 두 사람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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