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숨바꼭질

by 우비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고등학생 때 제일 좋아했던 밴드 자우림의 ‘일탈’이 이렇게나 내 얘기 같다니. 그 시절 파격적인 가사로 이슈가 되었던 노래는 지금 들어도 놀랍다. 그렇다고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 쇼를 하거나,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딘가 도망칠 곳이 필요하다는 가사가 내 이야기 같았다.

육아에 전념하는 나날은 때로는 새장 속 어미새와 아기새 같았다. 어떤 날은 표류한 배 위에 둥둥 떠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막막함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아이가 사랑스러운 것과는 다르게 나를 옥죄는 감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육아를 잘 해낼 줄 알았던 나에게도 위기가 온 것이다. 함께 육아를 시작한 친구들의 복직 소식에 부러움과 우울함이 밀려왔다. 육아와 사회생활이라는 서로 다른 일을 어떻게 병행할까 싶었는데 서로 다르기에 오히려 함께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집 안에서의 나날들이 즐거웠지만 탈출구가 필요했다.

하루 한 시간의 필라테스 수업도 그런 의미에서 탈출구나 마찬가지다. 온전히 내 몸과 싸우는 시간을 보내면 굳어있던 몸만 개운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몸이 조금씩 유연해지고 군살도 줄어드는 것은 분명 즐거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운동 동작중 플랭크라는 자세가 있다. 팔꿈치와 발 끝을 땅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엉덩이를 들어 몸통을 일직선으로 만들어 버티는 동작이다. 이 자세로 오래 버티면 배의 근육이 단련되고 엉덩이와 허벅지, 팔뚝의 근육까지 영향을 준다.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야 하는 고난도의 자세이면서 아주 효과적인 운동법이다. 하지만 1분 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다. 배의 근육이 약하면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온몸을 지탱하는 팔이 연약하면 어깨가 솟구치고 당장이라도 바닥에 엎드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렵다. 그런데 초보자라도 이 자세를 잘 해내는 방법이 있다. 몸이 아니라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필라테스 호흡법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다 보면 잠시나마 몸의 고통을 잊게된다. 호흡은 운동의 효과를 좋게 하는 방법이자 고통의 탈출구이기도 하다.


육아를 하는 시간도 호흡이 필요했다.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근육을 키워 줄 것 같았고 잠시의 고달픔도 견딜 수 있게 해 줄 것만 같았다.

육아의 늪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어느 날 동생 범이에게 전화가 왔다.

“누나도 글을 한번 써보면 어때?”
“이 상황에 무슨 글이야~ 그리고 일기조차 안 쓴 지 몇 년째인데 글을 어떻게 써~”

대답은 시큰둥하게 했지만 그 순간 식탁 한쪽 구석에 먼지 쌓인 노트북이 보였다. 율이 낮잠 시간 틈틈이 일을 좀 해볼까 싶어 구입한 노트북이었다. 열심히 뭔가 해보자 의욕은 앞섰지만 잘 되지 않아 은행 업무를 볼 때나 열어볼까 식탁 구석에 놓인 채로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글 쓰기가 가능한 온갖 이유들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밤과 새벽은 온전히 내 시간이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 한 시간이라도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율이를 재우며 함께 일찍 잠들고 새벽에 알람을 맞추었다.

날숨에 갈비뼈 사이를 조아 몸통의 공기를 밖으로 빼내는 것처럼 글을 썼다. 쓴다기보다 토해낸다에 가까운 글쓰기였다. 어느 날은 율이의 귀여움에 대하여 썼다. 어떤 날은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 쓰기도 했다. 오랜만에 써보는 수필은 늘 단어가 부족했다. 부끄러운 필력에 써 놓은 글을 읽어보면 손대고 싶은 곳 투성이었다. 노트북 디 드라이브에 만든 수필 폴더에는 나의 부족한 날숨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율이가 밤잠을 깨기 전에 한 편의 글을 완성해야 했다. 글의 숨은 늘 가팠다. 어느 날은 두 시간을 공들여 썼으며, 어느 날은 일찍 깬 율이가 방 문 여는 소리에 후다닥 글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율이가 깨면 글을 쓰던 나는 현실의 엄마로 돌아온다. 알싸한 새벽 공기 속에서 밤새 잘 자고 일어난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누룽지를 끓이고 보리차도 데운다. 이전의 피곤하던 아침은 어느새 잊혔다.
엄마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게 일탈이란 걸 글 속에 숨었다 돌아오면 알게 되었다. 매일 새벽 글 속으로 숨었다가 율이가 엄마를 찾으면 일상으로 돌아왔다. 숨바꼭질 같은 나날이었다. 일상이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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