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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Nov 25. 2019

시어머니의 주말 사정



매일 화창하더니 꼭 이런 날은 흐리다. 이른 아침의 고속도로를 달리며 흐린 일요일을 투덜거린다. 목요일쯤 비가 오고 서서히 개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맑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가도 번잡스럽지 않고, 깊은 가을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뚫릴 텐데. 나의 주말 사정이 있는 것과는 상관없는 하늘 사정을 탓하며 시댁으로 간다. 고속도로는 안갯속에 갇혀 주위의 풍경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시댁 김장하는 날이다.


거실로 들어서자 빨간 김치 속이 큰 통 한가득, 절여놓은 배추가 몇 광주리다. 이 많은 걸 작은 체구의 시어머니 혼자 준비하느라 몇 날 며칠을 애썼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여름 감자 캐낸 텃밭에 배추씨를 뿌렸을 것이고, 어느 일요일에는 어린 배추 싹 사이사이의 잡초들을 뽑았을 것이다. 시부모님이 거름 주고 뒤집어 놓은 기름진 땅에서 배추씨들은 착하게도 대부분 싹을 틔웠을 것이고 또 그걸 속아 내느라 어느 일요일 두 분이 허리를 숙이고 밭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농사지은 배추를 다듬어 절여 놓으니 두 분이 이 많은 배추를 어떻게 키웠나 싶을 만큼 높은 배추 언덕이 몇 개나 생겼다.


주방으로 들어가 인기척 하는 나를 반색하며 반기시는 어머님.


“아이고, 어찌 이리 일찍 왔어-

“어머님, 이러실 줄 알았어요. 저희 오면 하시지 뭘 이렇게 다 만들어 놓으셔요.”

“새벽에 일어나서 뭐하냐, 영감이 배추 다듬어 준 덕에 나는 양념이나 만들었지-“

“어머님 이러실 줄 알았으면 어제 오는 건데. 저 뭐부터 할까요?”

“아침 먹었어? 밥부터 먹어라- 우래기(우리 집 꼬마 율이)는 할머니가 새우 삶아 줄까?”


어머님은 특유의 말 끝을 길게 빼는 말투로 우리의 고픈 배부터 챙긴다. 김장 준비를 하는 것도 모자라 아들 내외 좋아하는 소고깃국에 손주 먹일 새우까지 준비해 놓으셨다. 시댁에 가면 쉴 새 없이 뭔가를 먹는다. 도착하자마자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시작으로 마당 귀퉁이 감나무에서 딴 단감을 깎아 먹고, 농사지어 볶아 놓은 땅콩 항아리를 끼고 앉으면 고소한 튀김 냄새가 풍겨온다. 어머님은 평소보다 바쁘고 빠르게 움직이며 하루 종일 음식들을 척척 내어오신다. 아들이 좋아하는 두유도 늘 그 자리에 한 박스 빼곡히 놓여 있고, 손주 먹일 요구르트며 며느리 싸줄 반찬까지 빈틈이 없다. 냉장고며, 식탁 위 주방 곳곳은 오늘의 만찬만을 위해 달린 듯 완벽하다. 어머님의 완벽한 주방에서 남편과 율이와 나는 종일 ‘아 배불러’를 외치며 다음 코스의 먹거리에 손을 뻗을 것이다. 시댁의 일요일이 충만했던 것은 배가 부르다 부르다 빈 틈 남은 마음까지 빵빵해지기 때문인 것도 같다.


시어머니와 나는 오늘의 배추 언덕을 향해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겨루는 용사처럼 비장하게 김장용 고무장갑을  팔뚝까지 당겨 낀다. 서로 마주 앉아 속이 노랗게 꽉 찬 배추에 시뻘건 양념을 치덕치덕 꼼꼼하게 바른다.


“어머니, 배추가 어찌 이리 노래요?”

“농사 잘 지었지? 조금 비싼 종자 사서 뿌렸더니 다른 집 배추랑은 비교도 안돼-“

“그러네요. 보기만 해도 달아요.”

“이렇게 김장을 해 놔야 일 년 내내 맛있게 먹지. 무른 배추로는 아무 껏도 안돼-“


어머님의 배추 부심, 손주 어린이집 생활, 주중 일하는 수선집 사정까지 고부간의 수다가 이어질수록 배추 언덕도 낮아진다. 몇 년 전 운영하던 세탁소를 접고 귀농하신 시부모님은 읍내에서 수선집을 하며 주말에는 텃밭을 일구신다. 철마다 고구마, 감자, 땅콩, 무, 마늘, 깻잎, 상추까지 어머님 말로 농약 하나 안치고 얼마나 잘 키운 줄 모르는 채소와 갖가지 과일을 나누어 주신다. 두 분의 새벽과 주말의 땀이 배인 채소들은 알차고 달고, 시원하다. 어머님은 알알이 꽉 찬 육쪽마늘 자랑을 하시다 이따 가져가라 하신다. 고소한 땅콩이 빈 깍지 없이 어찌 그리 잘 컸는지 자랑하시다 말고 땅콩도 싸가라 하신다. 어머님의 농사 자랑이 이어질수록 집으로 가는 차의 트렁크가 차곡차곡 채워진다.


그 사이 김장이 얼추 끝나간다. 파김치가 세 통. 깍두기 세 통. 배추김치 아홉 통을 가득 채우고 백김치 담을 배추 몇 포기 남겼다. 어머님과 나는 허리를 으쌰 펴며 주방 한편에 쌓인 김치통들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올해 농사 끝났다. 김장했으면 끝났지 뭐-“


어머님의 올해 농사는 날이 궂어도 신명 나게 끝이 났다. 어머님이 싸주시는 김치를 먹다 보니 일 년이 갔다. 김장김치, 깍두기, 물김치, 고들빼기김치, 열무김치로 매일 식탁에 앉아 고픈 배를 채웠다. 그 기운으로 월화수목금 반찬 걱정 안 하고, 햇빛이 가득한 주말 나들이하고 돌아와도 국만 데우면 한 그릇 뚝딱할 상도 차렸다. 날이 궂은 주말에도 밭에 나가는 시부모님의 성실함 덕이다. 하늘의 사정 따위는 가뿐하게 이긴 어머님의 신명 나는 주말 사정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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