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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Dec 07. 2019

휴식이란 무엇인가



나는 딱히 쉬는 날이 없는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는 주부, 또 다른 하나는 작가이다. 주 52시간 근무제의 이슈가 한창인 이즈음 직업이라 할 수 없지만 노동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나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루 8시간씩 주 5일을 일하고 이틀은 쉬는 노동자에 비해 정해진 프레임 없는 나의 역할은 어떤 면에서 쉽기도 하다. 내가 일을 하고 싶은 그 시간이 출퇴근 시간이며 마음먹으면  파업 선언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나의 노고에 대한 인정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면 두 역할 모두 하루하루의 성실이 성취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복지만은 간절하다. 언젠가부터 제대로 된 휴식을 즐겨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이를 돌보고 집안 살림을 하고 자아실현을 위한 글을 매일 쓰는 나에게 남편은 가끔 자유시간을 주곤 한다. 주부와 엄마로서의 내 역할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대타가 되기를 자처하며 몇 시간 나가서 차를 마실 수 있게 하고, 어느 때엔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는 반나절을 선물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시간도 충분한 리프레시가 되기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휴식의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휴식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휴식을 위해서는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하루 종일 스케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건 말건 그 어떤 방해도 없어야 한다. 그날이 일요일 아침이면 좋겠다. 일단 눈이 떠지는 대로 리모컨을 눌러 KBS2로 채널을 맞추고 '영상앨범 산'을 틀어놓는다.  그야말로 힐링이 되는 프로그램이지만 반드시 봐야 하는 건 아니다. 나지막한 내레이션과 BGM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이다. '영상앨범 산'이 끝나면 TV를 끈다. 그리고 절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 둔 책을 집어 천천히 읽을 것이다. 그 사이 배가 고프면 사과 한 개를 얼른 씻어 와 침대 속에서 한 손에 책, 반대 손에는 사과를  들고 우걱우걱 먹으리라. 책장을 넘기다가 다시 잠이 들면 더욱 좋다. 그렇게 든 잠은 깊지는 않지만 매우 달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더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가 점심 무렵이면 좋겠다.


그렇다면 무슨 요리를 해 먹을까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떡라면을 끓일 것이다. 끓는 물에 떡국 떡 몇 알과 라면을 넣고 파 송송 계란 탁으로 마무리 한 라면을 김장 깍두기와 함께 먹을 것이다. 그때 TV에는 ‘출발! 비디오 여행’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라면을 후루룩 거리고 깍두기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 것만으로도 몸속 세포들이 생기를 찾을 것만 같다. 그 이후에는 남편이 거실 소파를 점령한 일상도, 아이가 장난감으로 난장판을 만든 일상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상상하는 이런 휴식을 즐겨 본 지가 적어도 3년은 더 전인 듯하다. 이토록 완벽한 휴식이 가능하려면 옆에 아무도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과 주중의 구분 없이 아침 7시 30분이면 일어나는 아이가 있는 한 늦잠을 자는 주말이란 상상할 수 없다. 내 한 몸 꼼지락거려야 세 식구 입에 모이라도 넣어줄 수 있는 가사의 시스템에서 반나절을 멍 때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가장 어려운 것은 율이의 요청으로 하루 종일 뽀로로로 편성된 우리 집 TV에서 '영상앨범 산'과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본다는 것은 기대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다. 귀엽고도 슬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좋은 휴식을 그동안 왜 요구하지 않았을까. 하소연하듯이 진정한 휴식이 그립노라고 내뱉었다면 남편은 아마 율이를 데리고 단 둘이 시댁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는 일이 있더라도 내게 이 멋진 일요일을 선물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하소연마저 잊어버리고 살았던 건 모두가 리듬감 때문이다. 누군가 태엽을 감아준 것처럼 생기 넘치는 아침이 매일 반복된다.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매일 일정한 모닝 루틴을 이어오다 보니 가능해졌다. 매일이 비슷하다 보니 피곤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생기가 넘친다. 힘찬 아침이 그저 당연한 일상이고, 당연한 일요일의 모습이 되었다. 진정한 휴식과 리듬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쉽지 않다.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휴식 없이도 괜찮은 일요일 아침은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다. 나의 주 52시간 근무에 대한 고민은 이렇게 물 건너가는 것인가. 그렇지만 미래의 어느 날 불현듯 생각할 것이다. 다시, 휴식이란 무엇인가.




요즘 김영민 교수님의 에세이를 신명 나게 읽다 보니, 교수님 특유의 문체가 너무나 경쾌하고 멋져서 따라 해 보았습니다 ^^ '추석이란 무엇인가' , '책이란 무엇인가', '성장이란 무엇인가' 같은 통찰력 있고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성장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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