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단편소설 사랑 1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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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게... 그 유산이란 게 얼마나 되는데요?
유산은, 이 건물입니다.
흠,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강남 한 복판의 20층 건물이 조건부 유산이라니... 아빠는 대체.
시세로 650억 하는 유산이라면 무조건 조건대로 하는 거죠.
만약에요, 내가 그 결혼 하지 않으면 유산은 어찌 되나요?
재단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아 그 재단... 결국 오빠들이 갖게 되는 거네요.
그거야 말하자면 뭐 그런 셈이죠.
며칠 생각 좀 해볼게요. 그리고,
네, 결론을 빨리 내줘야 해요.
그 남자는요? 누군가요?
우변아저씨가 가방에서 유에스비를 하나 꺼내어 건넸다.
이 안에 그에 대한 모든 게 들어있어요. 여자라면 누구라도 맘에 들지 않을까 싶긴 한데 뭐 아가씨가 직접 한 번 봐요.
일생 동안 아빠의 권력에 휘둘리며 살지 않았던 나에 대해 아빠는 이런 식으로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순간에 내 인생을 온통 뒤흔들어버리는 일을 꾸민 건. 나는 유에스비를 열어보지 않고 노트북 키보드에 던져두었다. 사무실을 나와 테헤란로를 천천히 걸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도시다. 질척거리지도 않았고 개나 소가 어슬렁거리지도 않는 인도 아닌 테헤란로의 인도를 느긋하게 걷다가 커피숍으로 들어가 예가체프를 주문했다. 믹스커피 같던 연유커피의 걸쭉한 달달함이 그립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달콤한 걸 주문했겠지. 예가체프의 살짝 신맛이 입안으로 퍼졌다. 지나치는 사람을 무심히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앞을 가렸다.
어?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시 뵙네요. 하하
가이드...씨?
네 가이드입니다. 오늘도 커피만 드시고 있네요. 제가 가이드 해드릴까요?
그는 잘 생긴 얼굴에 미소를 토핑처럼 듬뿍 얹은 채 바라나시에서처럼 가지런히 웃었다.
가이드...요, 테헤란로 투어인가요.
그럼요, 여기도 제가 아주 잘 아는 곳입니다. 후회 없는 여행이 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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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건 나중에 해요. 그보다는 커피나 한 잔 같이 마셔요.
그가 커피를 사러 간 동안 나는 다시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시간이 아직 오후 타임이라 커플보단 비즈니스로 바쁜 도시다. 내 눈엔 각자의 삶을 짊어진 어깨가, 팔이, 허리와 다리가 묵직하게 늘어지는 늦은 태양처럼 그림자마다 길게 달라붙어 분주한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란 나에겐 삶의 무게보다는 생각의 무게가 그만큼의 길이로 들러붙어 움직일 때마다 거치적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빠는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예요?
심심해서였다. 인터넷에 아빠 이름을 치고 검색을 했던 건 단지 심심해서. 조숙한 건 아니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제들과 함께 하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은 노티나는 아이였었나보다. 학교에 가도 친구는 거의 생기지 않았다. 학년마다 한두 명 정도 베프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살갑게, 반의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깝게 놀고 그러진 않았다. 아마 내 스타일이 같은 나이에도 언니처럼 보여서였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검색에서 나온 아빠의 그림자는 충격이었다. 사소한 욕들은 그렇다 쳐도 쿠데타, 반란, 살인자 심지어 악마라는 표현도 있었다. 인터넷은 다 믿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들어와서인지 실감은 안 났지만 그래도 뭔가 있으니 이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아빠 주변에 있던 한 아저씨에게 물었었다. 아빠가 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인터넷에서 저런가 하고.
아저씨는 아빠가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했다. 원래 영웅에겐 반대세력들의 음해가 따르는 거라며 아저씨는 그런 아빠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난 아빠에게 직접 묻지는 않았고 근처 사람들에게만 물었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그 땐 그렇게 믿었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가서 난 아빠의 평판에 대한 서베이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갔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사실 비극적이었다. 그 때부터 아빠에게 휘둘리기 싫어졌기에 아빠의 돈은 거의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유학을 마쳤다.(라고는 하지만 역시 혼자라는 건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혹은 묵시적 동의 아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내 딴엔 거의 혼자 해냈다고 믿었으니까. 거리에 늘어놨던 시선을 거둬 테이블로 돌리니 가이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생각이 깊은 거 같아서 방해 안하고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반듯한 웃음이 살짝 벌어진 이빨 위에 걸린다. 마주 대하면 즐거운 미소, 가이드의 페르소나일까. 영업용 표정이라 해도 바라보면 마음에 불안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문득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궁금해서가 아니라 내가 처한 문제의 질문지 하나가 무심코 출제된 거니까.
네,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러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