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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05. 2019

마라톤은 외로운 경기가 아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혼자 운동을 하는 날이 많았다. 혼자 한강을 달리고, 어린이대공원을 달리고, 서울숲을 달렸다. 매주 하루는 동호회의 함께 달리기 모임에 나갔다. 혼자는 오롯이 나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고 함께 달릴 때는 같은 고통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다.

봄이 한창일 때 시작한 달리기는 어느새 그 해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10월, 11월에는 전국에서 매주 다양한 마라톤 축제가 열린다. 달리기를 하기에 그만큼 좋은 날씨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면 제아무리 따뜻한 남쪽 나라조차도 얇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달리기는 무리가 있다. 11월의 끝자락 대회들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동호회의 함께 달리기 모임을 나간 날이었다. 전국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섭렵하고 온 회원들은 그해의 마지막 마라톤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고 했다. 바로 역전 마라톤 대회이다. 42.195km를 다섯 명의 주자가 나누어 달리는 릴레이 경기이다.  남자 세 명에 여자 두 명이  한 팀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동호회는 역전 마라톤 대회를 위해 에이스팀 선발전을 치른다고 했다. 모든 회원이 운동장 트렉에서 5km 달린 후 기록을 잰다. 기록으로 가장 빠른 사람 5명을 에이스팀으로 선발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팀을 만들어 출전하면 된다고 했다.

초등학생이던 우비는 학교 대표선수로 달리기 계주에 출전해 기를 쓰고 달렸지만 서른다섯 살의 우비는 더 이상 빨리 달리지 않기로 했다. 결국 에이스팀에 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2위 그룹의 팀에도 끼지 못하고 팀원이 모자라 고전하는 기록상 꼴찌 그룹에 겨우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대회 출전을 위해 참가 팀명도 제출했다. 에이스, 다크호스 같이 이름만 들어도 우승을 향해 이를 갈 것 같은 이름은 감히 생각지도 않았다. 우리의 주제에 맞게 참가에 의의를 둔 깜찍한 이름을 내걸었다. 


‘가다 서다 구간정체팀’

대회까지 한 달이 남아 있었다. 분명 참여에 의의를 두자고 했는데 이상한 전의가 불타오른 건 이때부터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새벽에 눈 뜨면 어린이대공원으로 달려가 홀로 달리기 연습을 했다. 내가 달리는 구간은 거리가 비교적 짧아서 지구력보다는 속도전이 필요했다. 그맘때 1킬로미터를 6분 대에 달리고 있었다. 나는 욕심을 좀 내어 5분대까지 기록을 단축시킬 요량이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오르막 달리기 연습도 하고, 빨리 뛰었다가 천천히 뛰다가를 반복하는 인터벌 훈련도 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팀이지만 우리도 도전자 중 하나였다. 마음이 잘 맞았는지 나 말고도 우리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무리한 훈련으로 발목이 멀쩡한 날이 없었다. 정형외과를 찾는 날도 잦았다. 마라톤 100회 완주의 기록을 가진 정형외과 원장님은 경고를 날렸다. 


"이 발목으로 올 겨울은 달릴 생각 말고 쉬세요."

 나의 고집은 그보다 더 완고했다. 팀으로 달리는 마라톤 풀코스라는 매력적인 경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대회날 다리를 절뚝거리며 경기가 시작되는 잠실 올림픽 경기장으로 갔다. 대회에 참여하는 수십 개의 팀이 저마다의 부스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겨울이 막 시작되는 시기인지라 두꺼운 점퍼를 입었는데도 입김이 용처럼 뿜어져 나왔다. 비록 지금은 절뚝거리는 다리지만 내가 출전하는 구간의  3.5km 거리는 번개처럼 달릴 수 있을 거라 굳게 마음먹었다. 선수들은 출발지에 모여서 첫 주자를 응원한다. 출발 신호탄이 울리자 소나기 같은 함성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첫 주자들이 저마다의 팀명이 인쇄된 어깨띠를 매고 힘차게 달려 나갔다. 출발 응원 후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출발지로 간다. 다음 코스에 한 사람씩 내릴 때마다 긴장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드디어 세 번째 주자인 내가 내릴 차례가 되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경기이다. 마라톤의 유례가 된 아테네의 병사는 42.195km를  달려 승전보를 전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뜻이다. 운동이나 할까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마라톤을 시도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혼자서는 하루 종일 달려도 그 거리를 달릴 수 있을까 싶은데 실제 마라톤 경기는 5시간 내로 끝이 난다. 경기 중 통제되었던 도로가 풀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엘리트 코스의 선수들은 2시간 대에 결승점을 통과한다. 어려운 과정에 비해 생각보다 순식간에 끝나는 경기인 것이다. 그 말은 내가 세 번째 주자이긴 하지만 얼마 안 기다려 두 번째 주자가 달려와 어깨띠를 내게 넘겨준다는 뜻이기도 하다.

발목의 통증이 잦아들지를 않아 아쉬운 대로 진통제를 한 알 먹고 출발선으로 갔다. 2번 주자가 출발했다는 소식에 출발선의 경쟁자들은 가볍게 조깅하며 몸을 풀고 있었다. 나도 덜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함께 몸을 풀었다. 곧이어 2번 주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코스 바깥쪽에 서 있다가 우리 팀이 달려오면 출발 선에 서서 바통을 받듯이 어깨띠를 받아 달리면 됐다. 


저 멀리 우리 팀의 2번 선수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출발 선에 발을 올려놓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댔다. 심장박동의 반은 연습한 만큼 잘 달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고, 나머지 반은 달려오는 우리 팀이 너무나 믿음직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 손에 어깨띠가 쥐어졌다. 나는 연습했던 대로 주저하지 않고 한 번에 미스코리아처럼 어깨띠를 걸었다. 그리고 달렸다. 무지 빨리. 심장이 너무 뛰어서 도무지 속도 제어가 되지 않았다. 달리다가 손목에 찬 러닝용 시계를 보니 킬로미터당 4분의 속도로 뛰고 있었다. 이 속도는 10킬로미터를 40분에 완주한다는 뜻이다. 한 번도 뛰어본 적 없는 속도다.

‘내가 미쳤구먼. 그냥 한번 뛰어볼까. 가능하다면 꼭 한 사람만 따라잡고 싶다’

전편을 읽은 독자라면 알 테다 내가 계주의 역전에 집착하는 이유를. 어린 날의 나는 1등으로 받은 바통을 꼴찌로 넘겨준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뛰고 있는데 반대편 주로에서 우리 동호회 에이스팀 네 번째 주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엄연히 경쟁자지만 같은 동호회 회원이니까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쳐주며 서로의 달리기를 응원했다. 미친 속도로 달리던 나의 바람이 통했는지 뛰다 보니 앞서 출발한 경쟁팀의 3번 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발목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장작처럼 타오르는 시뻘건 의지만 가득한 내가 되어 속도를 더 높였다. 점점 앞 주자의 등이 가까워지는 것에 집중해 달리는데 어디선가 함성소리가 들렸다. 코너를 돌자 수많은 응원단들과 우리 팀 네 번째 주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달려라 하니처럼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그 바람에 앞 주자 한 사람을 제치고 도착점에 들어갔다.  어깨띠를 네 번째 주자에게 넘기고 다시 다리를 절뚝이며 동호회 사람들이 모인 응원석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내 기록을 보고 미쳤다고 했다. 나도 미쳤다고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우리 팀은 10위권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다. 가다 서다 구간 정체의 속도가 아니었다. 의외의 선전에 동호회 사람들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우리는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막걸리를 마셨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보냈다.

언젠가 풀코스를 완주해보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해의 겨울 다섯 명의 우리는 서로의 힘을 나누어 풀코스를 뛰었다.  각자의 달리기가 쌓여 만든 우리의 결과였다.

이토록 멋진 운동이 또 있을까.

모험, 도전, 그리고 팀워크 이 모든 것이 완벽한 거리 42.195km.
마라톤이 외롭기만 한 경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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