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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by 유수

효성의 사연을 들은 민지는 문득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남들보다 졸업은 늦었지만 취업은 보다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원하던 일은 아니었다.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든 파티플래너는, 자신의 대학시절 꿈이었던 '호텔경영'을 잠시 침대 밑 잡동사니 상자에 넣어두었다. 아, 호텔과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간혹 파티 장소가 호텔인 경우도 있었으니까. 민지에게는 적당한 월급, 월세로 마련한 작은 자취방,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작은 취미까지 생겼다. 게다가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그녀와 동수의 관계가 좋아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종합해 보면, 한때의 원대한 희망에 비해 소박하지만 꽤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은과 신애만큼 성취감을 느끼는 삶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지은과 신애는 윤서 다음으로 연락이 뜸했다. 사실 아무도 그녀들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장애물 하나 없이 쭉 뻗은 활주로를 달리는 경주마와 같은 두 사람의 소식에, 하우스메이트들은 점점 응원의 말을 보탤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격려를 보내곤 했다. 그렇다고 64번지의 그녀들을 원망하진 않았다. 두터웠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 마련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추진력을 떨어뜨릴 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은과 신애는 서로를 제외한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지은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 미술대회 참가를 추진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 선생님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신애는 마음이 통하는 팀원들을 만나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걔네들이 참 부러워." 효성이 먼 산을 보며 한숨 쉬듯 말했다. 그녀는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어갔다.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효성의 질문에 민지는 조금 불편했다. 유유히 현재에 순응하고 있는 자신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몰라. 지은은 선생님이고, 신애는 잘 나가는 애니메이션 감독이겠지 뭐." 그녀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멋지다. 나는 언제쯤 그렇게 살아볼까." 효성은 민지의 반응에 개의치 않아 하며 한탄을 이어갔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지은과 신애를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전부 채우고 살아가는 누군가는 존재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수는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대화의 흥미를 잃어가던 중, 동수의 뇌리에 한 가지 궁금증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윤서는 어떻게 지내?"


동수의 물음에 효성과 민지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꺼렸다. 두 사람이 윤서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한 사무직에 채용되었다가, 그만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통화를 한 효성이 동수의 물음에 답했다. "회사 그만두고 잠깐 쉬고 있나 봐. 요샌 그냥 집에 있대." 동수는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대?" 동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효성과 민지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윤서에게 연락을 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불행에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멋모르고 두드린 문을 통해 무엇이 나올지, 효성과 민지는 그 무게를 지금 견디고 싶지는 않았다. 불만도, 아쉬움도 많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좋았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윤서는 그날 밤 이후 불면증에 시달렸다.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오후가 되어서야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생활 패턴은 완전히 무너졌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물도 자주 마시지 않아 입술이 부르텄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두 눈은 퀭했다. 윤서는 그제야 자신이 이제껏 연극을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에서도, 졸업 후 사회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밝은 모습을 유지해 왔다. 지난 일에 대한 정신적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졸업 작품을 통해 치유된 것만 같았던 그녀의 마음속 상처는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다. 윤서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자신을 망가뜨린 그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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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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