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정말 신비한 존재였다. 자존심이 상할까 봐 눈물마저 삼키던 효성에게 하루하루 제각각의 감정기복을 선사하더니, 태어난 뒤에는 그녀를 세상 그 어떤 시련에도 맞설 수 있는 강인한 엄마로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평생 연을 끊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세 사람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효성과 재혁, 그리고 효성의 엄마는 별다른 대화 없이 화해를 했다. 효성의 엄마는 그 후 매일같이 효성의 집을 찾았다. 재혁이 출근하고 고요하던 집안은 드디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효성의 엄마는 배가 불러 움직이기 힘든 딸을 위해 밥을 짓고 청소를 거들었다.
효성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임신이라 말하곤 했다. 재혁도 동의했다. 그는 마침내 아빠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룬 것이다. 효성은 ‘엄마’로서의 새로운 자아를 만나게 되었다.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곧바로 가방 속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금연도 모자라 술도 끊었다. 그리고 언제나 머릿속을 행복으로 채우길 노력했다. 평소 냉소적이던 그녀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를 하고 있었다. 효성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본 하우스메이트들이 놀라 자빠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가온 출산일. 효성은 자신의 딸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그 작은 생명체는 효성의 가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 며칠 뒤 효성의 아빠와 언니들이 찾아와 집안이 시끌시끌했다. 서로 아기를 안아보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언니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모님. 효성은 자신의 눈이 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재혁은 하루종일 아기와 붙어있는 효성이 부럽기도 했다. 그는 친구들과의 저녁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퇴근 후 곧장 집으로 갔다. 재혁의 인생은 드디어 완성이 된 듯했다.
한편 효성은 새로운 ‘자아성찰’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다. 아기는 언제나 엄마를 필요로 했고, 그녀에겐 휴식시간이 항상 부족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에 효성은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럼 나는? 나의 존재는 어떻게 된 거지? “
효성의 물음에 정신이 든 민지와 동수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효성에게 답을 건네길 기다렸다. 우물쭈물 대는 둘을 보며 효성이 한숨 쉬듯 말했다. “신애는 애니메이션 감독에, 지은이는 아마추어 사이클리스트고, 너희들까지.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 가는데, 나는? 이대로 끝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