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피아노가 그려진 작은 건물의 박공지붕 위에 흰 고양이가 서 있었다. 파란 리본을 목에 맨 흰 고양이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높이 들고 노래하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 같은 가로등 불빛에 노래하는 고양이의 길고 흰 털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런 고양이를 처음 본 해피는 넋을 잃고 감전된 듯 멈춰섰다.
“이 밤을 날아가는 나그네, 그대는 뉘신가요?”
기척을 느낀 고양이가 노래하듯 물었다.
“미, 미안해. 나 때문에 노래를 멈춘 거니? 내 이름은 해피. 저 윗동네에 살아. 오늘 밤 처음으로 산책을 나왔어. 넌 노래를 무척 잘하는구나.”
칭찬에 후한 편이 아닌 해피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응, 그래. 그래서 내 이름이 노래야. 이 구역 친구들은 날 밤의 여왕이라 불러. 밤마다 이렇게 지붕 위에서 노래를 한다고.”
자칫 잘난 척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나 노래에게 그런 자만심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노래를 잘 한다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칭찬을 받아들였다.
“밤의 여왕? 참 멋진 이름이다!”
해피는 다시 홀린 눈으로 노래를 올려다보았다. 노래는 앞다리를 곧게 모은 다음 긴 꼬리로 다리를 휘감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는데 그 모습이 더욱 새침하고 도도해 보였다.
“좀전에 네가 부르던 노래는 무슨 노래야?”
해피가 조심스레 다시 말을 걸었다.
“슈베르트라는 작곡가의 세레나데야. 밤에 사랑하는 사람의 창가에서 부르는 노래래.”
“아, 그렇구나!”
“하하,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 너한테 부르는 건 아니니까.”
노래는 웃음소리도 맑고 우아했다. 해피는 좀 멋쩍어졌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그럼 누구한테 부르는 거야?”
“음, 저 달에게.”
“달에게?”
“응, 오늘 밤 달빛이 참 곱지 않니? 들어봐, 달님이 우리에게 뭔가 비밀스런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 같잖아.”
노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달빛에 흰 고양이의 푸른 눈이 신비롭게 빛났다. 목에 매고 있는 파란 리본이 흰 고양이의 미모를 더욱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런데 넌 어디 살아?”
집이 어디냐고 묻지 않고 그렇게 물은 건 어쩌면 노래가 딴 세상에서 온 고양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응, 바로 여기. 피아노교습소. 사람들이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곳이야. 우리 집사는 이곳 원장님이고. 난 여기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음악을 듣고 자랐어. 말보다 음악을 먼저 배운 셈이야.”
“그렇구나. 나도 음악을 자주 듣는데…”
해피는 그렇게 말해 놓고 금방 후회했다. 노래 같은 전문가에게 잘난 척을 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노래의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
“어머, 그렇구나! 주로 어떤 음악을 듣는데?”
“뭐 이런 저런 다양한 음악… 음, 요즘은 드뷔시의 음악을 자주 들어.”
해피는 노래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할까봐 대충 얼버무리려다 집사가 밤마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려주는 음악, 바로 얼마 전 집을 나오기 전까지도 들었던 음악이 생각나서 좀 잘난 체를 했다.
“드뷔시? 어머나! 너 드뷔시를 좋아하는구나!”
노래는 오랜 고향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워하며 눈을 반짝였다. 해피는 빨리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음악이라면 좋아하는 음악과 싫어하는 음악, 그리고 그저 그런 음악으로 분류할 정도일 뿐 전문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난 노래는 발동이 제대로 걸린 듯 계속해서 음악 이야기를 했다.
“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쇼팽, 드뷔시,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좋아하는 작곡가가 아주 많아. 하지만 그중에서도 쇼팽을 제일 좋아해.”
“우리 집사도 쇼팽을 좋아하는데!”
“정말? 오늘 같은 밤엔 녹턴이 어울리지. 밤의 노래, 야상곡 말이야. 그 중에서도 2번을 나는 제일 좋아해. 피아노 만큼 감상적인 악기도 없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노래의 피아노 예찬론은 계속될 기세여서 해피는 좀 부담스러워졌다.
“그런데 맨날 피아노 소리만 들으면 지겹지 않아?”
“물론 그럴 때도 있긴 해. 음악이라 말하기엔 좀 애매한 소리도 가끔 있거든. 어린 아이들이 작은 손으로 건반을 엉터리로 두들겨대는 소리 말이야. 그럴 땐 귀를 막고 싶어져.”
“나도 언젠가 우리집 꼬마집사가 쿵쾅쿵쾅 피아노를 두들겨대서 엄청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는데…”
“하지만 그러던 아이들이 어느 날 제대로된 음악을 연주하는 걸 보면 또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 어떨 땐 눈물이 날 정도야.”
“맞아. 사실은 나도 천둥치듯 쿵쾅대는 소리를 듣고 처음엔 피아노를 무서워했어. 그 근처를 피해다닐 정도로 말이야. 하얀 이빨와 검은 이빨이 많은 괴물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어느 날 집사가 연주를 하는데 피아노에서 잔잔한 바람이 불고 별가루가 날리고 기분좋은 향기가 나는 듯한 소리가 나더라구. 그래서 피아노는 무서운 괴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
“어머나, 너 말을 참 재밌게 한다! 근데 피아노는 괴물이 맞아.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심장을 쿵쾅대게 하고 그러니까.”
새침한 노래는 해피가 맘에 들었는지 갑자기 수다쟁이가 되었다. 해피는 집사의 책상 옆에서 오랜 세월 지루한 음악감상 수업을 견딘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우리 집사도 늘 그렇게 말해. 음악만큼 사람을 감동시키는 건 없다고. 우리 집사는 책상 앞에 앉으면 늘 음악을 트는데 주로 피아노곡을 들어. 그래서 내가 쇼팽도 알고 드뷔시도 아는 거야.”
“그렇구나! 우리 집사도 태어나서 제일 잘한 게 피아노를 배운 거래. 원래는 사람들 앞에서 멋진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재능은 가르치는 데 있다는 걸 알고 일찌감치 피아노 교습소를 열었대. 참 현명한 사람이지. 하지만 요즘은 걱정이 많아. 한때 백 명이 넘던 교습생이 이제는 삼십 명도 채 안 되거든. 그래서 언젠가는 교습소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대.”
“그래? 그럼 넌 어디로 가는데?”
“아니, 뭐 당장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니고, 피아노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아주 없어지면 말이야. 그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한단 얘기지. 그런데 집사 말이 세상 모든 일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래. 노래처럼.”
“노래처럼?”
“응. 짧든 길든 노래 한 곡 속에는 이야기가 있고 시작과 끝이 있잖아. 우리 집사는 이제 마무리를 잘할 때라고 했어. 집사도 요즘은 시간이 나면 가끔 연주를 해. 난 주로 듣는 편이지만 어떨 땐 피아노를 치기도 해. 집사가 나한테도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 줬거든.”
“정말? 와, 대단하다! 피아노를 치는 고양이라니!”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잖아. 피아노교습소 고양이 삼 년 하고도 또 삼 년에다가 이 년인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사실 뭐 그 정도는 우리 고양이들 누구나 할 수 있어. 연습만 열심히 한다면… 물론 연습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겠지. 음악성의 차이는 있는 거니까.”
노래는 자신의 재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지만 스스로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난 무엇보다 노래를 좋아해. 내가 들었던 곡 중에 맘에 드는 멜로디를 노래로 부르는 거지. 그럼 우리 집사는 박수를 치며 좋아해. ‘어머나 얘 좀 봐, 어려서부터 소리가 남다르더니 정말 타고난 소프라노야!’ 하면서 내 노래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해주지.”
해피는 열정에 도취된 노래의 아름다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넌 참 행복해 보인다!”
“그럼, 행복하지! 음악은 날 행복하게 해. 이 세상에 음악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운 건 없으니까.”
노래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음악을 좋아하긴 해. 음악은 뭔가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아. 어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음악은 좀 슬퍼지고 또 어떤 음악을 들으면 바로 행복한 꿈나라로 가기도 하잖아.”
“그래! 음악이 바로 그런 거야! 음악을 아는 친구를 만나서 정말 반갑다. 우리 구역에 너 같은 애는 없었는데!”
노래는 친밀감의 표현으로 눈을 한 번 지그시 감더니 다시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달밤이야! 그렇지 않니? 오늘 같은 밤은 노래가 절로 줄줄 나와. 한 백 곡 정도는 거뜬히 부를 수 있다니까. 아니, 밤새도록 노래할 수도 있어.”
“정말? 그러다 목이 쉬면 어쩌려고?”
노래는 정말로 노래로 밤을 샐 기세여서 해피는 걱정이 되었다.
“그럴 걱정 없어. 내 목청은 단련이 되어 있어서 그 정도는 보통이야. 그런데 넌 이 밤에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는 중이었어? 우리 구역엔 왜 온 거야, 윗동네에 산다면서?”
노래는 그제서야 낯선 고양이에게 궁금증이 생긴 듯 물었다.
“응. 나는 행복을 찾아가는 중이야.”
“행복을 찾아? 어디로?”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에 가보려고.”
“고행점? 하지만 거긴 고양이들은 못 들어가는 곳인데!”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한번 가보고 싶어서.”
“넌 호기심이 아주 많은 아이구나!”
“음, 좀 그런 편이야.”
“그곳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방이 백 개나 있대. 언젠가 우리 집사가 백 개나 되는 방을 돌아다니느라 하루 종일 힘들었다고 했어.”
“방이 백 개나 된다고? 나라면 엄청 신이 날 것 같은데… 우리 집엔 방이 세 개밖에 없거든.”
“근데 어떤 방에는 그랜드피아노가 있대. 그건 나도 좀 궁금하긴 해.”
“그랜드피아노?”
“응, 아주 크고 멋진 피아노. 우리 교습소에는 없는 아주 특별한 피아노래.”
“그런데 고행점에 왜 그런 피아노가 있는 거지?”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고행점은 우리에게 워낙 미스터리니까.”
“미스터리?”
“음, 그러니까 알 수 없는 곳이란 얘기지. 아직 가봤다는 고양이를 못 봤으니까.”
“그래서 내가 가보려고.”
해피는 호기롭게 말해 놓고는 너무 잘난 척을 한 것 같아 노래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노래는 해피의 매력에 빠져 있는 듯 여전히 눈빛이 따뜻했다.
“도서관 고양이 칸슈가 아는 게 많다고 해서 좀 물어보려는데 도서관은 어느 방향이야?”
“저쪽 라일락나무가 있는 길 모퉁이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다 큰 길을 건너면 은행나무가 보일 거야. 그 골목으로 가면 돼. 칸슈는 아마 너에게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줄 거야. 정말 똑똑한 고양이거든. 세상에 그렇게 똑똑한 고양이는 아마 칸슈밖에 없을 거야.”
노래의 말을 들으니 칸슈라는 고양이가 더 궁금해졌다. 책을 보는 똑똑한 고양이는 대체 어떤 고양이일까? 해피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실 칸슈는 내 첫사랑이야. ‘노래하라, 그대는 그토록 아름답다!’ 뭐 그런 제목의 시도 내게 써줬지.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해서 결국 헤어졌지만… 아마 칸슈는 지금도 책을 보고 있을 걸.”
노래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매력적인 고양이의 첫사랑이라니!’ 도서관 고양이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진 해피는 서둘러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그래. 부디 네가 원하는 행복을 찾길 바래.”
노래는 다시 목청을 가다듬더니 소프라노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아아아야아아아옹 냐아아아냐아아아옹...”
해피는 소프라노의 높은 소리를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웬일인지 노래의 노래는 꽤 맘에 들었다. 귀에 익은 멜로디가 언젠가 집사가 들려준 적이 있는 음악 같기도 했다. 해피는 낮은 목소리로 그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걸어 내려갔다.
“안녕, 호랑이무늬야.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라일락나무가 있는 골목 어귀 옷수선집 앞에 앉아 있던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말을 시켰다. 꽃무늬 조끼를 입은 날씬한 고양이는 흰 양말을 신은 것 같이 발만 하얬다.
“안녕, 넌 아주 특이한 옷을 입었구나.”
해피는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고양이는 처음이어서 그렇게 말했다.
“보통은 ‘아주 예쁜 옷을 입었구나.’라고 말하는데…”
조끼를 입은 고양이가 웃으며 말했다.
“어, 그래. 아주 예쁜 옷이야.”
해피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우리 집사가 만들어 줬어. 여기 행복한 옷수선집 주인이 우리 집사거든.”
조끼를 입은 고양이가 지붕 위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게 이름이 행복한 옷수선집이야?”
“응, 우리 집사는 어떤 옷이든지 마음에 들게 고쳐주는 기술자야.”
“그렇구나!”
“우리 집사가 주문 대로 옷을 수선해 주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마음에 쏙 들어요.’ ‘어머나 감쪽같네요.’ 하면서 좋아해. 아주 가끔 안 그런 사람도 있긴 해. 어디나 까다로운 사람은 있으니까. 그럼 우리 집사는 어떻게든 맘에 들 때까지 다시 수선을 해줘. 그래서 ‘행복한 옷수선’인가 봐.”
조끼를 입은 고양이의 집사 자랑은 계속되었다. 계절마다 알맞은 자투리 옷감으로 예쁜 조끼를 만들어 준다는데 이번 봄에 만들어준 조끼가 제일 맘에 든다는 것이었다.
“어떤 젊은 여자가 알록달록 꽃무늬 긴 치마를 가져와서 짧은 치마로 만들어달라고 했어. 난 속으로 ‘야호!’ 하고 소리쳤지. 그 옷감이 정말 맘에 들었거든. 집사는 벌써 내 마음을 알아채고 날 보며 살짝 눈을 깜박여 주었어.”
조끼를 입은 고양이가 조끼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해피는 한 번도 옷을 입어 본 적이 없고 입어 보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자신의 차림새에 만족해 하는 고양이를 보니 그 모습이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넌 참 좋겠다. 그렇게 예쁜 옷을 만들어 주는 집사가 있어서.”
“응, 그래.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고양이들에게 옷은 꼭 필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옷을 입고 있는 거야.”
조끼를 입은 고양이는 갑자기 풀죽은 얼굴이 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옷을 입고 있는데?”
그제서야 해피는 조끼를 입은 고양이의 몸이 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난 꼬리가 없어. 그리고…”
조끼를 입은 고양이가 말을 더 하려다 말았다.
“원래부터 그랬던 거야?”
“아니 그렇진 않아.”
조끼를 입은 고양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해피는 조심스레 묻고 싶었으나 바로 질문이 튀어나와 버렸다.
“누군가 날 많이 아프게 했어.”
“누구야? 누가 그런 거야?”
해피가 다그치듯 물었다.
“내 첫 번째 집사… 그래서 이렇게…”
“집사가? 널 어떻게 한 건데? 널 때리고 막 그런 거야?”
해피는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 조끼를 입은 고양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도대체 왜 그런 거야?”
해피의 목소리가 커졌고 흥분된 심장도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어. 세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거니까. 마음이 아픈 사람들 말이야. 한때는 그 집사를 많이 미워했는데 이제는 괜찮아. 지금 집사가 내 마음을 수선해 줬어.”
“마음을 수선해 줬다고?”
“응, 그래. 우리 집사는 옷수선만 잘하는 게 아니라 마음수선도 잘해. 나쁜 마음, 아픈 마음을 좋은 마음, 건강한 마음으로 만들어 주었거든.”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이야?”
“그럼!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 혹시나 나쁜 사람들이 나를 또 그렇게 할까봐 이렇게 예쁜 조끼를 입혀준 거 봐. ‘이 고양이는 행복한 옷수선집 고양이입니다.’라는 표시래, 이 조끼는. 그리고 내 이름도 골무라고 지어 줬어. 바느질할 때 손가락에 끼는 거 말이야. 난 우리 집사가 손가락을 다치지 않게 해 주는 수호묘야. 우린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인 거지.”
“그렇구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골무의 조끼가 더 특별하고 예뻐 보였다.
“‘불쌍한 우리 골무, 옷수선 하듯 마음수선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난 그럴 능력이 없네.’ 집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 집사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어. 누더기가 된 내 마음을 잘 기워 주고 예쁘게 수선해 준 걸 보면. 이제 나는 괜찮아. 나는 집사가 재봉틀 앞에 앉아 바느질하고 있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져. 자신이 수선한 작품을 보고 집사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면 난 안심이 되고 행복해져.”
해피는 골무가 정말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사 말이 마음은 수선하기가 힘든 거래. 그래서 마음은 고쳐먹는 거래.”
“고쳐먹는다고? 어떻게?”
“그러니까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아 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거야. 난 이제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준 집사에게 감사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 보면 투덜댈 틈이 없어져.”
해피는 골무의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자신은 한 번도 집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한 번도 없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았다.
“넌 어디 있다 지금 나타난 거야? 처음 보는 아인데!”
골무가 그제서야 해피에게 궁금한 질문을 했다.
“난 저 윗동네에 살아. 이름은 해피야. 오늘 밤 삼 년 만에 집을 나왔어. 고행점에 가보려고.”
“고행점에? 거긴 왜?”
“행복이 있나 가보려고.”
골무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 해피를 유심스레 살피더니 질문을 했다.
“하지만 네 집사는 알고 있어? 네가 집을 나온 사실을.”
“응. 난 도망쳤어. 집사를 따돌리고…”
해피는 집을 나오던 순간과 집사에게 쫓기던 상황의 긴박감이 생각나 마음이 복잡해졌고 그런 표정을 읽은 골무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저런! 넌 행복하지 않은가 보구나! 집사가 너를 학대하기라도 했어? 그러니까 널 때리거나 밥을 안 주고 굶기거나…”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전혀…”
‘애정이 넘쳐서 문제라면 문제지.’ 해피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그렇담 네 집사가 너무 불쌍하다. 널 얼마나 찾고 있겠어?”
해피는 처음으로 집사에게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 보답은 못할망정 가출해서 도망을 치다니! 해피의 표정을 읽은 골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럴 게 아니라면 어서 너만의 행복을 찾아 떠나. 하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이유도 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오기도 하지. 뜻밖의 행운이나 불행처럼. 하지만 행복은 만들어 가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네가 오늘 밤 여행을 통해 행복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골무의 진심어린 충고는 해피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마워. 나도 꼭 그러길 바래. 그럼 이만 가볼게.”
해피는 골무와 작별하고 작은 길을 또 하나 건넜다.
골목길을 또 한참 내려가다 보니 회색 건물 앞 전봇대 아래 키작은 치즈 고양이 한 마리가 서서 졸고 있었다. 해피의 기척을 느낀 순간 고양이는 번쩍 눈을 뜨고 경계심 가득한 몸짓을 했다.
“내 이름은 해피, 윗동네에 사는데 오늘 밤 처음으로 집을 나왔어.”
해피는 급히 자진신고를 했다.
“그렇구나. 넌 집이 있는 고양이구나.”
키작은 고양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집이 없어?”
해피의 질문에 키작은 고양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은 원래 꼭대기층인데 난 저기 행운전당포에 당분간 살고 있어.”
키작은 고양이가 회색 건물 위를 가리켰다. 2층에 나무로 된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간판은 칠이 벗겨져 왼쪽 부분의 글씨는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전당포? 처음 듣는 이름이다. 저긴 뭐하는 곳인데?”
“사람들이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 소중한 걸 잠깐 동안 맡겨 두는 곳이야. 시계나 반지, 팔찌나 목걸이, 옷이나 가방… 뭐 그런 것들을 맡겨 두고 돈을 빌려 가지.”
“그럼 너도 그래서 당분간 거기 살고 있는 거야?”
“응, 그런 셈이야.”
“언제부터 살고 있는데?”
“음… 그러니까 좀 됐어. 한 십 년.”
“십 년?”
해피는 큰 소리를 뱉어냈다. 여섯 살인 해피는 십 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긴지를 알고 있었다.‘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집사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네 집사가 널 저기 맡긴 거야?”
“응.”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좀 길어. 우리 구역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얘기인데…”
“처음 보는 나한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거구나! 알겠어.”
해피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예의상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키작은 고양이는 처음의 경계심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난 이 건물 꼭대기 작은 집에서 집사와 둘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나쁜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 안에 있는 걸 다 가져갔어. 내 캣타워와 숨숨집까지 모든 걸 다 가져가 버렸어.”
“숨숨집까지? 남의 집을 훔쳐가다니!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
해피가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소사 소사 맙소사!’ 집사는 계속 그 말만 했어. 집사가 당황하거나 흥분했을 때 하는 말이야.”
“도대체 네 집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자세한 건 모르지만 무슨 사기를 당한 거래.”
“사기?”
“그러니까, 나쁜 사람들의 거짓 꾐에 속은 건가 봐.”
“나쁜 사람들!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 사람들은 왜 거짓말을 할까? 우리 고양이들은 그런 걸 모르는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 집사 같이 착한 사람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게 더 화가 나.”
키작은 고양이는 그 일로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해피는 어느새 키작은 고양이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우린 둘다 하루 종일 쫄딱 굶었어. 집사는 잠도 안 자고 자꾸 한숨을 쉬더니 다음날 날 데리고 2층 전당포로 내려갔어. 날 안고 가는 집사의 심장소리가 쿵쾅쿵쾅 엄청 크게 들렸어. 집사가 곧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사장님, 당분간만 우리 고양이 좀 부탁드릴게요.’ 우리 집사가 그렇게 부탁하자 전당포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날 맡게 됐던 거지.”
“그래서, 그래서 전당포 주인이 돈을 줬어?”
궁금한 걸 못 참는 해피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응. 전당포 주인은 한참 동안 우리 집사를 쳐다보더니 금고에서 돈을 꺼내 줬어. 집사가 안 받으려고 하니까 ‘귀중품을 맡겼으니 돈을 받아 가야지.’ 하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어. 그러자 우리 집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어.”
“집사가 울었어?”
“응, 그래서 나도 울었어. 집사가 우니까 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거든.”
키작은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해피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 슬픈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궁금해졌다.
“‘백 밤만 자면 너를 데리러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집사는 나를 꼭 껴안아 주면서 그렇게 약속했어.”
“그런데 백 밤이 십 년이 된 거야?”
“응, 그렇게 됐어.”
키작은 고양이가 힘없이 말했다.
“넌 집사가 널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해?”
해피는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질문이 또 튀어나와 움찔했다.
“그럼, 당연하지!”
키작은 고양이는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하냐는 듯 확신의 몸짓으로 발을 구르며 대답했다.
“우리 집사가 나를 버린 거라고 말하는 못된 친구들도 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 안해. 우리 집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야.”
“뭐? 이 밤에 집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럼! 언제 올지 어떻게 알아? 어쨌든 우리 집사는 꼭 올 거야. 우리 집사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나하고 한 약속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단 말이야.”
해피는 키작은 고양이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런 신뢰와 확신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했다.
“넌 정말 대단한 고양이구나! 네 이름은 뭐야?”
“슈가. 우리 집사는 나를 그렇게 불렀어. 근데 전당포 주인은 나를 당분이라고 불러. 당분간 맡겨둔 아이라고.”
“당분이? 그렇구나!”
“근데 도서관 고양이 칸슈 말이 슈가도 어차피 당분이란 뜻이래. 나는 이래저래 달콤함이랑 인연이 있나 봐.”
달콤함이란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당분이가 환한 미소를 짓자 해피의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집사가 날 찾아오면 다시 내게 슈가라고 불러줄 거야. ‘슈가, 이리 와! 우리 달콤이!’ 우리 집사는 내 턱밑을 간지럽히며 그렇게 불러주곤 했거든.”
당분이는 추억에 젖은 듯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좀 슬픈 얼굴이 됐다. 해피는 당분이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당포 주인은 너한테 잘해 주니?”
“응, 그런 편이야. 우리 집사가 와야 돈을 받을 테니까. 내가 아주 비싼 고양이라고 말하거든.”
“전당포 주인도 네 집사가 올 거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럼, 당연하지!”
해피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답하는 당분이를 보고 당혹감을 느꼈다.
“그런데 너는 왜 집을 나온 거니?”
당분이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고행점에 가려고.”
“고행점? 소사 소사 맙소사!”
“뭐라고?”
“미안, 나도 우리 집사처럼 너무 당황하면 그 말이 튀어나와.”
“이해해. 동네에서 만난 다른 친구들도 다 나를 이상한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미안해, 너를 그런 고양이 취급해서. 하지만 거긴 고양이들이 못 들어가는 데라고 알고 있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그런데 거기 왜 가려고 하는 거야?”
“행복이 있는지 가보려고.”
“행복?”
“응. 고행점이니까 우리 고양이들의 행복이 거기 있지 않을까 하고.”
“넌 행복하지 않은가 보구나!”
당분이의 말에 해피는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딱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 적은 없었던 데다 오늘 밤 불현듯 생긴 이 모험 욕구의 정체가 뭔지 스스로도 아직 답을 못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오늘 밤 문득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해피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혹시 나랑 같이 갈 생각 없니?”
해피의 갑작스런 제안에 당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안 돼.”
“왜?”
“난 기다려야 돼. 우리 집사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해피는 ‘네가 기다리는 집사는 안 올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한 걸 꾹 참고 대신 이렇게 물었다.
“넌 이렇게 집사를 기다리는 게 행복하니?”
“그럼! 나는 우리 집사가 와서 내 이름을 불러줄 걸 생각하면… 그런 상상만 해도 행복해져.”
“그렇구나!”
해피는 당분이의 믿음이 참 무모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무모함이라면 자신을 따라올 고양이가 없을 줄 알았는데 당분이의 기다림도 참 대책없다 싶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칸슈가 고행점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대서 가보려고. 사실 난 고행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거든.”
“그래, 잘 가. 행운을 빌어. 네가 생각하는 행복이 뭔지 모르지만 고행점에 그게 꼭 있었으면 좋겠다.”
“고마워. 네 집사가 금방이라도 나타나 너를 데려간다면 좋겠다. 너에게도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래.”
“고마워. 그런 날이 온다면 난 행복해서 죽을지도 몰라.”
당분이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소사 소사 맙소사! 그렇다고 죽으면 안 되지. 행복하게 살아야지. 오래오래…”
해피는 당분이의 말투를 흉내내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진심으로 당분이에게 그런 날이 오기를 기원했다.
“고행점에 가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거긴 길을 잃게 하는 곳이래. 들어간 순간 길을 잃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은 지갑을 다 털린대.”
“그래? 거긴 도둑이 많은가 보구나!”
“도둑소굴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겠지. 우리 전당포 주인이 그랬어.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고. 정신줄을 단단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전당포 주인의 친척 한 사람이 거기 갔다가 순식간에 자그마치 백만 원을 털렸대. 그런데 그 사람이 고양이를 위해서 백만 원 정도 털리는 건 별일 아니라면서 웃더래.”
당분이가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 주듯 비밀스런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명심할게.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걸. 그래도 만약 고행점에 들어간다면 정신은 똑바로 차릴게.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도서관은 저 길 건너에 있니? 칸슈에게 고행점에 대해 좀 물어봐야겠어.”
“저기 멀리 보이는 커다란 집이 도서관이야. 키큰 나무 옆 회색 건물 말이야. 칸슈는 아마 지금도 책을 읽고 있을 걸. 정말 못말리는 독서광이거든.”
해피는 당분이와 작별하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동네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가진 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 해피는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좀더 일찍 집을 나왔더라면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약간은 후회스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