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와 미메이 '달밤과 안경' -신비로운 공간에 대하여

[일본 근대 환상 문학 03] 오가와 미메이 원작 月夜と眼鏡

by YOU EUNK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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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 들판도, 온 세상이 푸른 잎에 뒤덮여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달빛이 좋은, 온화한 어느 밤의 일이었습니다. 한적한 마을 외곽에 할머니가 한 분 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홀로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롱불 빛이 그 주변을 평화롭게 비추고 있었지만, 할머니는 이미 나이도 지긋해 눈이 침침해져 좀처럼 바늘귀에 실을 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등불 아래 몇 번이나 비추어 보기도 하고, 주름진 손가락 끝으로 가느다란 실을 비벼 보기도 했습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뜨스한 물속에 나무도, 집도, 언덕도 모두 잠긴 듯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바느질하면서 젊었을 적 일이나 멀리 사는 친척, 떨어져 사는 손녀딸 얼굴이 문득문득 떠올랐습니다.

선반 위 자명종 시계가 ‘딸각, 딸각’하며 시간을 새기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가끔, 사람들로 북적이는 번화가 쪽에서 물건 파는 장수의 목청이나 기차가 지나가는 듯한 희미한 울림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듯, 멍하니 꿈꾸는 듯한 평온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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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습니다. 바깥 문을 ‘똑, 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할머니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부쩍 어두워진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요. ‘분명 바람 소리겠지’라고 할머니는 생각했습니다. 바람은 이렇게 갈 곳 없이 들판이나 마을을 지나가곤 하니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창문 바로 밑에서 작은 발자국 소리가 났습니다. 할머니는 여느 때와는 달리 그 소리를 용케 알아들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누군가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할머니는 처음엔 자기 귀 탓을 하며 바느질하던 손을 멈췄습니다.

“할머니, 창문 좀 열어주세요.” 누군가 다시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대체 누가 부르는 걸까 싶어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창밖은 푸르스름한 달빛이 마치 대낮처럼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창문 아래에는 키가 그리 크지 않은 남자가 서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고 얼굴에는 수염이 나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누구요?”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보고, 이 사람이 집을 잘못 찾아온 게지 싶었습니다.

“저는 안경 장수입니다. 여러 가지 안경을 많이 가지고 있지요. 이 마을은 처음입니다만, 참으로 마음 편하고 아름다운 곳이군요. 오늘 밤은 달빛이 좋아 이렇게 물건을 팔아볼까 나온 겁니다.” 남자가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마침 눈이 침침해 바늘귀에 실 꿰기가 힘들어하던 참이었기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눈에 잘 맞는, 잘 보이는 안경도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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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상자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할머니에게 맞을 법한 안경을 고르다가, 곧 커다란 대모 안경 하나를 꺼내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할머니의 손에 건네주었습니다.

“이거라면 뭐든 잘 보일 거라고 장담합니다.” 남자가 말했습니다.

창문 아래 남자가 서 있는 발치에는 희고, 붉고, 푸른 온갖 풀꽃들이 달빛을 받아 거무스름하게 피어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안경을 써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쪽 자명종 시계의 숫자와 달력의 글자 등을 읽어보았더니,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수십 년 전 소녀 시절에는 모든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눈에 비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무척 기뻤습니다.

“아, 이걸 주구려.” 할머니는 곧장 그 안경을 샀습니다.

할머니가 돈을 건네자, 검은 안경에 수염 난 얼굴의 안경 장수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의 발치에 있던 풀꽃들만은 여전히 밤공기 속에서 향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창문을 닫고 다시 원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제는 아주 수월하게 바늘귀에 실을 꿸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해보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신기해하듯 이런저런 것들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평소에 쓰지 않던 안경을 갑자기 쓰니 자기 모습이 달라진 것 같아 어색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쓰고 있던 안경을 다시 벗어 선반 위 자명종 시계 옆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그만 자야겠다 싶어 일감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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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습니다. 다시 바깥 문을 ‘똑, 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할머니는 귀를 기울였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밤이구나. 또 누가 온 모양이야. 이렇게 늦었는데…….” 할머니는 중얼거리며 시계를 보았습니다. 바깥은 달빛으로 환했지만, 밤은 꽤 깊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작은 손으로 두드리는 듯 ‘똑, 똑’하는 앙증맞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렇게 늦게 누굴까…….” 할머니는 중얼거리며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곳에는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습니다.

“뉘 집 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이리 늦은 시간에 남의 집을 찾은 게요?” 할머니는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저는 마을 향수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하얀 장미꽃에서 뽑아낸 향수를 병에 담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밤늦게 집에 가요. 오늘 밤도 일하고 나서 달빛이 좋아 혼자 산책하듯 걸어 다니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져 이렇게 손가락을 다쳤어요.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 피가 나는데 멈추질 않아요. 벌써 다른 모든 집은 잠들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 집 앞을 지나다 보니 아직 할머니가 깨어 계셨죠. 저는 할머니가 친절하고 상냥한, 좋은 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문을 두드린 거예요.” 긴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가 말했습니다.

소녀의 몸에는 좋은 향수 냄새가 배어 있는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 향기가 할머니의 코를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알고 있다는 거니?” 할머니가 물었습니다.

“저는 이 집 앞을 자주 지나다니며 할머니기 창가 아래에서 바느질하시는 모습을 보고 알고 있었어요.”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아이고, 착한 아이구나. 어디 다친 손가락 좀 보여주렴. 약을 발라주마.” 할머니는 소녀를 등불 가까이로 데려왔습니다. 소녀가 앙증맞은 손가락을 내밀어 보이자 새하얀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가엽게도 돌에 긁혀 베인 모양이구나.” 할머니는 입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눈이 침침해서 어디서 피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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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안경을 어디 뒀더라.” 할머니는 선반 위를 더듬거렸습니다. 안경은 자명종 시계 옆에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서둘러 안경을 쓰고 소녀의 상처를 살펴보려 했습니다.

할머니는 안경을 쓰고, 자기 집 앞을 자주 지나다닌다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했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있던 것은 소녀가 아니라,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였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온화한 달밤에는 나비가 사람으로 변해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은 집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 나비가 다리를 다친 것이죠.

“착하지, 이리 오렴.” 할머니는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앞장서서 쪽문을 나서 뒷마당 화단 쪽으로 향했습니다. 소녀는 말없이 할머니 뒤를 따랐습니다.

화단에는 온갖 꽃들이 한창 만개할 때라는 듯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낮에는 나비와 꿀벌들이 모여 복작거렸으나, 지금은 풀잎 그늘 밑에서 즐거운 꿈을 꾸며 잠들었는지 아주 조용했습니다. 그저 물처럼 창백한 달빛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쪽 울타리에는 하얀 들장미 꽃이 소복하게 모여 눈처럼 피어 있었습니다.

“아가, 어디 갔니?” 할머니가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뒤따라오던 소녀는 언제 모습을 감췄는지, 발소리도 없이 사라져버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잘 자라. 이제 나도 자야겠다.” 할머니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좋은 달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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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이미지 생성했습니다.


오가와 미메이(小川 未明, 1882~1961)


"미지근한 달빛 속에 잠긴 마을, 그곳에서 만난 신비로운 손님들"


'일본 동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가와 미메이는 평생 1,200편이 넘는 동화를 남기며 일본 근대 아동문학의 기틀을 닦았으며, 서정적이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환상성이 깃든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뜨스한 물속에 나무도, 집도, 언덕도 모두 잠긴 듯했다"라는 묘사는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시각적인 달빛을 촉각적인 액체로 치환하여, 독자를 단숨에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입니다. 안경 장수가 건네준 신비로운 안경은 노안을 해결해주는 도구를 넘어, '보이지 않던 진실' 혹은 '잊고 있던 순수함'을 보게 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현실의 도구인 안경이 환상의 안경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소녀의 모습을 한 나비입니다. 나비와 할머니의 만남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합니다.


앞서 다루었던 니이미 난키치의 〈빨간 양초〉 속 양초가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였다면, 이번 오가와 미메이의 호롱불은 '진실을 비추는 따스한 등불'이 됩니다. 거장의 필치로 그려낸 고요한 밤의 풍경을 가만히 감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유튜브에서 일본어 원작을 자막, 한국어 낭독으로 들어 보세요~! 여기요~


01. 하라 타미키, 〈지붕 위에서〉 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yusoso/6

02. 니이미 난키치,〈빨간 양초〉 보러 가기 : https://brunch.co.kr/@yusos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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