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1인분 추가요

내가 알던 나의 등장

by 우비


열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혼자 방에서 숙제를 하는데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방에 들어가니 엄마가 퉁퉁 부은 눈으로 손에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었다.

“정민이네 가게에 가서 소주 한 병 달라고 해라”

심상치 않은 엄마의 심부름 요청에 터덜터덜 정민이네 가게로 걸어갔다. 술은 분명 나쁜 거라고 했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저녁 늦도록 집에 오지 않는 날마다 엄마가 한 말이었다. 햇볕이 따가워서인지 눈물이 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정민이 엄마는 소주를 사러 온 내게 누가 사 오라더냐 물었다. 엄마가 사 오랬다고 하자 더는 묻지 않고 소주 한 병을 내주었다. 소주를 안고 집으로 걸어오며 생각했다.

‘엄마에게 나쁜 일이 있는 걸까? 그래도 엄마가 소주를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과 달리 뒷날 엄마는 원래의 밝음을 되찾았다. 아침부터 경쾌한 도마질 소리가 났다. 아침 상에 감자볶음, 돼지 두루치기, 잡채가 빽빽이 서로의 접시를 밀치고 있었다. 엄마 생일도 아니고 아빠나, 범이, 내 생일도 아니었다. 심상치 않은 아침상을 시작으로 엄마의 화려한 요리쇼는 시작되었다. 시골에서는 먹기 힘들었던 양념 통닭이며, 폭신한 카스텔라, 맛동산 과자까지 엄마의 손에서 뚝딱뚝딱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특별한 요리를 만들 거야”

밥과 반찬이 아닌 특별한 요리들이 이후에도 이어졌다. 특별한 요리를 만들 때 엄마는 달랐다. 일하고 살림하느라 늘 지쳐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빵 반죽을 하느라 한쪽 팔에 은색 양푼을 끼고 계란 머랭을 만드는 엄마의 손놀림은 김치찌개를 젓던 때와 달랐다. 경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엄마의 나쁜 일이 지나가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주 특별한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한 나날이었다.

육아에 전념한 지 십육 개월쯤 되던 어느 날이다. 거실에 앉아 따뜻한 봄볕이 내려앉은 공원을 바라보았다. 당장 김밥을 말아서 소풍을 가야 할 것만 같은 날씨였다. 잠시 낮에 외출이라도 해볼까 생각하자 율이 기저귀, 보온병, 이유식, 물티슈 챙겨야 할 짐만 한 가방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내 처지에 나들이는 무슨 나들이.’

포기를 하자 우울한 마음이 밀려왔다. 멍하게 창밖을 조금 더 보던 그때 어린날 소주 심부름을 시키던 엄마가 떠올랐다. 날씬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거실에는 늘어난 뱃살과 푸석한 머리를 질끈 묶은 아기 엄마가 있었다. 서핑보드를 저어 파도를 넘어가던 나는 없고 산더미 같은 빨래를 마주한 내가 있었다. 잠을 줄여 공부하고, 배움을 이어가던 내가 아닌 틈만 나면 단 일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 내가 있었다. 그날의 엄마도 십 년 동안 사라졌던 자신을 떠올렸던 게 아닐까. 결혼해 아이 낳고, 살림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내 삶은 어디 갔나 허무했던 게 아닐까.

그제야 엄마가 소주 심부름을 시켰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날 엄마는 일탈을 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났겠지. 내게도 엄마처럼 일탈이 필요한 때가 왔다. 결혼하고 10년이 지나 일탈을 감행한 엄마보다 훨씬 먼저. 율이와 율이 엄마인 나 이전의 오롯한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기로 했다.

1인분 추가의 삶을 결심하자 봄 볕이 조금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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