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단편소설 사랑 1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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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
나는 노트북 위의 유에스비를 만지작거렸다. 이 안에 들어있는 남자는 나에게 육백 억을 안겨줄 남자였다. 1그램의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는 가이드와의 기한은 아직 3일이 남아있다. 이 유에스비의 무게도 1그램보단 무거울 텐데 난 자꾸 겨우 1그램 뿐인 사랑 쪽으로 저울 눈금이 기울고 있음을 이미 눈치 챘다. 사랑과 욕심은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이 유에스비의 남자와도 사랑을 할 수 있을는지. 하지만 조건으로 시작된 관계에서 사랑까지 가려면 아주 먼 길을 가야할지도 모른다. 가이드의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라고 가정한다면 난 기꺼이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불과 며칠 만에 나는 그의 마음에서 진실을 보았다. 아무리 사랑이란 걸 몰라도 진심은 느낄 수 있으니까.
심각해보이네요?
만약에요,
네,
나를 정말로, 사랑할 수도 있어요?
지금요, 그렇게 하고 있는 걸요.
그렇죠,
네,
그렇군요. 역시,
그 말 이후 나는 오래 침묵했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침묵했다. 헤이리를 구경하고 카페에서 팥빙수를 먹었다. 그리고 아울렛에 가서 쇼핑을 했다. 나는 그에게 선글래스를 사주었다. 그는 나에게 양말과 운동화, 그리고 폴 바셋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신을 사주면 신고 달아나라는 뜻이라면서요. 근데 양말까지, 세트네요.
정말 그렇게 되는지 궁금해요.
그가 또 가지런히 웃었다. 그 키스가 있던 날 이후 우리는 헤어질 때 볼에 키스하는 일을 시작했었다. 왼 볼에 남은 그의 입술촉감이 아쉬워 입이 제멋대로 왼쪽으로 삐죽거렸다. 내 왼 볼에 닿았다가 떨어지려는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뺐다. 그리고 내 엄지에 끼웠다. 그가 웃었다.
그날 밤 난 다시 유에스비를 만지작거렸다. 엄지에 입술을 대고 반지를 물었다 놓았다 하길 몇 분 정도 했다. 노트북에 유에스비를 끼워 넣었다.
12
잠시 후 폴더가 떴다. PSH라는 이니셜이 붙은 파일이 보였다. 긴장감은 들지 않았다. 선거에 나온 후보자 소개 책자를 보는 기분, 투표권은 나에게 있었고 후보자는 단독 후보다. 예스이거나 혹은 노,
딸칵딸칵,
파일을 열었다. 달랑 한 페이지의 문서에 그의 경력과 신상이 적혀있었다.
박상훈,
1983년 생,
경기고 서울대 스탠포드
박사
교수
대학 총장을 했던 아버지와 현재 예술대학장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학자 집안 출신의 학자, 피아노와 바이올린, 색소폰과 드럼 연주자로 공연도 몇 차례나 했다. 경제학자는 아버지로부터, 예술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제대로 물려받은 진골이다.
사진은,
없었다. 사진 자리는 비어있다. 이 정도 인물이면 인터넷으로 검색 하면 다 나올 텐데 왜.
호기심을 자극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수작일까. 공연히 그 수작질에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검색은 포기했다.
여섯 째 날,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을 올랐다. 인도라고 쓰인 글씨 앞에서 바라나시에서의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웃었다. 엔 타워의 전망대 식당은 비싸다며 하야트 호텔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보니 피아노가 보였다.
피아노, 칠 줄 알아요?
뭘 듣고 싶어요?
그가 가지런히 웃으며 말했다.
뭐든 가능해요?
그렇진 않지만 왠지 가능한 곡을 말해줄 것 같아요.
그가 또 웃는다. 나는 가능한 곡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루마라면 괜찮겠죠? 아무 거나 좋아요.
끄덕인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테이블에서 각자 이야기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흥미롭고 즐거운 눈빛이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난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Love Me... 눈을 감았다. 또 다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키스의 순간이 눈앞을 지나며 입술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내 입술이 신음처럼 다시 열렸다.
아...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실내를 메웠다. 어느새 연주는 끝나고 그는 다가와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