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1)
“해피, 어딨니? 해피, 어서 이리 와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들어온 집사가 흥분된 얼굴로 해피를 불렀다. ‘어, 웬일이지? 그 가방을 들고나가면 세 밤은 자야 돌아오는데!’ 집사의 이른 귀가에 깜짝 놀란 해피가 피라미드 숨숨집에서 후다닥 달려 나왔다.
진한 보라색 대형 캐리어는 먼 여행의 징표였다. 집사가 옷장 선반에서 그 캐리어를 꺼낼 때면 해피는 흥분해서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난동을 피웠고 그러다 화가 안 풀리면 가방에 들어가 꼼짝 않고 버티면서 심술을 부렸다. 그렇다고 집사가 여행을 안 떠나지도 않았고 해피를 데려가지도 않았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해피는 특별 간식 하나를 얻어먹는 것으로 타협을 하고 인심 쓰는 척 자리를 비켜주곤 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아침 일찍 나갔던 집사가 한 밤도 안 자고 저녁 어스름에 돌아온 것이다.
“해피, 이 가방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궁금하지 않니? 네가 좋아할 것들이 아주 많을 걸? 고행점은 갈 때마다 정말 놀라워. 돌아다니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니까. 내일이면 그 동네가 완전 난리가 날 거야. 생각만 해도 아찔해. 그래서 오늘 미리 다녀왔지.”
이번 집사의 여행지는 먼 나라가 아닌 고행점, 그러니까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이었던 것이다.
“고행점 가보셨어요?”
요즘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핫 플레이스는 단연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이다. 세계 ‘최초, 최대, 최고’라는 ‘3 최’를 내세우며 오픈한 고행점은 고양이들의 행복이 최우선 관심사인 집사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였다. 행복백화점이라는 이름처럼 그곳에 가면 행복해진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고행점에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을 거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고행점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물론 해피의 집사도 세일 때마다 놓치지 않고 그곳에 가는 단골손님이었다.
집사는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거실 바닥에 눕히더니 지퍼를 열고 펼쳤다. 양쪽 면에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물건들을 보고 해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 봐! 이건 알래스카 연어로 만든 통조림이고 이건 태평양 참치와 대서양 청어로 만든 간식, 이건 면역력에 좋다는 종합영양제, 이건 장건강을 위한 유산균, 이건 두뇌 건강과 심혈관 질환에 좋다는 오메가 3, 이건 신장 건강을 위한 츄르, 이건 구강 건강을 위한 신제품 바르는 치약, 그리고 이건 하트모양 스크래쳐, 이건 꽃무늬 캣닙쿠션, 이건 연잎 정수기, 이건 낚싯대 리필 장난감…”
집사는 쇼핑해 온 상품들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펼쳐 놓으며 난전 장사꾼처럼 신나게 떠들어댔지만 웬일인지 해피는 심드렁한 얼굴로 하품만 해댔다.
“해피, 잠자리 날개가 다 망가져서 이것도 새로 사 왔어. 이것 봐. 반짝반짝 무지개색 날개야.”
해피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 백이면 백 반응하던 잠자리 낚싯대를 휘둘러대는데도 앞발 펀치를 한 번 날려보고는 그만이자 집사는 당황스러워졌다. 폴짝폴짝 뛰며 좋아할 해피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맞다, 내 정신 좀 봐. 너 배가 고픈 거구나! 잠깐만 있어봐. 연어 간식 줄게. 마침 똑 떨어졌었는데 오늘 30%나 세일을 하더라구. 그래서 잔뜩 사 왔지.”
집사는 캔을 따서 간식용 그릇에 정성스레 담아 트레이에 걸어 주었다. 해피는 찹찹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는 다시 쇼핑 아이템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아주 좋은 듯했다.
“어머나! 웬일이야, 해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연어 간식을 남기다니!”
말라비틀어진 연어 슬라이스 조각들이 반쯤 남겨진 그릇을 뒤늦게 발견하고 깜짝 놀란 집사가 요람에 엎드려 있는 해피를 보고 소리쳤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더 먹고 싶지 않아. 입맛이 없다구.’ 해피의 토라진 뒤통수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해피는 여섯 살 호랑이무늬 수컷 고양이다. 특별히 애교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해피의 집사는 해피를 무척 사랑한다. 그래서 여느 집사들처럼 좋은 사료와 간식을 먹이고 깨끗한 화장실과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아름다운 음악도 들려주고 시간을 내서 놀아 주려고 애쓴다. 가끔씩 집사의 새벽잠을 방해하는 것 말고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건강한 고양이 해피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해피, 어디 아픈 건 아니니? 연어 간식을 남긴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신장이 더 나빠진 거 아냐? 지난번 건강검진 때 신장수치가 안 좋다고 했는데 더 나빠졌나 보다. 어쩜 좋아! 몸무게가 많이 는 걸 보니 혹시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닐까? 그럼 안 되는데! 우리 오래오래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 하잖아, 안 그래 해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혹시 우울증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집사는 건강 얘기만 하면 늘 그렇듯 또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군. 그놈의 건강염려증.’ 해피는 피라미드 모양의 숨숨집으로 숨어 버렸다. 해피가 혼자 있고 싶을 때, 아무한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들어가는 최고의 은신처이다. ‘잠이나 자야지. 역시 잠이 최고야. 잠이 보약이지.’ 해피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동그랗게 만 몸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해피, 또 잘 거니? 피라미드로 들어가 버렸네.”
집사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해피가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틀어준 다음 창문을 열었다.
“해피, 저 달 좀 봐! 정말 둥근 보름달이야!”
감흥에 겨운 집사의 말에 해피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피라미드 안에서 몸단장을 하느라 바빴다. 밤외출 준비라도 하는 양 몸 구석구석 털을 꼼꼼하게 고르고 다듬고 있었다.
‘달빛’이 참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날 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삼 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방안 퉁수로 지냈는데 왜 갑자기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터무니없이 모험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행복을 찾아서… ‘도대체 행복이 뭘까? 아무래도 내가 직접 행복을 찾아봐야겠어.’ 해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다.
어쩌면 그날 집사가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에서 사 온 간식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였을까? 그렇지만 간식맛이 변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입맛을 잃은 거지?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그날 밤 거실 창을 통해 바라본 달빛이 유난히 고와서였을지도. 둥글고 탐스러운 노란 달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어떤 욕구를 깨워낸 것일지도. 아니, 한 가지 확실한 건 열린 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집사가 쓰레기를 버리러 가느라 열린 문이 닫히지 않았던 것이다. 현관의 신발 한 짝이 음식쓰레기 국물이 떨어질까 봐 서두르는 집사의 발 끝에 치여 문틈에 끼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사이로 공간이 생긴 것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 작은 틈으로 들어온 바깥세상 냄새가 꽤나 유혹적이었기 때문에.
종합해 보건대 때가 된 것이었다. 떠날 때가. 그렇게 해피는 달 밝은 봄밤에 산책을 나섰다.
“해피, 이리 와! 어디 가는 거야? 해피! 해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뒤늦게 알아챈 집사의 다급한 외침소리를 뒤로 한 채 해피는 달음질쳤다. 작은 길을 건너 좁은 골목으로 숨었다가 또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좁은 골목 안에 더 좁은 골목이 있고 그 골목을 빠져나가면 다른 길이 나왔다. 골목이 많아 도망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래된 동네의 좁은 길 곳곳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는 몸을 숨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내가 사는 동네가 이렇게 멋진 곳이었다고?’ 들뜬 기분에 해피의 꼬리가 저절로 씰룩거렸다.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해피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어느 순간 집사를 완전히 따돌리고 자유의 몸이 된 해피는 한숨을 돌린 후 몸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집사의 외침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듯했지만 걱정이나 죄책감은 딱히 없었다. 일탈의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다.
구부러진 비탈길을 따라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문이 닫힌 집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낮은 담 안으로 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집도 있었고 또 어떤 집은 현관문이 열린 채여서 안의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다.
선선한 바람과 온갖 냄새들이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봄밤의 향기는 진하고 달콤했다. 꽃냄새와 나무 냄새, 흙냄새, 하수구 냄새, 휘발유 냄새, 알 수 없는 음식 냄새… 해피는 코를 벌룸거리며 냄새들을 분별하면서 어슬렁어슬렁 골목을 걸어 내려갔다. 달이 밝아선지 늦은 밤인데도 동네가 환했다.
‘해피! 해피!’ 집사의 목소리가 이제는 멀리서 꿈결처럼 아스라이 들렸다. 해피는 안심하고 내리막길을 다시 내려갔다.
“킁킁 이건 무슨 냄새지?”
어지러운 꽃향기 속에서 뭔가 익숙지 않은 날 것 냄새가 났다.
“냐오오옹! 넌 누구냐?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냐?”
벚나무가 서 있는 골목 모퉁이에서 커다란 회색 고양이가 불쑥 튀어나오며 목쉰 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바람에 물고 있던 고깃덩어리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뭐라고? 개뼉다구? 그게 무슨 소리야?”
해피가 깜짝 놀라 뒤로 멈칫 물러서며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뭐 그런 소리지. 우리말을 모르는 거 보니 넌 우리 구역 아이가 아니구나!”
어둠 속에서 회색 고양이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놀람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구역은 모르겠고 나는 저 윗동네에 살아. 이름은 해피.”
“해피?”
“응. 행복하다는 뜻이래.”
“그건 나도 알아. 내 생일이면 우리 집사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불러 주거든. 그런데 가끔 윗동네에 원정을 가기도 하는데 너 같은 호랑이무늬는 본 적이 없는데!”
“그럴 거야.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집을 나왔으니까.”
“뭐? 가출을 했다고? 그러니까 집고양이란 소리네! 근데 요람에서 뒹굴며 편히 쉴 시간에 왜 집을 나왔어?”
회색 고양이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해피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물었다.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에 가려고.”
“뭐?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 고행점에 간다고?”
회색 고양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얘 좀 봐라. 하룻강아지 아니 하룻고양이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너 거기가 어떤 덴지 알고 하는 소리야 지금?”
“고양이들의 행복을 위한 상품을 파는 곳 아니야?”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그걸 모르는 고양이가 어딨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거긴 고양이 입장금지야, 알아?”
“그건 나도 알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긴 왜 몰라? 쇼핑 같은 건 집사의 일이란 말이지. 그러니 우리가 힘들게 거기 갈 필요가 없는 거지. 그런데? 그런 줄 알면서도 왜 굳이 거길 가려하는데?”
“그냥 난 행복이 뭔지 좀 알고 싶어. 오늘 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혹시 고양이들의 행복백화점에 가면 그걸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야, 너 되게 웃기는 아이구나! 행복이 뭐 대단한 거라고 그래? 다른 건 모르겠고 넌 먹을 복이 있는 건 확실하다. 뭐니뭐니해도 복 중에 최고 복은 먹을 복이지. 고기 한 점 먹을래? 이 구역 친구들은 내가 고기를 주면 다 행복해하던데… 난 정육점 고양이 육점이야. 하지만 친구들은 날 비건이라 부르지. 고기를 안 먹는다는 뜻이래.”
“왜? 왜 고기를 안 먹어?”
“모르겠어.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정육점 진열장 가득 진열된 고깃덩어리들을 보는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어쩌면 인심 후한 집사 덕분에 어려서부터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질려버렸는지도 몰라. 어쨌거나 그때부터 나는 집사가 주는 고기를 주변 친구들한테 양보하고 나누기 시작했어.”
“넌 착한 고양이구나!”
“착한 고양이?!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나눔을 실천한다고나 할까. 난 나눠주는 행복이 있고 친구들은 얻어먹는 행복을 누리고, 이석일조 아니 일석이조 아냐? 묘생 뭐 별 거 있냐? 배부르고 등따순데 더 이상 무슨 행복이 필요해, 안 그래?”
회색 고양이가 이를 드러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우리 묘생에서 먹는 게 다는 아니잖아.”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고행점에 가겠다는 건 너무 무모한 생각인 것 같은데!”
“맞아. 난 무모한 고양이야. 난 원래부터 좀 그랬어.”
해피가 순순히 인정을 했다.
“세상엔 별난 고양이들도 많다더니… 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아마 우리 구역 고양이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애는 하나도 없을 걸?”
비건이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우리 고양이들처럼 생각을 다 안 드러내는 족속도 없을 테니까.”
“어쨌든 난 그래. 고행점에 대해 알고 싶으면 칸슈에게 가봐. 저 큰길 너머 도서관에 사는 고양이야. 하루 종일 책에 묻혀 살아. 그래서 이름도 칸슈야. 중국말을 배우는 도서관 집사가 지어준 이름인데 ‘책을 본다’는 뜻이래. 딱 어울리는 이름 아니니? 내 이름 비건이도 칸슈가 지어줬어. 우리끼리 부르는 이름이지만 난 그 이름이 정말 맘에 들어. 우리 정육점 집사한텐 좀 미안한 얘기지만, 육점이란 이름은 좀 그렇잖아! 난 점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비건이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새삼스레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그사이 없던 점이 생기기라도 했나 확인하는 듯하더니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안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칸슈는 정말 모르는 거 빼곤 다 아는 만물박사야. 아니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척척박사야. 내가 지금까지 물어본 건 뭐든지 다 대답을 한 걸 보면.”
“그래? 잘됐다. 그럼 어서 가봐야겠다. 고행점에 어떻게 가는지 물어봐야겠어. 고마워.”
급히 떠나려는 해피를 비건이가 불렀다.
“잠깐! 고기 한 점 먹고 가지 그래? 내가 줄 건 그거밖에 없는데…”
“고맙지만 난 배가 안 고파.”
“그래도 먼 여행을 떠나려면 든든히 먹어두는 게 좋을 텐데… ‘백두산도 식후경이다’ 뭐 그런 말도 있잖아. 아니다. ‘백화점도 식후경이다’인가? 난 칸슈처럼 머리가 좋지 않은가 봐. 기억력이 안 좋아. 금방 들은 걸 까먹거나 잘못 기억해서 박죽뒤죽 아니 뒤죽박죽이 되거나 해. 그래도 친구들한테 고기를 나눠줄 순서는 잘 기억해. 처음에 친구들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거든. 칸슈한테 물어봤더니 그럴 땐 가나다순이 최고래. 칸슈가 가르쳐준 대로 내가 이름에 따라 순서를 정해 주고 나서 평화가 찾아왔지.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너에게 나눠줄 수 있어.”
그런 날고기를 먹어본 적도 없는 데다 그날 저녁 제일 좋아하던 연어 간식을 남길 정도로 갑작스레 입맛을 잃은 해피에게 붉은 고깃덩어리는 오히려 비위를 상하게 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친구의 호의를 거절하기 미안해서 해피는 최대한 정중하게 사양하려 애썼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렇지만 다른 친구 간식을 뺏고 싶지 않아. 그럼 이만 가볼게.”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사양하다니… 우리 정육점에서 제일 좋은 1등급 한우 안심인데…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집사가 특별히 챙겨준 거라구. 네가 오늘의 행운의 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구나! 그럼 다른 친구를 기다려봐야겠다. 어쨌거나 길을 나섰으니 좋은 성과 있길 바랄게. 고행점은 어마무시하게 크고 높은 빌딩이라던데…”
비건이는 고깃덩어리를 물고 다시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해피는 처음 만난 고양이를 통해 동네 인심이 사납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좀 안심이 되었다. 무작정 집을 나왔지만 정작 바깥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덜컹덜컹 차소리가 났다. 청소차가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차가 멈출 때마다 뒤에 타고 있던 미화원이 내려서 집 앞에 놓인 쓰레기 더미들을 짐칸에 던져 넣었다. 해피는 어느 2층집 계단 아래 숨어서 청소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이건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향기인 걸.’ 청소차가 남긴 시큼하고 쿰쿰한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코를 벌룸거리고 있던 해피는 천천히 길을 건넜다.
“냐아옹 냐옹 야아옹 야옹…”
어디선가 청아한 음성의 노래소리가 들렸다. 입구에 가로등이 서있는 작은 골목길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해피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