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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06. 2019

내겐 너무 설레는 석 달

“다들 새로 나온 온라인 게임 컴퓨터에 깔아서 레벨 좀 올리도록 해”

어느 날 아침 회의에서 내려진 지시사항이었다. 광고회사에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신규 온라인 게임을 론칭하는 게임회사 광고 경쟁 PT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광고를 제대로 만들려면 게임을 잘 알아야 했고, 실제 게임을 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몇몇 직원들은 반색했고, 온라인 게임이라곤 해 본 적도 없던 나는 난감했다.

직원들은 각자의 ID를 만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게임에 열중했다. 누가 보면 회사가 아니라 pc방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을 풍경이다. 게임을 시작한 지 일주일쯤 지나자 레벨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레벨 1, 2를 기록하고 있을 때 레벨 3으로 우리가 가지지 못한 스킬의 캐릭터를 만든 이가 있었다. 바로 우리 팀장님이었다.

팀장님으로 말하면 잡기에 능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분이었다. 점심 내기 당구에서는 단 한 번도 점심 값을 내 본 적이 없는 능력자였다. 게임도 잡았다 하면 최고 레벨을 찍어야 놓는다고 하셨다. 골프, 낚시, 그림 실력까지 웬만큼 취미라 할 수 있는 것들에서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했다.

“나는 뭐 하나 잡으면 딱 1년은 푹 빠져서 해.”

팀장님이 내게 알려준 잡기에 능통하는 비결이었다. 대신 1년만 하고 다른 관심사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모인 1년들이 쌓여서 수많은 광고주를 만나야 하는 팀장님의 전략무기가 되었다. 어떤 대화에서도 초급자 같지 않은 유연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1년의 취미를 열 번 이상 경험한 팀장님의 실력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내게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나도 잡기에 능통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1년 동안 해봐야지 마음먹는 건 쉽지 않았다. 1년을 다짐하는 순간 관심 있었던 외국어, 운동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1년 후를 생각하며 장비를 구입하거나 학원에 등록하려니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끝까지 해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포기한다면 나의 도전 자체가 한심하게 느껴져 오히려 사기가 꺾일 것 같았다.

“딱 석 달만 해보자!”

나에게 무엇을 시작하기 좋은 적정 기간은 딱 석 달이었다. 석 달이면 기본기는 충분히 익힐 수 있는 기간이다. 레벨 1에서 2로 넘어가는 동안 운이 좋다면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석 달 해보고 흥미가 없으면 그만두어도 괜찮다. 목표는 이뤘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석 달 후 다음 석 달을 다짐하고 나면 1년 동안 즐길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어떤 일을 1년간 꾸준히 했다면 그 사람의 성실함은 물론 실력까지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석 달만 해보자 다짐했던 대상이 무척 많았다. 먼저 수영이 그랬으며, 마라톤, 영어공부, 발레, 뜨개질, 필라테스, 운전, 일본어 공부... 그 외에도 한참을 더 쓸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글쓰기가 그렇다. 평생 글을 쓰는 것이 목표지만 구십 살까지 산다면 앞으로 오십 년 더 글을 써야 한다. 오십 년을 생각하면 시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한 글자도 쓰기가 버거울 것 같다. 석 달을 목표로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석 달 동안 한 권의 브런치 북을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석 달을 시작하는 시점에 100일 동안 1일 1 글 도전을 시작하였다. 왠지 숫자가 딱 들어맞아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성공할 것만 같다는 설레발을 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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