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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22. 2019

후진이 필요한 시간

필라테스를 배운 지 8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이제 동작들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낯설던 필라테스 스튜디오도 내 집 거실처럼 편해졌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어깨와 배에 눈에 띄는 근육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동작들을 반복했다는 것이고, 열심히 운동하며 보낸 시간이 뿌듯했다.


운동이 익숙해지면 좋은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약간의 자만에 빠지기도 했다. 이건 일종의 자아도취인데 운동을 하며 자꾸 옆사람의 동작을 의식하게 됐다. 그들의 동작보다 내가 좀 더 유연하고 균형도 잘 잡으면 더욱 뿌듯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르시스처럼 거울 속 나를 보면 흐뭇했다. 나는 자만에 빠진 티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은근한 경쟁을 즐기고 있었다.


옆사람이 가장 신경 쓰이는 동작은 모든 운동이 마무리되고 누웠다가 일어서며 하는 '롤업'이라는 동작이다. 누운 자세에서 팔과 다리를 쭉 폈다가 머리부터 돌돌 말듯이 일어나 앉는 동작이다. 이 동작에서는 다른 의미로 옆 사람을 의식했다. 대부분의 동작에서 유연성과 균형감각을 마음껏 뽐내다가도 마지막 롤업에 오면 소심해진다.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꼭 성공한다'를 주문처럼 되뇌며 발끝과 손끝, 엉덩이까지 꼿꼿하게 힘을 주고 일어나기를 시도한다. 뜀틀을 넘으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높이인데도 구름판 앞에서 좌절하게 되는 것처럼 끝끝내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 이번에도 실패를 직감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 성공해서 앉아 있다. 나만 일어나려고 낑낑거리다가 결국 바짓가랑이를 잡고 몸을 끌어올려 앉는다. 그렇게 수업이 끝난다.


허탈한 마음에 쉽게 매트를 접지 못하고 몇 번 더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알아챘는지 수업을 마치고 나가려던 선생님이 내게 와서 동작을 한번 봐주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박자에 맞추어 몸을 들어 올렸지만 역시나 실패다. 선생님은 그렇다면 누워서 배의 힘으로 머리와 가슴까지만 드는 동작을 해보도록 하셨다. 이 동작은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라 무난히 해냈지만 금방 목이 뻐근해 왔다. 


"뭐가 문제일까요? 저는 역시 복근이 약하죠?"

"회원님은 숨 쉬는 게 문제네요. 숨 쉬는 연습을 더 하셔야겠어요."


숨 쉬기라면 필라테스 수업 첫날부터 배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수학의 더하기 빼기이며, 영어의 알파벳쯤이라고 생각하면 숨쉬기를 못한 다는 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결혼 전에 1년간 필라테스를 배웠고 지금도 8개월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수업에 참석했는데 나의 문제가 복근도, 체력도 아닌 숨쉬기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선생님의 설명은 논리적이어서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숨 쉬기 하나 제대로 못하다니'


생각해보니 숨쉬기의 문제는 필라테스를 배울 때만이 아니었다. 수영장에서 음파 음파의 비밀을 풀지 못해 얼마나 많은 물을 마시며 가라앉았던가. 마라톤을 배우면서도 씁씁 후후의 들숨 날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아스팔트 한가운데 주저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숨 쉬기의 어려움을 발견한 때는 고난의 복선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훈련을 하며 호흡이 익숙해지는 비밀의 열쇠를 찾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고난을 넘어서면 한 단계 성장해 있을 것이고, 피한다면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운동 초짜에 머무는 것이다. 의지에 불타올라 푸시업 개수를 늘리고, 다리 찢기에 매진할 때가 아니다. 


후진 기어를 넣고 오던 길을 곧바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렇게 나의 필라테스 수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슬금슬금 고개를 들던 자만심도 쏙 기어들어갔다. 모든 일이 그렇다. 계단을 뛰어오르는 것처럼 단번에 껑충 뛰어오르는 성장은 잘 없었다. 꼭 한 번은 후진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쩌면 모든 성장이 시작되는 지점인 것도 같다. 일단 오늘은 전 속력으로 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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