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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Dec 18. 2019

거북이도 끝까지 달린다


42.195KM를 달려보고 싶었다. 마음의 상처를 털어버리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가 제법 익숙한 일상이 된 때였다. 일주일에 삼일 정도를 혼자 공원에 나가 달리고 주말에는 달리기 코칭을 받으러 갔다. 어느 날은 운동장 트랙을 돌았고, 무지막지한 오르막을 뛰어올라가기도 했다. 매 순간이 고비였다.

좀 더 잘 달리고 싶다는 마음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훈련에 참가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아차산에 모여 산길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 훈련이 있었다. 평지에서의 달리기도 쉽지 않은데 산에서 달린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를 마실 생각에 좀 들뜨기도 했던 것 같다.

아차산 초입의 공원에는 열명이 조금 넘는 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감독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가벼운 준비운동을 마쳤다. 달리기 규칙은 간단하다. 속도가 느린 여자 참가자들부터 산을 오른다.  걷지 않고 뛰어서 2킬로미터의 트래킹 코스를 돈 후 다시 출발한 자리로 돌아오면 된다.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여자 회원들이 먼저 출발했다. 시작부터 눈 앞에 가파른 오르막이 나타났다.

‘아차, 여기 산이지’

완만한 둘레길에서의 달리기를 예상했던 나는 두려워졌다. 등산이라면 걸어서 올라가도 숨이 차올라 스틱이 없으면 출발할 엄두도 못 내는데 달려서 산을 오른다니 도저히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고난이 시작되었다.

200미터쯤 이어진 오르막을 겨우 달리고 나니 완만한 산길이 나타났다. 살았다 싶었다. 오르막길에서 바닥나버린 에너지를 채울 겸 다른 회원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쉬어 이번에는 한 줄로 줄을 맞춰 달리기 시작했다. 바위를 넘고 시냇물도 건넜다. 아침의 숲 속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지나고 대부분은 울퉁불퉁한 흙바닥과 바위와 싸우는 심정이었다.


맞은편에서 등산객들이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응원을 받아놓고 주저앉을 수는 없어서 있는 힘을 쥐어짜며 달렸다. 이제 겨우 1킬로미터쯤 달렸는데 도저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내 생에를 통틀어 두 다리가 가장 무거웠던 때를 말하라면 바로 이날이었다.

도저히 더는 달릴 수가 없어서 대열을 이탈해 속도를 늦추었다.

‘걷지만 않으면 된다’

달리기를 할 때의 내 목표였다. 몇 시간이 걸려도 걷지만 않으면 만족했다. 느리게 뛰어도 뛰다 보면 결승점이 보였고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이날은 속도를 늦추었는데도 힘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이제는 같이 달리던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았다. 나무가 빽빽한 산길을 혼자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땅이 꺼지도록 걷고 있는데 저기 앞에 달리기 모임 회원 한 명이 보였다.

‘나만큼 느린 사람이 또 있구나’

근처까지 가니 같이 달리자고 했다. 걷는 동안 힘이 조금 채워져 다시 천천히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는 낙오된 나를 끝까지 완주시키려고 기다리던 중이라고 했다. 걷지만 말고 천천히 달려보자고 해서 발맞춰 달렸다. 우리 옆으로 등산객들이 스틱을 탁탁 찍으며 앞질러 갔다. 거북이 속도로 달리는 나는 구세주 같은 회원님의 도움으로 출발 지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수많은 달리기 중 그날의 달리기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다. 처음으로 달리기를 포기하고 걸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내 체력이 정말 저질이라는 걸 깨달은 날이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험란한 길을 같이 달리는 사람이 있으니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거북이 속도이더라도 언젠가는 결승점이 보인다는 진리는 그날도 통했다. 가장 좋았던 이유는 그날 이후 한 시간 정도 달리는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다. 칠십 살이 되어도 글을 쓰고 있다면 좋겠다.


요즘은 자주 오르막을 달리는 것처럼 힘겨운 순간을 마주한다. 벌써부터 글감이 막막하기도 하고, 나만의 문체를 찾는 일도 힘겹다. 매일 쓰다 보니 생각이 충분히 숙성될 겨를 없이 날것처럼 미숙한 글을 발행하기도 한다. 이 오르막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오르막을 다 올라도 바위를 만날 것이고, 글 쓰기는 매 순간이 고비일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오늘의 이 험난한 코스를 하나 넘어서면 내일 조금 더 좋아질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나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 먹먹한 작가님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거북이 속도이더라도 서로 격려하며 함께 나아가면 된다. 글쓰기가 고독하다가도 누군가 의지가 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꾸준히 글을 쓰며 달려 나가는 날을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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