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곱슬머리를 정리하러 미용실에 갔다. 내가 주로 가는 미용실은 1인 샵이다. 디자이너 한 명이 운영하며 예약한 손님만을 받는다. 내가 파마를 예약한 날은 그 시간만큼은 나 혼자 모든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미용실은 갔다 하면 반나절은 족히 걸려 큰 맘먹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머리숱도 많고 곱슬한 내 머리를 손질하는데 애를 먹는 디자이너와 단 둘이 그 오랜 시간을 보내려면 작은 노력이 필요하다.
적당한 대화를 위한 노력이다. 아무 말 안 하고 몇 시간을 보내자면 그보다 어색할 수가 없다. 버젓이 내 뒤에 서 있는 디자이너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하듯 온갖 얘기를 쏟아 놓기에도 애매하다. 사실 만난 지 몇 번 되지 않고, 헤어 디자이너와 고객으로 만난 사이다 보니 좋든 싫든 내 말에 맞장구쳐야 할 그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적당히 내 머리에 대한 사연과 고민을 얘기하는 정도에서 가벼운 대화만을 이어간다. 나머지의 공백은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거나 졸리면 눈을 감고 잠깐 졸 때도 있다.
오늘은 좀 달랐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가위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저는 가위 하나만 들고 세계를 여행하고 싶었어요”.”와! 멋지네요. “
“외국은 머리 다듬는 비용이 비싸잖아요. 저는 머리 다듬는 기술이 있으니 세계 어디를 여행해도 그곳에서 머물 경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
“그래서 여행을 했어요?”
“아니요. 꿈만 꿨어요. 사실 겁이 많아서.....”
“아......”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그녀가 가위를 들고 세계를 여행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유럽의 햇살 좋은 광장 한 귀퉁이에서 할아버지의 머리를 자르는 모습, 몽골의 초원 위에 의자를 놓고 소녀의 머리를 땋는 모습, 케이팝에 빠진 어느 소녀에겐 한국 연예인 스타일의 커트를 해주는 모습. 가는 곳마다 가위 하나로 수만 가지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바이올린도 아니고, 스케치북과 연필도 아닌 가위라니.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여행의 풍경을 혼자 상상하며 부럽기까지 했다.
“언젠가 꼭 가볼 생각이에요. “
“네. 세상이 다 무시무시한 사건들만 가득한 곳은 아니잖아요. 저는 벌써 너무 부러워요.”
디자이너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또 다른 상상을 펼쳤다. 어쩌면 나도 필라테스 매트 한 장을 들고 세계를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석양이 내려앉는 발리의 해변에서, 뉴욕 어느 골목의 스튜디오에서, 프라하의 강물이 내려다 보이는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그곳의 사람들과 뒤섞여 운동하며 여행하며 우정을 쌓고 싶었다.
상상 속으로 세계를 몇 바퀴 돌았더니 머리가 매끄럽게 정리되었다. 세계 여행 비용을 카드로 결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