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지났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새해 인사를 건넨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새해 아침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아이와 연습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했다.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주의 재롱을 보며 새해를 맞았다.
가족 외에는 새해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1월 1일 아침 눈 떠서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면 가득하던 안부 인사들도 거의 없다. 의례적으로라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회사 상사들과 협력사 담당자들 마저도 직장 생활을 졸업한 후에는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새해 안부를 묻지 않아 새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원래가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에 무딘 사람이다. 오죽하면 부모님이 내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먼저 걸어오는 일도 많았다. 안부를 확인하지 않는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동생에게 다른 가족들에게 부모님의 근황을 전해 듣다 보니 나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먼저 전화를 걸어와 '딸 살아있니?' 물으시면 '무소식이 희소식이에요'라고 답하며 무안함을 웃음으로 대신하곤 했다.
자려고 누워 스마트폰으로 SNS를 확인한다. 후배의 백일 지난 아이가 드디어 뒤집기에 성공한 장면을 영상으로 확인한다. 대학시절 친구는 오래 살던 집에서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갔다. 가까이 지내던 회사 동료는 새해를 맞아 이직을 했다. 목소리를 듣고 시시콜콜 사는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 뿐 누가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 훤히 알고 있다. 다들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몇 달이 지나고 어쩌면 몇 년 후 어느 지인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제 점심에 네가 이태원 태국 식당에서 팟타이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문득 SNS의 뽀샤시한 사진 뒤에 드러나지 않은 근황들이 궁금해졌다. 아이가 백일 무렵 내 우울함은 극에 달했었는데 후배는 잘 견뎌내고 있을까. 친구는 잠자리만 바뀌어도 잠을 설쳤는데 이사한 집에선 잘 자고 잘 먹을까. 그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알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은 채 살아간다.
알고는 있지만 마음 쓰지 않는 것. 무소식이 희소식인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속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마음 쓸 일이 없다. 돌아보지 않았으니 돌볼 일도 없고. 마음이 헛헛한 것은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전화를 걸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 스마트폰의 통화목록에는 남편과 가족이 순서만 바꾸어 반복된다. 보는 것만 하지 말고 생각 난 김에 전화 한 통 걸어야겠다. 목소리 한번 듣는 일에도 용기를 내야 할 만큼 마음이 시들해졌다. 새해의 헛헛함을 일 년 내내 천천히 다독여야겠다. 용기를 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