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과 통화를 마친 윤서는 심란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근 시일 내 효성과 민지, 그리고 동수가 모일 것을 생각하니 그럴만했다. 이제는 정말로 64번지 집과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밀려오는 소외감은 윤서를 더욱 괴롭혔다. 후회도 막심했다. 사실 윤서는 작년에 효성으로부터 임신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온갖 핑계를 방패 삼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자기 삶도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생명을 잉태한 효성을 마주하기엔 자신이 너무 초라했던 것이다. 윤서는 효성과 민지의 대화를 예상해 보았다. 괘씸하게도 오랜 시간 사라져 있던 그 아이는 결국 게으른 백수로 연명하고 있더라, 윤서의 상상은 갈수록 비관적이었다. 윤서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차라리 어둠 속에서 현실을 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수를 셌다. 머지않아 윤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윤서가 회사에서 자신이 평범하지 않음을 느낀 건 입사 2년 차부터였다. 그녀는 동료 사무직 직원들과 다른 점이 정말 많았다. 우선, 대체로 인문계 전공자들로 이루어진 사무실에서 돋보이는 회화과 출신이었다. 둘째로, 스트레스가 가득한 환경에서도 윤서의 입꼬리는 남들과 비교될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아무도 그녀가 우울하다는 걸 알 수 없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밤하늘의 달도 어둠이 있어 빛나는 것이기에, 윤서는 자신의 암울한 뒷배경이 되려 웃는 표정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윤서는 지칠 대로 지쳐갔다. 우울감은 왜인지 더욱 커져만 갔고, 웃는 얼굴은 가면처럼 느껴졌다. 딱딱하게 굳은 껍데기와 같은 외양을 내세우며 하루하루를 버텨내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즐기는 것을 모두 거부했다. 윤서는 내면의 감정이 말라감을 알 수 있었다. 온몸에 가뭄이 들어버린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일까, 그 고민의 끝에는 사직서가 놓여있었다.
눈을 감은 윤서는 자꾸만 졸업 전시회를 떠올렸다. 학우들에게 작품 소개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다음 날부터 일은 꼬여만 갔다. 전시가 본격적으로 개최되고, 학부모들은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자식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학교로 모였다. 윤서는 부모님을 모시고 당당하게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환한 조명과 말끔하게 칠해진 페인트 덕분에, 미술관의 느낌이 물씬 났다. 마치 작가가 된 듯한 기분에 윤서의 고개는 좀처럼 숙여지지 않았다. 온몸 구석구석이 짜릿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부모님의 얼굴을 살폈다. 그동안 타지에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이 순간까지 왔을 딸 생각에, 두 사람의 입가에는 감격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아마 선택의 후회는 없으리라, 윤서는 생각했다. 윤서는 경영학을 전공하다 어느 날 중퇴를 해야겠다며 부모님에게 사정했다. 그녀의 눈물을 본 부모님은 과감하게 윤서의 손을 잡아주었다. 훗날 미대 입학에 성공한 윤서는, 부모님이 내린 그날의 선택에 일말의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어느새 4년의 결과물을 선보일 때가 온 것이다. "이게 제 작품이에요." 윤서는 자신의 뒤에 걸려있는 커다란 캔버스를 향해 손을 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윤서의 작품을 본 부모님의 얼굴은 이내 돌처럼 딱딱해져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윤서의 그림과 작품 설명을 번갈아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낯빛은 어두워졌다. “이게 뭐라고?” 그녀의 아빠가 물었다. 윤서의 엄마는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윤서는 차분하게 다시 작품을 소개했다. “그날 사건에 관한 거예요. 저는 이제 괜찮아지고 있다는 ….”“네가 언제 괜찮지 않았던 거지? 너에겐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녀의 말을 끊고 윤서의 엄마가 쏘아붙였다. 당황한 윤서의 손과 발이 차가워졌다. 윤서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날 저는 사촌오빠에게 당했다고요." 윤서의 말에 그녀의 엄마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윤서의 아버지 역시 그녀의 눈을 마주 치치 않았다. 예상치 못한 부모님의 반응에 윤서의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모님을 향해 한걸음 다다 가며 말했다. "믿고 싶지 않으신 거 알아요. 저를 걱정하시는 마음도 잘 알아요. 그렇지만 그날 일은 사실이에요." “가자 이제.” 윤서의 호소에 대한 부모의 답변은 한없이 간결했다.
윤서는 어둑해진 방 안에서 다시 눈을 떴다. 시간은 훌쩍 지나 밤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오늘도 생체리듬이 깨져 버렸음을 인지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구쳤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었다. 다시 잠에 들기에는 낮잠을 4시간이나 자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른 새벽이나 되어서야 눈꺼풀이 무거워질 것이다. 윤서는 팔을 뻗어 어둠 속에서 리모컨을 찾아냈다. 티브이를 켜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윤서는 현재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나름 뿌듯하게 여겼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그 사촌오빠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윤서는 다시 어둠 속에서 팔을 휘적거렸다. 이불 속에서 휴대폰을 찾아내 그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 옆에 서 있는, 턱시도 차림인 그의 사진을 발견했다. 다음으로 조그만한 손과 발, 동그랗게 큰 눈을 가진 아기의 모습도 보았다. 윤서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자신을 쏙 빼닮은 자식까지 낳은, 아주 행복한 삶의 장면들이었다.
이윽고 윤서는 휴대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캄캄한 그녀의 방에서 티브이 화면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뉴스를 응시했다. 고민스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또 어지럽히고 있었다. "사과라도 받을까…. " 윤서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마침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아니면 죽여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