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늘어난 티셔츠를 리스펙 해

by 우비

남편은 종일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갓난 아이가 자라는 속도는 눈에 보일만큼 빨라 한 순간이라도 더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서이다. 나는 예쁜 표정을 지을 기운도 손가락으로 그 흔한 V를 그릴 여유도 없다. 아직 신생아인 율이와 종일 방안에서 씨름하며 섬처럼 둥둥 뜬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남편이 찍어 놓은 사진 속의 율이는 빛난다. 율이 옆에는 보모인지 엄마인지 도무지 사진의 주인공으로 봐주기 힘든 퀭하고 후줄근한 내가 있었다. 남편은 여러 장의 사진 중 한 장을 골라 예쁘다며 내민다. 어제의 나와 율이다.


처음으로 율이 목욕을 시키던 날. 인형처럼 작은 아이를 욕조에 담가 씻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동영상으로 여러번 보며 순서와 방법을 외웠지만 실전은 달랐다. 작은 등을 받치고, 바둥거리는 팔 다리를 조심스럽게 닦였다. 아직 말랑말랑한 아이 머리를 감기는 것은 두려웠다. 다행히 율이는 기분이 좋은지 신나게 팔 다리를 파닥거렸다. 나는 능숙한척 했지만 매 순간이 너무나 떨렸다. 샴푸통은 넘어지고 거실은 물바다가 되었다. 율이를 씻겼는데 나도 물 범벅이 되었다.


사진 속에는 반짝 눈 떠 아빠의 카메라를 보는 율이. 율이를 안은 내가 있다. 물로 범벅이 된 얼굴과 퀭하게 흘러내린 다크서클. 초록색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나. 사진 속의 나는 낯설다. 예쁨이라고는 일도 없다.


‘엄마로 사느라 이렇게 못생기고 후줄근해져야 하나?’


밥도 대충 때우고 옷도 대충 꺼내 입는 내 모습이 처량했다. 태교를 하며 읽었던 프랑스식 육아법에는 옷 잘 입는 프랑스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프랑스 엄마의 외출복은 아이를 한 손에 바게트 빵처럼 안은채 빳빳하게 깃을 새운 트렌치 코트와 하이힐이랬다. 프랑스 엄마의 대범함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이힐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나도 멋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집에서는 목 늘어난 티서츠, 외출할 땐 구김이 덜한 티셔츠를 입는 나. 몇날 며칠을 변화 없이 망가져가는 외모를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었다. 옷장에는 멋진 옷들이 날 좀 입어달라며 어깨를 겨루고 있다. 하늘하늘한 쉬폰 플라우스도, 각 잡힌 트렌치 코트도. 모두가 그림의 떡이다. 저 날렵한 옷들을 소화하려면 몸무게가 적어도 6킬로그램은 더 빠져야 한다. 그보다 흘러내리는 뱃살은 수습이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결국 나는 또다시 티셔츠를 꺼내겠지.


생각해보니 한 때 티셔츠라면 질리도록 입던 시절이 있었다. 직장 다니던 삼십대 중반. 마란톤에 도전해보고 싶어 매일 저녁 한강을 따라 달리기를 했다. 무릎을 꽉 잡아줄 레깅스와 제일 편한 운동용 티셔츠를 골라입고 저녁마다 뛰러 나갔다. 매일 5km쯤 조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은 땀 범벅이었다. 얼굴도, 티셔츠도 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좋았다. 러닝의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순간에는 자기애가 폭발한다. 땀에 절은 티셔츠를 입은 내가 너무나 멋지고 좋았다.


‘그날의 티셔츠는 멋졌는데 지금의 티셔츠는 왜 싫을까?’

늘 아이를 안아야 하는 엄마.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멋스러움 보다는 아이를 생각했다. 여린 맨살이 닿을 옷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부드러운 면티셔츠로 골라입었다. 러닝을 하기 위해 가볍고 편한 티셔츠를 골랐던 것처럼.


그러고보니 티셔츠가 엄마의 유니폼이었다.


어제의 목 늘어난 옷과 다크서클에 대해 생각했다. 예쁨이라고는 일도 없는. 서글프면서도 한편으로는 괜찮았다. 티셔츠가 멘붕에 빠진 엄마의 상징이 아니라 프로 엄마의 유니폼이라 생각하니 그런데로 봐줄만 한 것도 같았다. 프랑스 엄마의 시크함이 트렌치코트라면 나도 쿨 시크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산 엄마다. 야구장, 자갈치 시장, 해운대 바다에서 갈고 닦은 마, 고마해라, 쫌이 내 피에도 있다. 이 세 단어면 만사 오케이지 뭐. 한강변을 따라 5km를 달리며 나의 멋을 발산하던 날의 티셔츠처럼, 빳빳하게 깃세운 트렌치 코트로 멋을 뽐내는 프랑스 엄마처럼,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땀내나는 티셔츠로 율이 엄마의 시절을 만끽해야지. 이게 엄마의 멋이다. 오늘은 어제의 다크서클과 목 늘어난 티셔츠를 리스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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