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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02. 2019

답이 없을 땐 미용실에 가자!



호기롭게 시작한 달리는 진전이 없었다. 주말마다 어린이대공원의 산책길을 달렸지만 여전히 남들의 걷는 속도보다 느렸다. 느려 터진 달리기는 답이 없었다. 점점 사람이 많은 시간은 피하게 되었다.

새벽에 일찍 눈 떠 공원으로 나간 어느 날이었다. 이제 막 동이 튼 공원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산책을 하거나 나들이를 나온 사람은 시간이 시간인지라 없었다. 대신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연세가 있으신 부모님 또래였다. 공원의 광장에서는 신나는 댄스음악과 함께 에어로빅이 한창이었다.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택견인지 명상인지 단체로 무술 비슷한 동작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간간히 달리기를 하는 아저씨들을 발견한 순간은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대부분 마라톤 중계방송에서 볼 수 있는 옷차림이었다. 가벼운 티셔츠에 짧은 러닝 팬츠, 이마에는 땀 흡수가 되는 밴드를,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아저씨들 뒤를 따라 달려야겠어. 그러면 속도가 좀 빨라지겠지?’

기가 막힌 생각에 신이나 얼른 발목, 무릎 돌리기를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칭을 하며 달려가는 사람들을 볼 때는 나도 저 정도 속도는 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목에 걸려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결국 아저씨 뒤따라 달리기를 포기하고 걷기 시작했다. 달리기에 뭐 요령이 있을까 싶었는데 오래 달리려면 어떤 비법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동호회라도 가입해서 비법을 배워볼까?’

좋은 생각이긴 했지만 마라톤 동호회는 왠지 엄마 아빠 등산모임이 연상되었다. 회원의 대부분이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 들일 텐데 그 틈에서 차마 살갑게 어울려 비법을 배울 자신이 없었다. 얼른 생각을 접었다.

‘기분도 꿀꿀한데 미용실이나 가자’

러닝이 아닌 걷기를 마치고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미용실에 갔다. 울적한 마음을 날려버리는 데는 스타일 변신 만한 것이 없다. 머리에 동글한 파마 롯뜨를 잔뜩 말고 시간을 보내며 잡지를 넘겼다. 잡지는 몇 달에 한번 미용실에 올 때마다 몰아서 보곤 했다. 여름이 막 시작되는 달의 잡지에는 계절 따라 유행하는 옷 스타일도 나오고, 올여름 돋보이는 립스틱 컬러와 연예인들의 가십거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미적 호기심과 세상 쓸모없는 연예인 개인사 걱정에 푹 빠져 있었다.

한참 페이지를 넘기는데 눈이 짜릿해지는 기사가 있었다. 마라톤 동호회에 대한 기사였다. 동호회 회원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사람들은 한강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직업이 모델인 직장 동호회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훤칠한 미남미녀가 가득했다. 동호회 이름마저 멋졌다. 마라톤 동호회가 아닌 ‘러닝 클럽’이었다. 이런 클럽이라면 야근을 마친 새벽에라도 뛰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연륜과 경험이 많은 훌륭한 마라톤 동호회도 많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과 함께 달리며 우정을 쌓고 싶었다. 멋진 친구들에게 달리기 비법까지 배울 생각에 설렜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한강을 따라 5km 정도는 거뜬히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새벽의 절망은 어느새 잊히고 다시 달리기에 대한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어린이대공원에서 떨어진 자신감을 미용실에서 되찾았다. 되려니까 이렇게 되는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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