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그간의 일들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민지와 동수는 자신들 앞에 차려진 음식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효성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민지는 자신의 배를 콱 움켜쥐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동수는 자꾸만 입안에 고이는 침을 천천히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장시간 운전을 한 탓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입맛을 다신다는 사실에 분노할 효성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참을만하였다.
효성은 민지와 동수를 위해 오래간만에 요리실력을 발휘했다. 이래 봬도 중식당 딸내미였던 그녀는 아버지 어깨너머 배운 음식들을 선보였다. 바삭하게 튀겨낸 탕수육과 센 불에 가볍게 볶아낸 청경채, 그리고 빠지면 섭섭한 볶음밥까지. 효성은 그야말로 두 사람을 고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좀처럼 다물 수 없었다. 언젠가 자신이 가볍게 여긴 우울증이 찾아오진 않았는지, 출산 후 망가진 몸과 마음이 아직도 썩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효성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아기는 정말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생명의 잉태를 사건이라 치부해도 되나 싶지만, 효성과 재혁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 일이었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상황에서 출산이란, 두 사람이 기대했던 미래와는 거리가 꽤나 멀었다. 당장 두려움이 앞섰던 효성은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눈물을 쏟아냈고 재혁은 그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재혁은 효성의 두 손을 잡고 그녀를 설득했다. 며칠간의 진지한 대화 중에 재혁은 무릎도 꿇어 보였다. 이후 당시를 회상하던 효성은 그 순간이 바로 프러포즈였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재혁의 손을 다시 잡은 효성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주변에 알렸다. 그녀가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한 곳은 바로 64번지, 셰어하우스에서 함께했던 하우스메이트들이었다. 초음파 사진을 본 하우스메이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축하의 답장을 보냈다. 단 한 사람, 윤서를 제외하고 말이다. 어찌 된 일인지 윤서는 자신의 근황을 점점 알리지 않았다. 다른 하우스메이트들의 연락에 답을 하는 횟수도 뜸해졌다. 그렇다고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다들 각자의 사회생활로 바쁜 나머지 오지 않는 답장에 연연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효성도 마찬가지었다. 당장 그녀의 임신을 축하해 줄 사람은 차고 넘쳤다. 그녀의 직장 동료들도 효성을 보며 한 마디씩 했다. 물론, 입에 발린 소리란 걸 효성은 알고 있었다.
효성이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녀의 출산 휴가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배가 불러온 상태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매장에서 제공하는 유니폼이 더는 맞지 않았고, 하루종일 구두를 신어야 하는 탓에 효성의 발목은 언제나 붓기와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임신을 했더라도 최대한 오래도록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삭인 그녀의 몸은 많은 배려를 요구했다. 효성은 제품 진열이나 재고관리, 매장 청소와 같이 움직임이 잦은 일을 점차 할 수 없었다. 처음엔 기쁜 얼굴로 축하를 해주던 동료직원들은, 자신들이 효성의 몫까지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설상가상으로 효성이 매번 영업실적 1위를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직원들의 화를 돋구웠다. 매니저는 직원들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효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출산 휴가를 앞당기는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효성은 쫓겨나듯이 집으로 가게 되었다.
집에 온 효성의 하루는 정적만이 채울 뿐이었다. 재혁이 공장으로 출근을 하면 집 안의 생활소음은 없었다. 효성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아침을 겨우 먹곤 했다. 하는 일이 없어도 배는 제때 고파왔다. 그녀는 간단한 집안일을 하는 것 말고는 그저 누워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인터넷에 올라온 태교법을 검색해보기도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효성에게는 외로움을 달래고 동기부여를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녀는 다시 64번지 하우스메이트들에게 연락을 취해보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이미 알고 있는 소식에 하우스메이트들은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효성은 그때 윤서의 빈자리를 알아차렸다. 윤서의 부재에 효성은 더욱 공허함을 느꼈다. 세상엔 앞으로 자신의 일을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아주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존재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생각도 들었다.
효성의 생각들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다. 며칠을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년 만의 통화도 놀라웠지만 곧 태어날 아기가 있다는 소식에 그녀의 엄마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이내 엄마는 딸의 집을 찾았다. 효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차분한 엄마의 반응에 의아했다. 그렇게 효성과 재혁, 그리고 효성의 엄마 세 사람의 재회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