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분의 삶

by 우비

이 이야기는 사진 한 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아빠의 오래된 앨범 속에서 본 사진이다. 엄마, 아빠, 나, 범이 우리 네 식구는 어린 시절 살던 할머니 댁 마당에 서 있다. 사진 속 아빠는 셔츠에 나팔바지를 입고 존 레논처럼 장발에 곱슬머리를 휘날리고 있다. 흰 블라우스를 입은 단발머리의 나를 안은채로 서 있다. 엄마는 갈색 블라우스와 몸빼바지차림이다. 아빠만큼 긴 파마머리를 하고 쫄쫄이 니트를 입은 동생을 안고 있다. 배경의 마당 가운데 파란 돗자리가 깔려있다. 돗자리 위에 콩 나뭇대가 쌓인 걸로 보아 한창 콩 타작을 하다 찍은 사진인 듯하다. 내가 대여섯 살 즈음이라면 엄마는 아직 이십대 후반일 것이다. 젊고 싱그러운 얼굴을 덮은 갈색 피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지 말하는 듯하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우리 식구는 열세 명이었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들과 삼촌, 나랑 동생 범이, 그리고 아랫채에 굴 양식 일을 돕는 삼촌들이 한집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집의 유일한 며느리였다. 엄마를 찾으면 늘 부엌이나 마당에 있었고, 집이 아니라면 마늘 밭이나, 굴 양식장에 있었다. 아직 스물 여덟 즈음이던 엄마는 대체 몇 인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을까. 지금 엄마가 살아계셔서 그 시절에는 어떻게 그리 고된 살림을 견뎌내었는가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실까. 엄마의 담담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겠지.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율이가 아파 입원을 했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며칠 항생제 주사를 맞고 있어서인지 아이는 새벽부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두 돌도 안된 아기가 강한 주사를 며칠째 연달아 맞으니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엉덩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바지를 갈아입혔다. 아침 식사시간이 되기까지 두 시간여 동안 여섯 번이나 똑같은 일들을 반복하던 중이었다. 여섯 번째쯤 되니 율이도 엄마가 자꾸 안아서 씻기고 옷 입히는 게 싫었을 것이다. 기저귀를 안 하겠다고 버티며 울기 시작했다. 밤새 못 잔 피로와 아침 내내 쌓인 피곤함에 마음까지 지쳐가기 시작했다.


율아 제발….


한숨 쉬듯 말을 토해내는 순간 아이의 오줌발이 날아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적셨다. 순간 얼음이 되었다. 보통 날이었다면 일단 3초 정도 스톱한 후 크게 숨 한번 쉬고 해야 할 일부터 착착 해내었을 것이다. 아이를 다시 씻기고, 닦이고, 기저귀와 바지를 입힌 후 내 옷을 갈아입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보송한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수도 없이 경험했던 돌발 상황이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그래 다시 씻어보자 했을 테지만 며칠밤 잠을 설치고 피곤에 절은 그날은 그게 되질 않았다.


율아, 엄마 너무 힘이 들어… 제발 좀….


그 시간 병실 청소를 위해 아이 할머니 벌의 환경미화원 아주머니가 병실에 들어와 한쪽에서 한창 바닥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하이고, 애 하나 키우면서 힘이 들어요? 나는 아홉을 키웠어!


아주머니의 질책에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아이의 기저귀를 입혔다. 육체가 힘든 것은 순식간이고 이 순간만 잘 이겨내면 되는 것이다. 육아의 매 순간이 그랬다. 하지만 그런 인내로도 평화로워지지 않는 날이 있었다. 할머니의 십 인분 인생에 비하면 갓난 아들 하나 키우는 나의 한숨은 가벼운 것이었을까. 순간 엄살 피우는 철없어 보이는 애 엄마가 된 나는 그렇게 좀 더 울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병원으로 퇴근한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여태 내가 하고싶은 건 마음 먹은 대로 다 됐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돼. 애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워. 그래도 어찌어찌 하겠는데 이상하게 열심히 해도 답답해. 생각해보니까 여태 나는 1인분 내 인생만 잘 살면 됐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3인분을 살아야 하잖아.”


“왜, 3인분이야?”


“잘 들어 봐. 우선 율이 엄마로 살아야 하지. 이것만 해도 하루가 빡빡해. 그리고 자기 와이프로 살아야 하잖아. 알아서 잘 해도 당신은 손이 좀 많이 가는 스타일이야. “


“그리고 또 1인분은?”


“내 인생. 율이 엄마도 좋고, 당신 아내도 좋은데 내 삶도 살고싶어. 다이어트도 하고, 공부도 하고싶어. 흐엉”


혼란의 화근은 ‘원래의 나’였다. 아이가 자라는 물리적인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 기간동안 육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가족이 도와주고, 베이비시터를 써도 엄마의 몫은 엄마가 감당해야 한다. 휴먼 다큐 같던 평온한 나날에 본연의 내가 꿈틀대자 현실에 대한 괴로움이 커져같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2인분의 삶만으로도 하루가 빡빡했다. 하지만 이대로 본연의 나를 눌러 놓을 수도 없었다. 결국 3인분을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오롯이 1인분의 존재감을 발산하는 율이 엄마와 괜찮은 아내, 그리고 멈추고 싶지 않은 본래의 나.

우리 세 식구의 웃음, 눈물 콧물이 내 손에 달렸다. 험난함이 예상되는 3인분의 시절이 부디 시트콤처럼 해피엔딩의 나날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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