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예쁜 쓰레기, 누군가에겐 평생 기다린 손님

by 영주

경상남도는 겨울에도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아니, 거의 내리지 않는다고 보는 것도 무방하다. 간혹 오더라도 반나절이면 다 녹기 때문에 눈이 "흩날리다 끝났다"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반면 위로 위로, 북쪽방향위 도시에서 눈은 겨울의 일상이며 애석하기고 출퇴근길의 난이도를 급상승시키는 '예쁜 쓰레기'로 홀대받는 경향이 크다. 뚜벅이들에게 '눈'은 순백의 하얀색으로 아름답게 세상을 뒤덮고 난 뒤 그랬던 적 없던 것처럼 건물 사이의 음지와 골목 구석에 덩어리로 남아 매운 겨울바람을 칼바람으로 둔갑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에 더욱 반갑지 않은 손님이기도 하고.


32년간 서울에서 나고 자라 장거리 출퇴근을 하며 예쁜 쓰레기에 덕분에 3시간 동안 출근버스에 갇혀도 보고, 바퀴가 눈에 미끌리거나 헛도는 바람에 도중에 하차해 덜덜 떨며 3~4개의 정류장을 걸어가 본 경험이 있는 내게 경상남도로 터를 옮겨와 보낸 6번의 겨울 중 눈이 오지 않았던 건 내심 반가운 변화이다.



2024년 겨울부터 올해 1월까지, 유난히 대설주의보가 많았던 대한민국이었지만 경상남도는 그 난리통에도 고요히 "엉뜨 도시"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온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얼마 전 이곳에도 눈이 내렸다. 심지어 쌓였다!


쌓였다..가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고작 0.3mm 정도의 눈이 쌓여 점심시간 전에 녹아버렸으니. 아침에 창밖으로 내다본 눈은 얇게 썰은 횟감처럼 훤히 길바닥을 보여주는 정도였기에 역시 경상남도 명성 답다는 생각으로 다른 날보다 따듯이 챙겨 입고 출근을 했는데 이게 웬일이람.

옆팀 팀장님이 눈으로 인한 교통대란에 갇혀 40분 지각을 한 것이 아닌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팀장님께 "사계절 타이어 안 쓰냐"물으니 또, 또 서울여자가 서울에만 살다와서 뭘 모른다는 핀잔이나 들었던 아침. 나는 정녕 경상남도 사람들이 눈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달은 날이었다.







불과 며칠 뒤 이번엔 정녕 '폭설'이 내렸는데 그 사실을 이른 새벽잠이 눈꺼풀에 아직 남은 시간에 알아버렸다. "자기야... 눈... 왔는데 혹시 보러 안 갈래..?" 라며 속삭이는 신랑 덕분에. 새벽 6시 40분이었고 내 신랑 역시 경상남도 토박이올시다. 그래 그래, 따듯하게 입고 나가자.


매일 추위에 떨며 걷기만 했던 강아지와의 아침 산책이 이날은 눈 덕분에 특별했는데, 우리에게만큼이나 눈은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선물이었나 보다. 아침 7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온 사방에 '어른이들'의 발자국이 토도도도.. 토도도도..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발자국에서 웃음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다. 토박이 주민 신랑말로는 10여 년 만에 이렇게 많은 눈이 쌓인 건 처음이라고 하던데, 그 말에 신뢰를 더해주는 장면이었달까.




그날 이후 며칠간 경상남도 사람들이 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30여 년간 서울에서 살며 봤던 눈사람의 개수보다 더 많은 눈사람을 본 며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나는 골목, 스치는 길가마다 온통 눈사람이었다. 모양도 가지각색, 크기도 들쭉날쭉. 각자 다른 마음과 상상으로 눈사람을 그리워했나 보다.





삶이라는 현장에 치여 이토록 낭만적인 존재를 예쁜 쓰레기로 폄하하며(?) 살던 세월이었다가 하얀 눈처럼 순수한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 자꾸만 웃음이 나는 '대설주의보'기간이었다.


누구의 말처럼 서울 여자가 또 다른 세상 이야기를 한다고들 하겠지만, 이방인에게 이런 장면은 아주 귀하고 소중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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