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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요일 Sep 10. 2023

잠(JAM)

장편소설(완결)

장편소설 잠(JAM)


OO님, 일어나요. 어서!




1. 별 지우개


기주. 일어나요. 기주~ 어서


이룬의 목소리다. 기주는 반쯤 눈을 뜨고 이룬을 찾았다. 바람이 산들 코끝을 스친다. 하늘, 아니 가상 하늘이 투영된 천장. 바람은 늘 일정한 속도, 일정한 온도로 불었다.


변하지 않는 현실. 별을 파괴하는 함선, 별 지우개의 선실은 좁고 답답했다. 침실, 주방, 욕실이 방 하나에 들어찬 스튜디오 원룸처럼 조종사들은 이 작은 공간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 나머지 공간은 더 좁은 조종실, 추진체와 동력, 그리고 생명 유지를 위한 시스템 일부이고, 함선 대부분이 간단한 방어 장비 외엔 항성 파괴 무기와 에너지 탑재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조종사를 위한 편의시설은 제한되어 있어서 조악한 스크린에 투영되는 숲길을 따라 내부 코스를 따라 달리거나, 우주복을 입고 선체 바깥으로 마련된 긴 산책로를 걸을 수도 있으나 기주는 마치 물 빠진 갯벌을 기어가는 느낌으로 막막한 어둠으로 가득한 선체 외부를 어정쩡하게 걷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니 처음 몇 번은 함선 외부 산책로에서 헬멧 스크린에 투영된 가상 정원을 따라 걸었지만 할수록 맨땅을 디디며 자연과 호흡하던 고향이 떠올라 결국 그만두었다.


일어나요! 기주. 응? 어서 일어나~ 응?


- 주린. 그 또 목소리.

일어났군요. 기주가 안 일어날 땐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란 거 알잖아요.

- 일어났군요는 무슨. 벌써 다 알고 있으면서. 마지막 한 번 더 부른 건 일부러 그런 거잖아.

아니에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주를 스캔하지 않아요.

- 알았어. 주린은 몇 퍼센트가 사람이고 몇 퍼센트가 기계야?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난 아직도 그게 궁금해.

굳이 퍼센트로 나눈다면 7:3?

- 뭐? 30퍼센트나 인간이야?

아니에요.

- 그럼?

70퍼센트가 인간이라고 볼 수 있죠.

- 진짜야? 그럼 거의 인간이잖아?

인간의 70퍼센트가 물이니까, 나도 그 정도의 물속에 잠겨있거든요.

- 진짠 줄 알았잖아.

가짜도 아니지만… 하여튼 휴먼 비율은 꽤 높아요. 게다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기도 해요.

- 높아져?

기주와 싱크로 되는 비율이 계속 올라가게 프로그래밍 되어있으니까요.

- 아 어쩐지 점점 더 이룬 같아지고 있어. 매번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잖아.

어서 준비해요. 우리는 60분 후 도착해요.

- 준비고 뭐고 그냥 네가 알아서 쏘고 빠지면 끝인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주는 옷을 갖춰 입고 고글을 착용했다. 발사를 준비하는 동안 기록할 것도 있고 체크할 일이 빼곡하다.


* * *


5 4 3 2 1 0


초읽기가 끝나자 함선 전면부의 스페이스 캐논 사출구로부터 쐐기 같은 빛줄기가 별을 향해 쏘아졌다. 주린이 띄운 모니터에는 가스층의 표면에 백색 열기로 타오르는 거대한 별이 보이고 그 중심부에 투사된 검은 구체가 일렁이는 모습이 비추어졌다. 발사된 빛의 중심부에는 지우개라고 불리는 본체가 그래픽으로 구현되어 외부와 에너지를 채운 내부의 사이 공간에는 작은 볼들이 에너지를 공급받아 어마어마한 속도로 파괴력을 높이는 회전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함선으로부터 별까지 거리가 기록되고 그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예상 경로에 맞게 형성된 궤적으로 별을 향해 나아가는 빛줄기는 갈수록 거세졌다. 농밀하게 축적된 에너지의 힘이 막대를 그리며 차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가 멀어질수록 강해지는 그건, 까만 암흑을 일직선으로 꿰뚫는 불줄기였다. 이윽고 목표지점에 도착한 빛줄기가 소리 없이 폭발했다.


불꽃놀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빛의 페스티벌이고 소멸이라면 어마어마한 빛의 소멸이 진공의 암흑 공간을 가득 채웠다. 기주의 광대뼈로 붉은빛이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함선은 불줄기를 맞이하는 별과 유효 사거리가 설정된 스페이스 캐논의 작동 구간만큼 멀어 그 폭발은 환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기주는 이룬과 함께 지우마스를 앞두고 재현된 옛 지구식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었다. 빛이 아닌 불의 축제. 이룬과 강변에 서서 바라본 송년 불꽃놀이는 밤하늘의 매캐한 화약 연기와 냄새 사이로 찬란한 불의 꽃송이들을 수도 없이 암흑의 하늘로 피워냈다. 오래전 구식무기인 화약을 복원해서 재현한 불의 축제라고 했다.


기주의 고글에 백색 섬광이 크게 원을 만들고 시야 가득 확산되다가 점차 사그라지자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기주가 시선을 창밖에 둔 채로 말했다.

 

- 이번 별이 몇 번째지.

기억 못하는 걸 억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스으으으읏

미세한 기척이 트트트트틋 트트트트 하며 안전거리까지 물러난 함선 외부를 기어코 건드리고 지나가는 소리가 함 내로 이어졌다.


- 저기 저 별에 의지한 생명체가 있다면… 분명히 있겠지?

보고서에는… 저 항성계 딸림별의 생명체는 모두 소멸된 상태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 그거야 뭐, 꾸미기 나름 아닌가.

우리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어요. 그저 지목된 별이 자연 폭발하기 전에 소멸시키는 것뿐.

- 너무 매정해. 우리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잊은 거 같아.

하지만 그냥 놔두면 신연방 은하 신연방이 또다시 큰 피해를 봐요.

- 인간이 살자고 거기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를 생명을 온통 소멸시킨다고?

놔둬도 어차피 딸림별들은 저 별에 휘말려 들어가서 소멸했을 거예요.

-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면 스스로 그렇게 될 때까지 놔둬야 하는 거 아닌가? 만약 저 태양계의 어느 별에선 옛 지구처럼 마지막 탈출이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아니 어쩌면 막 초읽기가 끝나고 있었다면? 인간이 뭐라고 그 가능성을 말살하는 걸까?

우리는, 신이 아니에요. 기주.

- 신이 아니라면서,


기주가 잠자코 있다가 주린 쪽을 돌아보며 툭 던졌다.


-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는 건 아니야?


선체를 스치는 파편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처럼 계속되었다.


트트트트트틋 트트트트트트


- 저 가운데 어떤 삶이 지나가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잖아.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던 주린이 대답했다.


항성이 파괴되면 어떤 꽃은 얼음꽃이 되어 부서지고 어떤 풀씨는 가능성을 몰수당하고 가루가 되어 사라지겠죠.


- 시인이냐. 너?


기주는 이 잔재들이 죽음의 찌꺼기가 되어 선체에 들러붙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린은 뒤에 남은 딸림별들을 향해 다시 스페이스 캐논을 쏘았다. 아홉 개의 혹성들이 차례로 폭발해 사라졌다.


기주. 커피 마실래요?

- 그래. 마시자.


주린의 지시에 따라 로봇이 기주의 커피를 만들어 날랐다. 진한 커피 향이 선체를 스치는 소리에 어울려 잔잔하게 퍼졌다. 그날, 먼 우주 어느 태양계는 태양을 잃었고 온통 폭발하여 사라졌다.




2. 다발적 사고


불꽃놀이가 검은 강물을 화려하게 수놓는 강변을 기주와 이룬은 묵묵히 걸었다.


그것은 사고였다.


탈출 모선에서 신연방 정부는 지구에서 끌어모아 데려온 종당 몇 쌍의 동물들을 번식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가뜩이나 제한된 공간에서 최고의 번식률을 이뤄내기 위해 포획할 때 DNA 검사까지 하며 최대한 선별해서 데려온 동물 중 긴 우주 항해 생활에 적응한 동물들은 새로운 지구에서 약육강식의 자연율을 벗어나 마음껏 번식하고 번성했다.


신연방 정부는 개체 수가 정착에 적당한 선이 될 때까지 임의로 동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규정으로 인간은 어렵게 키운 작물을 동물들이 마음대로 먹어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인간들도 대부분 그랬지만 목장이나 목축 코드를 받은 인간들은 몇몇 거대 지주를 제외하면 여전히 가난과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죽하면 굶주림을 면하려고 동물을 잡아먹다 걸려 큰 벌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기주는.


- 결국 그렇게 되는 거였으면,


이룬이 기주의 곁을 걷다가 잠시 멈추어 섰다.

ㅌㅌㅌㅌㅌㅌ츠츠츠으으으…

불꽃놀이의 여운이 이룬의 곁을 스치며 사라졌다. 이룬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빛의 소멸을 바라보았다. 이룬이 문득 그 스러지는 불꽃을 주시하다가 기주에게 말했다.


- 결국 그렇게 되는 거였으면,


기주가 주머니에서 작은 램바를 이룬에게 건넸다. 그 램바에는 이룬이 평생을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이 들어있었다.


- 이거, 내가 이룬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야.

- 기주가 없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이룬이 기주를 똑바로 보며 말했지만, 기주는 이룬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기주는 강물에 비친 이룬을 보며 말했다.


-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남아야 나중에 만날 수 있잖아.


불꽃의 여운들이 이룬을 감싸듯 스칠 때 순간적으로 기주는 이룬의 모습이 안 보여서 당황했다.


- 어? 이룬? 이룬?

- 말해. 기주.

- 이룬?


이룬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3. 남겨지는 것들


기주? 기주? 기주…


이룬은 기주가 떠나고 눈앞에 닥친 어둠을, 그 편견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이룬은 끝까지 기주에게 말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 저 애라며?

- 정말?

- 그래! 재미로 잡았다잖아

- 아 그래서 남편 될 남자가 신연방에…

- 그래. 그거지. 남편을 망친 거지.

- 세상에나… 어쩜 그래.


- 아니! 아니에요! 그건 사고였다고! 사고야!


이룬이 수군거리던 22커뮤니티의 여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지나가려니 하고 넘겼는데 오늘 저들은 차가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든 하이에나처럼 물어뜯고 늘어졌다. 말 하나하나가 차갑게 빛나던 하이에나의 이빨 같았다. 하이에나를 죽인 건, 사고였다. 기주가 이룬을 지키려고 한 거지만 이룬은 살고 기주는 벌을 받아 떠났다.


* * *


며칠 후 신연방 관리자와 22커뮤니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기주의 옷과 물품, 편지를 건네고 기주가 훈련을 잘 견디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무슨 훈련이 견뎌야만 하는 거야. 그런 훈련이 어디 있어. 그건 고문이지. 이룬은 고통스러운 기주의 신음이 들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 우주가 그렇게 커요?

- 몰랐어? 태양계와 태양계를 건너 옮겨 다니는 일이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야? 가장 가까운 태양계도 수면 없이 간다면 우주력으로 7~8년이 걸린다는데.

- 세상에. 그럼 다음 태양계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는 다음 세대를 맞이하겠네요.

- 당연하지.


관리자가 떠나고 멍하니 앉아있던 이룬이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대화를 듣다가 중얼거렸다.


- 우주력으로 7~8년…


이룬은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생각이야. 지금은 오직 생각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어. 이룬이 기주의 옷가지를 손에 잡고 드는 순간 사이에서 끼어있는 메시지 패드를 발견했다. 패드에는 광고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대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기회를 거부하는가?


* * *


다음 날, 이룬은 관리자 사무실을 찾아왔다.


- 사실인가요? 신연방 태양계를 건너는데 한 세대가 지난다는 말이?

- 그건… 오해의 여지가 있지만, 비슷하긴 합니다.

- 그럼 기주는 살아서 돌아오나요?

- 물론입니다. 문제만 없다면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관리자의 말에 이룬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행이야.


- 다만….

- 네?

- 돌아오면 우린 더 이상 이곳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 그게 무슨 뜻인가요?

- 조종사들은 수면 항해를 합니다.

- 수면 항해라니요. 자면서 움직인다는 건가요?

- 맞아요. 그들은 항성계와 항성계 사이를 이동하며 긴 시간 잠을 잡니다.

- 자더라도요. 나이는 먹지 않나요?


이룬이 심란한 눈으로 관리자를 바라보았다. 관리자가 이룬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 임무가 끝날 때까지 조종사는 생존해야만 합니다. 그게 신연방의 법이에요.

- 어떻게요? 어떻게 살아있죠?

- 수면 항해 중, 신체의 모든 움직임이 거의 멈춘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 나이를 먹어도 몸은 거의 그대로라는 건가요?

- 예를 들어 우리가 십 년을 사는 동안 조종사는 일 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겁니다.

- 우리가 백 살이 되면 기주의 삶은 겨우 십 년이 지난다는 거예요?

- 거의, 거의 그래요. 조종사의 숙명이에요. 돌아온 지구에 가족이나 지인은 남아있지 않을 거라는 걸 사전에 모두 알고 떠나는 거죠.

- 알고 떠나요? 그럼 우리는요?

- 우린… 순리대로 나이 들고 늙어 자연으로 돌아가야죠.


절망한 이룬의 눈에 메시지 패드의 글이 보였다.


혼자 두려는가요. 당신은?

별 지우개 프로젝트는 가족과 함께하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지금 바로 가까운 관리자에게 연락하세요.


진한 녹색 건물은 신연방 어디를 가도 메디컬 디렉터가 근무하는 건물이다. 야트막한 녹색 건물 몇 개가 늘어선 거리에서 그중 하나의 건물을 나선 이룬이 텅 빈 눈으로 거리를 걸었다.


- 180일 정도 남았어요.

- 180일이요?

- 앞, 뒤로 10일 정도 오차는 있게 될 거예요.



4. 함께할 결심


기주에게


기주. 편지 잘 받았어.

그 힘든 훈련을 무사히 마쳐서 정말 다행이야. 다른 조종사 가족들을 만났어. 알고 보니 갤브 조종사 가족 모임이 있었어. 그들은 각자 가족과 남편,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나보내며 이제 담담히 이별을 준비하더라. 그들은 가족이 남겨준 돈으로 남은 삶을 준비한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어.


기주가 남겨준 돈은 신연방 은행에 넣어두었어. 거기서 평생 살아갈 돈을 만들어 준대. 사실은, 기주가 떠날 때까지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아기에 관한 이야기야.


아기를 가졌는데 기주는 나 때문에 떠나야 하고. 차마 말할 수 없었어. 그 아기를 평생 혼자 키울지 아니면 관리자 말대로 신연방에 아기를 맡길지 생각이 참 많아. 신연방에서는 아기도 맡아 키워준다고 해. 아기를 맡기면 나도 기주와 함께 별 지우개 함선을 타고 떠날 수 있다고.


사실 기주에게 이 편지가 전해질지 모르겠어. 기주가 지구에 돌아오면 어차피 나는 죽어 이 세상에 없을 텐데. 다른 가족들도 그것 때문에 영상을 남긴다고 모여 이야기하는데 어떡할지. 기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편지를 쓰다 말고 이룬은 문득 배를 만졌다. 관리자가 그런 이룬을 바라보았다.


- 진정서대로 기주가 당신을 지키느라 그랬더군요. 영상에서 확인했어요.


순간 이룬이 희망을 담아 관리자를 보았다.


- 그럼 기주가 돌아오나요?


관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 이미 큰 비용이 투입되었고 많은 시간이 지났어요.

- 그럼 어떡해요. 우리는…


이룬의 눈물이 편지가 담긴 메시지 패드의 가상 스크린을 통과해 하늘빛 옥스퍼드 테이블보를 코발트로 물들었다.


- 그래서 연합에서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예요. 아기에게 연합에서 큰 지원이 가게 돼요. 아기의 가족에게도…

- 연합이요? 연합이 뭐죠?

- 아… 신연방이나 같은 거예요.


관리자가 처음으로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모종의 결심을 하는 이룬은 그보다는 관리자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 아기를 신연방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룬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도 한참을 고민하던 이룬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자가 이룬의 편지를 받아 22커뮤니티 관제 시스템에 송신하고 대기한 비행정에 이룬을 태웠다.




5. 손톱


기주. 일어나요. 도착했어요. 기주우~ 일어나요. 응?

- 제발 주린! 이룬 목소리는 하지…


기주가 눈을 뜨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아, 미안해요. 기주.


기주가 뭔가 더 입을 열려다가 말고 손가락 끝을 더듬었다.


뭐…해요?

- 몇 시간 후에 보급기지 도착한다고 했지?

19시간이 지났어요.

- 19시간. 그래.

준비는 끝났어요. 기주. 착륙선을 내려보낼게요.


주린이 착륙선을 투하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착륙선은 스스로 보급기지를 찾아가 로봇을 풀어 물품을 채워올 것이다. 연료, 식량, 그리고 신의 무기를 위해 충전된 에너지 부스터.


- 나도 간다.

네?

- 땅을 밟아본 지 너무 오래됐어.

위험해요. 기주. 보급기지는 환경이 지구와 달라요. 비라도 내리면 몇 분 안에 우주복이 녹아버릴 거예요. 더구나 아주 일부 지역만 통제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미지의,

- 주린이 지켜줄 수 있잖아.


후우, 탄식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니 에어 록이 작동하는 소리가 기주가 듣기에 마치 탄식처럼 들렸던 것이리라. 잠시 후 주린이 말했다.


좋아요. 준비해요.


쉬잉, 그사이 착륙선 쪽의 도크가 열렸다. 기주가 콘트롤 데크의 문을 나서자 위에서 우주복이 내려왔다. 기주가 착륙선 조종석에 앉아 기다리자 에어 록이 작동하고 착륙선이 함선을 떠나 곧바로 보급기지로 하강했다. 내려가는 동안 주린의 주의사항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명심해요. 이곳의 기후나 환경은 지구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소 분포도가 절반도 안 돼요. 우주복에서 벗어나는 순간 천천히 질식이 시작될 거예요.


기주는 주린이 있는 모선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린은 우주복에 장착된 캠으로 기주를 보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착륙선이 지면에 내려앉자 캐리어 로봇들이 보급기지 창고에서 필요 물품을 나르기 시작했다. 기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향과 똑같은 모습. 풀도 나무도 흙도 똑같은 모습이다.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우주복 신발 바닥 때문에 느리고 둔했지만, 그 느낌은 생생하게 온몸에 전해졌다. 훅훅 훅훅 키릭 키릭 키릭, 기주의 우주복엔 구명 케이블이 연결되어 착륙선에서 일정 거리 이상은 벗어날 수 없었다. 팔을 뒤로 돌려 줄을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케이블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기주!


곧바로 주린의 잔소리가 돌아왔다. 기주가 하늘을 흘깃 보고는 옆에 있던 평평한 돌 위에 주저앉았다.


- 주린.

말해요. 기주.

- 연락 온 거 없어?


* * *


이룬은 관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새롭게 역사를 만들어야 하는 신연방은 인구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금액과 집 그리고 세제 혜택으로 일반인으로 지구 탈출 모선에 탑승해 우주를 떠돌며 2세대, 혹은 3~4세대로 새로운 별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정밀하게 나눠진 특성 표에 맞게 직업 코드를 부여받았다. 누구는 농부로 누구는 목수로, 연구원으로, 교사로 직업 코드를 받아 생활에 필요한 경제 활동을 했다. 보통은 일생에 한 번 검사하여 직업 코드가 부여됐지만, 부모의 직업 코드 세습을 원하지 않는 자녀는 절차를 밟아 바꿀 수도 있도록 하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던 평범한 인간들은 신연방을 경영하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신연방을 경영하는 엘리트 코드 역시 세습으로 그 지위를 누렸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에게 주어진 특수한 사명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습성이 늘어가고 출산을 꺼리는 풍조가 생겨 엘리트 그룹을 이루는 시스템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신연방과 단체의 최고위 통치자는 시민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지배그룹 대부분을 차지하는 소수의 엘리트 그룹은 점점 더 사람이 부족해지고 결국 일반 코드에서 선별 입양하여 인력 부족을 해소하게 되었다. 입양된 아이는 엘리트 그룹이 되어 행정 법률 교육 경제 등 핵심 분야에서 신연방을 경영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이룬님이 수면 캡슐에 들어가 있는 동안 아기는 영양관 튜브로 성장합니다.


아기는 수면 중인 엄마의 태중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다 자라면 분만 유도를 통해 세상에 나올 거라고 했다.


- 아기는 엘리트 교육 과정으로 브레인 시스템이 주입되고 태어나면 엘리트 그룹의 부모에게 입양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이 코드 전환은 아기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면 그 가족들에게 같이 적용되며,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제한 없이 이어집니다.

-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이룬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눈물이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이룬의 부모는 목축 코드를 부여받았다. 이룬의 목장 근처에서 하이에나에게 먹힐 뻔하다가 이룬과 아빠 진에 의해 목숨을 구한 기주는 모든 기억을 잃고 이룬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어느 날 신연방에서 관리하는 사파리의 울타리를 뚫고 하이에나들이 목장 주변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영악한 하이에나들은 사냥이 쉬운 양과 염소 같은 가축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하이에나로 인해 잦은 피해를 본 기주와 이룬은 커뮤니티 행정부에 하소연했지만, 행정부에서도 다른 일이 급하다며 처리를 미루었는데 결국 이룬이 하이에나에게 습격당하고 말았다. 그 순간을 떠올린 이룬이 몸서리를 쳤다.


* * *


잠시만요.라는 주린의 말이 들리고 몇 분이 흘렀다. 기주는 지나온 시간보다 그 몇 분이 더 지루하게 느껴졌다.


아, 왔어요. 이룬으로부터.

- 읽어줘.


그리운 기주. 나는 잘 있어요.

십 년의 시간이 길고 지루하게, 마침내 흘러갔군요.

조금만 더 견디면 기주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고 떨려요.

아, 얼마 전에 우리가 살 집을 구했어요.

작고 아담하지만 따뜻하고 아늑해요.

남은 몇 달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요.

당신의 이룬으로부터.


기주는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우주복이 가늘게 떨렸다. 보급기지에 도착할 때마다 이룬으로부터 소식을 기다렸지만, 메시지가 도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별 지우개를 위한 보급이 이루어졌고 아홉 번의 보급을 받았다. 아홉 번째 만에 마침내 이룬의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기주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주린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룬은 잘 있군요. 다행이에요.

- 집을 구했다고? 아무튼 그래 다행이야. 그런데 주린. 궁금한 게 있어. 19시간 만에 인간의 손톱이 얼마나 자랄 수 있지?

무슨… 뜻이에요?

- 지난 임무 후 여기까지 19시간이 지났다고 했지.

그래요. 19시간이 지났어요.

- 손톱이 19시간 만에 두 배로 자라는 게 정상인가? 잠들기 전에 손톱을 깎았어. 지구에서 살 때는 3주마다 손톱을 깎아야 했지. 그 정도 시간이 흘러야 깎을 만큼 자랐거든. 그런데 임무가 시작된 후로는 잠을 자고 일어나면 손톱이 깎을 시기가 훨씬 지나고 또 지날 만큼 자라있었어. 불과 2일 혹은 3일을 잤을 뿐인데 말야. 주린. 이상하지 않아?

아, 그건… 수면 항해로 몸이 영향받은 게 아닐까요.

- 잠든 사이에 내 몸이 변했다…. 그게 최선의 대답이야?

정확한 건 검사를 해봐야 알겠어요. 요즘은 기주의 신체 데이터 체크 주기를 전보단 늦추고 있어요. 그동안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일상 체크 말고 정밀검사를 한번 해보기로 해요.


기주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 주린. 우리 솔직하자. 이제 거의 다 끝났잖아. 지난 임무 때, 소멸시킨 별의 딸림별에서 보낸 메시지가 있는 거 알았지?

메시지라니요. 그런 거 없었어요.

- 살려달라는, 우주 공통의 구난신호. 별이 파괴되고 흩어지는 동안 딸림별에서 보내진… 그 메시지를 보낸 누군가는 살아있었어. 생명체가 없다는 주린의 말과 달리 누군가는 분명 살아있었다고. 나는, 우리는 악마가 된 거야. 주린. 그동안 생명을 말살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다닌 거라고.

그 신호를 들었군요. 이렇게 됐으니 솔직히 말할게요. 기주. 하나가 아니었어요.


주린의 대답은 기주의 귀에 닿지 않았다. 단지 마지막 말, 하나가 아니었다는 말만이 기주에게 들렸다.


* * *


별 지우개 프로젝트는 서기 2263년에 시작된다.


많은 학자가 50억 년은 문제없을 거로 예측했던 태양계에서 태양의 이상 징후를 알게 된 건 한 민간 기업에서 발사한 태양 관측 위성이 초 단위로 발신하는 태양의 데이터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수년간 연구한 학자 때문이었다.


태양의 팽창으로 지구가 파멸하기 전에 10여 년간 준비를 마치고 결국 지구를 탈출한 인류는 정착할 별을 찾아 끝없는 우주를 유랑하다가 마침내 50여 년 후인 2153년 지구와 유사한 별을 찾아 신 신연방을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260년, 위기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으로 얻은 과학기술과 무기 체계를 바탕으로 신 신연방은 주변의 행성에서 멀게는 인접 은하까지 점령하여 식민지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식민지 지배를 위한 항로를 개척하여 행성 간 워프 터널을 건설한 신연방에 어느 날 큰 사고가 발생했다. 2259년 12월에 터널 주변에 존재했던 별이 폭발하면서 터널 일부까지 휘말리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천문학적인 돈과 수많은 인명이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태양의 폭발로 지구에서 탈출해야 했던 인류의 무의식 속에는 별의 폭발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신연방 정부는 터널 소멸 사고로 패닉에 빠진 신연방 시민들의 불안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고 기업 연합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회의를 거듭하여 신연방이 지배하는 은하의 상태를 미리 감시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상 징후가 보이는 별을 사전에 제거하는 계획이었는데, 그것을 별 지우개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신연방 은하 신연방 대부분 시민은 이런 프로젝트를 몰랐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이 항성 파괴용 스페이스 캐논을 장착한 함선, 별 지우개 함들은 3년간 훈련받은 조종사 지원자 1인과, 인간을 시스템에 인스톨하여 결합한 휴머노이드 시스템을 탑재하여 먼 우주로 떠났다.


이 작전에 지원한 사람 각자가 말 못 할 사연을 안고 십 년 계약의 별 지우개 조종사로 머나먼 항해를 떠나게 된다. 신연방의 모든 우주선은 반드시 인간 조종사가 탑승해야 한다는 규정과 함께. 하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을 시스템 네트워크에 인스톨하는 휴머노이드는 불법이었다.




6. 이별이 낯선 이유


어드레스 12542 코드 524 이룬 스카레이 입장하세요.


스피커에서 이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밀 신체 스캐너. 이곳에서 수면할 수 있는 신체인지 적합성 체크를 하고 수면 캡슐을 이룬에 맞게 세팅할 것이다.


이룬이 두 사람을 돌아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룬이 입구로 사라지며 22커뮤니티 수면센터를 담당하는 타이머가 관리자에게 말했다.


 - 임신한 몸이 인스톨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캡슐에는 수많은 약품이 투입됩니다. 그중엔 태아에게 검증이 안 된 약품 목록이 있어요.

- 가수면 상태로 유지하고 출산 후 정식 인스톨하면 됩니다.

- 그렇긴 해도 이 일은 출산 후에 시행되어야 하는 게 수면센터의 프로토콜입니다. 가수면 상태로 시스템에 임시 인스톨하면 이후 정식 인스톨 때나 언인스톨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 미룰 수 없어요. 시간이 다 돼 갑니다.


관리자는 타이머를 바라보며 강하게 말했다.


- 이번 일은 신연방의 승인을 받아 진행하는 일입니다.

- 이 사람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몰라도 이런 상태로 휴머노이드라니….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타이머 로이 존스가 관리자에게 뭐라고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전임자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이곳에 배치된 로이는 휴머노이드 인스톨 대상체가 임산부라는 것 때문에 찜찜했다. 어젯밤은 임산부의 수면 프로토콜과 관련한 데이터를 검색하느라 밤새 잠을 거의 못 잤었다. 휴머노이드라니. 휴머노이드 인스톨은 극히 제한적으로 진행하는 프로토콜로 그에 관련된 절차 처리만으로도 며칠이나 걸리는 복잡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 관리자는 그 절차에 대해 신연방확인서를 들이밀며 압박했다.


이룬이 스캐너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로이의 스크린에 어드레스 12542 코드 524 이룬 스카레이 부적합이라는 시그널이 반복해서 깜박였다. 로이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관리자가 이룬을 맞으며 말했다.


- 기분이 어때요?


이룬에게 말하는 관리자의 시선은 로이를 향하고 있었다.


- 저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이룬이 고개를 숙일 때 로이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관리자가 이룬의 어깨를 토닥였다.


- 잘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신변 정리를 해요.

- 다음 스케줄은 준비가 마무리되면 통보하겠습니다.


(삼켜요…)


관리자가 이룬이 바라보려는 스크린 시그널에 신경이 쏠리는 사이 로이가 이룬에게 뭔가를 건네며 귀 옆으로 속삭였다.


- 커뮤니티에 들러도 될까요?


이룬의 말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태워다 줄게요.


이룬이 고개를 끄덕이고 로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갔다. 관리자는 로이가 스크린에서 깜박이던 부적합 판정 시그널을 눌러 적합으로 바꾸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이룬을 뒤따라 나갔다. 이룬은 손에 있는 약처럼 생긴 작은 캡슐을 가만히 보다가 관리자가 따라 나오기 전에 입에 털어 넣었다. 삼켜진 그 무엇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관리자가 나간 후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로이가 무언가를 조작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22커뮤니티에서 관리자는 이룬에게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이룬은 22커뮤니티의 모든 곳을 눈으로 차근차근 담았다. 기주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영상으로 바뀌어 이룬에게 새롭게 심어진 나노캠에 기록되었다. 관리자는 이룬이 로이에게서 받은 나노캠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 이룬? 역시 이룬이었군요.


이룬의 뒤에서 누군가 이룬을 불렀다. 브레이커 패밀리라는 모임에서 본 비에사였다.


- 비에사, 모임 날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죠?


이룬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는 십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근황을 나누고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 외로움 등을 나누던 곳이었는데 눈에 띄는 사람은 두어 명뿐. 두 번 참여한 것뿐이지만 이룬에겐 낯선 모습이다.


- 이룬, 이번에 아홉 가족이 신연방이 마련해준 집으로 이사한다고 했어요. 그곳은 낙원이라더군요.


비에사가 ‘낙원’을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 빛났다.


* * *


목장으로 돌아오는 동안 이룬은 비에사가 말한 그 낙원을 평생 경험해보지 못 하리라 생각하며 아쉬움을 느꼈다.


- 그 낙원은 정말 아름답고 행복하겠죠?


관리자가 이룬을 보다가 그 부분에서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요. 근심과 걱정이 없는 파라다이스. 조종사 지원자들은 임무를 마치면 그 가족의 후손들과 함께 파라다이스에서 평생을 살 겁니다. 하지만 이룬, 이룬은 그보다 더 큰 혜택을 받게 될 거예요. 이런 일은 누구도 경험해볼 수 없는 특별한 혜택입니다.


이룬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 놀 사이로 3개의 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22커뮤니티에는 고층 빌딩이 없어 놀은 반구의 형태로 천공을 띠처럼 둘러 땅으로 향하고 그 사이로 떠오르는 세 개의 달도 놀에 휩싸여 벨벳을 두른 여신처럼 그림자를 그리며 이룬을 따라왔다. 비행정이 고요한 밤하늘에 하얀 자취를 새기며 이룬의 목장으로 향했다.


목장에 도착한 비행정이 이룬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이룬은 콘트롤 패널을 열어 관리 로봇을 불렀다. 잠시 후 목장 어딘가에서 이룬 대신 양을 돌보던 로봇이 궤도차를 타고 돌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이룬님.

- 그래. 진. 별일 없지?

네. 이룬님, 프로토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 좋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해.

네. 대기 중입니다.

- 나는 이제 여행을 떠날 거야. 아마도 아주 오래고 아주 긴 여행이 될 거야.

- 그동안 진이 주인이 되어 이곳을 돌봐야 해. 이제 그 내용을 하나하나 일러줄게. 첫째는 양들의 사료 공급에 관한 프로토콜이야. 시스템 접속-사료 코드는 9, 6, 9-사료 주문 및 결제-배송, 다음은 번식을 위한 프로토콜, 시스템 접속-번식 코드는…


이미 목축 코드 로봇으로 프로그래밍 된 내용이었지만 패밀리 로봇 진은 가끔 응답하며 이룬의 지시를 그대로 기록했다. 이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밤새 들릴 것처럼 이어졌다. 신연방의 하늘에 뜬 3개의 달이 기우는 동안 새벽이 조금씩 목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 * *


이룬은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이룬이 모르는 사이 이룬의 시신경에 장착한 나노캠이 이룬을 따라 방의 모든 것을 녹화했다. 그 영상은 가끔 뿌옇게 흐려지고는 했다. 이룬의 눈이 기주의 사진에 가 닿았다. 지적으로 생긴 얼굴이란다.


- 못생긴 편은 아니지.


못생겼다고 이룬이 놀리면 기주는 늘 이렇게 항의했다. 기주를 떠올린 이룬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이런 여행은 처음이라 도무지 뭘 준비해야 할지…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이룬은 무작정 다시 돌아올 일을 준비하자고 생각했다. 이별은 언제나 처음이라 어렵다.


마리에를 불렀다. 마리에는 이룬에게 신연방에서 진과 함께 제공한 가사 로봇이었다. 마리에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룬은 기주가 함께하면서부터 마리에, 진과 살았다. 로봇 진은 아빠의 이름과 성격을, 로봇 마리에는 엄마의 이름을 부여하고 성격을 심었다. 아빠는 다소 급한 성격으로 부지런하며 신중했고 엄마는 부드러운 성정을 지닌 여성이었다. 마리에는 어떤 일에서도 서두르지 않는 엄마를 닮아 모든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주인의 정서에 동화되는 패밀리 로봇인 마리에는 이룬에게 다가오면서 이룬의 슬픔에 물들었다. 마리에는 슬픈 모습으로 이룬을 안아주었다.


* * *


지구를 탈출한 인간들은 새로운 은하계에 정착하면서 옛 지구에서 버려야 했던 유산들은 가져오지 않으려고 했다. 특히 목적만이 강조된 A.I가 움직임을 방해하는 인간들을 사살하고 누른 핵 버튼에 핵으로 맞대응한 적성국 A.I로 인해 양측 모두 치명적인 피해를 본 인간들은 신연방에서는 로봇의 단독 행동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시스템에 인간이 관여해야 한다는 조항은 신연방기본헌법 제2조에 명시될 만큼 중요한 이슈였다. 90억 지구인 중 탈출에 성공한 인간은 불과 2만 5천여 명. A.I를 경계한 신연방에서마저 로봇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인력 부족이었다. 결국 필요에 따라 발전을 거듭한 로봇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수준까지 근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봇에게 의존하는 분야가 늘고 그에 따라 점점 더 지능적인 로봇들이 개발되자 지도자들은 로봇에게 알고리듬에 의한 판단력이 주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원칙을 뒤집는 로봇이 등장할 거라는 A.I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봇을 운용하는 모든 현장엔 반드시 인간이 책임자로 통제하도록 하였으며, 인간 또한 로봇에 대한 차별적 언행을 할 수 없도록 했다. 규정을 어기면 궤도에 정착된 세 개의 달 중 하나에서 긴 시간 노역하는 엄한 벌을 받게 하였다.


집에 오는 동안 이룬을 따라온 세 개의 달은 거대한 세 개의 위성이었다. 우주를 유랑하던 탈출 모선에서 정착할 별을 찾아 탐색을 떠난 20여 탐색선 중 하나가 지구와 환경 조건이 가장 유사한 별을 발견했다. 다만 이 별에는 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달을 만들자.


수만 년 동안 옛 지구에 맞춰 진화한 인류가 지구와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 원주 생물의 진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거라는 판단에 지도자들은 발견된 별의 환경을 가능한 옛 지구와 유사하게 하려고 했다. 그 방법으로 선발대가 먼저 와서 모선이 그 별에 도착하기 전 거대 위성을 만들어 달의 궤도에 올린 것이다.


옛 지구의 세 배 크기에 달하는 새로운 정착지에 썰물과 밀물이 있는 바다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개의 달이 필요했다. 크기는 옛 지구의 달보다 작았지만 크기와 질량을 산출하고 사이의 위치와 각도까지 계산하여 인력을 조절한 세 개의 달이 차례로 궤도에 진입한 얼마 후 마침내 거대 모선이 새로운 땅에 내려왔다.


지구 대탈출 후 부모가 죽거나 혹은 그 아이들이 죽고 우주 2~4세대인 신인류가 마침내 새로운 땅에 내려선 것이다.


* * *


이룬이 마리에의 등을 두어 차례 토닥이고 말했다.


- 마리에, 나는 돌아오려면 무척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러니 마리에가 집을 잘 돌봐줘. 혹시… 나는 못 돌아온다고 해도 기주가 돌아오면 따뜻하게 맞아주고 안아주고 커피를 내려주고 아침을 만들어 줘. 내가 함께 있는 것처럼 기주를 지켜줘. 부탁해 마리에.

네, 이룬님. 그럴게요. 걱정 말고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 기주와 나 사이에 아기가 생겼어. 이름은 지우로 지었어. 지우가 집에 돌아오면 마리에가 엄마가 되어줘. 이 영상은 영구 보존해. 나중에 지우나 기주가 오면 재생하도록 해.

네, 저장했어요.


이룬이 다시 한번 마리에를 토닥여주었다. 그런 이룬을 마리에가 오랫동안 끌어안았다.


* * *


- 하나…가 아니라니?


이번 임무의 딸림별들에서 그 시간에 정확하게 감지된 생명체는 669조8천2백73억…라는 말은 기주에게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주. 의미 없는 숫자일 뿐이에요.

- 의미 없는 생명체가 어디 있어? 그럼 모든 임무에서 이랬던 거야?

기주.

-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우리는 왜 악마가 됐지?


스크린에서 기주의 고개가 천천히 숙였다. 주린이 그런 기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주가 머리를 무릎에 파묻는 영상이 보였다. 주린은 천천히 기주를 불렀다.


기주.


기주가 고개를 들어 모선 쪽을 보았다. 주린은 기주의 눈가에서 빛나는 눈물을 보았다.


기주. 어차피 그들은 살 수 없었어요. 별들은 모두 폭발해 블랙홀로 바뀔 테고 폭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생명체는 사멸될 거였어요.

- 주린. 그들은 다만 며칠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 며칠 만에 그곳을 탈출할 수도 있었어. 지구인들이 태양계를 탈출했듯이 말이야.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 며칠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거냐고. 어쩌면 그들은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소멸했을 거야. 우리가 그랬어.

기주.


기주에게 들리지 않는 주린의 중얼거림이 텅 빈 콘트롤 데크를 울렸다.


며칠이 아니에요. 기주. 별이 소멸하기까지 그들의 시간으로는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일 수도 있어요. 어쩌면 몇천 년일지도. 그동안 빠르게 혹은 느리게 사라질 거예요. 우리가 말살한 생명체 숫자는 인간의 숫자로는 셀 수조차 없어요.


- 돌아가면 아는 사람이 남아있기는 할까? 얼마 전부터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어.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가는지.

기주

-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나의 시간은 멈추고 모든 사람은 내가 잠든 사이 나이 들고 사라지겠지.

기주

- 집을 구했다고? 이룬에게서 온 그 메시지… 거짓말이지? 이룬은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이룬이 살아있겠어? 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이 지났을 텐데. 이룬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어? 살아서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까?


기주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돌에 부딪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우주복의 헬멧은 표면에 자잘한 흠집만 날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주린이 간절한 목소리로 기주를 불렀다.


기주. 그러지 말아요. 제발…


* * *


목장이 작고 작아져서 마침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려다보았다. 진과 마리에가 떠오르는 비행정을 향해 끝없이 손을 흔들었다. 피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거나 함께했다는 것만으로 이룬에게 그들은 너무나 따뜻했다. 사라져가는 그들에게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을 다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이룬, 잘 될 거예요.


관리자가 이룬에게 말을 건네자 이룬이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래야죠. 그래야 할 겁니다.


비행정이 수면센터에 그들을 내려놓았다. 관리자가 출입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콘트롤 데크로 향했다. 가는 내내 양쪽 유리벽 안쪽으로는 은빛 튜브가 끝없이 늘어져 투명한 액체를 공급하고 있었다.


- 저기엔 누가 들어가나요?

- 필요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 필요한 사람들이요?

- 아직 치료 방법이 개발되지 않은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비용을 들여 긴 잠이 듭니다. 이 별의 알려지지 않은 바이러스나 중력에 적응하지 못해 발생한 질환들. 그들은 저 안에서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잠들어 있게 됩니다.


신연방은 아무리 옛 지구와 환경이 유사하다고 해도 미생물이나 동식물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종이 존재했고, 인간이 그 영향을 받아 질병에 걸리는 일이 흔했다. 어떤 질병은 치료할 수 있었지만 어떤 것들은 아직도 불치의 병으로 인간을 괴롭혔다. 그것이 신연방이 인구수를 원하는 대로 늘리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게다가 중력이 세 배나 높아서 어느 정도 중력을 조절하는 돔 안에서만 일상이 가능했다. 그 중력 돔을 커뮤니티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돔 안에서마저 중력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은 장기와 뇌가 손상되어 결국은 사망했다. 아직 해결해내지 못한 불치병이었다.


- 그러면 인스톨 되는 사람의 신체는 유지가 되나요?

- 신체 없는 정신은 소멸하고 말죠. 아무리 휴머노이드가 된다고 해도 신체가 유지되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존재 자체가 의미가 없으니까요.

- 존재하는 거군요. 나도 기주도.

- 그럼요.

- 제가 알아야 할 것이 또 있나요?

- 이제 이룬이 휴머노이드가 되면 이룬과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을 거예요.

- 누가 또 있나요?

- 네. 그와도 잘 만나도록 해요. 이룬과 그, 그리고 기주가 같이 별 지우개 함선을 움직이게 될 겁니다.

- 저 혼자만 인스톨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요. 그가 누군지 지금 알려주실 수는 없나요?

- 주린. 주린이에요.

- 주…린


* * *


캡슐 어드레스 H_H12542 이룬 스카레이 캡슐 소환합니다. 캡슐 룸으로 입장 바랍니다.


관리자와 로이가 바라보는 가운데 서서히 수면 캡슐이 열렸다.


‘지우…’


잠시 멈칫했던 이룬이 배를 한 번 쓰다듬고 캡슐로 들어갔다. 투명한 커버가 닫히자 허리, 팔과 다리를 고정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이룬의 눈에 무엇인가 스치는 듯했지만, 곧 사방에서 주입되는 가스에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 이 상태로는 아기와 산모 모두 위험하게 됩니다. 무모해요.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관리자님

- 지금 중단할 거면 애초에 H_P12541은 왜 조종사 적합 판정을 내렸나요.

- 가족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전임자의 실수이고, 신연방에서는 유산 위험성이 있는 어떤 행위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관리자님에게 큰 타격이 될 거라고요.

-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난 타격 정도지만 당신은 평생 세 번째 달에서 미네랄이나 만들고 있을 거라고.

-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큰 잘못으로 작은 잘못을 덮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에요. 차라리 벌을 받겠습니다. 수면 프로토콜을 진행하지 않겠어요.

- 어서 진행하라고! 어서!

- 타이머의 권한으로 불법 수면 인스톨 지시를 거부합니다.


로이가 개인 통신 모듈이 감긴 팔목을 들어 어딘가로 연락하려고 했다.


- 벌을 받겠다고? 그 벌은 내가 내리지.


다 감기지 않은 이룬의 눈동자에 로이가 관리자와 다투며 이룬을 가리키는 모습이 지나갔다. 이어 관리자가 품에서 핸드건을 꺼내 로이를 쏘았다. 맹렬한 빛의 파동이 넘실거리고 그 빛줄기에 맞은 로이가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관리자가 콘트롤 패널을 조작했다. 툭… 패널 옆으로 로이의 출입카드가 떨어졌다. 관리자가 그쪽을 힐끗 보고 다시 이룬을 보았다. 관리자가 이룬의 수면 캡슐 어드레스를 치자 판정이 부적합으로 변경되어 기록되어 있었다.


- 일을 망칠 뻔했군.


죽은 로이를 향해 뭔가를 중얼거린 관리자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부적합 판정 관련 기록을 삭제했다.


백 년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조종사의 생존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조종사의 심신 안정을 위한 휴머노이드로 가장 적합한 인간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다. 그러나 기주는 가족이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이룬의 존재를 몰랐다.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 봐 기주가 이룬의 존재를 숨긴 것이다. 기주는 십 년이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가족이 아닌 주린을 인스톨한 부분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관리자에겐 어딘가를 불완전하게 하는 일이었다. 고민하던 관리자에게 이룬이 보낸 진정서가 도착했었다. 관리자는 곧바로 이룬을 찾아가 휴머노이드가 되어 기주와 함께하라고 설득했다.


시스템에서 이룬의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가수면 프로토콜을 입력한 관리자가 이룬에게 다가와 상태를 확인했다. 이룬은 두뇌 일부와 아기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신체 기관이 정지되었다. 생존 장치가 투입되고 잠시 후 프로세스 완료라는 시그널이 켜졌다.


주변을 둘러본 관리자가 신연방의 메인시스템에 22커뮤니티 수면센터 타이머가 실종되었다고 기록했다. 수면센터는 신연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기관이었다. 메인시스템은 임시 타이머가 도착할 때까지 센터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임시 타이머가 센터에 도착했다. 임시 타이머가 콘트롤 데크로 들어와 관리자에게 다가왔다.


- 관리자님?

- 새로 온 타이머인가요?

- 저는 임시 타이머입니다. 정식 타이머가 올 때까지 수면센터를 관리하겠습니다.


엘리는 관리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료를 전송받아 센터의 시스템과 관리되는 캡슐 등의 기본 자료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엘리가 꺼내놓은 패드의 가상 스크린엔 수면센터의 모든 데이터가 표시되었다. 순식간에 데이터 대조를 마친 엘리는 “문제없군요.”라고 관리자에게 인수인계 완료를 통보했다. 엘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관리자가 이룬의 캡슐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부적합 프로세스를 적합으로 바꾸느라고 이룬의 캡슐을 어드레스 레이어로 보내는 것을 잊었다.


- 캡슐이 왜 나와 있지? 시스템, 캡슐 어드레스 넘버 H_H12542 캡슐 원위치시켜.


캡슐이 이동하는 걸 확인한 엘리가 다시 패드로 눈을 돌렸다. 관리자가 문을 나가며 슬쩍 돌아보니 엘리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콘트롤 패널에 올리고 발을 까딱거리며 패드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 됐어.


관리자가 작은 목소리를 남기고 수면센터를 떠났다.




* * *


소형 비행정이 수면센터에 도착했다. 콘트롤 데크로 들어선 관리자가 엘리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 휴머노이드 인스톨은 해봤어요?

- 아 뭐, 저는 아직 레지던트 과정이라서 실습만 몇 차례 해본 정도예요. 죄짓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 그럼, 오늘은 잘 할 수 있겠어요?

- 그거야 잘하죠. 관리자님. 어젯밤에 시뮬레이션을 200번쯤 한 거 같아요.

- 성공률은?

- 당연히! 99%죠.


엘리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가슴을 ‘탁’ 쳤다.


- 신연방 대학 최고 엘리트, 그 엘리자베스가 바로 접니다.


엘리가 어색한 웃음으로 긴장감을 풀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유심히 관찰하던 관리자가 놓칠 리 없었다.


기본이 단단해야 꼭대기도 단단해지는 것이다. 신연방의 메인시스템은 이곳에 배정되었던 베테랑을 시티로 보내버리고 임시였던 엘리를 그대로 정식 근무자로 주저앉혔다. 오늘은 이룬을 정식으로 인스톨하는 날. 별 지우개 함선은 2주 후 우주로 떠날 예정이다.


신연방에서 시티라고 불리는 곳은 1㎞ 상공에 만들어진 부유 돔이었다. 땅에서는 중력 돔에서도 영향을 받아 불치병에 걸리는 사람이 속출했지만, 부유 돔은 중력이 옛 지구와 비슷한 정도의 높이에 위치해서 인간들에겐 최적의 생존 조건을 제공했다. 신연방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 APS는 좋은 부지에 모델 부유 돔을 띄워 사람들을 모집하고 선 분양금을 받아 부유 돔을 건설해 팔며 우주적인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신연방에는 이런 부유 돔 수백 개가 떠 있었다. 신연방 메인시스템은 시티 우선 정책에 따라 그중 하나의 시티 수면센터에 이곳에 올 타이머를 발령했다.




7. 만나다


- 찰리 무슨 일이지?

- 목장에 누군가 있습니다.


바깥의 작은 술렁임을 듣고 방에서 나온 이룬이 패밀리 로봇에게 물었고, 로봇의 대답에 아빠에게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다.


찰리는 7세대 패밀리 로봇으로 13세대가 나온 요즘 많이 낡긴 했지만, 아직 이룬의 가족에게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아빠는 어깨를 으쓱하며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고개를 흔들었다.


- 글쎄 말야. 목장에 누군가의 생체 신호가 있단다.

- 찰리, 위치도 나와?

- 생체 신호가 감지되는 곳은 129 창고입니다.

- 가깝네요?

- 그래. 가봐야 할 것 같다.


아빠가 찰리와 집을 나서려고 할 때 라이플과 고글을 챙긴 이룬이 따라나섰다.


- 이룬? 찰리가 있는데 뭘 걱정해?

- 아니 그냥. 예비로다가.


이룬이 성큼 앞서 걷자 찰리가 얼른 이룬을 따라붙었다. 아빠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들을 따라 구역 경계를 넘어 초원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초원을 이동하던 찰리가 멈춰 선 곳은 사료를 저장해두는 사일로 옆 129 창고였다. 이룬이 문을 향해 라이플을 겨누자 아빠가 이룬의 머리를 툭툭 치고, 이룬. 이곳은 안전지대야. 그럴 필요 없어. 라고 말했다.


- 하이에나일지도 모르잖아요.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이룬이 고글을 쓰고 라이플을 켜 작동 준비한 뒤 찰리에게 내부를 확인하라고 했다. 고글에 찰리가 보내는 영상이 나타나자 이룬이 영상을 손목으로 전송하고 곧 손목의 가상 스크린에 찰리가 바라보는 시각이 그대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 오케이 찰리, 가.


이룬의 말에 찰리가 창고로 들어섰다. 아빠가 이룬 가까이 다가와 이룬과 함께 스크린에 집중했다. 찰리는 어두운 창고를 감열 모드로 확인하며 이동했다. 그리고 창고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하자 이룬의 영상에 붉고 노란빛의 물체가 잡혔다. 이룬이 아빠를 흘깃 보고 찰리에게 말했다.


- 찰리 거기 뭐야?

- 확인하겠습니다.


찰리가 그 물체에 다가가는 영상이 전송되었다. 찰리가 감열 모드를 끄고 서치라이트를 켰다.


우당탕!


빛이 밝혀진 순간 무엇인가 찰리를 공격해 서치라이트가 꺼지고 영상이 사라졌다.


- 찰리!


아빠가 소리치고 창고로 뛰어들려는 걸 이룬이 제지했다.


- 아빠, 잠깐!


이룬이 라이플을 겨누고 조심스럽게 창고로 접근했다. 라이플을 제압 모드에 맞추고 안쪽을 향해 발사하자 고막을 때리는 굉음이 창고 안으로 터졌다. 이어서 빛무리가 어둠을 뚫고 쏘아져 들어갔다. 커뮤니티 사람들이 난폭한 동물을 제압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소리는 공포를 만들고 빛무리는 근육을 마비시켜 순간이지만 움직임을 제어한다.


크아앙!


그 순간 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문을 뛰쳐나와 가까이 다가간 아빠를 덮치려다가 사지가 굳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 으악, 뭐야 이거!


아빠가 온몸을 움츠린 덕분에 무엇인가의 습격에서 무사했다. 굉음에 놀라 움츠렸지만 그게 목숨을 구한 것이다. 땅에 떨어진 걸 확인한 아빠가 이룬에게 엄지를 세웠다.


- 아빠 목숨을 구했네.

- 뭐예요? 하이에나?

- 그래. 하이에나인데 무슨 덩치가 이렇게 크냐?

- 사파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 이놈 하이에나킹이다. 영역에서 밀려난 듯?


아빠가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하이에나의 목덜미와 어깨에 생긴 상처를 살펴보며 말했다.


- 사파리에 있는 애들은 뻔한데 뭐가 이놈을 몰아냈을까요? 하이에나킹은 대장 노릇을 오래 한 거 같은데.

- 몇 년간 우두머리였다. 작은 애들이 우리를 뚫고 나온 적은 있지만 하이에나킹이 우리를 넘다니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이룬이 라이플을 마취 모드로 바꿔 하이에나에게 쏘았다. 푸른빛이 전신을 감싸자 하이에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 신연방에 연락하자. 경위도 알아봐야 하고. 대책도….


뒷말은 창고로 들어가 버렸다. 창고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어 스카의 머리 쪽에 두고 스위치를 누르자 빔으로 된 프레임이 켜졌다. 늙은 하이에나를 빔 우리에 가둔 아빠가 창고에 불을 켜고 안을 살폈다. 한쪽에 찰리가 쓰러져 있었다. 찰리의 상태를 확인한 아빠가 목 부위에서 빠진 커넥터를 찾아 연결하니 찰리가 다시 가동되었다. “가자.” 찰리의 움직임을 본 후 아빠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 하이에나의 공격이 딱 커넥터를 건드렸나. 근데 찰리, 인간이라며?

- 오류가 있었나 봐요. 아빠. 이제 찰리도 좀 쉬어야지.

- 그래 커뮤니티 나가면 알아보자. 13타입이 나왔다는데.


찰리는 묵묵히 두 사람 뒤를 따랐다. 앞서가던 이룬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 근데 아빠, 아무리 오래됐어도 키퍼 센서에 문제가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8. 우물


- 일종의… 상실감 같은 거예요.

- 상실…. 뭘 잃어버렸죠?

- 텅 빈 마음? 텅 빈 정신? 그래요. 정신. 우리는 정신을 잃은 누군가의 우물에 숨어든 악마입니다. 우물은 늘 배가 고파.


파란 눈의 남자가 유리벽 너머로 끝없이 놓인 캡슐을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옅은 아이보리 빛깔이 감도는 투명한 액체가 잔의 유리벽에 흐릿한 흔적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 그거 알아요? 악마는 우물에 숨지 않아.

- 왜죠?

- 숨을 필요가 없거든. 악마는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와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살고 우리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댄스를 즐기지.


잔을 빙빙 돌리던 남자가 한 모금 마셨다.


- 이 와인은 옛 지구의 소비뇽 블랑 품종으로 만들어진 무통 카데를 재현한 것인데 드라이하면서 산미에 바디감이 우물에 붓기엔 아까워요.


묵묵히 말을 듣던 여자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옛 지구의 모든 것들은 참 아름답군. 왜 옛 지구의 모습을 이곳에 심으려고 애를 쓸까요. 이제는 아무도 없는 다른 우주의 그림자 안에 기록으로만 녹아 사라진 기억일 뿐인걸. 이제 우물엔 와인이 말랐어. 모래뿐이지.

- 정신 때문이 아닐까요? 잃어버린 몸을 찾아 떠도는 유령 같은.


남자가 패널에서 수면 캡슐 어드레스를 찾아 메뉴를 열었다. 그리고 오픈을 눌러 잠시 바라보다가 그중 하나의 소거 탭을 눌렀다. 여자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보았다. 남자는 경건하게 자세를 잡아 앉고는 유리벽 너머 하나의 캡슐이 레이어의 어드레스를 나와 라인을 타고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하지 말아요.


여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남자를 제지했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캡슐이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콘트롤 룸은 원형으로 이루어진 돔이었다. 수많은 수면 캡슐들의 위치 어드레스가 방사상으로 중첩된 레이어가 돔의 각 부분을 빽빽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육신이었다. 그중 하나의 숫자가 빛을 선으로 바꾸며 이동하고 있었다.


-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딸이에요.


묵묵히 캡슐을 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듣기만 할 뿐 여자 쪽으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캡슐 어드레스 12132, 루미 오코너. 소거 프로세스를 진행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적막한 콘트롤 데크에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렸다.


- 승인한다.


캡슐 어드레스 12132, 루미 오코너의 소거를 진행합니다.


삐이…


캡슐에 이어진 튜브가 하나씩 분리되고 캡슐 바닥의 공간이 열리며 안에 채워졌던 액체가 분출되었다. 텅 빈 캡슐에서 백 년의 시간을 숨 쉬던 육신에서 생명 징후가 사라졌다.


텅!


데크를 울리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완전히 열리고 정신이 사라진 육체가 어두운 심연으로 추락해갔다.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그 순간 먼 우주의 어느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별 지우개 함선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빛으로 변하여 새카만 공간을 하얗게 밝힌 함선은 어둠 속으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텅 빈 캡슐이 제 위치로 돌아갔다. 여자는 남자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드레스 12133 다종 말레나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어드레스 12134 마사 테일러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어드레스 12135 스미스 워커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센터 시스템의 프로세스 알림이 마침내 끝났다. 콘트롤 데크에 적막이 돌아오고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97, 98, 99… 백 년을 유지해온(살았던이라고 하려니 저들은 과연 살아있었던 걸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흔아홉 명의 시간이 완전히 멈춘 것이다.


- 신연방 역사 최초의 제노사이드를 기록했군요. 당신은 히틀러 같은 학살자로 후세에 기억될 겁니다.


남자가 입을 열려다가 문득 멈추고 엘리를 보았다.


- 차가운 우주를 떠돌다가 어느 별의 인력에 끌려 들어가 이름 모를 별에 추락하여 무덤이 어딘지도 모르고 타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 그래도 생명이에요.

- 맞아요. 아주 소중한.

-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 숨을 끊어요?

- 저들은 인스톨을 결정한 후부터는 스스로도 삶이란 것에 미련을 버렸을 겁니다.

- 관리자님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아요? 저들 중 얼마나 돌아오지 못할 거로 생각하고 수면체가 됐을까요.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마다 상황은 다 다를 거라고요.


남자는 관리자였다.


- 생각해봐요. 돌아와도 아는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만 오롯이 세상에 남아있다면.


의자에 묶여 담담히 그의 말을 들으며 엘리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위기보다 휴머노이드가 되어 백 년의 시간을 보내고 깨어나 센터를 나섰을 때 어디로 가야 할까에 집중했다.


세 개의 인공 달이 떠 있는 밤. 신연방의 철저한 계획과 관리로 아직도 쏟아질 듯 깨끗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천천히 걸었다. 가슴 벅찬 감동이 느껴졌다. 별 지우개 조종사와 함께한 지난 100년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너무나도 먼 여행이었다. 아 맞다!


- 맞아. 조종사! 조종사가 있어요. 휴머노이드들은 혼자가 아니었어. 백 년의 시간을 함께한 우정 혹은 사랑, 혹은 전우애든 그들에게는 연대가 있어요. 조종사는 돌아오잖아요.


관리자가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돌아올 수 없어요. 프로젝트는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어요.

- 무슨 말이에요? 불법으로 진행된 거라고요?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별 지우개 프로젝트를 아는 사람은 프로젝트를 계획한 사람, 신연방에서 돈을 받은 관리, 그리고 돈을 댄 기업, 휴머노이드와 조종사, 그리고 나와 당신.


- 아…


순간 엘리의 등줄기로 소름이 지나갔다. 하지만 표정을 최대한 지우고 말했다.


- 그들은… 돌아와서는 안 되는 거군요.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왜 나를 강제 수면했죠? 어차피 당신은 나도 죽…


관리자가 엘리를 보았다.


-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 무슨 말이죠?

- 오늘이 지나면 나는 당신을 다시 수면 캡슐에 넣을 겁니다.


관리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소울 드라이브를 들어 보였다. 그 드라이브는 휴머노이드를 인스톨하는 장치였다.


- 나더러 거기 들어가라고요?


관리자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 지금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인원 중 휴머노이드 아흔아홉 명은 센터에서 소거되었고 조종사는 함선의 자폭 장치가 가동되어 각자의 위치에서 소멸했을 겁니다.

- 아…


엘리는 한숨이 터지는 걸 막지 못하고 머리끝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이것은 두려움을 넘은 공포였다.


- 센터의 캡슐에서 수면 중이던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와 어딘지 모를 먼 우주에서, 혼자 무슨 임무인지도 모를 임무를 수행하던 조종사 아흔아홉 명. 모두 198명이 한순간에 사라졌군요.


엘리가 숫자를 나열했다. 그리고


- 아! 나머지 두 명… 두 명은 어디 있죠?


관리자가 한숨을 내쉬고 유리벽 너머 어딘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관리자를 보던 엘리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두 명이 누구지? 맞아. 휴머노이드였어. 처음 인스톨에 성공한 이룬.


- 이룬?


관리자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 함선은 자폭했다면서요. 이룬은 돌아와 있나요? 이룬 말고도 먼저 인스톨 된 사람도 있었어. 그 사람은요?

- 잘했어요. 엘리. 당신은 역시 내 생각대로군요.

- 생각대로?

- 당신의 두뇌는 특이점이 있어요. 기억이 쌓이는 게 아니라 나열되는 두뇌입니다.

- 아… 내가 그랬군요.

- 맞아요. 기록하고 재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췄어요.

- 뭐, 좋아요. 그렇다 치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 조종사 중 한 사람은 살아있을지도 몰라요.

- 누구죠? 그 함선 조종사?

- 그래요. 그의 생사가 아직 분명하지 않고 그래서 두 명의 휴머노이드. 총 세 명이 생존하고 있어요.

- 맞아. 먼저 인스톨했다는 휴머노이드가 주린인가 그랬어요. 그리고 이룬, 기주. 백 번째 별 지우개.

- 정답!




9. 그리고 헤어짐


이룬이 창고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찰리가 불이 켜진 창고로 들어섰다. 아빠가 앞서가려고 하자 이룬이 옷자락을 당기고 라이플을 겨눈 채 들어갔다. 아빠도 이룬을 따라 들어섰다.


- 찰리, 키퍼 가동해.


찰리가 키퍼를 가동하자 곧 생체 신호 감지기가 가상 스크린에 떴다. 찰리가 이룬을 돌아보고 이룬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호가 강해지는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 아빠, 누가 쓰러져 있어!


아빠가 다가가 쓰러진 사람을 관찰하는 동안 찰리가 옆에서 아빠를 보조하고 이룬이 신중하게 라이플을 들고 기다렸다. 아빠가 찰리에게 쓰러진 사람을 스캔하라고 지시했다. 찰리가 연둣빛으로 그의 몸을 스캔하고 우측 허벅지에 크게 물린 자국을 찾아냈다. 바닥을 살펴본 이룬이 추측을 말했다.

- 늙은 하이에나가 어딘가에서 이곳으로 물고 온 거 같아요. 찰리, 저 상처 하이에나 이빨 자국 맞을까?


데이터를 검색한 찰리가 하이에나에게 물린 상처 이미지를 찾아 대조했다. 곧 일치 판정이 났다. 아빠가 어때 보여? 라고 묻자 찰리가 출혈이 심해서 지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빠는 창고의 구급함에서 도구를 꺼내어 상처 부위에 대자 나노봇이 투입되어 상처의 조직을 재생하고 찢긴 부위가 진한 자국만 남긴 채 아물었다.


- 나머지는 집에서 하자. 누군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룬이 고개를 끄덕이고 찰리가 쓰러진 사람을 안아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정도 응급처치가 끝나고 누워있는 남자를 이룬이 바라보았다.


- 저 남자는 누구기에 우리 창고까지 저 몸으로 왔을까?


* * *


커뮤니티와 통신을 시도하다가 라인 상태가 나빠 접속이 안 되자 아빠가 엄마와 외출 준비하며 이룬에게 말했다.


- 경로를 따라 조사해보니 늙은 하이에나가 물고 온 거 같아. 사파리 보호 빔이 뚫린 것 같은데, 가서 알아봐야지.


아빠는 사파리 문제를 커뮤니티 관리자와 상의하려고, 엄마는 필요한 물품을 사려고 두 사람이 커뮤니티에 나갔다. 이룬이 찰리를 같이 보내려고 하자 아빠가 마다했지만 이룬이 기어코 찰리를 함께 보냈다. 당신이 관리자 만나는 동안 그 많은 생필품에 식료품까지 어떻게 챙기냐고 엄마가 말하자 아빠가 그러네. 하여 이동 트레일러를 타고 집을 나섰다.


신연방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목장과 공장 등 생산시설이 커뮤니티를 감싸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룬의 목장은 22커뮤니티에서 트레일러로 2시간 거리에 있었다. 그 생산 구역에 근접하여 몇 개의 사파리가 있었고 사파리에는 지구에서 탈출할 때 같이 데려온 동물들이 자연생태계를 스스로 이룰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지구에서 인간들과 함께 탈출한 동식물 중 90%의 개체가 우주여행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생태학자들은 동물이 죽을 것을 대비해 미리 DNA를 추출 배양하는 등 개체 수 복원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결국 사자 호랑이 등 자연의 최상위 포식자는 극히 일부의 개체만 복원에 성공하여 특별한 사이트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에나들은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며 신연방 사파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점점 더 영악해져 각 사파리에서 보호 빔을 훼손하고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일이 빈번해졌다.


아빠 진과 엄마 마리에는 이동 트레일러에 앉아 구출한 남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 그 남자 누굴까.

- 글쎄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하고.

- 맞아! 나도 어디서 본 것 같아.

- 당신도 그래? 찰리 인물 검색에서 비슷한 사람이 있어?


검색 결과 매칭되는 인물이 없습니다.


- 데이터에 없는 사람이 있다고?

- 진 그게 가능해요?

- 글쎄. 찰리 데이터에 없다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거야?


두 가지 케이스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식민지 행성 소속 생명체입니다. 제가 접근이 가능한 네트워크의 데이터는 신연방에 국한되어있습니다. 둘째는 신연방 네트워크에서 데이터가 삭제되었거나 숨겨진 경우입니다.


- 숨겨져?

- 진? 진! 진….


숨겨진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는 동안 창밖을 보던 마리에가 다급하게 진을 불렀다. 마리에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진이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의 눈동자로 어마어마한 태풍이 들이닥쳤다. 자기 폭풍이었다. 한 번 발생하면 한동안 통신망을 마비시키고 중형 커뮤니티와 인근의 소형 중력 돔을 무기력하게 하는 초자연 재해.


자기 폭풍은 중력 증후군, 아직 그 종류가 다 밝혀지지 않은 세균과 바이러스, 원시 지구에서나 나올 법한 원주 생물들이 일으키는 질병, 사건 사고와 함께 신연방에서 커다란 피해를 일으키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나마 커뮤니티나 목장에는 자기 폭풍의 발생이나 침입을 막아주는 패러데이 실드나 워터 월 같은 장치가 있었지만 이런 황야에서는 피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저런 크기와 속도라면.


- 아…. 저런 건 처음 봐.


평소엔 자기 폭풍 발생의 규모와 시기를 파악해서 각 커뮤니티 단위로 주의 예보가 발령되었는데 이런 기습에는 속수무책이다. 위기를 감지한 찰리가 트레일러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여 다가오는 폭풍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폭풍의 규모가 너무 커서 회피 불가능했고 진행 속도는 이미 트레일러의 최대 속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영향권에 들어간 트레일러가 극심하게 요동쳤다.


- 찰리, 이룬에게 마지막 통신을 남겨.


진이 모든 걸 포기하고 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리에가 진의 손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


- 이룬… 부디 행복하기를.

- 이룬… 네가 우리 딸이어서 행복했어. 우리 나중에 보자.


찰리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아 최고 속도를 냈지만, 꽁무니를 아슬아슬하게 물고 달리던 폭풍이 마침내 트레일러를 집어삼켰다. 순간적으로 들어 올려진 트레일러는 까마득하게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폭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폭풍의 회오리 바깥으로 맹렬한 스파크가 일어나며 주변을 온통 태우고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했다. 자기 폭풍이 지나간 며칠 후 통신망이 회복되고 이룬은 찰리의 마지막 통신을 받았다. 며칠 동안 오지 않는 부모에게 걱정이 앞섰지만, 간혹 잡히는 통신에서 거대한 자기 폭풍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마도 그것에 발이 묶여 커뮤니티에서 며칠 지내다 오려나 싶었는데…


이룬이 부모의 흔적을 찾아 현장으로 갔다. 폭풍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 왕복하며 흔적을 찾았지만, 그저 길고 새카맣게 폭풍이 휩쓸고 간 폐허만 남아있을 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이룬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식탁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 저기….


쓰러져 있던 남자가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다리를 보니 상처는 잘 치료가 되어 움직임에 문제가 없어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나온 남자가 식탁에 앉아있던 이룬을 발견했다. 다가와 불러보았지만 이룬이 대답하지 않자 어깨를 툭 치며 불렀다.


- 저기요?


그때 이룬이 풀썩 쓰러졌다.


- 어? 이봐요?


* * *


- 괜찮아요?


이룬의 머리에 적신 수건을 얹던 그가 이룬이 눈을 뜨자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괜찮다. 무엇이 괜찮은 걸까. 아빠 엄마 찰리… 갑자기 가족을 모두 잃게 된 이룬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생각하던 이룬이 그에게 처음 한 말도 같았다.


- 아, 당신… 괜찮아요?


이룬의 말에 그는 대답 대신 적신 천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촉촉한 물기가 이룬의 입술을 가만히 적셨다. 이룬이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남자가 일어나기 쉽도록 몸을 받쳐주었다.


- 신연방에서 다녀갔어요.


주방에 나가 의자에 앉은 이룬에게 남자가 말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기의 로봇이 보였다. 신연방에서 연락이 왔었다. 자기 폭풍에 희생된 아빠 엄마를 애도하며 신연방 기금에서 보상금이 바우처로 지급될 거라는 것과 지금의 집에 그대로 살 것인지 이주를 원하는지 등을 물었다. 아빠 엄마와 찰리와 함께했던 곳을 떠나기가 싫어 그대로 살겠다고 하자 신연방 자산으로 희생된 가족의 노동력을 대체할 13타입 패밀리 로봇 두 기를 지원해줄 거라고 말했다.


두 패밀리 로봇에게 아빠 이름 진과 엄마 이름 마리에를 붙여준 이룬이 진은 목장 일과 키퍼 및 가드 역할을, 마리에는 집안일과 목장 전반의 관리 역할을 지정해주었다. 진과 마리에는 신연방에서 목장에 관련된 프로토콜을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도착했기에 처음부터 오래 해온 것처럼 익숙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두 패밀리 로봇에겐 이미 목장의 지형과 건물, 내부 구조 등이 사전 입력되어 있어 물건 하나의 위치는 물론 창고들과 비품, 양들의 숫자나 상태까지 원래 같이 살아온 것처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룬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생산성을 유지하려는 신연방의 정책 때문이었다.


- 이름이 뭐예요?


아, 혹시 커피가 있나요? 이름을 묻는 말에 커피를 찾는 남자에게 마리에가 자신이 만들겠다고 했다. 남자가 고맙다고 하고 이룬에게도 마시겠냐고 물었다. 좋다고 이룬이 말하자 마리에에게 두 잔 부탁해요. 라고 했다. 커피를 앞에 두고 남자는 자신의 이름은 이기주인 것 같은데 이름을 빼고는 나이나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찰리의 스캔 상으로는 허벅지의 물린 상처 외에 다른 곳의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 하던 이룬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순간 다시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자신을 기주라고 말한 남자는 이룬의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 아빠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 아…. 그래서 그랬군요.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잠깐씩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을 돌봐주던 분이 계셨다고 기억했다.


- 엄마였어요.


기준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어디 갈 데는 있어요?

- 그것도 모르겠어요.

- 괜찮으면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머물러도 돼요.

- 고마워요. 그럴게요.


기주… 이룬이 그 이름을 입속에서 불러보았다.


* * *


기주는 목장 일에 금세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룬이 보기에는 이런 일을 전혀 해보지 않은 손이라 처음엔 매우 어설펐다. 양들을 엉뚱한 곳으로 몰거나 다른 사료를 보급하기도 했는데 기주의 주변엔 진이 붙어서 기주의 어설픈 콘트롤을 보조했다. 이룬과 기주가 함께 생활한 지도 6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사이에 둘 사이는 무척 가까워져 같이 식사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식사하며 영상을 시청할 수 있도록 마리에가 커다란 가상 스크린을 식탁 앞에 띄우고 주변에서 서빙을 한다거나 차를 끓이는 등 두 사람을 위한 서비스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스크린에 행성 관련 뉴스가 지나갔다.


3커뮤니티 부근 어딘가에서 행성 바이러스로 인한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는 뉴스. 하이에나가 출몰하는 지역인 22커뮤니티와 27커뮤니티에서 하이에나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신연방에서 충분한 보상이 주어져 유족들 생활이 전보다 풍요로워졌다는 등, 하지만 생명은 소중하니 대비를 잘해야 한다는 당부. 그리고 자기 폭풍에 관한 뉴스.


이 뉴스가 나올 때는 마리에도 하던 일을 멈추고 뉴스에 집중했다. 이룬의 슬픈 감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기주는 그런 이룬과 마리에 사이에서 묵묵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다시 스크린으로 가져갔다. 뉴스가 지나고 광고가 시작되었다. 광고에서 APS라는 기업이 부유 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기 폭풍, 하이에나, 중력계 질환, 바이러스 확진,

부유 돔엔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안전한가요?

부유 돔은 인간에게 딱 맞는 중력이 가동됩니다.

이제 소개하는 바다 뷰

CT 12-A 구역의 커뮤니티를 주목하세요.

당신이 가진 것들로 당신을 누리세요.

시간은 눌리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APS를 만나세요.


영상에서는 아름다운 수평선 뷰에 태양이 지고 세 개의 달이 뜨는 모습 사이로 건물 지어지는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찰랑거리는 파도가 지나가고 낭만적인 삶을 누리는 모습과 APS의 기업 로고, 라이크 어스라는 슬로건도 지나갔다.


- 라이크 어스….


기주는 자기도 모르게 슬로건을 중얼거렸다. 그런 기주를 보며 이룬이 물었다.


- 기주. 부유 돔에서 살고 싶어요?

- 아, 아니에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서.

- 아, 어쩌면 부유 돔에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네.


기주가 이룬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이룬이 마리에에게 스크린 오프를 지시하고 앞에 놓인 잔과 디저트 접시를 들고 일어날 때 기주도 마침 잔을 들고 일어서다가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서게 되었다.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당황하는 이룬을 보니 문득 기주는 이룬이 무척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이룬의 눈을 바라보며 기주가 말했다.


- 이룬, 키스해도 될까요?


이룬이 기주를 보았다. 그 눈에 담긴 기주는 하얗던 얼굴이 적당히 그을려 보기 좋은 빛으로 황금빛 눈동자 안에 이룬을 가득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매일 아침을 기다리는 태양처럼 아름다운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이룬이 자신도 모르게 기주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보드랍고 따뜻해서 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기주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 감지 말아요.


이룬이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기주는 가만히 이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당신이 눈을 감으면 세상이 온통 어두워질 것 같아.


이룬이 눈을 뜨고 말했다. 기주의 황금빛 눈동자가 이룬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이룬, 저는 아마도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룬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기주가 다시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할 때 이룬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막고 말하지 말아요. 라고 했다. 기주는 가볍게 웃으며 하지 말라는 게 많군요. 하고 이룬을 가볍게 안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이룬은 곁에서 잠들어 있는 기주를 보았다. 함께 지내온 모든 순간이 영상이 되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기주는 심성이 착하고 겉으로는 단단한 남자였다.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 과거에서도 그는 역시 그랬을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 이룬이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자기 폭풍에 부모님을 빼앗기고 처음. 이룬은 다시 잘살아 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 일어났어요?


눈을 뜬 기주가 이룬을 보고 싱긋 웃었다.


- 머리 아픈 데는 괜찮아요?

- 괜찮아요. 생각보다 머리가 단단한가 봐요.


기주의 말에 이룬이 활짝 웃었다. 그런 이룬을 보며 기주도 같이 웃는다. 마리에가 커피와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좋은 꿈 꾸셨나요? 이룬님 기주님.


트레이를 침대에 내려놓은 마리에가 기주에게 다가가 머리를 보여달라고 했다. 기주의 뒷머리에 작은 상처가 보였다. 지난밤에 기주는 이룬에게 밀려 침대에서 떨어지며 머리를 부딪쳐 기절했었다. 기주는 잠깐 충격을 받은 거라고 했지만 이룬이 부르는 소리에 달려온 마리에의 스캔으로는 기주가 기절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기주는 머리를 부딪쳐 충격을 느끼면서 뭔가 아련하게 떠오르다가 마리에의 스캔과 응급처치에 정신을 차렸다. 잠깐이지만 기주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눈앞에 있는 걸 보았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몇 층 높이나 되는 거대한 공간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설득하려고 하는 모습도 있었다. 과거에 자신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는데 금세 사라져서 아쉬웠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룬을 보며 곧 마주 웃어주었다.


* * *


도끼로 장작을 패던 기주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눈을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룬이 그런 기주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미소 짓던 기주가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뭔가가 이룬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룬은 기주가 다른 곳을 보자 같이 눈을 돌리고는 곧 눈동자에 당황과 공포의 감정을 가득 담았다.


- 이룬! 달려요! 어서!


기주가 도끼를 들고 이룬 쪽으로 맹렬히 달려갔다. 이룬은 기주를 향해 모든 힘을 이끌어 내달렸다.




10. 씨앗


‘정답이라…. 그럼 저 사람들까지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관리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가 문득 또 하나의 사건을 떠올렸다. 자신이 최초로 수면 캡슐 출산에 성공한 이룬의 아이.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 * *


90년 전, 이룬을 인스톨하기 전날, 아이를 가진 상태로 가수면에 들었던 이룬에게서 아이를 먼저 출산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 아이요? 세상에… 왜 내 첫 인스톨 케이스가 이렇게 고난도죠?


관리자가 절망에 빠진 엘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를 받는 건 우리 직원이 할 거니까 엘리는 인스톨에 집중해줘요.

- 아니 관리자님. 저 같은 애가 무슨 애를 받아요. 그건 모르겠고 바이탈이 문제라서. 일단은 저 산모 바이탈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인스톨은 신연방 역사상 단 한 건도…


엘리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 아니 뭐 거의, 거의 한 건도 없을 거라고요. 그렇단 이야기는 그만큼 시도가 없기도 했지만 있었다고 해도 거의 실패했을 테니 케이스에서 뺐겠죠. 저 이래 봬도 신연방 대학 수석이에요.


엘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인스톨이라는 작업이 그만큼 정교하고 어려운 작업이라 수면센터 담당자인 타이머들은 엘리트 중 엘리트가 뽑혔다.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직업군이고 그만큼 대우도 최상급. 아마 엘리만 해도 큰 혜택을 받아 부유 돔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 엘리, 부디 침착하게 그 좋은 머리를 써요. 어떡하면 산모의 바이탈에 무리 없이 인스톨을 진행할 수 있을지.

- 있었으면 벌써 써먹었죠… 아!


관리자가 엘리의 마지막 말에 집중했다.


* * *


다음 날 오후 일단의 인물들이 비행정으로 센터에 도착했다. 엘리가 이룬의 캡슐을 소환했다. 이룬의 배는 이미 출산 징후가 뚜렷하게 불러 있었다.


- 아이가 무척 클 거야.


엘리가 가만히 셈을 해가며 말했다. 보통 아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지런히 움직일 것을 권했다. 그건 아기를 키우기 위해 보통보다 먹는 양이 늘어나는데 대신 몸이 힘드니 움직이기를 꺼려서 아기가 과하게 성장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큰 아이는 출산 때 큰 고통을 수반하고 심지어 산모를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아무리 과학, 의학이 옛 지구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출산은 자연 분만을 권했다. 그건 모체에서 성장하는 동안 익히게 되는 학습이 아기의 체질을 더 강하게 해준다는 오랜 학설이 아직도 뒤집히지 않아서였다. 이룬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캡슐에서 움직이지 않고 생존을 위한 영양분을 공급받았지만, 아기에게 가는 탯줄에는 별도의 튜브를 달아 아기를 위한 영양분을 공급했었다. 당연히 아기는 정상보다 무척 성장했을 것이다.


- 하지만!


숨을 고른 엘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 그렇다고 배에 레이저를 대는 건 바이탈을 더 흔들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다소 촉진제를 쓰더라도 자연 분만을…

- 자연 분만이요?


같이 온 무리 중 한 여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관리자가 그를 바라보며 엘리를 가리켰다.


- 카트린, 엘리는 최고의 천재 그룹이에요. 엘리의 말을 좀 더 들어보고 판단합시다.


카트린이라고 불린 여자가 곧 고개를 숙이며 네라고 했다. 엘리가 관리자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 아 당신이 무리의 대장이었나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엘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생각해봐요. 그분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했고 무엇을 지켜주었는지.


엘리의 말에 집중하던 사람 중 하나가 아! 하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자신을 보자 머쓱했는지 흘러내린 머리를 그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고 다시 엘리를 보았다.


- 모성애는 무엇보다 큰 사랑이니까요. 엄마의 힘을 빌려보자는 거죠.

관리자가 박수를 쳤다. 그 박수에 사람들이 곧 출산 준비에 들어갔다. 혹시 몰라 촉진제를 챙겨온 사람은 그 아! 라고 한 사람이었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엘리의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그만큼 엘리도 불안하기에 스스로 용기를 주려고 하였는지도 몰랐다.


- 사실 출산과 인스톨은 상극인데 거기에서 실패를 예방하겠다고 시작한 팀들은 전부 실패에 성공했어요.


까지 말한 엘리가 잠시 눈을 감았다. 순간 센터 콘트롤 데크에 정적이 맴돌았다. 관리자의 지시가 내려진 후로는 그 누구도 엘리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잘 따르는 거든지, 잘 따르게 한 거든지.


몇 분 후 눈을 뜬 엘리가 다시 입을 열자 콘트롤 데크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동안은 고요하게 너울만 일다가 밀려와 부딪치는 순간 모든 것이 살아나는 것처럼 엘리의 목소리가 세팅에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에 리듬을 주는 것 같았다.


아니 관리자는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엘리의 말이 공간을 리드미컬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순간 엘리는 신연방 최초의 출산 후 인스톨을 위한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된 듯했다. 옛 지구 성애자인 관리자에게 무엇보다 아쉬웠던 게 바로 교향악단이 사라진 것이었다. 지구를 탈출한 인원은 극소수였고 그중 악기연주가 가능한 사람은 더 적었다. 하물며 마에스트로 급 지휘자라는 존재는 동물이 멸종하듯 멸종해버려 지구 박물관에 보관된 진공 전시관의 LP에서나 볼 수 있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 기록을 뒤져보니 모두 일곱 번 시도가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 실패한 사례를 기록에 남겼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순간 사람들이 다시 하던 일을 멈추고 엘리에게 시선을 모았다. 사실 누구에게 한 질문인지 몰라서였지만.


- 혹시 제왕…절개?


누군가의 대답이 있자 엘리가 정답!이라고 외쳤다.


- 맞아요. 일곱 차례의 제왕절개가 시행되었고 일곱 차례 산모 모두 인스톨 실패 후 출산과 인스톨의 부작용을 못 견디고 사망.


긴장감이 실내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의학계의 디렉터급 직업군이거나 센터 관련자, 캡슐 타이머 등 이 계통에서 꽤 실력을 쌓은 이들이기에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 심지어 아기까지 사망해서 관련자들에게 3호 달 40년 노역형이 내려졌어요. 물론 일이 년 후 거의 사면 됐지만.


이번엔 협박이다. 신연방에서 인구는 무척이나 중요한 이슈였다. 기껏 늘려놓으면 중력에 눌려 죽고 자기 폭풍에 휘말려 죽고 희한한 바이러스에 후각 기능을 상실하다가 결국 심장마비나 폐색으로 죽기도 하고 최근엔 심심찮게 하이에나까지 인구수를 줄이는 데 동참했다. 이런 시국에 산모의 죽음이야 어떻게든 커버가 되겠지만 아기의 죽음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 그래서


엘리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엘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수심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보였다.


- 아무도 실행한 적이 없는 방법, 즉 자연 분만해보자는 겁니다. 과연 가수면 상태였던 엄마가 아기를 지켜줄 것인지. 또한 산모는 자기 자신을 지킬 것인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이왕이면 안 갔던 길로 가봅시다.


엘리의 조금은 긴 연설이 끝나자 관리자를 시작으로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어디서 봤는지 엘리가 청중을 향해 연주를 막 끝낸 지휘자가 돌아서서 인사를 하듯 멋들어진 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에 관리자는 또다시 놀랐다. 그리고는 엘리를 유심히 기억 안에 집어넣었다.


- 옥시토신 투여할까요?


준비를 마친 사람이 보고하고 튜브에 주사제를 투입할 준비를 했다.


- 옥시토신이요?


엘리가 되물었다.


- 자궁수축을 촉진하는 호르몬입니다. 투입할까요?


엘리가 잠시만요. 라고 대답하고 순식간에 옥시토신이라는 단어를 두뇌의 전극에 연결된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찾아냈다. 사랑의 호르몬. 좋아. 옛 지구 식이네. 옥시토신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정연하게 엘리가 착용한 데이터 링크를 통해 눈앞에 띄워진 스크린으로 전송되었다.


자궁수축을 유도하여 태아를 자궁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돕는다. 아이에게 자신감과 사랑을 북돋아 주는 호르몬. 사회성과 신뢰감을 형성시켜 주고 모유 수유에도 도움이 된다. 안 쓸 이유가 없다. 오랜 시간 구축된 지식과 케이스를 바탕으로 한 정보가 엘리의 브레인 드라이브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이룬의 수면 캡슐에서 전송된 데이터를 가상 스크린에 띄워 바이탈을 체크했다. 바이탈은 가수면 상태로 가장 안정적인 상태였다.


- 자, 이분이 무슨 죄를 짓고 휴머노이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역사를 시작해봅시다.


엘리가 손뼉을 짝 치며 모두에게 당찬 선언을 던졌다. 옥시토신을 들고 엘리의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엘리의 손짓에 따라 튜브에 호르몬 키트를 투입했다. 호르몬은 튜브에 투입되자마자 분해가 시작되며 투명한 관을 따라 이룬의 몸으로 들어갔다. 엘리가 이룬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했다. 메디컬 디렉터가 이룬 곁에서 이것저것 조언하고 출산을 도울 준비물들이 제자리에 놓였다.


- 시작이에요.


메디컬 디렉터의 말에 엘리가 이룬의 얼굴을 보았다. 이룬이 눈을 뜨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런… 깨어났어.


엘리가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관리자가 다가와 스크린을 보고 말했다.


- 인간은 참 신비한 존재야. 가수면이 어떻게 풀렸지.

- 가수면을 스스로 풀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죠?


수면센터 타이머였던 남자가 엘리에게 의문을 던지자 엘리가 글쎄요. 라고 말하고 브레인 드라이브를 검색했다.


- 세상에… 가수면을 스스로 푼다니… 그럼 수면센터에서 수면 중인 사람 중에도 저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을까?


기록을 찾아보던 엘리가 수면 중에 스스로 깨어난 사례가 한 번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이미 수백 년도 더 된 사건으로 수면센터 초창기의 일이고 그 일로 인해 장치와 약품이 발전을 거듭해 이후로는 단 한 건도 이런 케이스가 없었다. 현대 수면센터의 기록으로는 불가능한 케이스를 이룬이 만들어낸 것이다.


- 산모의 신체에서 자체 옥시토신 반응이 활성화됩니다.

- 태아 바이탈 모두 정상입니다.


이룬과 태아에게 연결된 스크린을 모니터링하던 조직원이 보고했다. 투입된 호르몬과 별개로 이룬에게서 확연하게 자체 호르몬 분비가 시작되었다.


- 출산할 걸 알아요.


엘리는 마치 자신을 보듯 인상을 쓰며 카메라를 보는 이룬을 보고 감정에 무엇인가 낯선 기운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이룬은 캡슐에 고정된 상태로 움직임이 제한되는 틈에서 사력을 다해 아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사력을 다해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데크를 가득 메웠다.


끄으으응 으아아아악


이룬의 안간힘을 다한 비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은 모두가 이룬의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가 되어 간절한 에너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리 없이 뜨겁고 열정적인 응원을 모아 결국 이룬은 아기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메디컬 디렉터가 손을 뻗어 아기를 받아냈다. 그가 이룬에게 아기를 보여주었다.


- 아들이에요. 축하해요.

- 크…지우…이지우


이룬이 중얼거리며 아기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손은 고정 장치에 묶여 닿을 수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아기를 만져보려고 하던 이룬의 손이 툭 떨어졌다.


삐이이이…


- BP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바이탈을 체크하던 메디컬 엔지니어가 긴박하게 소리 질렀다. 엘리가 콘트롤 패널에서 긴급 리커버리 프로토콜을 불러내어 이룬에게 연결했다. 연둣빛이 이룬을 감싸며 캡슐에서 투입된 수많은 나노봇이 이룬의 신체 곳곳으로 움직였다.


- 아기도 떨어져요. 아기가!


엘리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아기가 있는 소형 캡슐에서도 이룬 것처럼 연둣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노봇이 투입되고 아기의 몸에서도 리커버리를 진행했다.


- 안정됐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니터링 하던 메디컬 엔지니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하자 콘트롤 데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엘리에게 다가온 관리자가 수고했다며 엄지를 추어올렸다.


- 이제 인스톨해야죠.


엘리가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이룬을 인스톨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가상의 콘트롤 패널 위에서.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과 명쾌한 판단으로 진행된 엘리의 인스톨 프로세스는 주변에서 보는 이들에겐 마치 지휘를 위해 허공으로 손을 휘젓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한쪽에서 저게 처음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 과정이 엘리에게조차 그 순간을 아주 익숙하게 느껴지도록 했지만.


인스톨이 완료되었습니다.


정식 수면 인스톨에 이어 휴머노이드 인스톨도 성공을 알리는 시그널이 떴다. 엘리가 이룬의 얼굴을 보았다. 모든 짐을 덜어낸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관리자가 손뼉을 치며 성공을 축하했다.


- 잘했어요. 엘리, 아 참 한 사람 더 해줘야 하겠어요.

- 네?

- 아 아기… 지우를… 아니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관리자가 눈짓을 하자 메다컬 엔지니어가 뒤에서 다가와 엘리에게 마취 캡을 씌웠다. 순간 엘리의 눈이 동그랗게 바뀌었다가 고개를 푹 꺾으며 쓰러졌다. 그런 엘리를 받아든 요원이 준비된 수면 캡슐로 엘리를 옮겼다. 동시에 옆에서는 아기를 소형 수면 캡슐에 올리고 아기와 엘리의 수면 인스톨이 진행되었다. 모든 작업을 마치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수면 캡슐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수면센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에 빠졌다.


* * *


- 이룬!


이룬이 힘에 부쳐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 기주가 달려들어 이룬을 밀쳤다. 그와 동시에 하이에나가 이룬에게 덮쳐들던 그대로 기주에게 달려들었다.


기주가 도끼를 휘둘렀지만, 하이에나가 그 도끼를 피하며 기주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덤볐다. 한 손에 도끼를 든 기주가 다른 손으로 주둥이를 막으며 사력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지만, 하이에나가 만만히 당할 리가 없었다. 기주와 하이에나가 사투를 벌이는 걸 보며 옆에 쓰러진 이룬이 비명을 질렀다. 기주가 결국 팔을 물려 선혈이 낭자하게 흘렀다.


- 아악! 진! 마리에!


이룬이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진을 찾았다. 주인의 위급함을 감지한 진과 마리에 모두 각자 손에 뭔가를 들고 서로 다른 쪽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마침내 이룬 곁에 도착한 마리에가 몽둥이를 치켜들고 이룬을 보호하고 진이 기주와 사투를 벌이는 하이에나에게 달려들었다. 진이 목책을 지을 때 쓰는 쇠기둥을 치켜들고 엉켜있는 두 존재 중 인간의 채널을 분리하고 하이에나의 채널을 향해 쇠기둥을 내던지려는 순간,


캥!


짧고 강한 신음성이 들리며 도끼에 찍힌 하이에나가 뒤로 쓰러졌다. 마리에가 급히 기주에게 달려갔다. 진이 기주를 스캔하고 마리에가 하이에나에게 물린 팔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던 기주가 다른 팔을 딛고 상체를 올려 이룬을 찾았다.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며 이룬이 기주를 바라보았다.


- 마리에, 기주는 어때?


마리에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기주가 마리에에게 이룬을 돌보라고 말했다.


- 마리에, 나는 진이 치료할 테니 마리에는 이룬을 스캔하고 필요한 처치를 해.


마리에가 이룬을 스캔했다.


- 난 괜찮아. 기주. 지친 것뿐이야. 어쩌려고 그냥 달려들어. 큰일 나려고.


이룬의 말에 기주가 햇살처럼 웃었다.


- 난 이룬을 잃는 줄 알았어.


기주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마리에가 보고했다.


이룬님. 기주님은 물린 상처가 커서 일을 며칠 쉬고 안정을 취하며 치료를 계속해야 합니다. 이룬님은 신체에 상해는 없지만 놀라움과 공포로 인한 멘탈 데미지가 있고 PTSD가 우려되니 며칠간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룬이 말했다.


- 그래. 기주. 며칠 쉬자. 진! 광견병 메디컬 키트도 있어?


목장의 패밀리 로봇에게 기본 키트입니다.


진이 기주를 치료하고 잠시 후 두 사람 두 로봇이 하이에나의 시체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이룬이 진에게 물었다.


- 진, 동물을 죽이면 어떤 형벌을 받지?


3호 달에서 최대 49년간 노역형에 처합니다.


- 세 번째 달…


기주가 이룬을 돌아보며 말했다.


- 동물을 죽여도 벌을 받아?

- 기주. 특히 하이에나 같은 최종 포식자의 개체 수는 전체 생태계에 영향력이 커서 가장 큰 중벌을 받아요.


이룬이 말을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주가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마리에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하늘로 끝없이 올라갈 것만 같은 그곳에 정지위성 하나가 이룬과 기주. 그리고 하이에나를 향해 카메라를 가동하고 있었다. 모든 순간은 감시위성에 의해 신연방의 메인시스템으로 전송될 것이다.


- 이룬, 들어가서 좀 쉬어.


이룬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을 한 번 더 흘깃 보고 마리에의 부축으로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 따라가던 기주가 잠시 멈춰 서서 죽은 하이에나를 한참 동안 보다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기주를 진이 뒤따르며 집으로 걸어갔다. 기주가 진에게 말했다.


- 예외조항은 없어? 이룬이 죽을 뻔했잖아. 정당방위 같은…


처벌은 정상참작이 없습니다. 단지 신연방에서 사망자 가족에게 큰 보상을 할 뿐입니다.


- 사망했을 때만? 그럼 49년 노역형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나?


얼마 전, 관리자가 방문하여 전달한 이벤트가 있습니다.


- 이벤트? 뭐지?


10년 동안 별 지우개 조종사가 되면 최대 49년 노역형까지 대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 조종사?


기주가 진의 말을 곱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10년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야. 이룬에게 잘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 끄응… 어쩔 생각이에요?


엘리가 묶인 손을 움직여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자 포기하고 말했다. 관리자는 와인 잔을 들어 엘리에게 건배하듯 제스처를 하고 한 모금 마셨다. 뭐라고 할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까. 엘리는 도대체 왜 자기가 볼모가 되어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름 신연방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늘 그 자리에서 빛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멘탈까지 탈탈 털려가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었다. 언니. 100년의 잠을 흘러온 지금, 언니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연방 대학을 마치면 몇 년간 커뮤니티에 내려가 의무 근로를 한다. 그걸 끝내면 자유로운 신분으로 초우주 기업에 스카우트되어 돈도 벌고 언니와 행복하게 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타의에 의해 나이만 먹고 말았다. 지금이 몇 년이에요? 엘리의 말에 관리자가 안 세어봐서 모르겠는걸. 요즘은 도통 시간 가는 걸 모르겠단 말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 그들도 모두 죽일 셈인가요?

-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을 텐데?

- 그거야 우리도 뭐 다를 바는 없지 않나요?


관리자가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사악한 기운이 가득 느껴져 엘리를 섬뜩하게 만들어야 정상인데 그의 눈은 전과 다를 바 없이 악한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해 보였다.


- 그들만이 아닙니다.

- 그럼 또 누굴 죽일 건데요?

- 우물에 끼어있는 먼지를 남김없이 씻어낼 생각입니다.

- 터무니없어. 무슨 이익이 있다고 그런 짓을. 옛 지구 좋아하시니 잘 알겠지만 여긴 그 세 배나 되는 별이라고요. 게다가 여기 사는 생명체들은 그 수가 무려…

- 상관없어요.


네? 말이 막힌 엘리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라고 중얼거릴 때 관리자의 말이 이어졌다.


- 우리 직원이 그 우물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성냥이었어요.

- 성냥?

- 직원은 늘 자기의 성냥과 어머니의 우물에 대해서, 불꽃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온갖 곤충들이 밤을 지새우며 짝을 찾는 이야기,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먹이를 유혹하는 나비와 바람에 자식들을 날려 번식을 꿈꾸는 나무들, 어머니는 새처럼 날아 은하계를 떠돌며 따뜻한 우물에서 자는 걸 바랐대요. 침대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 새가 우물을 나와 아침을 먹어요….

- 그곳이 어디예요?

- 여기서 멀지 않은 곳, 우물 공사가 진행 중이던 어느 경로의 은하, 황금빛 뿔이 찬란하게 빛나던 NJ24825. 그 아름다운 워프 터널이 어느 날 들이닥친 나비들에 의해 성냥이 되어 사라졌답니다.

- 워프 터널 공사는 100년 아니지 200년도 더 된 일인데 어떻게 가능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차라리 소(설을 쓰지)…

- 그게 시작이었어요. 헐떡거리는 주전자를 아끼려고 나비들은 우물 공사 예정 경로에 존재하는 성냥들을 소멸시키고 다녔어요. 새들이 날아올라도 받아줄 우물은 없어요. 물론 그 먼 성냥은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만.

- 뭐래

- 바다를 건너는 터널을 만들려면 몇백 배의 주전자를 끓여야 해요. 아마 그들은 그 불씨를 전부 받아내 다른 색종이를 만들고 모든 일을 플랑크톤 수프에 떠넘긴 거 아니겠어요. 의원들이 뭘 알아요. 틀어박혀 문 앞의 일도 관심 없는 나비들. 이건 워프 터널 공사를 맡은 기업 연합에서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지. 나비의 욕심이 만든 비극…

- 그럼 그놈들만 찾아서 죽이면 되지. 왜 전부…

- 나비가 저지른 짓이니 성냥이 갚아야지.


그 말을 하는 관리자의 옆모습은 이상해 보였다. 어두웠다가 평온했다가 다시 어두워지고. 감정의 기복이 말을 하면 할수록 크게 바뀐다. 엘리가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비슷한 성향의 언어 구사를 검색했다. 순식간에 몇 가지 유형이 떠올랐다.


아침 해가 뜨면 우리는 잠에서 깨요. 그러면 깨진 병으로 머리를 쳐요. 머리가 수박이 되는데 수박이 맛있는 거예요. 수박에는 우리가 모르는 성분이 있어요. 그 성분이 우리를 울게 만들어요. 울음이 그치질 않아요. 세상은 아무도 없는 사막. 물이 필요해. 목이 말라요. 누가 나에게 수박 좀 줘요…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스키조 증상과 비슷했다. 오래전에 인간에게서 극복된 정신과적 증상인데 관리자에게 나타난 것이다.


- 그 나비, 아니 그 성냥은 어떻게 탈출했어요?(헷갈려라…)

- 그 나비의 어머니는 말벌이었어요. 훈련 과정으로 우물에서 잠시 나와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우물이 사라진 걸 알았다고 해요. 처음엔 엉뚱한 우물에 도착한 줄 알고 당황했는데 세 번 네 번 성냥을 태우고 다시 돌아와도 늘 그 자리였대. 사막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거지.

- 그럼 어머니가 직원을 구한 건가요?

- 작은 벌이었던 어머니는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우물에 갈 말벌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도 살아야지, 최대한 숨을 참고 가보자는 마음에 아가미를 뻐끔대며 보름을 떠돌았답니다. 남은 성냥은 몇 개뿐. 아껴 먹어도 7일 만에 먹이가 떨어지고 나비는 우주를 떠도는 돌멩이처럼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 막막한 우주를 헤매다가 마침내 비가 내리기 직전 지나가던 화물선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답니다. 그들은 신연방 나비들이었고 성냥의 말벌은 지구로 오게 되었죠. 지구인과 결혼해서 고양이를 낳게 되고. 잔나비는 월급이나 파먹는 루팡이 되어 땅굴에 살아요. 땅굴엔 해가 뜨고 비가 내리면 우물에서 나비가 날아올라요.

- 아…


분명 스키조가 맞다. 신연방의 모든 생명체를 멸살하려는 걸까. 관리자의 망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정말 스키조 환자라서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


- 그래도 엄마를 구한 건 나비, 아니 신연방 소속인데…


엘리가 미련이 남아 어떻게든 관리자를 설득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콘트롤 데크로 들어왔다. 어? 누가? 관리자가 얼른 일어나 엘리의 속박을 풀었다. 속박이 풀린 엘리가 손목을 주무를 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 아빠

- 그래, 어서 와. 곧 올라가는 거지?

- 네. 가기 전에 뵈려고 왔어요.

- 인사해라. 지우. 네 학교 선배 엘리님이야.

- 안녕하세요. 지우입니다.

- 엘리예요.


(지우?) 어디서 들은 이름 같은데 떠오르지 않자 엘리가 당혹해할 때 지우가 인사를 꾸벅하고 방을 나갔다.


- 아빠요? 당신에게 저렇게 어린 아들이 있어요? 백 년이나 지났는데?


관리자가 지우가 나간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엘리는 더 많은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있었고 관리자가 뭐라도 말하는 순간 바로 튀어 나갈 준비했지만, 관리자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남은 와인을 조금씩 마시며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어 엘리가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지도록 만들었다.


- 아니…

- 지우도 캡슐에서 자랐어요. 물론 우리 두 사람보다는 조금 일찍 깨어나도록 했지만.


아니, 왜 이렇게 멀쩡해? 엘리가 참다못해 입을 여는 순간, 관리자도 입을 열었다. 수면? 지우? 아 뭐 그럼, 말은 되네. 중얼거리는 엘리에게 관리자가 다시 속박 도구를 내밀었다. 엘리가 고개를 도리도리하자 관리자가 다시 속박 도구를 앞으로 쑥 내밀었고 엘리는 손을 뒤로 쏙 감추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 싫어요.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어.

- 엘리에게는 언니가 한 사람 있지요?

- 어? 그걸 어떻게 알아요?

- 당신은 엘리 슈타인, 언니는 베스 슈타인. 당신과 쌍둥이. 당신의 생활비를 대 주던 쌍둥이 언니.


엘리의 눈이 아련해졌다. 언니 소리만 나와도 마음이 울적했다. 학비와 숙소는 신연방에서 해주었지만, 생활비는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언니가 커뮤니티에서 일하며 엘리를 뒷받침했다.


* * *


베스는 엘리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둘의 부모는 엘리와 베스가 어릴 때 사고를 당해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도 하이에나가 문제였다. 곁에서 노는 줄 알았던 아이들이 안 보여 두리번거리던 아빠의 눈에 아이들을 항해 몰래 다가가는 하이에나가 보였다.


- 엘리! 베스!


아빠가 다급하게 달려가며 아이들을 부르자 놀던 아이들이 방그레 웃으며 아빠에게 손을 벌리고 달려왔다. 아빠가 아이들의 앞을 두 팔을 벌려 막아서고, 그 상황을 보고 놀란 엄마는 삽을 집어 들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아빠가 뛰어드는 하이에나를 어깨로 밀쳐 물리치는 동안 틈을 노리던 다른 한 마리가 아빠의 어깨를 물었다. 이어 나가떨어졌던 다른 한 마리가 목을 노리고 달려들 때 엄마가 삽으로 하이에나를 쳤는데 하이에나를 정통으로 맞추며 아빠를 위기에서 구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깨를 크게 물린 아빠는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빠를 쓰러뜨린 하이에나가 이번엔 엄마가 휘두르는 삽을 피해서 달려들었다. 하이에나가 엄마의 목덜미를 물고 마구 흔들자 엄마가 맥없이 쓰러졌다. 이 모습을 보던 아빠가 벌떡 일어나 목을 물고 있던 하이에나의 머리를 성한 한쪽 팔로 끌어안고 물어뜯었다. 하이에나는 엄마의 목을 문 채로 아빠의 공격에 버티다가 숨을 거두었지만, 엄마는 이미 목숨을 잃었고 아빠도 결국 숨이 멎었다.


* * *


엘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자신과 언니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니 부모님에게서 두 번의 생명을 받은 것이다. 신연방에서는 두 사람과 두 마리의 하이에나가 죽은 케이스가 없어서 고심하다가 결국 보상하지 않기로 했다. 옛 지구 생태계의 복원을 염두에 둔 신연방 관리자로서 하이에나 두 마리는 두 사람의 목숨만큼 중요한 존재였기에. 엘리와 베스는 많은 사람에게 동정받으며 성장했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 근데 언니가 베스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엘리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관리자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자기 입으로 언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므로.


- 언젠가 당신이 자신을 엘리자베스라고 하더군요. 내가 파악한 당신의 이름은 엘리, 엘리 슈타인. 베스는 뭘까 생각해보다가 조사시키니 언니가 있었고. 그래서 여기에 언니를 인스톨해 두었지요.


관리자가 주머니에서 작은 소울 드라이브를 꺼내어 콘트롤 패널 위에 올려놓았다. 엘리는 또 다른 희망이 생기는 걸 느꼈다.


- 언니를 어쩔 셈이죠?

- 걱정하지 말아요. 언니의 캡슐은 바로 이 센터 어딘가에 있으니까.


관리자가 속박 도구를 내밀자 엘리가 망설이다가 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고리가 나와 엘리의 손을 구속했다.


- 베스 언니를 해치지 말아요. 부탁해요.


관리자의 말이 막 시작되려고 할 때 문이 확 열리며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관리자가 돌아보며 누군가? 하고 묻자 두 사람은 대답 없이 관리자와 엘리 곁으로 다가왔다. 한 남자가 속박 도구에 묶여있는 엘리를 보더니 관리자에게 물었다.


- 당신이 이 센터 타이머인가?

- 당신은 누군데 센터에 무단침입을 한 거야? 센터 무단침입은 노역형 정도로 끝나지 않는 1급 범죄다.

- 그건 알 거 없고, 이 여자는 왜 묶여있지?


ㅍ가 대답하지 않자 한 걸음 더 다가설 때 관리자가 남자를 밀치고 문으로 달아났다. 품에서 핸드건을 꺼낸 남자가 관리자를 쏘려고 하자 엘리가 소리쳤다.


- 악! 쏘지 마요! 그가 죽으면 베스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아!


엘리의 외침에 멈칫한 남자가 핸드건을 내렸다. 엘리의 만류로 관리자가 달아나고 나서 세 사람만 남은 콘트롤 룸에 먹먹한 적막이 감돌았다.


- 누구세요?


엘리의 물음에도 남자는 말 없이 품에서 소울 드라이브를 꺼내어 다른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 뭐 하시는 건데요? 저도 좀 알면 안 되나요?


드라이브를 받은 남자가 데크로 올라가 가상 콘트롤 패널을 펼쳤다. 그 모습을 본 엘리가 말했다.


- 저기요. 여기 타이머가 전데요? 아니, 한때는 저였거든요.

- 에밀, 잠시만.


그 말에 데크 아래의 남자가 데크 위 남자를 잠시 멈추게 하고 말했다.


- 당신이 이곳 타이머였다고요? 그게 언제였죠?

- 뭐 말하기는 좀 이상하지만, 한 백 년 전? 쯤에요.


엘리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희망의 태양이 떠올랐다. 엘리는 남자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자신의 어두운 내면이 따뜻하게 밝아지는 걸 느꼈다. 뽀송뽀송해질 때까지 바라보고 싶고 그가 누군지 무척 궁금해졌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엘리!


- 근데 당신은 누구죠?

- 저는 기주입니다.

- 어? 기주…그 기주?


엘리가 드라마틱한 표정으로 기주를 보았다. 엘리의 말에 기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엘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 저를 아시나요?

- 별 지우개 조종사, 기주님이 맞는다면 네. 이름을 들었어요.

- 아, 백 년 전에 당신이 이곳 타이머였다면 혹시… 인스톨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나요?

- 네. 저는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


엘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주가 급히 물었다.


- 그럼 이룬이라는 사람을 아시겠어요?

- 알죠! 그분 제가 정식 타이머가 되고 처음 인스톨했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 처음이요?

- 네. 걱정 마세요. 신연방 최초로 제가 가수면 상태에서 출산 성공! 휴머노이드 인스톨도 성공! 저 신연방 대학 수석 엘리자베스라고요!


이룬을 생각하던 기주가 엘리의 너스레에 잠깐 마음을 추스르고 데크의 남자에게 먼저 말했다.


- 에밀, 이분에게 부탁해보자. 드라이브를 이분께 드려.

- 네, 기주님. 저는 에밀입니다. 3커뮤니티 수면센터 타이머였고요.

- 아 그래서 그렇게 능수능란하셨구나.


에밀이 엘리에게 드라이브를 건넸다. 하지만 엘리가 묶여있는 두 손을 보여주자 아… 라고 탄식을 뱉었다. 에밀이 기주를 바라보았다. 어떡하나요?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기주가 핸드건을 꺼내 무기에 달린 가상 스크린을 펼쳐 무엇인가를 터치했다. 그리고는 이어,


푸슛!


으악! 소리친 엘리가 묶인 손이 자유로운 걸 보고 말했다.


- 놀래라. 말도 없이 쏘시다니… 근데 신기하네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기주가 무기의 액정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몇 개의 구분 섹션이 있고 각각 인간, 물건, 동물 등의 심볼이 표시되어 있었다. 똑똑한 엘리가 바로 알아들었다.


- 아, 무기의 옵션을 물질로 변경해서 쏜 거구나요?

- 네, 공격자의 신체에 상해를 가하지 않고 무기물만 제거하여 생포하기 위한 옵션입니다. 동물은,

- 하이에나 같은 위험한 동물을 생포하기 위한!


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은 좀 해주시지라고 중얼거리며 엘리가 데크로 올라갔다. 엘리가 콘트롤 패널을 펼치고 드라이브를 세팅했다.


- 아? 이룬님과 또 한 분, 모두 두 분이 계시네요!


스크린을 확인하며 엘리가 말하자 기주가 대답했다.


- 이룬과 주린입니다. 모두 깨워주세요.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센터의 시스템에 드라이브 데이터를 전송해 관련 어드레스를 입력하자 곧바로 뜬 검색창에서 이룬과 주린을 입력했다. 언인스톨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인간의 영혼이란 그 존재 자체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인데 저런 드라이브에 담긴다는 자체가 용납할 수 없는 일 아닌가?


- 저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처음부터 금지해야 했어…

- 네?


문득 혼자 생각하던 기주의 입이 열리고 호기심 대마왕 엘리가 바로 반응했다. 기주가 아닙니다. 라고 얼버무렸다.


- 됐어요.


엘리가 말하자마자 진행 과정을 보고하는 센터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드레스 H-H12542 이룬 스카레이 수면 해제합니다.

어드레스 H-aH12542 주린 아이렌 수면 해제합니다.


곧이어 캡슐이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고 콘트롤 데크로 두 개의 수면 캡슐이 들어왔다. 에밀과 엘리는 긴장된 표정으로 캡슐을 주목하고 있었다. 엘리의 눈에 보이는 두 개의 스크린에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엘리가 보기에 이룬은 처음 보았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수치상으로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인간은 지금까지의 과학으로도 다 풀어낼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존재였기에. 기주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끼며 다가오는 캡슐을 바라보았다. 함께해온 백 년의 시간이 콘트롤 데크에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이이이잉 철컥


마침내 캡슐이 열렸다. 휴머노이드 인스톨과 수면은 과연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거기에 이룬은 출산까지 했다. 엘리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하나 망가진 곳은 없는 것 같고 머리를 휘휘 돌려보았다. 양호.


휴머노이드가 되었던 두 사람의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지나고 결국 기주가 못 참고 말했다.


- 혹시…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왜 안 깨어날까요?


엘리는 누군가를 깨워본 적이 없어서 실제로 그 과정을 본 적도 없었다. 인스톨 되었던 함선 100대 중 돌아온 이는 아직 없다. 특히 관리자가 용도폐기하듯 숨을 끊어버린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는. 이상하네. 프로세스는 문제가 없었는데… 하며 에밀을 보았지만, 에밀도 인스톨 된 휴머노이드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옮기는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 죄송합니다. 지우님. 제가 경험하지 못한 사례라 뭐라고 답을 드려야 할지….


엘리도 에밀도 아무런 답이 없자 기주가 다시 캡슐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 휴머노이드로 인스톨 후 깨어나지 않은 사례가 있을까요? 이대로는 불안하네요.

- 잠시만요.


엘리가 검색을 시작했다. 잠시 눈을 감은 엘리의 브레인 드라이브가 가동되고 수많은 사례가 엘리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눈을 뜬 엘리의 표정은 어두웠다.


- 아니요. 한 케이스도 없어요. 아마도 범죄자들의 인권 문제 때문에 검색을 막아둔 거 같아요.

- 범죄자라니요? 누가 범죄자인가요?

- 네? 원래 휴머노이드는 범죄자가 되는 거 아닌가요?

- 아니요. 이룬은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다른 별 지우개의 휴머노이드들은요? 각자 어딘가의 커뮤니티에서 언인스톨을 시행하지 않았을까요?

- 별 지우개 휴머노이드들은…


에밀이 엘리에게 별 지우개를 말할 때 엘리는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울음이 터진 엘리를 보며 당황한 에밀이 엘리를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 흑, 관리자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엘리를 보며 기주가 문득 짐작 가는 게 있었다.


- 별 지우개의 휴머노이드들은 모두 죽었군.


에밀이 놀라 엘리를 보자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울음이 터졌다.


- 그럼… 기주님. 보스가 유일한 생존자였군요.

- 관리자가 휴머노이드 된 사람들의 튜브를 모두 빼고 이 센터 어딘가로 버렸어요. 아흔아홉 명의 목숨을.

- 엘리님 그렇다면 인스톨과 언인스톨 과정 모두 처음 해보는 거였나요?


에밀의 말에 엘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인간을 휴머노이드로 인스톨해서 함선의 운용 시스템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불법인 것 같아요. 관리자는 별 지우개 프로젝트가 의회 승인 없이 기업 연합에서 벌인 일이라고 했어요.

- 프로젝트 자체가 불법? 그럼 그 많은 제조창과 함선과 보급기지, 그 일이 정당한 일이라고 믿게 만든 스토리며, 가족들에게 지급된 보상이 모두 신연방이 아니라 기업 연합이 꾸민 짓이라고요?


에밀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인간을 휴머노이드 하는 거 자체는 신연방법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요?


엘리가 검색한 결과를 말할 땐 이미 황당을 넘어서서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 범법자가 아닌 인간을 휴머노이드로 인스톨하는 프로토콜은 없어요. 반대로 휴머노이드를 금지하는 규정이 있군요.


엘리가 자신의 눈앞에 있던 가상 스크린에 띄워진 데이터를 센터의 대형 스크린으로 확장해서 펼친 후 검색한 법규를 띄웠다. 그 내용은 신연방에서 인적 자원이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원이기에 해치거나 변형할 수 없으며 인간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훼손해서는 안 되고 유전자 조작과 같은 일도 절대로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었다. 그 아래 범죄자에 대한 휴머노이드 노역 형벌에 관한 규정도 있었다. 그런 일을 시도한 자는 일급 살인에 준하는 형벌을 내린다는 단서 조항도 있었다. 한 마디로 인간을 휴머노이드로 만든 것 자체가 이미 불법이다. 엘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엘리라고 해도 학살을 벌이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건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에밀이 기주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도대체 보스는 무슨 일을 당한 거야? 기주는 에밀이나 엘리에게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이룬이 깨어나지 않는 캡슐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일어나 이룬. 어서.


* * *


안 돼!


스크린을 들여다보던 주린이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했다. 기주는 모선이 있는 쪽을 흘깃 올려다보고 착륙선의 벽에 부착된 비상용 도끼를 꺼내어 입고 있는 우주복의 한곳을 내리쳤다.


기주!


아무리 튼튼하게 제조된 우주복이라도 같은 부위에 타격이 계속된다면 결국 손상되고 말 것이다. 우주복이 손상되면 기주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고 임무도 끝이었다.


기주.


주린이 한숨처럼 낮게 기주를 부르고 기주에게 연결된 케이블의 모터를 작동시키며 우주복 내부에 가스를 주입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기주의 고개가 푹 꺼지고 조금씩 착륙선으로 끌려들어 갔다. 주린에게는 기주가 끌려가며 땅에 팬 자국이 가슴에 파고든 상처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얼마 후, 캐리어 로봇이 보급물자를 모두 싣자 착륙선이 보급기지를 떠나 모선으로 돌아왔다. 기주의 우주복과 튜브가 제거되고 침대로 옮겨졌다. 주린은 기주가 깨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깨어나면 그 후엔 또 어떤 모습을 보일까. 오랜 시간을 보내며 업데이트를 거듭한 주린은 기주의 예민한 신경성 발작에 점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눈에 띄는 날카로운 물건들을 모두 치웠다. 주린은 긴 시간을 함께하며 한층 가까워진 한 남자의 깨우기 두려운 깊은 잠을 지켜보았다.


주린은 타의에 의해 휴머노이드가 되었다. 기주는 정신과 육신이 보존되어 별 지우개 함선 콘트롤 데크에 있지만, 주린의 몸은 신연방 어느 커뮤니티의 수면체이고 영혼이 시스템으로 인스톨 되었다는 것. 이제 싱크로율 69%의 휴머노이드로 업그레이드가 진행된 상태였다. 일 년 늦게 인스톨 되어 업그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존재, 서브 시스템인 이룬과의 힘겨루기도 쉽지 않았다. 이룬은 기주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서브 체계로 시스템에 인스톨되었다. 원래는 이룬이 인스톨 되고 주린은 다른 함선이나 보급기지를 운영하는 휴머노이드가 되었으리라. 이룬 대신 기주의 함선에 배정된 주린은 그래서 이룬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주와 더 많은 교감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이룬과 기주는 사랑으로 묶여있어서인지 이룬의 업그레이드는 놀랍게 빠른 속도를 보였다. 이룬은 싱크로율 67%까지 진행된 상태. 주린보다 일 년 늦게 시스템에 인스톨 된 것을 생각해볼 때 예측을 뛰어넘은 업그레이드였다. 이대로 놔두면 이룬에게 시스템 콘트롤의 권한이 넘어갈 것이다. 즉 메인시스템의 지위가 바뀌는 것이다.


기주가 왜 저러고 있죠?

이룬? 랙에서 나왔군요? 기주는 지금 안정이 필요해요.

주린은 왜 나를 걸핏하면 랙에 가두는 거죠? 무슨 일이 있었군요.

이룬을 가두는 게 아니라 업그레이드를 위한 배려였어요. 그런데 그 이후 업그레이드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군요.

이봐요. 주린. 당신 정말… 아니 아니에요. 어서 기주를 깨워요. 강제 수면 모드가 정신적으로 어떤 데미지를 주는지 알면서… 주린!

아… 이룬. 지금으로선,

주린. 기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에게 말을 해봐요.

이룬… 난, 나는… 이룬…


“이룬… 이룬”


기주가 이룬을 부르는 잠꼬대를 했다. 이룬이 주린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주린에겐 이룬이 마치 거보란 듯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이룬보다 기주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주린은 서글펐다. 이룬보다 몇 배 아니 수십 배 많은 시간 주린은 기주를 보살펴 왔다. 아쉽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로 표현될 수 있었다면 시스템은 심각한 에러가 나고 함선은 자멸할 정도였을 것이다.


주린.


기주를 보며 회한에 빠진 주린을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네… 이룬.

주린. 이러지 말아요. 주린은 제삼자라 냉정하겠지만 난 그렇지 못해요.

제삼자… 라고요?

그래요. 기주는 주린이 다루어야 할 조종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룬 난,


주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단 1초도 기주를 단지 다루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주린.

말해요. 이룬.

주린이 기주를 앞세워 소멸시킨 생명체가 얼마라고 했죠?

이룬이 그걸 어떻게? 그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이룬도 알잖아요. 그렇게 되도록 프로그래밍 된 계획에서 휴머노이드의 프로세스는 뻔한…

주린. 나라면 물었을 거예요. 나라면…

이룬. 묻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주린. 물어서 기주와 의견을 나눴을 거예요.

이룬. 의견을 나눈다고 해도,

주린. 기주가 죄책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니에요. 이룬. 거부한다고 될 일이면 진작…

주린. 변명하지 말아요. 주린이 기주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사랑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거예요. 세상에 억지로 되는 거란 없어요. 주린.

이룬, 나는

주린.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은 스스로 갖추는 게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지는 거예요.

이룬…

이해해요. 주린 마음.

어? 이룬 어느새…


서브 시스템 최종 업그레이드 완료.

효율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메인시스템을 교체하겠습니까?


히든 시스템으로부터 최종 휴머노이드 비율 70%를 알리는 시그널이 소리 없이 반짝이며 기주에게 메인시스템 교체의 승인을 요청하는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그건 요청이 아니라 통보였다. 주린이 뭐라고 했지만, 그 지시는 승인되지 않았다. 주린의 탄식이 주위를 어둡게 만들었다. 그 순간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탄식 같은 부팅 소리와 함께 주린이 이룬의 시스템으로 편입되었다. 주도권이 이룬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메인시스템이 된 이룬이 지난 영상과 기록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는 동안 주린은 멍하게 기주를 바라보았다. 기주는 주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마치 깨어날 수 없는 잠을 자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빠른 속도로 기록을 체크하던 이룬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췄다.


주린. 이게 뭐예요?


묵묵하던 주린의 입이 열렸다.


내 아버지는,

주린. 다음 좌표가 없어요. 다음 행선지가 없는 거 미리 알았어요?

표현하지 않는 뜨거움. 드러내지 않는 슬픔. 꿈 없는 미래, 사랑 아닌 가족… 희망 앞의 좌절. 최선과 최악, 내 아버지는.

주린! 정신 차려요!


주린이 대답 없이 혼잣말을 계속하자 이룬이 매뉴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눈 깜박할 사이 매뉴얼을 읽어 들인 이룬이 비명 같은 소리로 주린을 불렀다.


주린!


주린은 여전히 혼잣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기로 했어. 약속했어요. 아버지는 아직 살아있을까. 확인해야 해. 주린이 인접한 통신망을 찾습니다.


180, 179, 178, 177…,


그 사이 함선에서는 위기 시 울리는 경고와 초읽기가 시작되고 함선의 마지막이 시시각각 다가서고 있었다. 메인 컴퓨터가 콘트롤할 수 없는 히든 시스템에 프로그래밍 된 그대로, 함선은 콘트롤 데크에서 먼 곳부터 차례로 폐쇄되기 시작했다. 녹음된 음성이 숫자를 거꾸로 세며 위험을 경고했다. 파멸이었다. 이룬이 아무리 메인시스템으로 전환되었다고 해도 히든 시스템에 프로그래밍 된 명령은 콘트롤이 불가능했다.


주린!


그들은 별 지우개의 귀환을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교류가 중단된다는 것은 신연방의 별들이 서로 고립된다는 걸 의미했다. 신연방 행성 간의 고립은 곧 신연방의 해체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신연방의 일부 정치가와 기업 연합 사이에 극비 프로젝트가 수립되었다. 시한부 프로젝트이다 보니 예방 차원에서 개설이 예정된 공간에 소멸과 상관없는 어린 별들도 미리 치운다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다. 우주 공간에 일직선을 긋듯이 쭉 뻗어 휘어지지 않는 효율 100% 꿈의 터널이 탄생하는 것이다.


기업 연합이 주도하여 퇴행 항성을 소멸시키고 워프 터널을 건설하여 안전한 우주 항로를 확보하는 별 지우개 프로젝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실행되었으며 신연방 시민들의 토론에서 절대 불가하다는 공론이 형성되었기에 다수의 동의를 구할 수도 없었다. 별의 소멸, 무수한 딸림별 생명체의 말살 같은 잔학무도한 일은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대체 그런 일을 누가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워프 터널의 운영을 무기한 중단하고 다른 대안을 찾자는 말은 신연방의 자본가들이 들을 때 정신 나간 소리였다. 은하 간 교류 중단으로 인한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 일에는 어마어마한 자금과 언제 끝날지도 모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기업 연합 측에서는 별 지우개 함선을 출항시키기를 원했다. 프로젝트는 3년의 준비 끝에 막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것은 딸림별 생명체들의 수많은 가능성까지도 완전히 말살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옛 지구의 마지막처럼 그들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별 지우개의 함선들은 각각 맡은 영역에서 프로젝트 수행을 완료하면 히든 시스템이 모든 걸 장악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소멸시킨 별들처럼 그들도 결국 예정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단지 기주의 함선은 예상치 못하게 이룬이라는 서브 시스템이 메인시스템으로 전환되면서 메인시스템이 콘트롤 가능한 영역이 남아있게 되었다. 시스템 에러.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는데 시간은 늘 가장 필요할 때 가장 부족하다.


주린. 이게 무슨,


이룬이 마침내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주린을 보았다. 아무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주린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기로 했어요.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주린이 인접 통신망을 찾고 있습니다.

주린.



붉은 경광등이 명멸하는 실내가 다가올 마지막을 예시하고 있었다. 이룬이 기주를 깨웠다.


기주 일어나. 기주. 래~앤디. 일어나. 어서. 기주!

- 주린. 왜 또 이룬 흉내를 내는 거야.


기주가 머리를 흔들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수면 가스의 영향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주린. 커피 마시자.

기주. 지금 커피보다 급한 일이 있어.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조금씩 눈이 열리고 귀가 뜨인다. 온통 붉은빛의 회오리가 물결치듯 주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지잉지잉 거리는 경고음도, 시간을 헤아리는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지?

함선이 폐쇄되고 있어. 시스템이 말을 안 들어.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어. 아무래도… 자폭 명령 같아. 주린도… 이상해졌어.

- 자폭?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주린이잖아?

기주 그 이야기는 나중에, 아… 나중이라니.


나중이라니… 이룬은 할 말을 잊었다. 나중이라는 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룬이란 사실을, 왜 별 지우개의 휴머노이드가 되었는지를… 기주에게 이야기해 줄 시간은 이제 없었다. 기주의 뒤를 따라온 그 이유, 끝까지 함께 있고 싶어서. 그 마지막까지 사랑하고 있음으로. 몸을 버린 이유를.


- 주린. 이 상황을 설명해 봐.

기주. 주린은 제정신이 아니야.

- 장난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주린?


시스템 에러로 반복적인 중얼거림을 계속하던 주린이 기적처럼 기주의 부름에 응답했다


기주?

- 그래 주린. 무슨 일이냐고.

아버지를 찾고 있어요. 기주.

- 아버지?

아버지, 표현하지 않는 뜨거움. 드러내지 않는 슬픔. 꿈 없는 미래, 사랑 아닌 가족… 희망 앞의 좌절. 최선과 최악…

- 주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해.

기주. 여길 벗어나야 해. 어서!


이룬이 기주에게 소용없으니 어서 탈출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기주는 두 목소리가 확실히 다름을 깨달았다. 한목소리에서 기주는 그리움 기다림 슬픔과 사랑을 들었다.


- 누구?

기주. 누군지는 알 것 없어. 어서 벗어나야 해. 시간이 얼마 없어. 이 함선은 곧 폭발해.


이룬은 기주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차라리 모르고 떠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기주. 착륙선을 타! 보급기지로 돌아가! 어서 서둘러!


이룬이 도크를 열고 로봇을 움직여 우주복을 입힌 기주를 강제로 착륙선에 밀어 넣었다. 경고음은 이제 남은 시간이 불과 10초임을 알리고 있었다.


주린이 근접 통신망을 찾고 있습니다. 주린이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린이 근접 통신망을,


아… 이룬이 깊은 탄식과 함께 착륙선을 모선으로부터 배출했다. 곧 작은 불빛과 함께 함선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스크린에는 어리둥절한 채 우주복 속에서 모선을 보는 기주의 얼굴이 보였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룬에겐 눈물을 만들 가슴도, 눈물을 퍼 올릴 심장도, 그 눈물을 흘려줄 눈도 없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이룬에게서 안녕, 이라는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안녕, 기주.


착륙선 안에서 모선을 바라보던 기주의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긴박한 상황에서 탈출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마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아련하지만 따뜻한, 이건 뭐지… 라고 생각하던 기주에게 자신을 착륙선으로 밀어 넣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기주. 기주우, 늦었어. 어서 일어나. 응? 어서 일어나. 기주!


아, 또 주린이? 아니야 주린이 아니야. 기주는 일부러 그 이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쾅쾅! 착륙선 벽을 쳤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헬멧의 얼굴 부분이 하얗게 젖어간다. 헬멧을 벗었다.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속이 타올랐다. 구토가 치밀어 오르는 입술을 악물었다. 아니 혀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름. 그 이름을 악물었다. 기주의 눈이 모선으로 향했다. 모선이 소리 없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폭발하고 있었다. 폭발로 흩어지는 잔해가 마치 길 안내라도 하는 것처럼 탈출선보다 앞서서 보급기지의 땅으로 낙하를 시작했다.


트트트트트트 트트트트틋, 선체를 스치는 모선의 잔해들에서 수없이 사라져갔던 빛나는 별들과 그 딸림별에서 말살된 생명체들의 마지막 인사가 들리는 듯했다. 기주의 손이 창을 스치는 잔해를 어루만졌다.


- 아, 나의…


마지막 그 이름이 입술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잠겨 착륙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기주의 고개가 숙여졌다.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가눌 수도 없었다.


- 이…


그때 마지막으로 폭발하는 모선의 한 귀퉁이에서 반짝하며 또 하나의 조각이 배출되었다. 기주의 착륙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작은 선체는 기주의 뒤를 따라 보급기지가 있던 별로 유성처럼 끝없이 낙하해갔다.



11. 종말과 시작


- 여긴 어디죠?


깨어난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신체를 고정했던 장치가 풀리자 여자가 앞으로 픽 쓰러졌다. 기주가 그 몸을 잡아 의자에 앉혔다. 기주의 얼굴을 본 여자의 눈이 동그래지며 눈물을 흘렸다.


- 기주?


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맞아, 나야. 100년 만에 만났는데 왜 울어. 이제 괜찮아.

- 아 당신이군요. 기주. 보급기지 탈출에 성공했군요. 잘됐어요. 정말 잘 됐어.


기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를 토닥여주었다. 여자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기뻐서 우는 거랍니다. 기주. 여자는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웃었다. 백 년 만의 콘택트.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른 여자가 다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엘리와 에밀, 기주… 그럼?


- 당신이 그분인가요?


엘리를 보며 주린이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엘리나 에밀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다른 캡슐을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캡슐을 보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여자가 캡슐에 있는 사람을 보며 아… 하는 침음성을 냈다.


- 이분이… 그분이군요.


콘트롤 룸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엘리가 돌아보니 지우가 룸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잠시 상황 파악을 하는 듯 둘러보는 게 보였다. 순간 엘리가 기주를 한 번 보고 지우를 또 보며 역시 그랬어! 라고 중얼거렸다.


- 뭐가 그래요?


에밀이 그 작은 소리를 듣고 엘리에게 말했다. 엘리는 이 순간 직감이 맞았음을 느꼈다. 기주가 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라고 느꼈다. 그게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지우가 들어오면서 확신하게 된 것이다.


- 저 사람 얼굴을 봐요.


엘리의 말에 에밀이 지우를 돌아보았다. 잠시 얼굴 모습을 익히는가 했더니 아! 하며 기주를 보았다. 기주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 아빠는 어딜 갔죠?


지우가 모르겠는 상황은 집어치우고 선배라고 소개한 엘리에게 물었다. 엘리가 아빠는, 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기주가 지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 저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보스를 보는 것 같군요. 엘리. 저 사람의 아빠가 누군데요?

- 아, 저 사람은 지우라고 하고 제 신연방 대학 후배라고 들었어요. 아빠는…


아빠는 이라고 하며 기주를 슬쩍 본 엘리가 말했다.


- 아까 달아난 관리자가 아빠라고 하네요.

- 아까 그 남자요? 닮은 데라고는 1도 없는데?


에밀도 기주를 슬쩍 보고 말했다.


- 아빠가 달아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우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 기주. 이 사람 기주와 닮은 얼굴인데 본 적 없어요?

-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관리자의 아들인가요.

- 그렇다고 들었다는 거죠. 이룬님 인스톨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관리자가 저를 강제로 수면시키고 자신도 수면에 들었다가 깨어난 게 오늘 아침이었어요. 관리자가 말하기를 자기의 아들도 자기처럼 수면시켰다고 했어요. 대신 조금 먼저 깨어나서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고.


엘리의 말에 지우가 화가 나서 외쳤다.


- 강제라니요. 아빠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아빠를 함부로 말하면 아무리 선배라도 그냥 있지 않겠어요.


엘리가 그런 지우에게 손가락을 흔들고 말을 이었다.


- 관리자가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를 살해한 게, 그리고 동시에 별 지우개 함선들은 모두 자폭했을 거라고도 말한 게 바로 오늘 아침.


살해라는 말에 지우가 흠칫 놀랐다. 아빠는 늘 자신을 사랑했고 늘 자신의 시간을 이끌어 준 버팀목이었다. 아빠를 희대의 살인자로 매도하는 지금의 분위기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당신들!


지우가 뭐라고 소리치려 할 때 엘리가 문득 손가락을 탁 튀기며 지우에게 물었다.


- 아! 진짜 당신 관리자를 처음 본 게 언제죠?

- 그…그게 무슨 말입니까?

- 아빠를 언제 처음 봤냐고요. 내 말이 어려워요?


지우의 말문이 막혔다. 지우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하자 수면 시스템에 익숙한 에밀이 나섰다.


- 아, 이제 알겠다. 그런 사례는 센터에서 흔한 일입니다.


에밀의 말에 지우가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들었다.


- 아이가 성장하기 전에 어떤 이유로 수면에 든 부모는 자신들 없이 아이가 고아처럼 자라는 게 싫어서 아이도 같이 수면에 들게 하고 자신이 깨어나면서 아이도 같이 깨어나게끔 예약해둡니다. 그러면 100년이 지나든 200년이 지나든 아이를 케어할 수 있으니까요.

-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저는 비록 첫 만남은 아빠와 영상으로만 만났지만 열여덟 살이 되고 아빠를 만났어요. 당신들은 아빠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요.


그때 기주가 지우 앞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기주는 지우의 얼굴에서 익숙함을 만났다. 엘리가 그런 두 사람의 얼굴을 비교해 보며 에밀에게 말했다.


- 지우는, 이룬의 아들이에요.


이룬이라는 말에 기주가 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 이룬의 아이?

- 맞아요. 이룬님을 인스톨하기 전에 출산을 도왔는데 지우를 낳으면서 가수면을 스스로 풀어 모두를 놀라게 했었죠. 그리고 아이를 눈앞에 두고 지우… 이지우… 라고 하고 실신했어요. 분명히 기억나요.


엘리의 말에 기주가 다시 지우를 보았다. 자신을 닮은 눈동자, 이룬의 머리색.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가 이룬을 꼭 닮은 얼굴.


- 그럼 내가… 네 아빠란 거네.


기주의 말에 지우가 기주의 눈을 외면하고 말했다.


- 제 아빠는 관리자님입니다.


그 말에 엘리가 혀를 찼다.


수면에서 갓 깨어난 여자는 한구석에 서서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현실감각을 익히려고 애썼다. 100여 년을 육신 없이 정신만으로 산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밀이 문득 떠오른 기억을 들고 그 여자에게 갔다.


- 혹시…

- 네?

- 혹시 언니나 여동생이 있었지 않으신가요?

- 언니가 있었어요. 이제는 없겠지만.


그녀가 슬픈 음성으로 회상했다.


- 언니는 맞고 있는 나를 감싸며 대신 매를 맞았어요. 온몸에 멍이 들고 피가 튀어도 절대 물러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데려갔어요. 어디로 갔는지 왜 데려갔는지도 모르게… 헤어지고 말았어요.

- 어쩌면 언니를 아직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언니가 맞다면요. 언니의 이름을 기억하시나요?


그녀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며 이름을 기억해냈다.


- 언니는… 언니 이름은 주희. 주희예요.

- 주희 아이렌.

- 당신이 어떻게 알죠? 아이렌을?

- 제 할머니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있어요.


주린이 에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 당신은 누구죠?

- 저는 에밀이라고 해요. 제 아버지는 마르코 아이렌.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할머니의 성을 부여했어요. 아이렌은 흔한 성이 아니라서.


언니가 살아있고 눈앞의 남자가 손자라는 사실에 주린의 마음이 북받쳤다. 멈추었던 시간을 이제야 보상받을까. 주린이 두 팔을 벌려 에밀을 안았다. 에밀도 주린을 꼭 안아주었다. 엘리가 지우와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때 기주가 주린과 에밀에게 다가와 두 사람을 축하했다.


- 정말 잘 됐다. 주린, 에밀.

- 이제 이룬님만 깨어나면….


에밀이 이룬의 캡슐 쪽을 보며 말을 줄였다. 기주가 이룬에게 다가가 말했다.


- 이룬 여기 이룬의 아이가 왔어.


기주가 이룬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말했다.


- 이룬. 어서 일어나. 잠은 깨어있는 시간을 위한 거야.


기주가 이룬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엘리나 에밀, 주린에게만 감동을 주는 모습은 아니었다. 지우 역시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렇게 애절한 느낌일까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지우가 기주의 모습을 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자 엘리가 다가가 지우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 어서 가봐. 정말 당신 엄마와 아빠가 저분들이 맞아요. 100년 대선배인 내가 보증한다니까?


엘리가 미는 바람에 살짝 한 걸음 내딛게 된 지우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기주의 뒤에 서게 되었다.


- 엄마야. 처음 보지?


지우가 뒤에 있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주가 말했다. 지우는 엄마라는 말에 한 걸음 더 캡슐로 다가갔다. 정말 엄마일까.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 지우의 삶에서 엄마는 그저 다른 누군가였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분은 왜 깨어나지 않고 이렇게 있나요?


이룬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지우가 입을 열었다.


- 어떤 사고가 있었고, 그 일로 나는 먼 우주로 떠났어. 그런데 어쩐 일인지 엄마가 나를 따라왔다. 그 과정에서 너를 낳고 휴머노이드로 인스톨 되었다고 들었다. 이제 100년만인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 말에 지우가 다시 한번 이룬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엄마라고 작은 소리로 불러보았다. 워낙 고요했던 콘트롤 데크에서 비록 아주 작은 소리로 부른 거지만 그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똑똑하게 들렸다. 그때,


- 스크린을 봐요!


엘리가 모두의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이룬의 바이탈이 들썩이고 있었다. 맥박이 오르고 혈관의 산소포화도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 지우가 왔어. 이룬.


기주의 지우라는 말에 이룬이 천천히 눈을 떴다.


- 깨어났어… 세상에…


엘리가 중얼거릴 때 지우가 이룬 앞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기주가 이룬이 지우를 잘 볼 수 있도록 옆으로 비키고 드디어 멈추었던 시간을 넘어 이룬과 지우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 이…지우…


이룬이 손을 내밀어 지우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캡슐에 고정된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지우가 손을 내밀어 엄마의 손을 만졌다.

- 아…


엘리가 다시 스크린을 보며 탄식했다. 이룬의 바이탈이 다시 이전처럼 안정되기 시작했다. 기주가 이룬을 불렀지만 이룬의 눈은 감긴 채 다시 열리지 않았다.


- 어떻게 된 거죠?


주린이 다가와 에밀에게 말했다. 에밀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 일시적인 수면 해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 맞아. 스스로 가수면 풀 때처럼…


엘리가 탄식하자 기주가 물었다.


- 엘리. 이렇다는 건… 이룬은 계속 수면체 상태가 되나요? 아니면 뭔가 다른 일이 있게 되나요?


다른 일이라면 그것뿐이지. 엘리가 눈을 감고 기록을 쭉 검색했다. 참고할 만한 기록이 없었다. 바이탈은 현상 유지가 되고 있으니 혹시라도 잘못될 일은 없을 것이다.


- 아마 이룬님이 스스로 의지를 발휘해 돌아올 때까지 현상 유지가 될 것 같아요. 스크린을 보세요.


엘리가 이룬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전송했다. 대형 스크린에 가득 찬 이룬의 얼굴이 무척 평온해 보였다.


- 이룬님의 저 얼굴은 지우를 출산하고 고통이 모두 해소된 것처럼 평온한 그때의 얼굴 같아요. 아마도 지우를 보았기 때문에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해진 거 같은걸요.


엘리가 설명하고 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지우에게 다가가 말했다.


- 너는 엄마와 나 사이의 아이가 맞다. 엄마는 나를 만나기 전엔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어.

-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 아닌가요? 아빠가 저에게 해주신 모든 건 다른 부모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해주신 것과 같았어요.


지우의 고집에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 딱 봐도 아빠구먼 왜 고집이야?

- 아빠가 맞는 것 같아요. 너무 닮았잖아. 두 사람.


잠시 고민하던 엘리가 센터의 시설에 관해 검색하고 기주와 지우에게 제안했다.


- 이 센터에서 친자 확인 가능한데 해보는 거 어때요?


기주는 오케이 했고 지우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두 사람이 친자 확인 검사를 하기로 했다. 두 개의 캡슐이 콘트롤 데크로 올라왔다. 캡슐의 뚜껑이 열리자 기주와 지우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 연둣빛 광선이 두 사람의 신체를 스캔했다. 전면의 스크린에 두 사람의 DNA를 비교하는 영상이 지나가고 잠시 후 마침내 99.98% 유전자 일치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 거봐!


엘리가 성공! 이라고 외치고 에밀, 주린이 손을 마주쳤다. 캡슐에서 나온 두 사람이 머쓱하게 서 있자 엘리가 다가가 두 사람을 포옹시켰다.


- 뭐 해요? 아버지와 아들의 역사적인 만남인데!


기주가 팔을 열어 지우를 안았다. 지우가 떨떠름한 얼굴로 기주에게 안겨있자 엘리가 지우의 팔을 들어 기주를 감싸며 말했다.


- 당신은 두 분의 아이가 틀림없어요. 아마도 이룬님이 당신을 낳고 나서 관리자가 나를 수면 인스톨하고 자신과 당신을 수면에 들게 한 것 같아요. 도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겠만.


엘리는 그 말을 하며 문득 관리자가 했던 엉뚱한 말들이 다시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스키조. 하지만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고 기주와 지우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엘리의 말에 지우가 기주를 안은 팔에 조금 힘을 넣어 같이 끌어안았다. 관리자의 부하에게 들은 내용과 다소 차이가 있긴 했지만, 자신이 봐도 기주는 자기 모습과 많이 닮은 데다 특히 이룬을 보는 순간, 떨리기 시작한 심장이 그게 진실임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엘리가 친자 확인 검사 전에 생각났던 걸 기억하고 말했다.


- 관리자에게 신연방을 말살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 같아요.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 뭐, 딱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뉘앙스가…


엘리의 말을 들은 기주가 이룬의 얼굴을 천천히 보았다. 이룬은 마치 짐을 덜어낸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이제 나 조금만 쉴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이룬, 조금 더 쉬어. 내가 누군지 보여줄게.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나.


지우는 기주의 말에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를 남자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이 남자는 불과 몇 분이었지만 지우에게 잔잔한 떨림을 주고 있었다.


- 엘리, 그 말은 지금 별 지우개 함선 한 대가 이리로 향하고 있단 뜻인가요?

- 아마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엘리가 기주의 말에 동의하자 주린이 안 돼! 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에밀이 그런 주린을 안아주고 말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스가 해결할 거니까.


에밀이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기주를 보고 있었다. 지우에겐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 엘리, 혹시 지금 가진 시스템으로 세 개의 달도 제어할 수 있을까요?

- 네? 아, 뭐 한 번 해볼까요?


기주의 질문에 대답 대신 반문을 던진 엘리지만, 곧바로 브레인 드라이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데이터가 엘리의 두뇌에 들어왔다. 세 개의 달은 그 규모의 방대함이나 운용의 복잡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 흠… 뭐가 이렇게 복잡해. 보기엔 간단해 보이는데. 초창기 기술이라 그런가.


엘리가 알다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동안 지우는 생각에 부딪혀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따뜻하던 아빠가 지금 여기를 부수러 온다고? 왜? 그런 짓을 왜 해? 그럼 나도 죽는데?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의 늪에 빠진 지우와 다르게 엘리의 데이터 처리 스피드는 눈으로 봐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랐다.


- 세 번째 달은 리어 부스트가 메인이고 두 번째는 사이드 부스트…. 아, 저렇게 서로 인력을 만들어서 조수 간만의 차를 만든다? 머리 잘 썼네. 중력의 1/3은 간격 유지에 쓰고 나머지를….


엘리의 중얼거림이 계속되자 기주가 에밀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 에밀, 이곳에 잠들어 있는 APS의 전 주주, 이사들을 깨워줘. 찾을 건 찾아야지.

- 네, 보스. 다만 손이 좀 필요합니다.


기주가 지우와 주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지금은 두 사람이 에밀을 좀 도와줘야 해.


주린이 대답하고 데크로 올라갔다. 에밀이 주린에게 가상 키보드를 넘겨주고 맨 위부터 부탁합니다. 하며 명단을 넘겨주자 백 년의 휴머노이드 실력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 오우, 브라보!


주린의 경이적인 손놀림에 에밀이 놀라 찬사를 보내고 지우를 보았다. 안 와? 지우가 네, 네 하며 올라가자 지우에게도 가상 키보드를 주고 명단을 건네주었다. 아래에서부터 찾아. 난 중간부터라고 한 에밀도 검색을 시작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체크한 지우가 기주에게 물었다.


- 이 사람들을 왜 깨워야 하죠?


기주가 할 말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지우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 틀린 것을 바로잡는 중이다. 주니어.


기주의 신중한 모습에 지우가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고 받은 명단과 센터의 수면 어드레스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막상 시작하자 지우의 속도가 주린에게 뒤지지 않았다. 에밀이나 기주는 그 모습을 잠시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 역시…


에밀이 뜻 모를 말을 남기고 곧 자기 일에 돌입했다. 가상 키보드 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실제로 소리가 들릴 리 없었지만, 실내는 경쟁이라도 하듯 손을 움직이며 수만의 어드레스를 체크하는 모습에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들이 22커뮤니티 센터에 다 모여 있나요? 뭐 그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서치를 계속하며 지우가 말했다.


- 설명해주도록 하지.


에밀이 입을 열었다.




12. 심판


중력에 대항하기 위해 착륙선이 끊임없이 역 추진했지만 실제로 콘트롤을 도맡아 해주던 시스템이 작동 불능이 되면서 주린도 이룬도 착륙선의 방향, 각도, 위치를 조정해주지 못해 거의 추락하듯 떨어졌다. 착륙선의 동체가 땅을 수십 바퀴 구른 후에야 비로소 멈췄다. 모선의 잔해들이 끊임없이 착륙선을 때려 선체가 넝마 조각처럼 깨지고 찢어져 만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이 안에서 죽겠다 싶었던 기주가 죽을힘을 다해 착륙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멀어졌다 싶은 순간, 착륙선에 타면서 고정된 구명 견인 줄이 방해가 되고 있었다.


슈우욱 콰콰쾅 쾅 슈슈슈슈우욱!


신연방 주변에 산재한 은하계를 넘나드는 별 지우개 모선의 구조는 대부분 추진 장치와 대 항성 무기인 스페이스 캐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별을 폭파하는 무기인 만큼 모선의 폭발은 범위가 넓었고, 무기의 출력을 버티기 위해 최상의 강도를 자랑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본체가 폭발하면서 그 파편은 산화하지 않고 그대로 사정없이 지면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때아닌 지옥을 맞이한 낯선 동물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기주가 견인 줄을 제거하려고 기를 썼지만, 처음부터 조종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견인 줄은 인간의 힘에 요지부동이었다. 기주는 결국 포기하고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고 폭탄처럼 추락하는 파편들을 바라보는 기주의 눈에 이제까지 떨어지던 파편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동체의 일부가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 이게 마지막이라도 좋아. 이룬과 함께했던 시간은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어.


기주가 눈을 감고 파편이 떨어져 모든 걸 날려버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기주의 눈앞에 이룬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차례대로 지나갔다.


퍼펑 퍼퍼퍼퍼펑 쿠콰콰콰쾅!


쏟아지던 파편들이 무성한 불의 심판을 벌이는 사이 그것들을 모두 잠재울 만큼의 어마어마한 불꽃이 사위를 가득 메우며 거대한 충격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쾅!


악! 폭발의 충격에 짧은 비명과 함께 기주가 수십 미터를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폭발의 여파로 견인 줄이 달린 리니어 모터까지 터진 듯했다. 기주의 우주복이 너덜너덜해지며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이만큼이나 견뎌준 게 다행일 정도의 충격에 강타당한 후 결국 기주가 우주복에서 이탈된 맨몸으로 어딘가에 날아가 쿵 떨어졌다. 끊긴 견인 줄처럼 기주도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 * *


뾰로로삐삐이이이! 까까까까아아~

투둑 투두둑


대폭발에서 살아남은 새가 긴 울음을 남기고 어느 나뭇가지 아래로 스며들고 얼굴에 빗방울이 부딪치며 기주가 깨어났다. 주린이 이 보급기지를 브리핑할 때 이 행성에 내리는 비는 산성으로 5분 이내에 피신하지 않으면 몸이 녹아들 것이라고 했다. 기절하였던 동안 얼마나 비를 맞았을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몇 걸음 걷던 기주가 보급기지가 가까이 있는 걸 보았다. 다행히도 보급기지 가까운 곳에 떨어진 건지 아니면 그 와중에도 보급기지 쪽으로 좌표를 설정해 탈출시킨 건지 어느 쪽이든 기주는 천신만고 끝에 살길을 찾은 셈이라 새삼 주린과 누구일 것 같은 미지의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보급기지는 쾌적했다. 신연방과는 다른 외부의 조건에 대처할 수 있도록 설치된 기지는 은하를 횡단하는 조종사들의 비상 대피소로 운영되어 필요한 물품들이 갖춰져 소중한 조종사의 생존을 위한 쉘터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기지 안으로 들어온 기주가 다시 기절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기주가 눈을 떴다. 그가 있는 곳은 기지의 콘트롤 데크. 중앙의 대형 스크린에서는 외부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대로 투영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통유리 창을 내다보듯 보이는 바깥세상은 아름다웠고 평화로웠다. 이국적인 인상의 식물들이 빗속에서 온전히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빗줄기에,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릴 뿐 살아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옷을 벗어 던진 기주가 몸을 점검했다. 보급기지에 들어오자마자 긴급 구조 시스템이 초기생존에 필요한 조치를 한 듯 몸은 기초 조건이 유지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메디컬 베드를 찾아 누운 기주가 잠시 상황 파악을 위해 생각에 잠겼다. 기주의 몸 주변을 옅은 주황색 광선이 위아래로 오가며 스캔하자 메디컬 나노봇들이 몸 안팎의 터지고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고 앰풀을 투입해 머리를 안정시켰다. 수혈을 위한 블러드팩까지 등장하는 거로 봐서 기주는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틀림없었다. 모선은 폭발하고 주린과 또 한 사람의 휴머노이드는 그렇게 사라졌다.


생각하다가 그리움에 북받친 기주가 한참을 허공만 노려보았다. 억지로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그 목소리는 분명히 이룬이었다. 이룬이 왜 별 지우개 함선에 인스톨 되었는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룬을 죽인 거야.


* * *


보급기지 도착 14일 후.


하루에 일정 시간, 정해진 치료가 끝나고 로봇이 음식물이 담긴 트레이를 앞에 갖다 두었다. 조종사 생존에 초점을 둔 보급기지에서 목숨을 구했지만 기쁘기보다는 우울감에 빠져 며칠을 침울한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비에 손상된 얼굴도 어지간히 치료가 이루어져 눈 밑으로 흐릿한 흉터가 기주가 겪은 고난을 말해줄 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주는 추락하고 부딪쳐 상처 입는 과정에서 잃었던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을 알았다. 자신이 누구며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죽을 위기에 다다랐는지. 그리고 진과 이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그 기억들.


이기주.


신연방의 범 우주 최고의 기업 APS의 대표 의장. 그는 중력을 제어하는 반물질 기관을 실용화하는 기술 특허로 범우주적인 거부가 되었다. 부유 돔은 공기 정화, 오수 처리, 교통 등 삶에 필요한 모든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고, 공원 녹지 등 삶의 질을 최대한 높여줄 여러 편의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자신만의 돔을 원하는 거부들에게 특화된 부유 돔을 만들어 분양하며 우주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이후 그는 개발이익으로 얻은 재화를 활용하여 커뮤니티의 중력 돔에서 생활하는 인간을 통째로 부유 돔으로 이주시키는 범 우주 프로젝트를 계획하지만, 주주와 이사 중 일부가 그 계획을 반대하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 * *


거대한 원형 회의실, 각층별로 마련된 260개의 패드에서 가상 스크린이 나타나고 참석자들이 속속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전원 참석 시그널이 켜졌다. 이들은 신연방의 각 식민지 행성에서 3~5명 단위로 참여한 투자자들로 우주 최고의 기업, 국가이거나 행성 단위의 종족 혹은 기업과 개인 주주 자격으로 온라인에서, 혹은 오프라인으로 직접 오늘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 이 프로젝트는 지구인들만 혜택을 받는 것입니까?

-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신연방의 모든 생명이 이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을 겁니다.

- 중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생물은 지구에서 생활하는 인간에 국한되는데, 그럼 중력에 상관없이 생활하는 타 행성의 거주 시민들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나요?

- 중력 돔에서 부유 돔으로 이주하는 인간들이 받는 혜택에 따르는 장기적인 개발 계획을 통해 모두의 삶의 질을 극대화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의장인 이기주 손을 들어 각종 데이터가 담긴 도형과 차트를 대형 스크린에 전송하자 각 은하 간 통신의 시차를 두고 개별 스크린마다 정책 자료들이 차례로 입체로 뜨기 시작했다. 실로 파격적인 세부 항목들이 떠오르자 회의장이 파란에 휩싸였다. 종족 단위 혹은 인접 행성의 각 대표가 웅성거리며 의견을 나누거나 혹은 고개를 저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이게 정말 가능하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란이 점차 커지자 누군가가 탁자를 손으로 탕 치며 소리쳤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계획이야!


그 목소리가 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기주 의장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 모든 계획은 현재를 기준으로 전반적인 상향 평등이 기준이며 그로 인해 각 행성 거주 신연방 시민들이 받는 삶의 질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신연방이 이 우주에 정착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라고 느껴질 만큼 거대한 지표들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정말, 이 계획이 실현된다면 신연방에서 굶어 죽는 생명체는 없을 것이었다. 국가나 종족 단위의 대표들이 주로 자기 시민이나 종족에 대한 대책을 살피느라 부산한 모습을 보인 것과 대조적으로 신연방에서 사업을 벌이며 천문학적 부를 쌓고 있는 몇몇 지구인 주주와 이사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거부감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 이게 무슨 혜택이요? 그냥 날로 퍼주기지. 의장이 신연방 대통령에 출마할 의사가 있다고 하더니 그 사전 포석 아닌가요? 이익이 남으면 운영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는 주주에게 분배하는 게 우리가 APS에 투자한 목적이 아닌가? 나는 이 무모한 계획에 동의할 수 없어요!


이기주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신연방 재정장관 아놀드였다.


- 동의합니다. 이익이 남으면 그건 주주에게 배당되는 것이 맞지!

- 그래요. 그래야지!


반 기주 세력 중 수장이랄 수 있는 그가 나서자 신연방 소속 몇몇 이사와 기업에서도 반대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 이 정도 규모면 우리가 모르는 재정 부문이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이거면 몇 개의 은하가 몇백 년은 그냥 먹고살겠어. 그 막대한 예산을 왜 의장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려고 하지요?


아놀드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예산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해서 숫자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유 돔 하나만 해도 중력 돔에서 평범한 인간이 50년 이상을 안 쓰고 모아야 간신히 입주비가 되는 막대한 비용을 지급해야 했다. 그래서 중력 벨트에 돔을 띄운다는 부유 돔 대신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의 부유 돔을 쓰는 판인데. 게다가 신연방 정부에서도 부유 돔을 따로 시티라고 부르며 시티만의 우대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4만 단위로 주거하며 생활하는 부유 돔이 첫 5년 동안만 모두 20동이라니… 게다가 중력 돔으로 출퇴근하는 수송정 숫자만도 어마어마했는데 그 탑승 요금은 운영비보다 턱없이 적었다. 출퇴근이 곤란한 사람을 위한 업무 단지엔 기존 커뮤니티용 중력 엔진을 업그레이드해서 부유 돔에는 못 미치겠지만 새로운 중력 제어 기관을 설치해야 하고, 업그레이드나 신규 설치가 어려운 지역에는 사람 대신 로봇을 전면 배치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 무모한 계획.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지만 APS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반물질은 단지, 부유 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력의 영향을 받는 모든 것에 응용 가능하기에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했고, 그것이 이기주를 범우주적인 사업가로 만들어 준 것이다.


몇 번째 사업인지도 모를 부유 스테이션은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그동안 우주로 나가려면 셔틀로 자재를 제1, 제2 달의 제조창까지 옮겨 달에서 제작해 우주로 보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달에서 조립 과정을 거쳐 우주로 출발하는 함선은 돌아올 때도 달을 거쳐 셔틀을 타고 귀환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했지만, 중력이 제로가 되는 한계점까지 띄워 올린 부유 스테이션에서는 무리 없이 함선을 출발시키게 되었고 더구나 필요할 때마다 부유 스테이션을 지상에 내려 물품들을 선적한 뒤 다시 올리면 그만이라 막대한 예산을 세이브해주는 역할을 했다.


- 마르코. 신연방 주주와 이사들 사이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나?

- 대략 12~13명 선에서 별도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 별도의 움직임이라…


기주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지금 앞에 앉아 찻잔을 들고 있는 이 사람, 마르코뿐이었다. 연이은 발명과 특허로 부와 권력을 몰고 다니던 기주에게 접근하는 자들의 목적은 단 하나, 돈이었다.


탐욕은 자본주의가 생긴 이래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멸망을 피해 지구를 떠나온 인간들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지구 탈출 계획이 알려질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지구에 닥쳐온 위기를 자신들의 정보계통을 통해 알고 있던 부자들은 서로 정보를 나누고 초읽기를 해가며 살길을 모색했다. 그들은 공동투자를 통해 민간우주 기업으로부터 탈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모든 부를 살아남는데 쏟아부었다. 또 금이나 희토류 광물처럼 지구가 사라지더라도 가치가 유지될 수 있는 자원을 사재기했다. 그들 중엔 지구를 탈출하다가 우주 미아가 된 자들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이 탈출 모선의 이동 경로를 따라갔기에 모선을 만나 구조되었다. 그렇게 수백 년 살 곳을 찾아 헤매었어도 그들의 자산규모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 않았다.


* * *


오랜 시간 우주에 머물러야 했던 탈출 모선도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자본주의의 망령에 물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완벽한 재생산 순환 구조를 갖춘 시스템이라도 인간의 기억 속에 이미 각인된 욕망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 배설한 거로 재생한 걸 누가 먹어요?


워낙 급박하게 떠난 상태였기에 나라 하나가 들어갈 만큼을 채우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은 넉넉했고 플랜트를 건설할 부자재는 3D 프린팅으로 얼마든지 공급될 수 있었다. 부자들은 물리적으로 완벽히 재생된 식료품을 거부하며 모선의 나머지 공간을 사용료를 부담하고 임대해 플랜트를 제작하고, 그들이 실어 온 유전자를 활용해 동식물을 키우고 길러 그들만의 농작물과 목축의 생산 시스템을 갖추었다. 대부분 로봇을 써서 관리했지만, 인간의 손이 필요한 곳에는 나머지 인간들이 고용되어 일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었던 탈출 모선에서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목장에서 나오는 신선한 육류와 싱싱한 채소 같은 것들을 특별식으로 가족에게 먹였다. 재생 식료품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박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인간들은 일자리가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애썼다. 돈을 벌려면 일해야 한다는 주의는 머릿속에 세포가 되어 자리 잡은 개념이라 누구도 그곳에서 임금을 받고 일하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최초엔 물물교환으로 시작된 경제 개념에서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연합 정부가 갤럭시 코인이라는 전자 화폐를 발행하고 신용카드 개념을 다시 도입하자, 자본주의는 폭발적으로 모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해야 했지만, 생산시설을 독점하며 그곳에서 나는 생산물 판매를 통해 그들만의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목장에서 일하는 인간들은 살기 위해서 무작정 탈출 모선에 뛰어든 터라 재화를 들고 오지 못했다.


* * *


죽어가는 지구에서 인간은 약탈과 강도 강간 살인을 일삼으며 세기말적 광기를 폭발시켰다. 그런 현상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흉악한 자들과 그에 가담한 인간들이 자동차에 헬리콥터, 제트기, 군함까지 탈취하며 그 세력을 하늘 땅 바다로 뻗쳤다.


어차피 다 죽는다. 다 죽을 때까지! 다 죽이겠다!


이런 구호를 내건 갱단은 길을 가며 보이는 모든 인간을 죽이거나 다리 하나를 자르는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며 웃고 즐겼다. 죽지도 못하는 시간의 고통을 떠안은 인간들은 기어서라도 모선으로 가는 셔틀을 타려고 목숨을 걸었다.


최초 선별명단을 만들어 과학자와 생물학자, 의사, 엔지니어 등 주요 인력을 탑승시키려고 했지만, 전쟁을 통해 이미 셀 수도 없는 많은 인명이 사라진 상태에서 선별정책으로 모선을 채우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반도 못 채우고 출발하게 되자 모선 정부는 시한을 정해두고 그 안에 도착하는 모두를 선별 없이 탑승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다 보니 모선 정부는 탈출 모선에 전염병이 돌 때 자칫 전멸할 수도 있기에 방역에 몰두했다. 질병을 치료하다가 실패하거나 치료하더라도 생존 가능성이 약해 보이면 어느 우주의 암흑 속으로 배출하거나 선별된 자 중 질병에 걸리면 치료 중에도 수면 통제를 강제했다.


* * *


모선의 일정한 구역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자들이 공동묘지라고 부를 정도로 수많은 수면 캡슐이 정연하게 놓여있었다. 수면 캡슐에 들어간 인간은 귀한 자원이기에 공동묘지는 삼엄하게 관리되었다. 수면 캡슐을 관리하는 타이머들이 수만 개의 캡슐에서 수면체에 생긴 질병의 진척이나 증상 완화 같은 변화를 세심하게 체크했다. 그리고 가망이 사라지거나 질환자의 증상이 심해져 도저히 치료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가족에게 통보 없이 캡슐 채로 모선 밖으로 방출했다. 캡슐은 생명줄이었지만 또한 죽을 자를 위한 관이기도 했다.


가족 중에 부모나 자식이 캡슐에 있다는 걸 아는 인간들은 그 가족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죽은 셈 치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말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말콤이 캡슐에 들어가 있어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캡슐의 수많은 증상 중 하나인 중력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백여 년간 말콤들은 모든 지혜를 짜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연구는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한 모선의 생활 구조에서 함께 움직이며 삶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수억 수천만 년을 지구의 중력에 맞춰 진행한 인간의 진화는 새로운 중력에 대항하여 신체적 특성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2세대에 이르러서 변화가 두드러진 인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키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 체형이 왜소해지고 있다는 것, 머리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는데 아마도 적응력이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인간들이 세대를 거치며 새로운 중력에 맞게 몸을 효율적으로 바꾸고 있는 듯했다.


모선 정부는 이런 변화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끌어안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모선의 생활환경에 맞추어 바뀌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모선을 떠나 언제 어딘지 어떤 상태인지 모를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하면 이 변화가 그곳에서는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기 체크가 있던 어느 날, 타이머 중 하나가 캡슐에서 이상 반응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스스로 깨어나 캡슐 안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타이머가 곧 팀장에게 보고하고 이 보고는 곧바로 연합 수뇌부에게까지 올라갔다가 연고 가족에게 통보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일반 거주 구역 Z 섹션 276S 건물 앞으로 소형 비행정 한 대가 도착했다. 비행정의 트랩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 돌아오셨군요!

- 당신은 누구죠?


그가 말하며 그 사람의 뒤쪽을 보자 그곳에서는 몇 사람이 그를 바라보며 존경의 마음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마치 옛 지구의 소설에나 등장하는 엘프처럼 작은 머리와 흰 피부에 호리호리한 체형을 하고 있었다. 앞에 비행정에서 내린 남자에게 말을 건 자 역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우리는 말콤입니다.


말콤들은 세기말 지구의 온갖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셔틀에 탈 수 있었다. 말콤은 노벨상을 거부한 천재 과학자로 태양의 이상을 처음 발견하고 경고한 장본인이었다. 그가 노벨상을 거부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가난한 과학자들은 기업의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지원받지 못한 이론이나 실험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게 학자와 함께 사라진 모든 연구 결과를 모으면 지금의 이 사태를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노벨상은 거대 기업들의 각축장에 다름없고 그 자신은 그런 자본의 파티에 들러리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그는 탈출 모선에도 탑승하지 않겠다고 했다. 지구 연합의 홍보 포스터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말콤과 말콤들은 결국 탈출 모선을 향해 먼 길을 달려왔고 천신만고 끝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자기를 말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말콤들은 자본가 소유의 목장에서 일하며 생활 기반을 다졌다. 공동 주거 공간에서 그들은 학교를 세우고 탈출 2세부터 4세대의 후세를 양성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자본주의에 지배당하지 말고 자본주의를 지배하라.


* * *


- 매기, 열흘이면 돼?

- 열흘 후 놀라운 결과가 나올 거야. 그 정도면 모든 중력장 환자들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몰라.

- 꿈 하나는 에누리 없는 말콤이네.

- 야! 꿈은 꾸라고 있는 거라고.


1남 1녀가 결과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모선의 일반 주거 지역 Z 섹션 276S에 있는 건물의 연구실. 비행정에서 내린 남자가 마중한 남자와 함께 연구실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사람이 그가 들어오자마자 와… 하고 입을 벌려 놀라자 비행정에서 내린 남자를 마중 나왔던 남자가 말했다.


- 와… 말콤이다…

- 매기, 이분이 바로 그분이시다.


매기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멈추지 않자 수송선에서 내린 남자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 반가워요. 이기주입니다.

- 이…기주요?


매기가 놀람을 멈추고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 말콤은 앞으로 이로 바꾸게 될 겁니다.

- 그래 매기. 모든 말콤은 앞으로 이다.

- 아빠, 그래도 우린 말콤이라는 성이 더 멋진걸요?

- 말콤이 이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린 말콤입니다. 하지만 말콤으로서는 아무래도 행동의 제약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로 바꿉니다.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매기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이라는 성이 썩 내키지 않는 듯했다.


* * *


탐욕을 실현하는 인간들. 기주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신연방에서 인간뿐이었다. 처음 몇 번 그런 자들의 농간에 휘둘려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해가 진다고 해가 아닐 수 없듯 지우는 지우였다.


마르코의 보고에 잠깐 생각을 정리하던 기주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마르코, 부탁이 있어.

- 말씀만 하십시오.


마르코가 이렇게 말하는데도 다 사정이 있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 그뿐 아니었다. 중력장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어머니를 구해주었고 더구나 그런 어머니가 살기 편하도록 부유 돔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지우다. 기주의 지원 덕분에 어머니는 중력장의 손상을 해소하고 더불어 보다 건강한 신체로 바뀌어 80대인데도 6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사용한 기주의 아이디어는 무척 실험적인 발상이었다. 마르코 입장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매한가지 결과, 즉 어머니를 여의게 될 바엔 차라리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에서 기주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실험은 성공을 넘어 기적과도 같은 성과를 내게 되었다.


남들은 비싼 돈을 들여 수면센터에 들어가 완치술이 개발될 때까지 잠들어 있지만, 마르코의 어머니는 불과 일 년 남짓한 치료 시간 동안 수면에 들었다. 특수 제작된 나노봇들이 반물질을 이용해 다운된 세포를 하나하나 부양했고 떨어진 신체 능력을 복원했다. 원래의 몸은 물론 중력장의 영향력이 반감되면서 경이로운 활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슈퍼맨이 지구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행사하듯 마르코의 어머니는 등이 굽은 노인들 틈에서 남다른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결과를 임상까지 끌고 가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기주는 마르코에게 어머니의 일을 함구할 것을 지시했다. 마르코가 안 따를 이유가 없었다. 때때로 어머니는 자신조차 놀랄 만큼 젊어 보였고 보기에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마르코가 진중하게 기주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설사 죽으라고 해도 죽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마르코, 아이가 있지?

- 네. 이제 열다섯 살이 되려는 중입니다.

- 아이와 가족들과 함께 수면에 들도록 해.

- 네? 제가 없으면 의장님은…

-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마르코. 내가 무슨 일을 당하면 마르코가 구해줘야 해.


마르코의 자세가 더욱 신중해졌다. 자신만도 아니고 가족들까지 수면에 들라니…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지시였지만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잠시 뜸을 들인 기주가 말했다.


- 마르코는 마지막 카드야.


무슨 말이냐는 마르코의 얼굴을 외면하고 기주가 회의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반대파들은 논리가 딸리자 결국 말도 안 되는 위협을 가했다. 그 말은 결국 어디 두고 보자 였다.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할 말을 정리한 기주가 마침내 생각이 끝난 듯 마르코를 보았다.


- 마르코, 저들은 반드시 부유 돔 프로젝트를 망치려고 들 거야.


마르코는 보스에게서 처음 발견하는 증오와 혐오의 감정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계기로, 어느 쪽에서 이빨을 드러낼지가 걱정이에요.

-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든 자기만 잘살면 된다니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을까.

-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고 합니다만 이렇게 새로운 우주로 이주하고 나서도 여전히 그 행동을 관두지 못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 우주를 유랑하던 모선에서도 그들은 특별대우를 바랐지. 모든 것들은 이미 예견되던 거야.


기주가 마치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듯 말할 때 비서가 들어와 회담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했다. 기주가 일어나며 덧붙였다.


- 22커뮤니티의 수면센터에 가족들 모두 수면하도록 준비해놨어. 나중에 깨어나서 아무도 없으면 얼마나 서운하겠냐고 이 친구가 그러더라고.


마르코가 비서를 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나갔다.


- 인간이 다 사악한 건 아니겠지. 나에겐 사악하게 굴어도 자기 가족이나 지인에겐 또 좋은 사람일 수 있고.


마르코가 동의하는 몸짓을 취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렇다고 믿습니다만… 만약 일이 생기거나 제가 필요하면 이곳으로 연락을 주세요. 만반의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마르코가 송신기를 건넸다. 송신기는 나노봇으로 만들어져 몸 안에 장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기주가 나노봇 주입기를 팔에 대자 라인을 따라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주입기를 정리하며 기주가 말했다.


- 아이 이름이 에밀이지? 열 살인데 신연방 대학에 조기 입학할 거라며 소문이 자자한 천재 소년.

- 감사합니다. 보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 좋아. 거기서 보자.


마르코가 나가고 곧 비서가 들어와 비행정이 준비됐다고 전했다.


* * *


기주가 자동 항법 장치로 움직이는 1인용 비행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안내 음성이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고 말하고 비행정이 잠시 후 착륙했다. APS 주주이자 신연방 재정장관 아놀드의 저택은 옛 자구의 중세풍을 본떠 만든 거대한 성이었다.


- 이런 부와 권력을 쥐고서도 아직도 부족하단 말인가?


기주가 가로수가 정연하게 늘어선 길을 걸으며 길가에 심어진 거대한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은 키가 10m는 되는 것처럼 높이 솟아올랐고 이파리는 투명해서 하늘이 투과된 파란빛 잎을 찰랑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저 나무만 해도 한 그루에 어마어마한 유지 비용이 들어갈 것이었다. 아놀드가 그를 초청하며 굳이 혼자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주주들 중 신연방 소속의 주주가 기주의 부유 돔 계획에 반대를 표명하고 있었고, 그 핵심에 아놀드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식으로 훼방을 놓으려고 할지가 걱정일 뿐.


문 앞에 도착한 기주가 팔목을 들어 일정 부위를 누르자 가상 콘트롤 패널이 생겼다. 콘트롤 패널에서 나노봇의 녹화용 캠을 켰다. 머릿속에 나노봇이 녹화를 시작합니다. 라고 음성이 들리고 그의 눈 한쪽으로 빨간 점이 밝아졌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의 뒤를 따르던 로봇 가드에게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한 기주가 옛 지구 식으로 장식된 커다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집사가 나와 기주를 맞이했다. 집사가 곁눈으로 지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긴 회랑 양옆으로 옛 지구의 그림을 복원한 레플리카 액자가 벽마다 일정하게 걸려있었다. 저건 누군가가 모사를 한 게 아니라 실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시의 염료와 화가의 터치까지 살려낸 진짜 같은 가짜였다. 응접실로 들어가자 창밖을 보던 아놀드가 돌아서서 그를 맞았다.


- 어서 오시오. 이기주 의장님.

- 네, 아놀드 장관님.


간단한 눈인사를 마친 아놀드와 기주가 집사가 들고 온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 아시겠지만,


아놀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 APS에 투자한 건 나 개인이 아니고 신연방 정부의 자산입니다.


앞뒤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낌 없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기주가 찻잔을 들어 조금 마시며 생각했다. 반은 신연방, 반은 당신 개인의 것이지…


- 그래서 신연방 정부의 자산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벌이는 엉뚱한 계획에 이용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 아놀드 장관님. 개인의 영달을 위해 프로젝트를 시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구인은 중력에 대항하여 삶을 유지하느라고 고통받고 있습니다.

- 의장님이 대통령 출마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런 포퓰리즘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하려고 합니까?

- 출마 의사 같은 거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각서라도 써드리지요.

-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거야 의장님 자유이지만 APS의 대주주로써 APS의 자산을 마음대로 전용하는 그 계획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 부유 돔에서 생활하는 것은 삶의 질을 끌어 올리고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며 그 수명을 보다 늘일 수 있는…


아놀드가 두 팔을 들어 올려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 의장님이 보시다시피 나도 부유 돔에서 살고 있지 않아요. 난 이렇게 땅에 발붙이며 살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부유 돔 프로젝트는 포퓰리즘이 극대화된 터무니없는 계획일 뿐입니다. 신연방 정부의 돈을 그렇게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 장관님의 가족은 각자가 모두 개인 부유 돔에서 생활하고 있지 않은가요? 아내분과 자제들은 바다 위 별장까지도 부유 돔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 가족은 가족이고 나는 나요. 난 이렇게 땅바닥에서 사는 게 좋답니다. 의장님.

- 이곳은 일반인들이 거주하는 커뮤니티의 중력 돔보다 거대한 반중력 기관이 돌아가고 있더군요. 일반 커뮤니티 거주민 수백 수천 명이 이 집 한 곳에 설치된 반중력 엔진의 10%에 불과한 출력에 의지하여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이만큼 반중력 기관을 가동한다면 일반 커뮤니티의 중력 돔들도 살만한 곳이 될 수 있어요. 의장님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땅바닥에서 말입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프로젝트를 바꿀까요?


기주가 마지막 말에 힘을 주며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를 바라보는 아놀드의 얼굴엔 경멸과 조소가 가득했다.


- 차차 해나갈 것입니다. 정책이란 한순간에 끝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만 수립하고 확립하고 실행하는 거라고요. 하지만 의장님의 계획은 무모하고 근시안적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입니다.

- 그럴 리가요? APS의 싱크탱크 수준은 신연방 정부 기관 이상입니다만?

-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의장님이 과연 APS를 올바르게 이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장관님이 그러시다면 나머지 주주들을 찾아가 일일이 설득할 것입니다.


아놀드의 입술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해볼 테면 해봐라 하는 여유 만만한 얼굴이었다. 기주는 더 이야기를 진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다리를 꼬며 의자에 등을 기댄 아놀드가 말했다.


- 해볼 테면 어디 해보시든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여러 개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 당신들은?


아놀드가 활짝 웃는 목소리로 기주에게 말했다.


- 멀리 가실 것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다 모였으니 바로 해보시지요.


대부분의 주주가 찬성표를 던졌지만, 실세는 아니었다. 그들이 나누어 가진 주식이 이들이 가진 주식의 25%가 안 되었다. 신연방 소속인 이들이 개인으로 혹은 기업으로, 국가로 절반의 주식을 보유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놀드가 신연방 정부의 재산으로 10%, 개인의 자산으로 10%의 주식을 보유하여 압도적인 보유량을 보이고 있었다. APS의 의장은 25%의 주식을 보유한 기주였지만 실질적 주인 행세는 이들이 하는 셈이었다. 아놀드가 일어나 책상 서랍에서 패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패드가 켜지고 스크린이 열리자 그 위로 한 장의 서류가 떠올랐다.


- 서명하세요.

- 양도각서? 왜 이런 걸 쓰라는 거죠?

- 더 이상 의장님에게 APS를 맡길 수 없다는 게 우리 뜻입니다. 금액은 나머지 삶에 부족하지 않게 책정했으니 의장님에게 아니 이제 전 의장이 됐군요. 불리한 조건은 아닐 거로 생각합니다.


기주가 피식 웃었다.


- 미안합니다만 아놀드 장관님, 대충 봐도 너무 싸게 잡으셨군요.

- 뭐라고요?


기주가 늘어서 있는 주주들을 둘러보고 손가락을 들어 주주 고유번호와 서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 이 각서에 책정된 액면가로 하면 여러분들이 APS에 투자 금액은 전체 투자금의 10%밖에 안 될 텐데 여러분들은 모두 동의를 하셨네요? 이 서류가 후에 어떻게 쓰일지 알고들 그러셨을까?


그의 말에 곧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놀드만이 비웃음을 버리지 않고 말했다.


- 의장 교체를 위해 한시적으로 APS 주식을 액면가대로 책정한 것이니 특수한 상황일 뿐이오. 모두 염려하지 마세요.


아놀드의 말이 통했는지 주주들은 곧 진정을 되찾았다.


- 정말 그럴까요? 내가 사라지고 나면 이 서류가 다른 분들의 올가미가 되겠군요?

- 별걱정을 다 해주시니 우리 투자자들도 나름 행복하군요.


기주가 핵심을 찌르며 이죽거리자 주주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아놀드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사실이 그랬다. 우주 최대 기업 APS의 어마어마한 배당을 주주가 아니라 상관도 없는 일반 시민에게 퍼주려는 의장을 제거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지분을 포기시키는 거였다. 그쪽에서 권력을 가진 아놀드는 그 힘을 이용하여 단지 협상을 위한 카드라며 1억 8천만 배 상승한 APS의 주식을 처음 발행한 액면가로 처분하는데 동의하는 서류에 사인하도록 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의장 압박용이라며 불안해하는 일부 주주들의 불안을 단숨에 막아버린 아놀드였다.


- 그래서 내가 사인을 안 하면 어쩌시려고 장관?


훼방을 놓으리라는 예측은 했지만, 기업을 통째로 강탈하는 방법을 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었다. 아놀드 같은 인간도 누군가에겐 가장 따뜻한 인간일지 모른다고 이미 마르코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너무나 낭만적인 기대였다.


- 아놀드 당신은 APS를 독차지하려는 야망이 있었군. 하긴 신연방 대통령보다는 APS 의장이 되는 게 이익이지.


기주가 이죽거리자 허허 웃던 아놀드가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 잡아!

아놀드의 말이 끝나자 문밖에 대기하고 있었던 듯 사방에서 전투 로봇들이 들이닥쳤다.


…이건 진짜로군…


긴장한 기주가 긴급으로 가드 로봇을 호출했지만 아놀드의 비웃음 섞인 손가락질을 보고 포기했다. 그 손가락 끝에선 아놀드의 전투 로봇들에게 둘러싸여 파괴되는 가드 로봇이 보였다.


- 내가 이곳에 온 걸 모르는 신연방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 아 그 점은 염려 마시오. 이런 걸 준비했으니.


아놀드가 패드의 한 부분을 누르자 양도각서에 기주의 서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기주의 모든 기명 주식은 상상도 하지 못할 낮은 가치로 아놀드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다른 투자자들은 그 모습에 오한이라도 온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라도 기주처럼 모든 걸 빼앗기고 소문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 나 APS 현직 의장 이기주는 이 서명이 신연방 정부 재정장관 아놀드에 의해 날조된 위조임을 명백하게 밝힌다. APS는 언제까지나 이기주의 소유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주가 아놀드의 불법 위법한 행동에 대항하는 말을 남겼다. 사람 중엔 그런 기주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감명받는 이도 적지 않았다.


…역시 의장…

…그, 이기주였지…

…이거였어. 신연방 최고의 인재…


하지만 그 말들은 아놀드의 다음 말에 꺼진 불꽃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 역시 명불허전.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안타깝군.


음모가 한층 짙어진 입꼬리에는 묘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패드를 눌러 다음 장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그 페이지 하단에 기주의 서명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그 사인은 일반적인 사인이 아니라 극비 프로젝트를 위한 내부 결제에 사용하는 것으로 검증된 측근들만이 알 수 있는 서명이었다.




13. 의심


- 이 서명을 유출한 자가 누구지?

- 궁금하신가?


아놀드가 웃으며 한쪽을 바라보자 그곳에 한 사람이 얼굴을 돌리고 있다가 천천히 기주를 바라보았다.


- 이런… 자네였군. 이건 짐작도 못 했어.


이 모든 것들은 내부자가 없이 결코 외부에서만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기주가 바라보는 화면의 맨 위, 제목은 ‘유서’였다.


전투 로봇이 기주를 무릎 꿇렸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는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아놀드가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마호가니 책상 한쪽에 올려진 옛날식 벨을 흔들어 집사를 불렀다.


- 자, 역사적인 날이로군. 우리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다 함께 건배합시다. 톰, 여기 가장 좋은 술을 갖고 와.


집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나가는 집사를 그가 흘깃 보고는 아놀드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던 기주가 느닷없이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하하하


기주는 아무 대비 없이 불쑥 아놀드라는 하이에나 소굴로 들어온 자신이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저 친구라니…


아놀드가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기주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다른 이사들은 기주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순간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의 웃음은 분위기를 처연하게 만들었다.


- 자네가 이 유서를 읽어보게.


아놀드에게 지목된 그가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는 이내 유서를 읽으려고 했다. 아놀드가 문득 손을 들어 제지했다.


- 아니지, 이건 술이 들어오면 술과 함께 듣는 게 좋겠군.


그때 집사가 잔과 술병을 들고 들어왔다. 아놀드 앞에 와서 책상에 잔을 내려놓은 집사가 병을 들어 아놀드에게 보였다.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집사가 옛 지구식 코르크가 달린 술병을 잡고 다른 손으로 스크류를 꽂아 코르크를 빼냈다. 뽕 하는 맑은소리가 울렸다. 코르크를 아놀드에게 정중하게 건넸다. 코르크를 받아든 아놀드가 냄새를 가볍게 맡아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콜콜콜콜 잔 바닥을 조금 채울 정도로 술을 따르자 진홍빛 액체가 향긋한 냄새를 방 안 가득 채우며 파도치듯 잔을 휘감아 내려갔다. 집사가 잔을 들어 아놀드에게 올렸다. 잔을 들어 입에 머금은 아놀드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에 잔을 내려놓자 집사가 술을 따랐다.


- 나에게도 한 잔 주나?


그 장면을 유심히 보던 기주가 입을 열었다. 아놀드가 유쾌하게 웃으며 집사에게 잔을 주라고 했다. 곧 다른 시종이 잔을 갖고 오자 집사가 받아 기주에게 건넸다. 잔을 받아든 기주가 아놀드에게 말했다.


- 그런데 난 왜 주는 거지?

- 당연히 지금 주빈은 의장인데 같이 건배를 해야지. 하하하


일이 잘 풀려 기분 좋은 아놀드가 술을 받아든 기주에게 잔을 부딪치는 시늉을 하자 문이 열리고 15명의 시종이 잔을 들고 와 이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집사가 이사들에게 다가가 한 사람씩 잔을 채웠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아놀드가 건배 제의를 했다.


- 자, APS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합시다.


아놀드가 잔을 높이 쳐들자 이사들도 같이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라고 했다. 모두의 잔이 입으로 향하던 그 순간 기주가 잠깐! 이라고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아놀드가 팔을 내리고 기주를 바라보았다.


- 톰이라고 했나?

- 네. 미스터.


기주가 집사에게 입을 열자 집사가 공손히 답했다.


- 톰, 이 와인은 도멘 르루아 샹베르탱 그랑 크뤼인가?

- 네.

- 2013년 산, 비즈 르루와가 창조해낸 부르고뉴의 걸작. 한 병에 8천 8백 불이 넘었던 최고의 와인.

이건 오리지널인가?

-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그렇군. 하며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기주가 입에 있던 와인을 잔에 도로 뱉어냈다. 가만히 기주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숨 같은 탄성을 질렀다. 술을 뱉어낸 기주가 그대로 잔을 뒤집어 술을 바닥에 쏟았다. 아라비아풍 양탄자가 진하게 물들었다. 전보다 더 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집사가 기주를 바라보며 무슨 의미인지를 물으려 할 때 아놀드가 먼저 말했다.


-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 내가 주빈이라 했으니 호스트에게 한 가지 청이 있는데?

- 말해 봐.

- 이 와인은 교활하고 음침해서 오늘 같은 날엔 별로야. 술을 바꿔줄 수는 없을까?


이미 향에 취해 있던 이사들이 누군가는 잔을 흔들어 향을 맡으려 하고 누군가는 교활하다고? 하며 한 모금 마셔보려고 입을 갖다 댔다.


- 톰, 다른 와인을 가져와.


톰이 네. 장관님 하고 시종들에게 눈짓하자 시종들이 자신의 앞에 있던 사람들의 잔을 거둬들였다. 다시 한번 좌중은 아쉬움의 탄성으로 가득 찼다. 더러는 끝까지 마시려고 했지만 결국 시종에게 잔을 빼앗기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집사가 새로운 술을 들고 와 아놀드에게 권하자 아놀드가 사양하며 기주에게 보냈다. 기주가 술을 머금고 입속에서 한 바퀴 돌린 다음 말했다.


- 샤스 스플린. 슬픔이여 안녕…

- 그렇습니다. 미스터.


병의 라벨에는 난 천년을 산 사람보다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네. 라는 보들레르의 시, 스플린의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또한 복원된 와인. 기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와 시종들이 다시 조금 전과 같이 둘러선 이들에게 잔을 건네고 술을 따랐다.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집사와 시종들의 움직임은 한결같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 자, 기쁘게 건배를 듭시다. APS의 미래를 위하여.


아놀드가 잔을 들며 건배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잔을 들어 건배했다. 기주는 잔을 들고 잠시 바라보다가,


- 인 비노 베리타스.


라고 중얼거리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은 아놀드가 그가 잔을 모두 비우자 곁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 모든 준비가 끝났군. 당신 차례가 왔어.


곁에 선 남자가 흘깃 기주를 바라보고 짧게 헛기침을 했다. 기주는 그 모습을 보지 않고 창밖의 어느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저 ‘유서라…’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유서, 나 이기주는,


남자가 기주를 보고 담담하게 유서를 읽기 시작했다.


- 질 높은 삶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노력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중력장의 손상을 줄여주는 부유 돔을 통해 그 꿈의 대부분을 이루어 냈다. 목표를 이룬 만큼 큰 허무가 다가온다. 앞으로의 나에게 다른 꿈을 허락하지 않는다. 목표가 사라진 시간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남자가 다시 한번 헛기침을 했다.


- 이제 나는 다른 시간을 열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간을 놓으려 한다. 내 모든 재산은 나의 오랜 친구…


기주가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다른 모든 사람이 두 남자 사이를 흐르는 긴장감에 숨을 죽였다. 시선을 의식한 남자가 기주를 마주 보며 담담하게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기주 역시 담담한 표정으로 낭독을 듣고 있었다.


- 마르코 아이렌에 양도한다. 나 이기주는 이제 이 시간을 마감하려 하며 이 모든 것은 어떤 강압, 강제도 없는 명백한 나 자신의 결정임을 밝힌다.


실내에 가벼운 탄성이 일었다. 아놀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뼉을 치고 말했다.


- 좋아. 이제 쇼의 대미를 장식해 볼까? 준비됐으면 가져와.


아놀드의 말이 끝나자 집사가 뭔가를 들고 기주에게 다가와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검은 잔에 담긴 푸른색 액체였다. 기주가 아놀드에게 물었다.


- 이건 뭐지?

- 별것 아니야. 인간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 끝없을 고통 대신 무한한 행복을.

- 해피엔딩이로군.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치유될 방법이 생길 언젠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멈추어 잠드는 수면센터. 또 하나는 비용이 없거나 혹은 수면이 싫어 시간을 멈추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약물. 신연방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허가받아 지급되는 이 약물은 강한 마약 성분으로 고통 없이 삶의 마지막을 맞을 수 있게 한다고 하여 해피엔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기주가 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누구는 마주 보고 누구는 눈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기주의 시선이 유서를 읽은 남자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 이거야 원 참… 별수 없군.


기주가 잔을 들어 바라보다가 액체를 단숨에 마셨다.


잠시 후 기주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아놀드가 그런 그를 잠깐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탁 튕겼다. 집사가 시종들과 함께 들것을 들고 와 기주를 옮겼다. 마르코가 방을 나가는 기주를 끝까지 따라가며 보았다.


- 카르페 디엠! 우리는 오늘을 즐깁시다.


아놀드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좌중을 주도했다. 기주야 어찌 됐든 이제는 아놀드의 세상이었다. 시종들이 분위기에 맞는 술과 안주를 들여왔다. 술자리가 무르익기 시작할 무렵 문득 아놀드가 마르코가 안 보이는 걸 발견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놀드가 집사를 불렀다. 한 시종이 들어와 집사가 기주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말을 전했다. 잠시 생각하던 아놀드가 콘트롤 패널을 열어 저택 사방의 카메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사들이 책상 앞에 둘러서서 아놀드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치를 계속하던 아놀드가 한 화면에서 카메라를 멈추고 확대라고 지시했다. 곧 하나의 작은 스크린이 확대되어 공간을 차지했다. 화면에는 누군가를 업고 달리는 집사가 보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집사가 업은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 들고 달리는 마르코가 보였다.


- 더 크게.


아놀드가 말하자 화면이 더 확대되며 업힌 남자의 흔들거리는 얼굴에 초점이 맞춰졌다. 헉, 누군가가 헛숨을 들이켰다. 아놀드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전투 로봇들에게 명령했다.


- 잡아!


저택의 사방에서 로봇들이 솟구치는 모습이 스크린에 보였다. 아놀드도 서랍에서 핸드건을 꺼내 들고 뛰쳐나갔다. 곧바로 전투 로봇들이 달아나는 세 사람을 둘러쌌다. 하지만 집사가 품에서 패널을 꺼내어 누르자 전투 로봇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지만, 곧바로 저택에 설치된 자동 방어 시스템에 발이 묶였다.


- 야 이건 또 뭐야?

- 이게 그거야. 이건 나도 안 돼.


집사가 가까운 나무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 집사와 기주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분산하려고 뛰쳐나간 마르코가 방어 포대의 무차별 공격에 다급히 가까운 조각상 뒤로 숨었다. 파괴 빔이 그 조각상을 박살 내자 연이어 후퇴하며 집사가 있는 나무 뒤까지 밀렸다. 공격이 멈췄다. 그들이 물러난 곳은 음영지역처럼 무기의 사정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마르코가 돌을 주워 앞으로 바로 던지자 바로 빔의 공격에 돌멩이가 박살이 났다. 약간의 차이였지만 일단은 안전했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며 대책을 마련할 때 그들이 고민하는 곳으로 아놀드가 도착했다. 아놀드가 나서서 말했다.


- 막대한 유산을 물려줬더니 기껏 배신하는가?

- 배신이 아니라 신의를 지키는 거지.

- 죽일 때는 언제고 신의를 찾나? 취미가 참 희한하군.

- 굳이 죽일 필요가 있나? 당신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어. 뭐가 더 아쉬워서 목숨까지 빼앗으려 하지?

- 집사! 어차피 그는 행복하게 죽어. 해피엔딩을 먹은 자는 절대로 살릴 수 없는 걸 모르는가?

- 수면제입니다. 아놀드 장관.


집사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아놀드가 크게 웃었다.


- 바꿔치기? 죽이려는 계획에 동참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무슨 헛소리냐?

- 그를 보내줘라.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위협조차 안 될 거라고!

- 위협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한다. 넌 그냥 따르기만 하면 되고.

- 못 하겠다면?


피융

콰아아앙


아놀드가 핸드건을 발사했다. 마르코와 집사, 기주가 은폐하고 있던 나무 모퉁이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 그냥 당할 거 같으냐?


피융 파파파


마르코가 핸드건을 발사하자 아놀드의 곁에 있던 조각상 팔이 날아갔다. 아놀드가 다른 조각상 아래로 피하며 핸드건을 쏘았다.


피융 피융 파라락 파라락 퍽 퍽


빔이 근처의 조각상을 박살 내며 서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코의 작전은 조금씩 들어맞고 있었다. 마르코는 집사에게 눈짓하고 일부러 원을 그리며 아놀드가 방어 포대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했다. 뭔가 이상한 낌새에 놀란 아놀드가 시스템에 명령하지 않았다면 아놀드의 머리가 조각상처럼 부서질 뻔했다.


- 방어 시스템 해제!


아놀드를 향해 금방이라도 무서운 광선을 발사할 듯이 노란빛을 모으던 무기들이 작동을 멈췄다. 그때 마르코가 아놀드를 향해 핸드건을 발사하며 외쳤다.


- 지금이야 톰. 달려!

- 어림없다!


아놀드가 맞대응하며 집사를 향해 핸드건을 쏘았지만 곧이어 마르코의 핸드건이 자신을 향해 불을 뿜자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그 틈을 타 집사가 기주를 업고 죽으라고 달려 아놀드의 공격권을 벗어났다. 아놀드가 그런 집사를 향해 핸드건을 쏘려고 했지만, 마르코가 방해하자 하는 수 없이 공격을 피해 숨었다.


- 방어 시스템 가동!


한동안 피하는 것 같던 아놀드가 갑자기 시스템 가동을 명령했다. 축 늘어져 있던 무기들이 갑자기 머리를 쳐들더니 사정권 안에서 달리던 집사와 기주에게 빔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 헉!


마르코가 당황한 눈으로 집사를 뒤쫓았다. 공격에 당했는지 무릎이 픽 꺾였던 톰이 다시 기주를 들쳐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피융! 핑 핑!


다시금 그들을 향해 무자비한 빔 소나기가 쏟아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던 불줄기가 사라지고 비행정에 기대앉아 집사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붉은 코트 아래로 그의 한쪽 무릎 밑이 보이지 않았다. 기주는 세상모르고 잠들어있었다. 출혈이 심한지 집사의 얼굴은 핏기 없이 푸르게 보였다.


- 톰! 야 인마 정신 차려! 토미!


아놀드를 어떻게 따돌렸는지 마르코가 도착해 집사의 상처를 보고 얼굴을 툭툭 치며 소리쳤다. 품에서 긴급 키트를 꺼내 사라진 다리 위쪽에 대고 나노봇을 투입했다. 라인을 통해 수많은 나노봇들이 들어가 상처를 치료했다. 출혈이 멈추고 집사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왔다. 집사가 사라진 무릎 아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 몇 번째냐. 형만 만나면 다리가 사라지네. 다리야 미안하다.

- 인마 다리야 또 맞추면 되지.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의장님을 안으로 옮기자.


마르코가 기주를 업고 비행선으로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본 집사가 한쪽 다리로 문을 통과해 들어오며 말했다.


- 근데 아놀드는 왜 안 보이지? 그게 더 무서운데…

- 글쎄 말이다.


마르코가 기주를 안전하게 눕히고 기주와 집사에게 비상 구명 키트를 채웠다. 창밖을 살피며 비행정의 콘트롤 패널을 허공에 띄우고 비행선을 이륙시켰다. 어디로 갈지 잠시 망설이던 마르코가 목적지를 설정하려는 순간,


콰아앙!


뭔가가 비행정을 공격했다. 급히 밖을 내다본 집사가 이런 아이고 하며 일단 가! 아무 데나 가! 라고 소리쳤다. 뭔데? 대꾸하며 마르코가 급히 내비게이션에서 기본 행선지 중 아무 데나 누르자 비행정이 방향을 잡고 출발했다. 하지만 연이어 뭔가가 와서 타격을 주자 방어 시스템이 자동 작동하며 배리어 지우털을 펼쳐 공격을 막아냈지만, 내부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쿠아아앙! 우당탕!

기주가 눕혀져 있던 자리에서 튀어 올라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집사나 마르코나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는 처지에서 기주를 도울 수가 없었다.


콰앙 쾅쾅쾅 쾅 쾅! 와장창!


아무리 방어 시스템이 작동한다지만 민간 비행정이라 결국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배리어 지우털이 박살 나 깨져나갔다. 곧이어 커다란 타격이 비행정 선체를 직격했다. 방어 시스템이 무력해진 선체에 구멍이 나며 기주가 구멍 쪽으로 쓸려나가자 마르코가 몸을 던져 기주의 옷깃을 잡아챘다. 야! 톰 나 좀 잡아! 마르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기주를 당기고 집사가 그의 다리를 한쪽 팔로 잡고 다른 팔로 선체의 벽을 잡고 버텼다.


쿠아아아아앙!


하지만 이어진 타격이 선체를 때리자 요란하게 요동치며 마르코와 집사가 기주를 놓치고 구석으로 처박혔다.


- 으아악!

- 아이고 의장님!

마르코가 엉금엉금 기어 구멍으로 추락해가는 기주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그렇지! 하니 집사도 다가가서 같이 보다가 됐어! 했다. 촤라라락! 기주의 잠든 몸이 맨땅으로 추락하는 순간 긴급 구명 키트가 전개된 것이다. 키트가 작동해 떨어지는 속도를 급히 늦춰 곤두박질치는 걸 막아내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기주는 바닥의 한 뼘 정도 위에 멈출 것이다. 그러나 기주를 발견하고 뒤따라온 전투함이 빔을 쏴서 기주의 구명 키트를 파괴하자 기주는 지상으로 낙하하다가 어느 숲속으로 사라졌다. 기주를 추락시킨 전투정이 추락지점 주위를 선회하며 기주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사가 다급히 말했다.


- 빨리 튀자!


기주가 떨어진 지점을 하염없이 보던 마르코가 집사의 말에 급히 콘트롤 패널을 수동으로 바꿔 비행정이 빠르게 현장을 떠났다. 숱한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기주의 전용 비행정에 탑재된 고도 유지 시스템 덕분에 결국 추락하지 않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잠시 후 아놀드의 전투정이 나타났다. 아놀드가 사라지는 기주의 비행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정은 아쉬운 듯 주변을 더 맴돌다가 저택 쪽으로 사라졌다.


한편 추락하던 기주는 울창한 나뭇가지에 부딪치며 속도가 떨어져 길게 자란 풀들이 가득한 바닥에 쿵 떨어졌다. 비행정에서 이미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후 추락 도중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부딪친 기주는 바닥에 떨어지며 혼수 상태로 바뀌었다. 기주는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엎어져 있었고 길게 자란 풀들이 그런 기주를 가려주고 있었다. 아놀드가 전투정 안에서 스크린으로 기주가 떨어진 지점을 지켜보았다. 전투정 함장이 생체 신호를 모니터링 했지만 여러 개의 무리가 잡힐 뿐 누가 기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함장 저기 떨어진 부분을 집중 공격해. 거기 있겠지. 어디 가겠나.


아놀드가 추락지점 쪽을 가리키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함장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 장관님, 이곳은 사파리입니다. 동물이 한 마리라도 죽으면 일이 커집니다.


아놀드가 함장을 노려보자 함장이 말했다.


- 장관님!

- 에잇! 되는 일이 없어! 여기 포식자가 하이에나인가?

- 네 장관님. 27마리가 있습니다.


다른 대원이 자료를 찾아 보고했다. 잠시 생각하던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복귀하자. 라고 말했다. 전투정이 사라진 사파리엔 일상의 고요가 돌아왔다. 한동안 기주는 미동도 없이 쓰러져있었다. 새들이 날아와 여기저기를 콕콕 거려도 반응이 없다던 기주가 문득 머리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동시에 하이에나 한 마리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가 머리를 들자 한 걸음 물러서서 주춤 그를 살폈다. 기주가 해피엔딩을 흉내 내기 위해 집사 톰이 먹인 유사 수면제에 취해있던 시간은 네 시간 반.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집사 톰은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었지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떨어지며 머리를 심하게 부딪치더니 순간 기억이 전두엽 아래 어딘가로 숨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건. 죽음의 냄새다. 기주가 끄응 소리를 내며 곁에 자신이 부러뜨려 떨어진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으로 많은 상처와 상처가 움직임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선 그가 나뭇가지를 몽둥이처럼 휘둘러보았다. 적당히 무겁고 적당히 길어 지팡이로 딱 좋았지만 그보다.


크헝!


기주를 살피던 하이에나가 탐색이 끝난 듯 몇 미터를 뛰어올라 그의 목에 이빨을 내밀었다. 지팡이의 무게와 길이를 재던 기주가 몽둥이를 휘둘러 하이에나를 물리쳤다. 목을 비틀어 몽둥이를 피한 하이에나가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며 공격 찬스를 노렸다. 움직임도 불편했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은 눈도 초점이 부정확하여 첫 시도에서 보기 좋게 실패한 기주는 두 번째 공격에 대비해 몸을 비틀어 하이에나를 견제했다.


크르르르르르!


목울대에서 이를 가는 것 같은 위협 음이 기주의 움직임에 허점을 만들었다. 하이에나가 순간 반대편으로 몸을 비틀자 기주가 움직여 공격을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움직임은 가뜩이나 중심이 흐트러진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하이에나에게 다시 몸을 일으켜 대항하려고 했지만 하이에나가 그를 타넘어 반대쪽으로 뛰자 그 움직임도 균형을 잃는 계기가 되었다.


아…


기주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온힘을 기울여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이에나는 그 몽둥이를 목을 낮춰 피한 뒤 반대로 지나간 몽둥이를 주둥이로 잡아챘다. 하이에나의 힘에 몽둥이가 내팽개쳐졌다.


아… 으아아아악!


다시 한번 낮은 탄식을 내쉰 기주가 등골을 통과하는 고통에 뼈 끓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하이에나가 그의 허벅지 뼛속 깊이 박힌 이빨 그대로 기주를 물어 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빈 자리엔 기주가 흘린 피가 흥건했지만 바람이 피를 덮고 비가 피에 섞여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으드득


나노캠을 기억해낸 기주가 이를 갈며 브레인과 연결된 콘트롤 패널 오픈 방법도 기억해내고 녹화영상의 재생을 지시했다. 영상에는 아놀드와 이사진이 벌인 만행이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다.


사실 기주와 마르코는 아놀드의 초청을 앞두고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아놀드의 집사가 마르코의 사촌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집사 톰은 마르코의 지시로 아놀드의 저택에 잠입해 정보를 빼내어 마르코에게 전달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주 위험한 계획을 전해왔다. 마르코는 그 정보를 듣자마자 기주와 상의하러 온 것이었다.


- 아놀드가 나를 제거하려고 한다고?

- 네. 보스.

- 그래서 어떻게 한답니까?


아놀드의 계획은 이랬다. 이번 프로젝트 건으로 회의를 하자는 명목으로 기주를 아놀드의 저택으로 불러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지구인 이사진들과 함께 제거하는데 그 계획에는 유언장 작성과 제거 방법까지 상세하게 짜여 있었다.


-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 저들의 공모를 언론을 통해 모든 신연방 시민에게 노출하면 어떻겠습니까?

- 언론은 대대로 진실한 적이 거의 없어요. 자본이 있는 곳에 언론이 있으니 우리가 아무리 모든 걸 밝힌다고 해도 제대로 노출도 안 될 겁니다.


여러 방법이 논의되었지만 무엇 하나 뾰족한 수가 없자 기주가 말했다.


- 뭐든 잡으려면 굴에 들어가야죠. 나 하나 안전하게 있자고 많은 신연방 사람들의 고통을 눈감고 있을 수는 없어요.

- 보스!

- 어차피 아놀드가 나를 초청했고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됐어요. 방법을 좀 찾아보자고요.


잠시 생각에 잠긴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 보스를 해치고 자살로 위장하려면 총 칼 같은 일반적인 무기는 자신의 DNA가 각인 되어 스스로 증거를 남기게 되니 아마 약을 쓰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놀드가 구할 수 있는 약물이라면 딱 하나가 있지.


신연방 은하 신연방에서는 범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모든 무기가 될 법한 물건에 각인 시스템이 내재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 물건(무기)을 잡으면 장갑을 끼거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더라도 사용자의 영상이나 DNA를 채취하고 그 내역이 각인 되는 것. 애초부터 범죄에 이용할 꿈도 못 꾸게 하는 것이다. 그건 피치 못할 순간을 뺀다면 거의 성공한 정책이었다.


- 해피엔딩

- 해피엔딩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그의 지위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독약. 해피엔딩

- 그에게 이걸 전달해주세요.


기주가 검은색 드라이브를 내밀었다.


- 이건? 이건 극비문서에만 하시는 시그니처 사인 드라이브가 아닌가요?

- 아놀드는 절대로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의심이 많은 자예요.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뭔가 내부적인 극비사항을 전달해야…


이후로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되어 기주와 마르코, 집사의 모험이 계획된 것인데 기주는 하이에나에게 먹힐 판이고 집사는 다리를 잃었다. 아놀드에게서 달아난 비행정이 만신창이가 되어 설정된 장소로 들어왔다. 그곳은 적이 많은 기주의 비밀 안가. 일단 집사의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메디컬 캡슐에 올린 후 마르코가 대책을 생각했다.


마르코에겐 기주를 구하는 게 먼저다. 하지만 사파리는 신연방 관리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고 그곳은 10분 단위로 인공위성이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그 인공위성은 말 그대로 휴머노이드가 탑재된 시스템으로 구동이 되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노역형으로 수면 상태에서 휴머노이드 시스템이 되어 콘트롤하는 것이다.


인간 자원 또한 아직 너무나 부족하기에 소중하다. 노역형으로 인스톨 되는 휴머노이드 이외의 어떤 휴머노이드라도 모두 불법이었다. 이들은 신연방 내에서 범죄 행위를 찾아내면 형이 감면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모니터링 했다. 이런 휴머노이드 인공위성 수만 개가 모든 곳을 샅샅이 훑으며 신연방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사파리는 특히 중점 관리 지역이라 한마디로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정밀 센서로 돌멩이 하나까지 훑어 감시하는 곳이다. 그곳에 무단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체포되면 무조건 4~50년 노역형을 두들겨 맞는 건 기본이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신연방 검사에 의해 증거만 명료하게 제시되면 판사는 참작 없이 무조건 형벌을 확정했다.


그래서 동물을 죽일 상황이 되면 차라리 남은 가족을 위해서 그냥 죽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만큼 풍족한 배상금이 나오는 것이다. 가족들은 일부가 하이에나에게 죽어 배상금이 나오면 그 돈으로 부유 돔에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물리려고 사파리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지자 신연방은 사파리에서 물렸을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원도 배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족들에게 사파리 시설물 훼손에 대하여 보수에 관한 손해배상 청구로 정책이 바뀌었다.


노역형이야 문제가 아니지만…이라고 중얼거리던 마르코가 갑자기 생각을 접고 기주의 지시대로 수면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공연히 문제를 일으켰다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계획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수면이라는 도구는 미래의 시간을 누릴 수는 있지만, 과거는 영영 돌이킬 수 없었다. 개인 통신 모듈을 켜 집에 연락했다. 잠시 후 팔목에 감긴 패드에서 작은 가상 스크린이 생기고 그의 아내가 화면에 나타났다.


- 켈리, 어머니와 에밀 그리고 당신 모두 바로 22커뮤니티 수면센터에서 보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는지 아내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화면에서 사라졌고 스크린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는 그대로, 기주는 또 그대로, 계획이 있었다. 그는 일단 보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치료 중인 집사를 보다가 고개를 젓고 빠르게 콘트롤 패널에서 스크린을 띄워 벽으로 날렸다. 벽에 메시지가 메모로 남았다.


- 톰, 나 먼저 센터로 간다. 다리마저 생기면 뛰어와라. 캡슐 하나 비워둘게.


집사가 들었으면 한숨을 내쉴 메시지를 벽에 척 붙여놓고 마르코가 안가에서 나갔다.


신연방 은하 신연방 의회


마르코 가족이 수면센터에서 만나 수면에 들어간 오십 년 후, 신연방 은하 신연방 최대의 스테이션 APS 역에 두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 곁에는 항성계는 물론 행성계 경유 스티커까지 덕지덕지 붙어서 원래 디자인이 보이지도 않는 커다란 캐리어가 남자를 따라 자율주행 하고 있었다. 앞에서 오던 한 아이가 요리조리 길을 막으며 캐리어와 장난을 치자 난감해하던 캐리어가 반대로 가는 척 아이를 속이고 멀리 떨어진 남자를 찾아 부지런히 바퀴를 굴렸다. 그 가방 뒤로는 또 다른 남자와 역시 경유 스티커가 잔뜩 붙은 캐리어가 앞선 남자를 따라 걷고 있는데 그 발걸음은 여행자처럼 느긋했다.


- 여기 카페에 들르시겠어요? 커피와 브뤠첸이 아주 맛있는 곳이에요.

- 그래. 배가 고픈 거구나. 나도 커피 당긴다.


두 남자가 크레스마스란 간판이 은은하게 빛나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로봇이 아닌 인간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첨단의 핵심인 곳에 이런 낭만은 참 괜찮은 걸… 인테리어와 디스플레이 된 컨셉은 2000년 대 지구 같았다. 직원들은 모두 인간이었고 주문이나 계산 등의 방법이 모두 과거의 지구였다.


- 좋지요? 제가 자주 오던 곳이에요.


앞에 앉은 남자가 동의를 구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다.


- 의회는 아직 APS의 건물을 사용하고 있군.

- 네 굳이 바꾸려고 하지도 않아요.


남자가 말하고 다른 남자가 보충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커피와 브뤠첸이 나오자 앞에 앉은 남자가 마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기대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자가 그 모습에 하하 웃고는 좋구나. 해주었다.


- 가족은?

- 네. 저만 조금 일찍 잠에서 깨어났어요. 가족은 아직 수면 중이예요.

- 할머니는 깨어나면 친구가 없어서 싫겠네.

- 아니요. 오히려 젊은 친구가 생길 거라며 좋아할 거 같은 걸요?

- 하긴 요즘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필요한 사람은 출근하듯 센터에 가니까.

- 맞아요. 그것도 다 덕분이지요.

- 덕분은 좋은데 그 때문에 날강도 같은 놈들이 센터를 이용해서 시간을 넘나들며 범죄를 은폐하고 다니는 게 안타까워.

- 미래는 어떨지 몰라도 과거에 새겨진 각인은 못 바꾸니까 제 무덤을 스스로 판 걸 알면 땅을 칠겁니다.

- 부디 그렇길 바라야지.


남자가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시고 레드바인 하나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곁에 놓인 캐리어가 바퀴를 빼서 주인을 따라 떠날 채비를 했다.


보급기지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던 기주가 한쪽 구석에 심하게 훼손된 채로 세워져 있는 우주복의 일부를 바라보았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 일부만이 남아있는 우주복은 그날의 위태로움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고 있었다.


기주가 보급기지의 통신 프로토콜을 바꾸어 채널을 변경했다. 잠시 후 통신 채널 변경을 완료했다는 시스템의 노티스가 있자 자신의 비밀 인식 코드와 현재 위치를 보냈다. 영상과 음성을 보내는 것도 되지만 가능하면 발각 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임무와 시간을 계산하여 별 지우개 함선을 한꺼번에 폭파 시킬 정도로 용의주도한 놈들이다. 마르코라면 아니 그 후예일지라도 이 신호를 받기만 한다면 분명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송신을 끝낸 기주가 콘트롤 패널에서 벗어날 때 문득 세워진 우주복의 팔 부분이 미세하게 깜빡이는 걸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우주복에 설치된 긴급 구조신호 인디케이터다. 인디케이터를 분리해 콘트롤 데크로 들고 갔다. 시스템을 불러서 신호를 해석하라고 지시했다. 주기적으로 깜빡이는 신호가 잠시 이어지는 동안 시스템이 분석을 마치고 말했다.


인디케이터의 연둣빛 램프 표시는 모두 열 개의 칸으로 그 중 세 개의 칸이 점멸하는 것은 구조요청자가 반경 3km 범위 내에 있다는 신호입니다.


- 구조를 요청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나? 식별 기호라든지…


이 구형 기기로 그 부분까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 스크린에 그 범위의 지도를 띄우는 것이 가능한가?


시스템이 대형 스크린에 보급기지로부터 반경 3km의 원을 그려 보여주었다. 지형까지 3D로 표시 되는데 가려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600미터 높이의 산을 두 개 지나야 했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강까지 가로막고 있었다.


- 시스템, 저 지역의 위험요소를 체크해 봐.


포식자가 3종, 독이 있을 것으로 예측 되는 동물이 13종, 독을 갖고 육식을 하는 식물이 4종, 강물은 강한 산성으로 닿을 시 5분 이내에 보호 장비가 녹기 시작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강물 안엔 포식성 어류가 최소 2종이 군집으로 있는 것으로 예측되며,


시스템이 정보를 전달하는 동안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 이어졌다. 숲은 깊었고 강물은 맑아보였다. 다채로운 빛을 가진 새들이 날아오르고 날아 내렸다.


보시는 조류 중에도 독으로 작은 생물을 마비시켜 사냥하는 종류가 최소 3종 이상이 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시스템이 날아오르는 작은 새를 잡아채는 나뭇가지를 보여주었다. 작은 동물을 잡아채는 새는 숲의 색깔을 띄고 있었고, 맑은 강물이 거뭇해지더니 물을 찾아든 초식성 동물이 순식간에 물속으로 끌려들어갔다.


- 산은 어떤가?


두 개의 산은 630m, 680m의 높이로 산성비에 의해 보행 시 부스러질 위험이 있는 산화된 지질로 예측됩니다. 경사면은 동쪽이 완만하고 서쪽으로는 급격한 경사로 이루어져 평지를 걷는 체력에 비해 300%의 에너지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 주로 보행으로 설정이 된 것 같군. 보급기지에는 비행체가 없다는 말인가. 저기를 간다고 했을 때 추천할 수 있는 장비를 스크린에 올려 봐.


 스크린에 보급기지에 비축된 장비들이 올라왔다. 예상대로 비행체는 없고 수륙양용 궤도 차량과 모선이 폭파되면서 탈출할 때 훼손된 것과 동일한 우주복, 헬멧과 라이플, 핸드건, 3기의 가드 로봇 등이 올라왔다. 불과 3km를 가는데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장비 구성이었다.


- 저 차량으로 두 개의 산을 넘을 수 있을까?


차량과 탑승자의 무게로 인해 산을 넘기는 어렵다고 판단됩니다만, 지질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경사각도는 가능합니다.


- 그래. 필요한 장비를 준비해 줘.


* * *


잠시 후 보급기지의 문이 열리고 궤도 차량이 나왔다. 차량 양쪽의 발판으로 가드 로봇이 라이플을 들고 탔다. 차량의 지붕으로 난 또 다른 가드 로봇이 레일 건을 잡고 주변을 경계했다. 기주는 시스템에 의해 운행되는 차량 내부에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었다. 동물들은 대부분 차량의 낯선 모습에 놀라 피했는데 포식자로 보이는 동물은 보이는 대로 달려들어 가드들이 사살했다. 시스템의 경고보다는 다소 수월하게 강을 건넜다. 물속에서 거뭇한 그림자가 솟구치다가 일부가 바닥에 부딪치고 다시 아래로 사라졌다. 산밑에서 잠시 망설이고 있자 시스템이 가드 로봇을 이용하여 위험을 감지하여 차량의 앞길을 열었다. 혹시 몰라 양옆의 가드들도 차량 무게를 줄이기 위해 뒤쪽에서 차량을 호위하듯 따라왔다. 두 곳에서 바닥이 허물어지며 궤도 차량이 잠시 기우뚱 했지만 뒤에 따라오던 가드가 반대편에서 차량을 지지하여 균형을 잡았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인디케이터의 램프 숫자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삐익 소리와 함께 한 지점에서 인디케이터의 시그널에 맞추는 소리와 램프가 점멸했다. 가드가 그 무엇인가를 스캔하자 시스템이 차량 내 스크린으로 영상을 보냈다.


- 뭐지? 사람이 아닌데?


그렇습니다. 스캔 결과 구조 신호를 보낸 건 소울 드라이브입니다.


- 소울 드라이브?


함선에 장착되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가드가 드라이브를 회수해서 기주에게 건넸다. 드라이브를 받아드는 기주의 손이 떨렸다. 기주는 그 안에 들어있는 영혼이 주린과 그리고 또 한 명… 마지막에 자신을 탈출시킨 그 존재, 바로 이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려왔다. 살아있어 주어 고마웠다.


APS 스테이션이 위치한 거리는 신연방에서 가장 화려한 번화가였다. 많은 사람이 일과 후의 여가를 즐기러 거리로 나왔다. 메인 스트리트 이곳저곳엔 초대형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는데 밤이 내려오면서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지금 한창 진행 중엔 신연방 은하 신연방 차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영상이 번호 순서대로 뜨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 맘길을 끌어모았다. 단연 거리의 화제는 대선이었다.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스크린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브뤠첸을 뜯어 먹으며 그중 하나의 스크린 앞에 섰다. 그 스크린에는 후보자의 약력과 경력, 그리고 대표적인 공약이 뜨고 있었다. 남자가 그곳에 나오는 후보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다른 남자가 캐리어와 함께 다가왔다.


- 관리자, 아니 아놀드인가요? 결국은 출마했군요.

- 안 할 이유도 없지. 모두 잠에서 깰 때가 됐군.


관리자가 수면센터에서 달아난 이후 전투함 한 대가 신연방에 나타나 대 항성 파괴 무기를 발사했지만, 타이밍에 맞춰 세 개의 달 중 하나를 이동시킨 엘리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거리를 늘리며 충분한 파괴력이 상승되지 않은 스페이스 캐논은 달 하나를 반파하고 끝났다. 마지막 별 지우개는 신연방군의 공격에 소멸하였다. 이제 모든 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엘리가 한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상황에 쫓겨 놓치고 있던 가장 원초적인 궁금증.


관리자는 과연 누구인가? 그 마지막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검색을 해보았지만, 막대한 정보가 담긴 자신의 브레인 드라이브 그 어디에도 관리자는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관리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냐는 것. 그렇다면 파괴된 별 지우개의 함선에서 그가 과연 마지막을 맞이했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파괴된 별 지우개의 잔해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관리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 어디에도 그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았다. 기주와 에밀은 수면과 해제를 반복하며 신연방의 많은 별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끈기 있게 관리자의 흔적을 찾아 추적을 거듭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곳에서 바로 신연방 한복판인 신연방에서 그를 찾아낸 것이다. 아놀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무려 차기 신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당선이 유력시되는 후보였다. 그 두 명의 여행자는 기주와 에밀 아이렌이었다.


기주가 후보의 영상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캐리어가 그 뒤를 졸졸 따라가고 에밀도 발걸음을 돌려 따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스크린의 후보 얼굴을 슬쩍 보았다. 그 얼굴 아래로 그가 내세운 공약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호 3번 아놀드 페이로드

전 신연방 재정부 장관

전 APS 이사회 대표 의장

대표 공약 :

중력 돔 거주 시민 전면 부유 돔 이주 프로젝트 시행.


그를 스쳐 지나가는 두 여자가 스크린을 보며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 누구 찍을 거야?

- 당연히 3번이지! 우리를 부유 돔에 살게 해주겠다잖아. 그보다 좋은 공약이 있어?

- 하긴, 그거 하나만으로도 다른 후보를 압도하는 것 같더라.

- 당연하지. 누구나 바라는 일이잖아.

- 근데 진짜 그게 가능하긴 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부유 돔에 들어가려면 백 년을 벌어도 안 된다는데 말이야.

- 가능하니까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겠지. 저 사람이 누구야. APS 의장이잖아!

- 인정! 바로 납득 되네. APS면 그냥 끝판왕이지.


앞서가던 기주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때마침 늘어선 스크린 사이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흩어져 날리는 눈발이 스크린의 화려한 빛을 반사하며 무지개처럼 빛나고 있었다.


- 오랜만이네요.


콘트롤 룸의 문을 들어서며 에밀이 감회를 늘어놓았다. 5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센터다. 센터 타이머는 에밀 또래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기주가 들어서자 느닷없는 방문자에 당황하다가 에밀을 보고는 다가와 굳은 포옹을 했다.


- 어서 오세요. 에밀.


부모가 누군지 어떤 환경인지도 모르면서 아이는 태어나고 원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듯 이곳도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더 이상 가족의 수면 유지비용을 대지 못해 나가고 누군가는 그대로 삶을 이어가지 못해 잠든 채로 나간다. 또 누군가는 중력을 견디지 못해 영원할지 모를 잠을 청해 들어오고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이유로 잠을 청한다. 22커뮤니티 수면센터는 여전히 평온과 고요를 덮어쓴 말없이 시신처럼 잠든 자들의 표정 없는 절규와 숨죽인 함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고 있었다.


에밀이 기주를 타이머에게 소개하고 간단한 인사가 지나갔다. 22커뮤니티 수면센터의 기록상 타이머는 에밀 아이렌. 그가 타이머로 배정받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신연방에서는 새로운 타이머를 파견할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정규적으로 보고가 딱 맞춰 올라왔고 그 모든 것들이 인간이 아닌 시스템에 의해 진행되었기에 인간이 백 년도 넘게 생존해서 센터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


센터는 대대로 아이렌 집안에서 가장 수재인 아이들에게 이어졌다. 타이머가 된 아이렌은 원래의 이름이 무엇이었든 에밀이라고 불렸는데 한 에밀이 25년간 센터를 맡게 되며 지금의 에밀 아이렌은 제5대 에밀인 셈이다. 에밀은 에밀에게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고 빠진다. 아이렌 집안에서 센터 타이머가 된다는 것은 무척 영광이었기에 이러한 세습은 오히려 아이렌들의 가문을 보다 영민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초대 에밀이 5대 에밀에게 깨워야 할 명단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패널을 열어 수면 해제할 명단의 어드레스를 시스템에 전송했다. 시스템이 명령 확인을 마친 후 각 층의 레이어에서 수면 캡슐을 추출하여 콘트롤 룸의 대기 공간으로 이송했다.


신이 인형의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듯이 수면 해제 프로세스가 차례로 가스와 보존 액체를 빼내고 나무처럼 고요한 육신에 바이탈을 부여했다. 돌아올 준비를 마친 캡슐로부터 튜브가 분리되고 맥박이 돌아오며 호흡을 시작했다. 동시에 10여 개의 캡슐에서 수면이 해제되는 광경은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 아 이 부분은 정말 잘 개선이 되었구나. 49개 프로세스를 3개로 바꾸어 내다니.

- 네. 프로토콜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수면에 들어가는 과정도 그만큼 빨라졌어요. 이제 몇 분이면 수면 세팅이 가능합니다.

- 와 이건 정말 생각만 했던 건데 실현이 되었군!

- 아! 저도요!


엘리가 깨어나 금세 심신을 추스르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밀과 엘리는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알고 활짝 웃었다. 다만 엘리의 얼굴엔 그늘이 있었는데 바로 언니 베스 때문. 관리자가 분명 언니도 이 센터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못 찾고 있다. 에밀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어서 마르코, 켈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깨어난 지우가 에밀, 엘리와 인사를 나누고 기주와 머쓱한 인사를 나누었다.


- 주린?

- 언…니?


아이렌 자매(자매는 수면에서 깨어나 콘트롤 룸을 산책하듯 걷다가 마주치고 서로 바라만 보며 울먹였다.)의 만남은 모두의 얼굴을 웃게 했다. 이 만남은 도대체 몇백 년만인가. 옛 APS 주주와 이사들도 차례로 눈을 떴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깨어났을 때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기주에게 사과의 마음으로 앞으로의 모든 일에 협조할 뜻을 밝혔었다. 그리고 기주가 양해를 구하고 다시 잠들게 했다.


모든 이들이 시간을 관통하는 만남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을 때 엘리와 기주만이 이룬의 캡슐 앞에서 시간 사이에 함께 멈춰있었다. 엘리는 아이렌 자매의 만남을 보며 언니를 떠올렸다. 이곳, 22커뮤니티의 수면센터에 있다고 했다. 물론 희대의 악당 관리자-아놀드-의 말이었지만 그나마도 마지막 기대를 남기게 하는 희망이었는데 언니는 아직도 어드레스를 찾지 못해서 만남은 150년 후까지 시간이 미뤄진 것이다.


수면에 든다고 해서 불사는 아니다. 자칫 사소한 문제로도 센터 내의 그 누구도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엘리가 아닌가. 보급기지 행성에서 이룬과 주린도 별 지우개 모선에서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룬과 주린이 담긴 소울 드라이브를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때맞춰 날아온 에밀이 아니었다면 기주도 이룬도 주린도 좌표 상의 코드로만 존재하는 어느 보급기지 행성의 먼지가 돼 있을 것이었다. 기주의 마음이 아파왔다. 그 시련을 견뎌내고 찾아왔는데 이룬만이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룬…


마르코가 감격한 표정으로 기주에게 다가왔다. 보스… 무사하셨군요! 기주도 뜨거운 포옹으로 마르코를 맞았다. 그리고 집사 톰. 셋이 당시(라고 하지만 이미 50년이 지났다.)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 다리를 또 잃어?


기주가 집사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말을 하자 집사가 발을 탕탕 굴러 보이며 웃었다.


- 멀쩡합니다. 보스.

- 너는 왜 프로젝트마다 다리를 다치냐. 것도 딱 그쪽만.

- 하도 없어지니까 몸도 얘를 없는 거로 치나 봐요. 사라지면 또 붙이죠. 뭐.

- 톰! 그런 말 하면 안 돼!


마르코의 아내 켈리가 톰의 눈을 똑바로 맞추며 질책했다.


- 에이 켈리, 농담이에요. 농담!


마르코가 그간의 이야기를 묻고 기주가 대략 아놀드 이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르코 등은 아 지우…하며 지우를 바라보고 아… 이룬님 하며 이룬의 캡슐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대략 깨어나자 에밀이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아놀드의 자취를 찾아 우주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 일에서는 다들 탄성을 보냈다. 지우가 문득 입을 열어 질문했다.


- 아놀드가 정말 그렇게 나쁜 악당이면요.

- 아이고 아직도!


엘리 단박에 뭐라고 하려는 걸 에밀이 살짝 잡아당겨 말렸다.


- 아니 엘리. 그게 아니라… 만약 그런 악당이라면 그냥 APS와 신연방 정부에 고발해서 처리해도 되는 거 아니었나요. 두 분 그렇게 온 우주를 찾아 헤매며 고생할 거 없이.

- 그렇지. 그렇게 하면 좀 편안할 수는 있었을 거야.


에밀이 공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우의 질문에 집중했다.


- 증거라면. 크리…기주 나노캠이 있고 공격당한 비행선에도 아놀드의 각인이 남겨져 있을 거고 결정적으로 전 주주, 이사들이 여기 이렇게 증인으로 있잖아요.


에밀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서 기주를 보았다. 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이 입을 열었다.


- 지우, 아놀드는 절대로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우리도 그렇게 처리하려고 했지. 하지만 딱 한발씩 늦게 되더라고.


결정적인 이유는 기주의 기억상실이었다. 그 기간, 주축이 되어야 할 기주가 사라짐으로써 아놀드에 대한 처리가 늦어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아놀드가 모든 대비를 완벽하게 마치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 아놀드가 대비한 건 뭐였니?

마르코가 에밀에게 묻자 에밀이 바로 말을 이었다.


- 아놀드는 곧바로 장관직을 사퇴하고 APS 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가 다시 허수아비 인물을 내세워 의장직을 수행하도록 했어요. 저분들은…


에밀이 전직 APS 주주와 이사를 가리키자 한 사람이 대표로 나서서 이야기했다.


-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의장님. 저희로 인해 그렇게 큰 고초를 겪게 되었어요. 모든 일을 제대로 돌려놓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그가 머리 숙여 사과했다. 기주가 말했다.


- 다 지난 일입니다. 다만 아놀드를 처벌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에밀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저분들은 아놀드에게 APS의 주주, 이사직에 모든 지분과 심지어 전 재산까지 빼앗기게 되고 말았습니다.


마르코가 이사들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 라고 중얼거렸다.


- 아놀드는 우리가 쫓는 걸 알고 있었고. 그의 주변엔 그가 채용한 탑 그레이드 가드와 사설 탐정은 물론 신연방 경찰과 신연방군에까지 통하는 영향력을 과시하며 온 우주를 제집처럼 돌아다녔어요. 그것도 어디서든 VIP 대접을 받으며. 어디 있는지 알아도 쉽게 접근할 수 없고, 접근했다고 해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 아놀드를 잡기 위해 군과 경찰력에 기대어 보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건 협조할 수 없다는 대답뿐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모두가 탄식을 내뿜었다. 잡지 못한다면 증거가 다 무슨 소용인가.


- 그런데 이제 그 아놀드 본인이 신연방 은하 신연방 대통령에 출마한 겁니다. 그것도 의장님이 제시했고 추진했던 부유 돔 프로젝트를 대표 공약으로 내세우면서요.


이 말을 할 때 에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에밀 또한 그동안의 사건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쳤으리라. 마르코가 기가 막힌 코웃음을 쳤다. 이사 쪽에서도 포퓰리즘이라매? 그러게 말야. 내로남불이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주가 에밀의 떨림을 받아 말을 이었다.


- 이놀드에게 죗값을 치르게 할 계획을 짜려고 합니다.


모두의 눈과 귀가 기주에게 모여들었다.


아놀드의 유세 현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아놀드의 연설에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새로운 신연방 대통령은 아놀드가 가장 유력하다는 뉴스가 모든 언론에 도배 된 것처럼 깔렸다. 상대적으로 다른 후보들은 그 후광에 점점 빛을 잃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아놀드가 지지자들과 손을 마주치며 행렬을 지나갔다. 그 행렬의 뒤쪽, 모자를 눌러 쓴 세 사람이 그를 보고 있었다.


- 정말 가드가 너무 많네요. 대충 봐도

- 몇 명이나 보여요?


마르코가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군중 사이에 섞인 가드를 훑어내고 있었다. 마르코의 눈에 담긴 나노캠이 현장을 센터로 전송했다. 엘리가 그 영상을 받아 브레인 드라이브의 인명 데이터를 대조해서 가드일 것으로 보이는 사람을 파란빛으로 가려냈다. 스크린이 금세 파란색으로 가득해졌다.


- 저게 다 가드?

- 맞아요. 분명 가드거나 혹은 가드 경력이 있는 특수요원들이네요.


화면 가득 띄워진 얼굴은 각양각색의 전직 특수 요원이거나 현직 보디가드만을 가려낸 것으로 수가 수백 명도 넘어 보였다. 지우그 모습에 기가 질렸고 엘리가 받아서 보충했다.


- 저걸 무슨 수로 잡아


지우가 중얼거렸다. 엘리가 지우가 아놀드에게 저걸이라고 표현하자 새삼 쳐다본다. 지우가 그 모습에 뭐요! 하지만 엘리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냥 웃어넘긴다.


- 무슨 방법이 없을까. 저러면 벌을 주긴커녕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네.

- 돈의 힘인가요…


같은 고민은 현장에서도 하고 있었다.


- 저걸 무슨 수로 잡아?


집사가 마르코에게 투덜거렸다. 셋이 아놀드의 호위 행렬을 뒤따라 가며 어쩔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APS에 간 인원들이 대회의장 접수 완료! 라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 일단 돈줄은 잡을 것 같고


마르코가 차에 타는 아놀드를 보며 중얼거렸다. 집사가 택시를 불렀다. 셋이 택시를 타고 아놀드의 차를 뒤따라 갔다.


* * *


시그니처 드라이브에 담긴 이기주의 기밀 프로젝트 결제용 사인은 무슨 수를 써놨는지 아무리 아놀드라도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기존에 마르코가 제공한 기밀 사인은 오리지널 사인을 복제한 것으로 중요한 보안 코드가 제거된 상태로 전달된 것이라 결국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아놀드가 잠시 집권 했거나 아놀드의 허수아비가 집권하는 시간 동안 기밀 사인이 오픈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 때문에 주요 프로젝트가 기약 없이 보류된 상태였다. 무슨 짓을 해도 APS의 메인시스템은 기주의 승인이 없는 한 프로젝트의 진행을 허용하지 않았다.


- 엘리, 준비 됐나요?


엘리의 커뮤니케이션 모듈로 기주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 네. 그쪽 미디어 관제 센터는 이제 제 거예요.

- 문제없이 부탁합니다.

- 그럼요! 저 엘리예요!


지우가 그런 엘리를 보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 엘리는 윤리 책 속에서 성장한 캐릭터 아니었어요? 탈법도 열심이네요?

엘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윤리? 그거 맛있어요?


지우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 선배!

- 나 엄청 윤리적이거든요! 당장 사과하세요!


전원이 모인 이사회에서 허수아비 회장이 결재 사인한 기밀문서가 또 다시 메인시스템에서 승인 거부되었다. 된다고 해서 벌인 쇼였는데 또 실패한 것이다. 시스템 에러인가 했지만 시스템 엔지니어는 시스템이 정상이라고 알려왔다. 프로젝트가 진행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신연방 각 은하에서 직접 날아온 행성 대표자와 기업 대표자가 불만을 터뜨렸다.


- 해주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하세요!

- 이거 뭡니까? 너무한 거 아닙니까?

- 당장 사퇴하세요!

- 의장님. 이러면 APS 지원 계획을 철회해야겠군요.


그동안 쌓인 서러움과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기라도 하는 듯 사방에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 잠시만요. 잠깐. 뭔가 오류가 있나봅니다. 곧 해결할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잠시만!


그 순간 회의장의 불이 모두 꺼졌다. 온통 분노가 터지려는 순간 벌어진 일이라 사람들이 순간 긴장해서 눈만 희번덕거릴 뿐 의도를 파악하느라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때 회의장 양쪽 벽면 초대형 스크린에 기주의 얼굴이 나타났다.


- 어? 저 저 사람은 의장?

- 귀신이야? 죽었다며?

- 의장!


수면 기간을 몇 번이나 거치며 지금까지 살아있는 몇몇 이사가 기주를 알아보고 경악했다. 기주가 잠시 회의장을 둘러보더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에 이사들은 물론 아놀드의 허수아비 의장도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 시스템!


기주가 메인시스템을 불렀다. 모두들 누구는 놀라고 누구는 당황하고 누구는 설마! 하는 모습으로 회의장 중앙의 시스템 스테이지를 내려다보았다. 메인시스템이 스크린에 음성 인식을 위한 암호를 끼워 맞추는 그림이 나타났다. 하지만 정확히 맞은 것인지 인식을 거부한 것인지 알아볼 방법은 없었다. 기주가 다시 시스템을 불렀다.


- 헤이 시스템, 나를 잊었나?


말씀 하십시오. 의장님.


 - 프로젝트 CTS-F330221 열어


기밀 프로젝트 오픈을 위한 시그니처 사인  드라이브 가동, 승인하시겠습니까?


- 어?

- 아…


그동안 아무리 오픈을 시도해도 반응 없던 시스템이 뭔가 다른 모습을 보이자 장내는 작은 흥분에 휩싸였다.


- 승인한다.


승인권자의 권한에 의거, 기밀문서를 해제합니다.


- 오… 열렸다!


시스템은 기주가 승인한 기밀 프로젝트 사인의 암호 코드를 분석한 뒤 관련 행성 관계자와 기업 대표자들이 염원했던 기밀 프로젝트를 오픈했다. 초대형 스크린에 기밀 프로젝트의 내용이 떴다. 그 모습에 경악한 이사들이 수군거릴 때, 기주가 APS는 이기주의 소유이며 그 유언장은 날조된 것이라는 나노캠 영상을 띄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많은 이사들이 기주를 진정한 APS의 주인으로 인정했지만 아놀드가 심어둔 이사들은 과거의 영상에 대해 그 진실성을 의심했다.


- 해킹이다! 저럴 수가 없어. 저건 풀 수가 없는 암호 코드라고. 이건 분명 우리 APS는 물론 신연방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자들의 악독한 음모야!


아놀드의 허수아비 의장이 외치자 어용 이사들과 친 아놀드 계열 이사들이 그럼 그렇지 이기주는 죽었다더라 하며 맞장구를 쳤다. 기주는 이 상황을 어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증거를 들이밀었는데 속수무책이다. 돈독했던 당시 이사들은 지금 거의 이 자리에 없었다. 죽었거나 수면 중이거나. 그때 엘리가 스크린으로 또 다른 영상을 송신했다. 행성 간 또 은하 간 몇 초의 딜레이가 지나간 후 초대형 스크린에 놀라운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어? 저게 누구야?

- 아, 어떻게 저럴 수가…

- 의장! 저게 사실입니까?


영상에서는 아놀드가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더니 품에서 핸드건을 꺼내 그 사람을 소멸시키는 모습이 상영되고 있었다. 영상 속의 남자는 송신기를 들고 있던 그대로 먼지도 안 남기고 사라졌다. 충격적인 영상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놀드는 그를 죽인 후 콘트롤 패널에서 뭔가를 조작하고 카메라를 향해 다가와서 뭔가를 중얼거리고 센터의 콘트롤 룸을 나갔다. 영상의 마지막은 소멸한 남자의 신분 카드가 보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잠시 후 한쪽에 신분 카드의 사진을 놓고 다른 쪽에서 인물을 대조하는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영상은 바닥의 신분 카드에 인쇄된 사진이 클로즈업되며 그 얼굴과 다른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매칭 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졌는데, 지구 소속 이사 중 한 여자가 계속 설마 하다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악! 아아. 로이…


사람들이 뒤돌아보거나 고개를 빼고 앞 옆 라인을 보며 무슨 일인가 파악하려고 했다. 또 다른 이들이 계속 인물이 바뀌는 스크린에 집중하다가 한 사람의 인물정보 카드에서 문득 멈추며 매칭 시그널이 뜨는 것을 보고 저런… 하며 비명을 지른 당사자를 바라보았다. 스크린의 인물 카드에는 로이 존스라는 이름이 보였고 그 얼굴은 떨어진 카드의 얼굴과 모든 특징이 완전히 일치했다.


화면이 바뀌며 기주가 여자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영상이 나타났다. 기주가 입을 열었다.


- 존스 이사, 혹시…

- 네 의장님. 저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행방을 못 찾던 그입니까?


여자가 넋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장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림이 시작되더니 곧 웅성거림으로 바뀌며 커다간 소란이 일었다.


- 엘리?

- 네 이야기 하세요. 에밀

- 아놀드의 차량이 비행정으로 바뀌었어요. 수행차량 중 십여 대도 비행정으로 바뀌어 날아올랐어요. 방향은 APS. 그쪽 방향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런… 같은 내용을 듣고 있던 기주가 깊이 탄식했다.


- 도착했어요. 들어갑니다.


엘리가 상황을 전달하고 5~6분이나 지났을까 싶을 때 회의장 문이 열리며 아놀드가 가드와 함께 들어왔다.


- 가드는 탑 그레이드 경호 요원이고 아놀드 가드 팀장이라고 나오네요.


엘리의 연이은 정보 전달이 있는 동안 문 앞에 선 아놀드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스크린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기주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아놀드 장관


아놀드가 기주의 부름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스테이지에 서 있던 허수아비 의장에게 말했다.


- 하펜, 권한을 넘겨라.

- 시스템, 의장의 권한을 아놀드 페이로드님에게 이임한다.


잠시 침묵을 두고 말이 없던 시스템이 결국 대답했다.


아놀드 페이로드 대표 의장에게 권한을 부여합니다.


- 시스템, 미디어 센터 시스템의 통제권을 회수해라


중앙 미디어 센터 하위 시스템의 통제권을 회수합니다.


잠시 후 기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스크린의 배경이 APS 로고로 바뀌었다.


- 시스템, 해킹 이후의 영상을 모두 삭제하고 해킹 경로를 추적해.


해킹 이후 재생된 모든 영상을 삭제합니다.


- 잠깐! 시스템! 영상 삭제를 멈춰.


시스템이 지시를 이행하려고 할 때 누군가 시스템의 프로세스 이행을 막아서며 스테이지로 올라가려고 했다. 가드가 그 행동을 제지하자 오르는 걸 포기한 여자가 아놀드에게 말했다.


- 아놀드. 영상을 삭제하기 전에 내가 당신에게 확인할 게 한 가지 있어요.

- 당신은 누구인가요?

- 나는 존스입니다.

- 오! 존스 이사, 용건이?

- 당신이 내 아들을 죽였나요?

- 당신 아들이 누구인가요?

- 내 아들은 로이 존스!

- 그가 누구인가요? 나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 22커뮤니티 수면센터에서 당신이 소멸시킨 남자가 바로 내 아들이에요!

- 22커뮤니티 수면센터? 난 거기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 거짓말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당신이 내 아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모습을.


아놀드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하고 존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분통이 치민 존스가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다시 가드에 의해 제지되었다.


- 시스템, 조금 전에 나온 영상을 다시 보여줘.


존스가 이를 갈며 시스템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시스템이 그 지시를 이행하지 않자 다시 말했다.


- 시스템! 이사회에서 오픈된 영상은 다시 실행을 지시할 수 있는 이사의 권한으로 영상 재생을 지시한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시스템이 답변했다.


존스 이사의 권한에 따른 지시는 이행이 불가능합니다.


- 왜? 왜 안 되냐고. 이건 정당한 이사의 권한으로 내리는 지시야!


불가능합니다. 해킹 이후의 영상은 이미 삭제되어 권한에 의해 내려진 지시를 이행할 수 없습니다.


아놀드가 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 존스 이사?


아놀드가 존스를 바라보았다. 이제 네가 뭘 어쩌겠느냐는 모습이었다. 부들부들 떨던 존스가 뒤로 돌아서서 이사들을 둘러보며 아놀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다들 봤죠? 이 남자가 내 아들 죽이는 거. 다 봤죠? 모두 봤죠? 불쌍한 로이!


존스가 다시 홱 몸을 돌려 소리쳤다.


- 이 살인자! 모두가 증인이다! 이제 넌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거다. 이 나쁜 놈!


아놀드가 좌중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마치 네가 봤어? 아니야? 그럼 네가 봤어? 넌? 너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놀드와 눈에 마주친 이사들이 하나 같이 목을 움츠리거나 눈을 돌렸다. 혹은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아놀드가 다시 시선을 돌려 존스를 바라보았다.


- 왜들 이래? 전부 봤잖아? 로이가 처참하게 살해되는 거 다 봤잖아? 응? 이봐요? 라카트? 이튼? 데이비드? 봤잖아? 봤지?


하지만 라카트도 이튼도 데이비드도 존스의 눈을 외면했다. 당황한 존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명히 아놀드가 범인인데 하다가 문득 시스템을 불렀다.


- 시스템! 센터 출입 기록은 언제까지 보존하지? 수면센터 말야!


수면센터 출입 기록은 보존 연한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무기한 저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존스 이사님


- 좋아! 이거야. 22커뮤니티 수면센터 출입 기록을 찾아서 스크린에 띄워줘. 로이 존스 중심으로.


시스템이 검색을 시작합니다. 하고 스크린엔 검색 중이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이사들 모두 이번엔 꼼짝 못 하겠다는 쪽과 긴가민가한 쪽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제 3의 방향을 짐작하는 쪽 등 제각각이었는데 분명한 건 이번이야말로 아놀드가 달아날 구멍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스크린에 이름을 입력하고 22커뮤니티 수면센터 출입 명부 검색에 들어갔다.


타임머신처럼 시간이 과거로 이동했다. 시대에 걸맞은 화면이 스크린을 빠르게 지나갔다. 모두 숨죽이며 검색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존스는 어떻게 해야 원수를 갚을 수 있을지를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놀드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어떡하든지 빠져나갈 궁리를 해두었을 것이다. 마침내 계속 지나가던 이름이 어느 한순간에 멈춰 섰다.


22커뮤니티 수면센터 로이 존스의 출입 기록입니다.


- 로이 존스의 출입 일자에 다른 출입자 기록을 띄워.


존스가 다시 지시했다. 로이가 출입했던 날짜에 출입한 명단을 띄웠다.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은 로이 존스. 그리고 각각은 한 번씩 들어가서 나오지 않거나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로이가 사라진 날로부터 그는 그 기간 몇 번 더 출입했다. 하지만 끝내 아놀드 페이로드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아놀드가 이제 어쩔래? 하는 표정으로 존스를 내려다보았다.


- 이럴 리가 없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살인자!


존스가 아놀드를 가리키며 증오를 내뱉었다.


- 시신도 온전히 찾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 없었어. 존재 자체가 사라졌어. 너도 똑같이 당할 거야. 네가 뿌린 대로 그대로 당할 거야. 네가 신연방 대통령이 된다고? 신연방의 수백 수천 억 목숨을 그 손아귀에 쥐겠다고? 이 나쁜 놈… 얼마나 더 죽여야 그 더러운 욕심이 채워질까. 나쁜 놈…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주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존스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심장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던 존스가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존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메디컬 로봇이 나타나 존스를 스캔하고 나노봇을 투입했다. 하지만 존스는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잠시 후 작은 부유정이 들어와 존스를 밖으로 옮겼다. 아놀드가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부유정을 멈추고 존스의 귀에 속삭였다.


- 너의 저주는 허공중에 사라질 것이다.


부유정이 회의장을 떠나고 스테이지로 올라온 아놀드가 이사들을 둘러보았다. 잠시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아놀드가 입을 열어 말했다.


- 외부 세력이 우리 APS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유세 도중 부랴부랴 왔더니 다들 이게 무슨 꼴입니까? 가짜뉴스에 선동이나 당하고.

그는 자신이 아니라 APS를 공격하는 외부 세력이라고 했다. 이사들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전부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벌어진 일이며 아놀드가 나타나면서 모든 공격이 한순간의 해프닝으로 <완전한 종료>가 이루어졌다는 걸 알았다. 아니 그렇게 정리되고 그렇게 기록되었으므로 그렇게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칫 거짓 선동에 속아 부화뇌동 할 뻔 한 거다.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들은 것도 없었다. 개중엔 물론 이게 정상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나서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 APS의 명성에 타격을 줄 수 있으니 부디 외부엔 일체 함구하시기 바랍니다.


정의? 그게 뭐야. 그런 건 어디에 쓰는 거지? 그들에겐 무엇보다 이익이 중요했다. 지금 일이 잘못되면 자신들이 투자한 돈이 큰 손해를 볼 것이다. 게다가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는 아놀드 연관 기업에 투자한 자들도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투자 금액을 몇십 배 몇백 배로 불려 줄 아놀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 작은 흠집으로도 거대한 댐은 무너질 수 있다는 옛 지구 역사의 교훈을 새기며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암묵의 순간이었다.


* * *


기주가 연결이 끊긴 스크린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아놀드가 로이를 죽이던 영상이 어디에서 났지? 하는 생각이 났다. 자신이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파일이었다.


- 엘리, 그 마지막 영상은 어디에서 난 겁니까?

- 아… 기주님. 그 영상은

- 그래요. 본 적 없는 거라.

- 네 기주님 이룬님에게서 회수한 나노캠에 찍힌 영상이에요.

- 이룬…이 돌아왔나요?

- 아 지난번처럼 잠깐 다녀갔어요.

- 그랬군요. 다녀갔다는 표현 고마워요. 엘리

- 그 표현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네요. 필요할 때마다 꼭 집에 오듯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니까 언젠간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기주.


언젠간. 기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  


22커뮤니티 다운타운에서 수면센터로 돌아오던 집사가 갑자기 멈춰 서서 말했다.


- 저게 다 뭐지?

- 아놀드가 왔나 보다.

- 아놀드? 여길? 왜?

- 제 발이 저리나 보네.


얼굴이 드러날까 봐 모자를 고쳐 쓴 마르코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 에이 형, 저어 멀리 있는데 뭘 벌써 그래? 소심하게?


마르코가 입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쉿!  하며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 저 정도 인물이 뜨면 인공위성 상시 감시인 거 몰라?

아! 하며 집사가 수긍하더니 대충 걸친 모자를 쿡 눌러 썼다. 두 사람은 주의를 기울이며 나무들의 그림자를 골라 밟으며 22커뮤니티의 수면센터로 가는 가로수 길을 걸어갔다.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비행정을 부르지 않고 걸어서 센터로 돌아가던 두 사람이었다. 메인시스템은 기주의 지시를 수행했지만 이후의 모습을 본다면 APS를 되찾았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아놀드를 잡을 생각에 골치 아파진 두 사람은 말 없이 걷다가 센터로 가까이 갈수록 늘어선 차량의 숫자가 배로 늘어나는 걸 발견했다. 결국, 센터로 들어가는 걸 포기한 두 사람이 길가에 세워진 공용 정류장으로 몸을 숨겼다. 시간이 퇴근 시간인데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 진작 알아챘어야 했는데…

- 엘리나 에밀과 다른 사람들은 무사할까?


집사가 센터에 남아 아놀드 공략법을 짜내던 엘리와 에밀, 지우와 일행을 걱정했다. 마르코와 집사의 가족은 전부 그 안에 있었다. 센터 쪽에서는 개미 한 마리 빠져나올 틈 없이 촘촘하게 신연방군 제복을 입은 병력이 지키고 서 있었다.


- 신연방군? 당선된 것도 아닌데 신연방군이 움직여? 지휘자가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벌써 저러지…

- 어쩔까?


말은 묻고 있었지만 실제로 물은 건 아닌 듯했다. 마르코는 집사에게 물은 게 아니라 자기에게 물은 거일 터다. 평소에도 집사는 액션 쪽이지 브레인은 아니라며 생각은 마르코에게 미루고 엉뚱한 상상이나 하는 편이니 물을 리도 없고.


- 보스도 왔을까?

- 보스는 아직 안 왔을 거야. 거기가 해결돼야만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방향이 잡히니까.

- 보스의 브레인 드라이브 복구가 얼른 끝나야 할 텐데…

- 그러게 말이다.


*  *  *


그때 기주는 하나의 문 앞에서 자신을 인식시킬 방법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그를 가로막은 문은 생체인식 암호를 위한 세 겹의 시스템 배리어를 모두 해제하고 마지막 단 하나의 키워드를 남겨두고 있었다.


- 시스템, 정말 나에게 이럴 거야?

- 전 의장님, 이 문에 대한 출입 권한이 저에겐 없습니다.


기주는 처음부터 APS의 메인시스템 콘트롤 룸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시스템이 그를 기억한 덕분이긴 한데 여기서는 시스템의 막강한 권한도 통하지 않았다. 이건 기주 자신이 걸어둔 것으로 이 방은 오직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가 사망했다고 알려진 이후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그의 방이다. 기주는 그걸 알면서도 시스템과 대화를 나누며 기억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씩 시간을 넘어 돌아오는 기억이 다시 수면을 거듭하며 그만큼 멀어져 회복이 더뎌지고 있었다. 문득 기주의 기억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무심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밀었다.


- 말콤?


쿠콰콰콰쾅


두 사람이 고민하고 있을 때 센터 쪽에서 세상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놀란 마르코가 그늘에서 벗어나는 줄도 모르고 튀어 나가 센터를 보았다. 센터는 굉음만큼이나 뜨거운 불꽃을 내뿜으며 폭발하고 있었다. 집사가 얼른 마르코를 끌어당겼지만, 마르코는 끌려올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폭발하는 센터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다른 군 병력도 모두 센터의 폭발에 주의가 끌려 아무도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집사가 간신히 마르코를 잡아당겨 그림자 사이로 녹아들었다.


- 형… 큰일났네…


마르코는 그 말에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센터 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마르코가 몸을 번쩍 일으켰다. 집사가 그런 마르코를 간신히 찍어 눌러 말렸다. 곧 마르코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소리 없는 오열이 공기를 축축하게 적셨다.


* * *


- 의장님


기주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침묵하자 시스템이 기주를 불렀다. 문이 열리면서 시스템의 호칭이 바뀌었다. 굳게 잠겨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시스템이 부른 소리를 듣지 못한 기주가 방에 들어섰다.

- 이쪽으로 오는 통로는 모두 차단했나?

- 외부에서 들어올 방법은 없습니다.

- 좋아. 그러면 마지막 키워드인 말콤을 기억해둘 것을 승인한다. 그리고 내가 그 키워드를 물어보면 대답하도록 해. 근데 아까 나를 부르지 않았어? 급한 일인가?

- 아닙니다. 나중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기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책상을 어루만졌다. 얼마만인지. 모든 것들은 기주가 방을 나가 마르코를 만나고 아놀드의 저택으로 갈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이 공간은 늘 자신을 기다려 왔다.


- 시스템, 실행 코드 이기주 생체인식 전환 프로토콜 가동해


의장님 이 프로토콜의 소요 시간은 약 48시간입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프로토콜이 진행되길 기다리던 기주가 진행해. 라고 말하다가 되물었다.


- 잠깐, 무슨 일이지?


네 아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 말해봐.


이 영상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스템이 인공위성에서 잡은 동영상을 스크린에 송신했다. 스크린에 건물의 잔해가 불타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건물의 잔해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 여기는?


22커뮤니티 수면센터입니다.


- 영상 앞뒤를 모두 재생해.


시스템이 영상을 뒤로 돌렸다. 영상이 줌인 되고 잠시 후 센터 앞으로 가드를 태운 비행정이 속속 도착하고 신연방군까지 도착해서 경계를 펼쳤다. 곧이어 호화로운 비행정이 착륙하자 누군가 내려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센터 밖으로 경계가 이어지고 그 인물이 비행정에 올라 사라지자 센터가 섬광을 내며 폭발했다. 기주가 묵묵히 영상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담담해서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 앞에 있었다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차분했다.


- 예상 피해는?


실제 피해는 아직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록상 센터에는 12,021명이 수면 상태로 입주해있습니다.


- 생존자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 생존 가능성은?


폭발의 규모로 예측할 때 생존자는 없습니다.


기주가 다시 화면을 뒤로 돌려 비행정에서 내린 사람을 클로즈업시킬 것을 지시했다. 화면이 점차 확대되어가며 선명도가 증가했다. 그리고 최종적 확대된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 아놀드…


다만…


시스템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의장님의 연결 루트였던 엘리라는 신연방 공무원에게 폭발 징후에 대하여 노티스 하였습니다.


기주의 얼굴이 옅은 희망이 생겼다. 노티스를 하다니 시스템으로서는 수행이 곤란한 ‘일탈’을 한 것이다.


- 왜 그 말을 처음에 하지 않은 거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나?


다만 노티스 한 시간이 폭발 시간과의 간격이 짧아서 생사 여부는 미지수입니다. 그래서 보고를 미루었던 것입니다.


- 그 과정을 자세히 보고해 봐.


폭파의 징후는 폭파 실행 전 30분 27초에 찾아냈습니다. 다량의 폭발물이 센터 주위에 매설되고 있다는 인공위성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위하여 데이터를 수집한 결과,


시스템이 정확하게 내용을 브리핑하자 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럼 노티스한 시간은?


신연방군이 준비한 폭발물을 매설하는 데 걸린 시간이 23분입니다.


- 그럼 고작 7분?


네. 의장님. 7분이 주어졌고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네트워크 콘택트 능력을 보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 가능하다는 건?


네. 의장님. 제 예측으로는 4개의 솔루션이 있었습니다.


- 4개?


첫 번째 옵션은 포기입니다.


- 포기는 옵션이 아니라 결과지.


두 번째 옵션은 탈출입니다. 다만 폭파가 진행된 과정으로 봐서 탈출했더라도 전원이 사살되었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 역시나 옵션은 아니지.


세 번째 옵션은 역습입니다. 아시다시피 센터엔 여러 가지 방어 체계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다만,


- 그것도 옵션은 안 돼. 저 인원으로 대항도 안 되겠지만 폭파되면 어차피 그만이잖아. 결국 시스템은 네 번째가 하고 싶은 말이군.


이 방법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57개의 솔루션 중 하나입니다만 저의 네트워크 배리어를 뚫은 인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예측됩니다.


- 시스템!


제 예측은 예측일 뿐입니다.


- 57개의 솔루션 중 단 하나의 솔루션을 찾아내서 실행할 수만 있다면 생존할 수도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 그것도 7분 안에…


기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 *


마르코가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집사는 그런 마르코를 달랠 생각도 못했다. 다만, 넋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고만 있었다.


폐허.


말 그대로 22커뮤니티 수면센터는 자잘하게 부수어진 잔해들만이 센터가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전부였다.


태양을 피해 살아남을 별을 찾아 우주를 떠돌던 인간이 신연방에 발을 디딘 때부터 인간의 생명을 이어주며 장엄하게 빛나던 지상 1,202층, 지하 미상의 초거대 건물이 몇 무더기의 돌조각으로 변한 것이다. 게다가 만이천여 생명들까지 한순간에 소멸하여 버린 것이다. 가족이 지금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머니뿐이 아니었다. 새로운 생명을 꿈꾸며, 건강한 생명을 바라며, 아픔이 조금이라도 가시기를 바라며 수면에 들어갔단 수만 명의 목숨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허무했다. 이래도 되나. 한 인간의 말 한 마디로 수백 년의 목숨이, 그 생명들이 풀꽃처럼 사라져도 되는 것인가. 인간이 뭐기에. 권력이 뭐기에. 마르코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씹어뱉듯 튀어나왔다.


- 아놀드…

- 폭발로부터 살아남는 단 하나의 방법은 뭐지?


말씀드렸듯이 수면센터엔 방어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수면센터 자체의 존재 이유에 의거, 생존을 위한 최소의 기준에 맞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 생존을 위한 최소 기준?


그렇습니다. 생존을 위한 최소 기준은 수면 중인 신체에 근거하여 산출되었습니다. 수면 중인 인간이 외부의 타격에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기준으로 최대 7일 간 현시점의 생존 레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 그럼 수면 중이 아니면?


수면 중이 아닌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센터의 지하에는 수면 중에 공급되는 필수 약품과 최소 영양 공급을 위한 긴급 서플라이 시스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수면 중인 자는 최소 7일간은 생명 유지가 된다니 다행이지만 이미 외부에서 물리력이 가해진 상태에서 그 위력은 어떻게 견디나? 1,200여 층에 달하는 건물을 폭파할 정도의 물리력이야. 그 층마다 수천에 달하는 캡슐들이 있을 거 아닌가?


실제로 지상에 만들어진 각 층의 용도는 수면 캡슐의 어드레스 레이어가 아니고 수면 캡슐에 공급되는 물자를 비축하는 스토리지입니다. 캡슐은 지하에 만들어진 레이어드 스토리지에서 보존됩니다. 지상에서 폭파된 것은 물자 저장고입니다. 스크린에서 보시는 것처럼 초거대 건물이 폭파된 것이라기엔 잔해가 많지 않습니다. 정확한 데이터는 구호 장비들이 투입되는 시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만, 센터 지하 부분은 저 정도의 물리력으로는 손상되지 않는 강도를 유지한다고 판단됩니다.


- 그럼 12,000여 수면체는 최소 7일간 생명 유지가 된다는 거네. 하지만 수면체가 아닌 사람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기주가 문득 폭발의 결과로 잔해가 가득한 센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 수면 캡슐?


시스템은 기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기주 또한 답을 바란 게 아니었기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스크린에 잡히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두 남자가 기주와 마찬가지로 잔해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 * *


문득 마르코가 뒤돌아서서 커뮤니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집사가 마르코를 부르려다가 묵묵히 뒤를 따라 걸었다. 센터에서 커뮤니티 중심까지는 5㎞. 아마도 곧 커뮤니티에서 많은 비행정들이 속속 도착하여 상황 파악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예상대로 22커뮤니티 쪽이 소란해지는 게 보였다. 군데군데 불이 켜지고 비행정이 날아오르는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역 언론이 잔해가 덮인 센터 전경 영상을 입수하여 방영하는 장면이 곳곳에 설치된 임시 스크린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집사가 그 화면을 바라보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 신연방군이 동원됐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저들은…

- 신연방군은 대부분 전투로봇으로 구성되지. 그 걸 통제하는 자 중에 아놀드의 부하가 있었을 거야. 신연방군이 수면센터를 폭파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건.

- 일이 점점 커지네. 신연방군까지 아놀드 쪽이라면 우리가 무슨 수로 복수를 하지?


마르코가 집사의 말에 대답할 말을 못 찾고 침묵을 지켰다. 개인 대 신연방 싸움이라니 어디 가능이나 한가. 두 사람은 5㎞를 걸어 22커뮤니티의 도심으로 들어왔다. 호텔에 들어와 한잠도 못 자고 뉴스 화면만 지켜보며 밤을 새웠다. 말이 없던 마르코가 입을 열었다.


- 보스가 우릴 찾기를 바라자. 지금은 엘리가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없구나.

- 우리가 센터에 돌아갔을 거로 생각할지도 몰라 형. 보스는 우리가 살아있는 것조차 모를 수도 있잖아.

- 그렇군. 우리가 먼저 보스를 찾아보는 게 좋겠다.


***


복구 작업을 시작합니다.

 

- 시작해.


시스템에 저장된 모든 시간의 기주가 다시 현재의 기주에게 돌아왔다.


나머지 부분도 복구할까요? 다만 나머지 부분은 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로 어디까지나 의장님의 구술에 의해 저장된 부분이며, 의장님의 별도 지시가 없을 때는 복구하지 않는 영역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기주가 그 부분은 놔둬. 라고 말하고 시스템이 대답했다. 이어서 기주는 자신이 지시할 때까지 아놀드가 장악한 현재 상태를 유지하라고 했다. 이후의 방향을 생각하느라 말이 없자 시스템도 묵묵히 기주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 별 지우개 프로젝트를 좀 알아 봐.


알겠습니다.


- 아, 그리고…


네. 의장님.


- 수면 캡슐은 제한이 있나? 예를 들어 사이즈라든지.


네. 의장님. 모든 자원을 가동할 수만 있다면 확률적으로는 큰 공간도 수면 캡슐처럼 활용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 그 확률은?


준비 기간이 길수록 올라가게 됩니다.


- 최대 한 달의 기간을 준다면 확률이 얼마나 올라가지?


5% 미만입니다.


- 아쉽네. 우선 센터에 모든 지원을 다 해 구조, 복구 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자.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무조건 전력을 기울이게 해.


- 알겠습니다. 의장님.


자신의 모든 걸 들은 기주가 APS를 빠져나왔다. 밤이 내린 거리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신연방 대통령 후보들의 홍보 영상으로 번쩍거렸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의 홍보 스크린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여전했다.


기억이 머리속을 흔드는 순간이 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수면 아래에서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끈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늘 먹먹하기만 한 순간들.


생각에 잠겨 길을 걷던 기주가 무심코 눈을 들어 바라보니 크레스마스다. 에밀과 함께 감초 레드바인과 커피를 마신 뉴트로 스타일의 카페. 에밀도 엘리도 아직 아무런 콘택트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이룬과 지우. 가족이 생매장되었는지 아니면 폭발에 희생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무척 오랜 시간이었다. 가족도 일가친척도 하나 없이 혼자 지내온 순간들. 크레스마스의 한 테이블에 앉아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기주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고 있었다. 아직 완전한 시간을 되돌린 것이 아니었다.


수면 시간을 거듭할수록 기억은 조금씩 사라졌다. 그 앙금처럼 삶의 수면 맨 밑바닥에 흩어져 가라앉는 기억은 깨어있어야 다시 조금씩 떠올랐다. 지정된 타이머가 울릴 때까지 자고 깨고 자고 깨고. 기주는 시스템에 모든 시간을 저장하고 되돌리고를 반복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기주로서는 태어난 이후 가장 오래 깨어있는 시간이었다. 깨어있을 때마다 필요한 것들을 발명하고 개발하며 모든 역사와 경험과 재능과 아이디어를 불태우듯 써버린 후 다시 타이머가 켜질 때까지 잠들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삶은 수면 캡슐에서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깨어있으면서 그만큼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오리진마저 까마득하게 사라질 것 같았다. 풍랑이 일어 바닥이 뒤집히며 가라앉은 것들이 떠오르듯 시간이 돌아오다가 가라앉고 있었다.


시스템은 기주의 모든 것을 간직하며 강화되고 현명해지고 단단해지며 오랜 시간을 업그레이드해왔다. 타이머가 끝난 기주가 깨어나 복구를 지시하면 이전에 저장해둔 그 해마다의, 또 때마다의 시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잠이 들 때마다 자신을 조금씩 잊고 잃는다는 걸 느낀 어느 날부터 기주는 그 현재의 자신을 시스템에 기록해두는 방법으로 오리진을 간직하려고 했다. 그 금단의 히든 코드를 푸는 열쇠는 오직 기주 그 자신이었고.


* * *


기주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두 남자가 카페에 들어섰다. 적당히 테이블을 잡고 앉은 남자가 커피를 시켰다. 다른 남자는 한 벽면 가득 채운 메신저 패드 앞으로 걸어가 메모를 확인했다. 패드에는 빼곡하게 소식을 전하거나 다녀갔음을 인증하는 종이 메모가 붙어있다. 맨 끝부터 채워져 최근 소식은 늘 가운데를 향한다. 그가 메신저 패드 앞에 둔 종이와 펜을 들고 뭔가를 적어 패드에 붙였다. 뉴트로 카페다운 21세기식 지구 방식이다. 자리로 와서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한 모금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가 그런 마르코를 보며 말했다.


- 형, 보스가 여기를 알까?

- 그래. 에밀이 같이 왔었다고 자랑하더라. 에밀… 켈리, 어머니 부디 무사하길.

- 아 그랬구나. 에밀 형수 숙모 부디 무사하길.

- APS 빌딩 앞에 있어서 다시 올 수도 있고.

- 그것도 맞네.


집사가 카페를 휘 둘러보았다. 어떤 남자가 메시지 패드 앞에서 뭔가를 읽는 모습이 보이고 곧 누군가 카페로 들어와 메모 먼저 확인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아 얼굴이 보이자 집사가 관심을 끊고 다시 문 앞을 주시했다. 그때 한 남자가 패드에서 떼어낸 메모를 들고 자리로 가 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메모를 읽는 모습이 뒷모습이라 긴가민가 한 집사가 마르코에게 말했다.


- 형이 메모 붙인 데가 어디야?

- 한복판. 거기 있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집사가 일어나 메시지 패드로 걸어갔다. 한복판에서 메모를 확인한 집사가 막 잔을 들려던 마르코를 잡고 뒷모습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 보스?


마르코가 집사의 말에 뜬금없이? 라고 말하고 뒷모습의 남자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사람을 잘못 알아본 듯합니?


고개를 들어 앞의 남자를 확인한 마르코의 발음이 묘하게 꼬였다. 그리고는 이내 남자를 꽉 끌어안았다.


- 보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하자 기주가 7일간의 희망을 이야기했다. 집사가 행동가답게 말했다.


- 굴착기!

마르코와 기주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집사가 서둘러 말했다.


- 굴착기는 가장 강력한 걸 쓰자고요.

- 에밀에게 나노송신기가 있어. 그게 어쩌면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준비해서 가보자. 보스, 준비하겠습니다.

- 잠시만.


기주가 개인 통신 모듈을 열어 시스템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는 간결했지만 간절한 내용이 오갔다. 시스템은 센터 구조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신연방 정부도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 자, 시스템이 장비를 지원할 거야. 가서 가족을 구해.


마르코와 집사가 기주와 이야기를 마치고 카페를 나가자 기주가 따뜻한 희망을 담아 식은 커피를 모두 마셨다.


* * *


현장은 북새통이었다.


가족이 수면 중인 사람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어 안위를 걱정하며 울고 불고 혹은 폭발의 원인과 범인을 밝히라며 애먼 신연방군을 쥐잡듯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누구도 지금으로선 대답할 게 없었다. 방송사들이 전문가들을 섭외해 취재 경쟁을 벌이면서 구조 현장이 실시간으로 신연방 은하 신연방은 물론 식민지별까지 생중계 되고 있었다. 누구는 센터의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연쇄 폭발을 일으켰을 거라든지 또 누군가는 처음부터 1,200층이라는 초거대 건물을 건설한다는 게 문제였다. 또 누구는 신연방 소속 중 원한이 있는 종족의 짓일 거라든가 아니면 아예 미지의 은하 침략군 소행이라고 막말 대잔치를 벌이는 전문가도 있었다.


- 잡혀?

- 아니 아직 아무것도 없어.


집사와 마르코는 건축 도면을 띄워둔 화면을 카피해서 가상 스크린에 띄워놓고 예상 지점을 예측해 집중적으로 파고 있었다. 그 부분은 중앙 콘트롤 센터가 있던 주변 일대였다. 시스템에 의하면 지상에 있던 건물은 모조리 폭파되어 잔해로 바뀌어버렸기에 그 위치가 큰 의미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또 아놀드에게. 마르코가 팔을 뻗어 빙빙 돌렸다. 그에 맞춰 마치 수맥을 찾듯 송신 전파를 잡아채려고 수많은 나노봇들이 거미줄 같은 전파망을 펼쳐 일대를 휩쓸었다. 이 파인더 나노봇은 시스템에 의해 최고의 탐지 성능을 갖도록 업그레이드 된 로봇으로 역시나 기주에 의해 개발된 로봇이었다.


- 형!


팔을 뻗어 파인더의 거미줄 범위를 최대한 넓히려고 애를 쓰던 마르코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집사를 보았다. 집사가 눈짓으로 이제 막 도착하고 있는 거대 비행선을 가리켰다. 그 비행선을 보는 순간 마르코가 파인더 콘트롤 패널을 빼서 집어던지려는 걸 집사가 간신히 받아냈다. 그리고는 튀어 나가려는 마르코를 잡아냈다.


- 에이 형 이건 아니지! 정신 차려!


튀어 나가질 못하니 한동안 이만 북북 갈던 마르코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집사는 갑자기 더 불안해져 잡고 있는 한쪽 다리를 더 세게 부여잡았다.


- 됐어.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어차피 아무리 피가 터지게 소리 질러봤자 미친 놈밖에 더 되겠니.

- 그거지. 내 말이 그거라고.


집사가 손을 놓고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마르코는 집사가 일어나게 손을 잡아주고 소란을 일으킨 주범을 바라보았다. 언론 기자들이 서로 인터뷰를 따려고 달라붙는 바람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이 느낌은 분명 놈이다.


현장 한쪽에 띄워진 거대한 스킨 스크린에 그의 얼굴이 나왔다. 그는 사고를 당한 분께 위로를 전하고 현장 수습을 위해 개인적으로 APS의 모든 자원을 투입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말이 되는 게 지금 현장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건 APS 마크를 가슴에 달고 움직이는 인력과 로봇, 장비들이니 저게 모두 그가 지시한 것처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외부에서는 아직 그, 바로 아놀드가 APS 의장이기 때문에.


- 안 올 수가 없지. 여기라면 공짜로 전 신연방에 홍보를 할 수 있는데.

- 그럼 저 놈은 이런 걸 노리고 미친 짓을 저질렀다는 거야?

- 그럴 것 같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 신연방 모든 곳에 방송이 되고 기사가 나니까 한 표라도 더 당길라고.

- 다크호스가 등장했다더라.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기업 연합을 해체하고 민영화 됐던 의료 시스템과 생활에 필요한 기간 시설들을 모두 다시 국유화하겠다는 공약이지.

- 그거 좋네? 근데 그럼 기업 연합 쪽이 가만히 있을까?

- 가만히 안 있겠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게다가 특히 저놈이 일을 벌일 것 같다.

- 아 청부살인?

- 쉿! 놈이 현장 시찰 하려는 모양이다.

- 형. 저쪽으로!


집사가 마르코를 음영이 진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때 마르코의 수신기로 전파가 잡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삐잇 삐잇 삐잇


* * *


당황한 마르코가 탐색 나노봇의 시그널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이 기계는 시스템이 지원한 탐색 나노봇이라 마르코에겐 익숙하지 않은 콘트롤 패널이었다. 마르코의 의도와는 반대로 나노봇들이 시그널이 울린 지점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굴착을 위한 형체를 만들었다.


굴착 프로세스를 시작할까요?


합체 형태를 마친 나노봇이 승인을 요청했다. 바로 그 순간,


- 열심히 하고 있군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시 우리 인간의 미덕이 아닐까요?


아놀드가 마르코와 집사에게 다가와 칭찬을 늘어놓았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잘한 잔해들만 가득한 현장에서 피할 곳은 없었다. 더구나 아놀드를 따라 다니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세 사람을 원샷으로 잡고 있었다.


- 두 분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자원봉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저는 지금 이 시간부터 제 1차 부유돔 프로젝트를 실제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놀드가 느닷없이 부유 돔 프로젝트의 시행을 선언했다. 동시에 신연방 은하 신연방 커뮤니티 곳곳에 설치된 수만 개의 스크린에 자막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놀드가 센터 붕괴 현장에 이목이 집중된 순간을 노려 신연방 대통령이 되면 시행하겠다던 부유 돔 프로젝트를 당선이라도 된 것처럼 기습적으로 실행한 것이었다.


- 신연방 시민은 최고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놀드의 말에 모든 신연방의 구성원들이 환호 했다. 각지에 나가서 현장 중계 하던 언론은 담당 기자를 급파해서 반응을 채집했다. 이런 건은 특히 주목도가 최소 80% 이상이었다. 아놀드가 스크린을 지나가는 수많은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기에 이름이 나오는 분들은 신변을 정리하세요. 생활에 필요한 건 다 준비되어 있으니 개인물품만 챙겨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주 신 신연방 별들 곳곳에서 환호와 박수갈채가 끊이질 않았다. 순간 아놀드에 의해 자원봉사자가 된 마르코와 집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릴 못 알아봐? 집사가 마르코에게 입모양으로 묻자 마르코도 고개를 저으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아놀드를 보았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라가며 질문공세를 계속 했다.


- 아놀드가 두 사람을 몰라본다고?


카페 크레스마스에서 스크린에 나오는 아놀드를 보며 기주가 중얼거렸다.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게 뭘까.


방송국이 떠나고 현장은 다시 바쁘게 구조와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투입된 로봇 수천 기가 캡슐로 공급되어야 하는 약품과 식품 라인, 공기 통로를 복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신연방과 APS 로고를 단 많은 비행정이 속속 시스템이 준비한 물자를 실어날랐다. 마르코와 집사는 이상한 아놀드 건은 일단 접어두고 엘리와 에밀 등을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 에밀? 들리니? 에밀 대답해!


마르코가 송신기에 대고 소리쳤다. 잠시 연결되었던 라인이 다시 먹통이 되고 말았다. 굴착기로 합체한 나노봇이 시그널이 수신된 장소를 중심으로 잔해를 파고 들어갔다. 지상만큼은 아니지만 지하의 깊이도 상당했다. 현재 나노봇 굴착기는 지하 29층 정도의 깊이에 도달한 것이 마르코의 스크린에 보이고 있었다.


- 도대체 몇 층이야. 이거. 형 통신은 아직이야?

- 그래. 시그널은 그냥 자동 송신 된 게 잡힌 거 같아. 에밀이 설정해둔 모양이다.

- 어떻게 된 거지?


집사의 말을 흘리며 마르코가 묵묵히 스크린으로 전송되는 영상에서 뭔가 단서를 찾으려고 애썼다. 시스템이 보스에게 대폭발에서 살아남을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는데 과연 뭘까. 송신기는 아직 에밀에게 있을까. 에밀들은 아직 생존해있을까.


* * *


복구와 구조 작업은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 방송에서 센터 설계 관련자들이 연이어 출연해서 수면 캡슐은 지하에 안전하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정보를 전하자 많은 수면 가족들이 안도의 환호성을 올렸다. 다만 기한이 일주일이었고 그 안에 캡슐의 서플라이 라인이 복구 되어야 살 수 있다는 점은 불안을 야기하는 포인트였다. 문제는 도대체 누가 이런 악마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거였다.


- 폭발의 규모로 볼 때 이것은 분명 신연방 적대 세력의 공격입니다. 민간인이 이런 엄청난 테러를 저지를 수 없어요. 인간이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단 말입니다!


센터 대폭발 규명 프로그램에 나온 전 신연방군 사령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앵커가 그러면 그럴만 한 행성이 어디냐고 질문하자 다른 패널이 그 질문에 앞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 그건 아닙니다. 신연방군의 정보통에 의하면 신연방 은하 신연방에서 독립을 꾀하는 이계 종족의 행성들이 연합할 움직임이 포착 되었다고 합니다. 반 신 신연방 조직에 의한 테러가 분명합니다.

- 무슨 헛소리! 지금 신연방 은하 신연방은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한 단결력을 유지하고 있어요. 특히 아놀드 대선 후보의 부유 돔 프로젝트에 환호하는 신연방 시민들이 왜 반란을 획책한답니까? 그럴 이유가 없잖아?


마르코의 연락으로 아놀드가 저지른 짓에 대하여 대략적인 내용과 송신기의 시그널을 포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유 돔 프로젝트의 이른 시행으로 아놀드의 인기가 은하를 뒤덮고 있었다. 다른 후보가 선거관리기관에 선거법 위반이 아닌지 문의했고, 기관에서는 APS 기업 차원에서 원래 하려던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위법하지 않다고 해석했다.



- 왜 나와 우리 아이들은 명단에 없어요? 엄마를 이렇게 떨어뜨려 놓으면 우린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한 남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APS의 시크릿 가드들에 둘러싸여 외치고 있었다. 그 가족이 시발점이 되었다. 신연방 여기저기에서 부유 돔과 관련된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아직 뉴스로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크레스마스를 나와 생각에 잠겨 길을 걷던 기주가 APS 빌딩 앞을 지날 때였다.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 패드를 설치하고 플래카드를 띄웠다.


- 왜 우리는 부유 돔 명단에 없는가? 우리는 가족과 함께할 권리가 있다!

- 우리는 가족과 함께할 권리가 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의 구령에 맞춰 구호를 외쳤다. 지나가는 인간이며 이계인 등 신연방 은하 신연방 시민들이 모여들어 그들을 지켜보았다. 기주도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 우리는 부유 돔 이주가 진행 중인 4커뮤니티 중력 돔 거주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곧 닥쳐올 것입니다. 우리는 부유 돔 입주를 거부당했습니다. 대통령 후보 아놀드는 선별적으로 입주자를 받고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와 떨어지고 아빠는 엄마와 떨어져야 합니다. 그가 왜 이러는 걸까요? 여러분!


언론에 알려진 아놀드의 유세 시간에 맞춰 시위를 시작한 것인지 아놀드의 비행정이 APS 광장에 도착했다. 시위하던 사람들이 그 앞으로 몰려가 항의를 시작했다. 잠시 후 아놀드가 비행정에서 내렸다. 많은 가드가 그를 둘러싸고 시위자들이 접근하는 걸 차단했다.


- 아놀드는 부유 돔 프로젝트 선별 이주를 즉각 중단하라!


그 중에 한 사람이 격렬하게 외치자 즉시 가드가 그를 제압했다. 제압되어 바닥에 쓰러진 그를 가드들이 둘러싸며 시위자들과 차단했다.


- 아빠!


어린아이가 그런 아빠에게 달려갔지만 가드에게 막혀 접근하지 못하자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감싸 안고 항의했다. 아놀드가 비행정에서 내려왔다. 그는 연설을 위해 마련된 행사용 부유정에 타고 위로 올라갔다. 아놀드가 시위자들에게 말했다.


- 모두를 부유 돔으로 이주시킨다고 한 적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부유 돔에 입주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가족이 모여 살고 싶어요? 그럼 커뮤니티에서 살면 됩니다.


말을 마친 아놀드가 유세장으로 부유정을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그 모습을 보던 기주가 문득 시스템을 불렀다.


네 의장님

- 아놀드의 부유 돔 프로젝트를 전송해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시스템이 하위 시스템으로부터 받은 부유 돔 프로젝트 파일을 전송했다. 내용을 확인하던 기주가 시스템에게 말했다.


- 왜 한 집에서 여러 사람이 분리되어 있지? 확인해 봐.


기주가 몇 개의 명단을 체크해서 보냈다. 시스템이 대답하고 확인을 시작했다. 기주에게도 시스템이 명단을 추리고 내용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확인을 끝낸 시스템이 말했다.


의장님. 이 명단 사이에는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 특이점?

네. 명단의 블루와 옐로우는 인간과 이계 종족의 혼혈자입니다. 레드는 이계 종족으로 신연방 은하 신연방에서 생활하는 이들이고 화이트는 혼혈이 아닌 인간들입니다.

- 왜 혼혈과 인간을 구분하는 거지? 그러면 화이트의 명단이 부유 돔으로 이주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 시스템에 따로 지시된 것은 없나?

네. 의장님 행방불명 이후 프로젝트는 하위 시스템으로 넘어가서 현재는 제가 관여하지 않습니다.

- 내가 이런 지시는 한 적이 없잖아. 현재 이주 진행 상황은 파악할 수 있어?


선별 작업을 진행한 적이 없습니다. 현재 아놀드 부유 돔 프로젝트 시작 발언 이후 7일이 경과하였고 의장님이 이미 진행하였던 부유 돔 프로젝트 설계에 따라 준비했던 거주 공간으로 명단의 1.2%가 이주를 마쳤으며 4.3%가 이주 준비를 마치고 내일 중으로 입주하도록 진행됩니다.


* * *


센터 붕괴 현장의 복구 시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시스템은 앞으로 3-4일은 더 걸려야 생명 유지를 위한 장비와 물자를 정상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사람과 로봇이 온힘을 다해 공급선을 복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더 구하기 위한 노력이 밤낮 없이 진행되었다.


굴착 로봇이 결국 에밀의 송신기를 찾아냈다. 그 넓은 매몰 현장에서 찾아낸 작은 희망은 새로운 절망의 시작이었다.


- 송신기를 중심으로 100미터 주변엔 다른 캡슐들 밖에 없어. 형.

 

마르코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데드라인이 지난 지 벌써 4일 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시스템의 예측 대로 캡슐에 들어간 게 맞는다면 어쩌면 하루 이틀은 더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4일은 무리다. 특히 캡슐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유지를 위한 물자는 적게 필요할지 모르지만 신체의 방어력은 그만큼 떨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 어드레스를 알아도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은데 어쩌지?


이렇게 가다간 이미 늦은 후에야 발견할 수도 아니면 아예 못 찾을 수도 있었다.


- 마르코? 지금 상황이 어때?

- 네 보스. 지하 캡슐 보관소로 통하는 길이 열린 것 같은데 문제는 어드레스입니다. 수면에 들어갔는지 아닌지도 문젠데 어드레스를 모르니 행방을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기주가 개인 통신 모듈 패드를 열어 연락하자 마르코가 좌절이 섞인 목소리로 현장 보고를 했다.


- 그래. 시스템이 네트워크 복구에 최선을 다 하고 있으니까 곧 엘리가 브레인 드라이브에 어떤 메시지라도 남긴 게 있는지 확인이 가능할 거야. 그리고 폭발이 있던 날 신연방군이 있었다고 했지?

- 네 분명 신연방군 제복의 로봇이었고 지휘자가 몇 명 보였습니다.

- 시스템이 확인하니 그날 신연방군이 출동한 기록이 없다고 하는데 말야. 아무래도 우리가 속고 있는 건 아닐까.

- 신연방군 복장을 하고 움직이는 걸까요?

- 그렇다고 봐야지. 아무리 신연방군이 썩었다고 해도 그런 세기의 학살을 묵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 신분을 확인해본 게 아니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요.

- 나는 좀더 조사를 해볼 테니 네트워크 복구 완료까지 쉬고 있어.


어쩌면 그는 아놀드가 아닐지도…


잠시 생각하던 기주가 다시 시스템을 불렀다. 아놀드는 무슨 의도가 있어서 그런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것일까. 게다가 선별이라니 그건 뭘 의미하는 거지.


네 의장님.

- 붕괴 사고 일어난 날 아놀드의 스케줄을 체크해 봐.


잠시 후 시스템이 기주를 불렀다.


의장님, 아놀드는 시티의 유세 현장에 머문 것으로 파악됩니다.

- 그럼 아놀드가 일으킨 사고가 아니라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스케줄은 스케줄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 만약 그게 아놀드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짓을 할까.


시스템은 묵묵히 기주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 APS 보유 물자에 신연방군 전투로봇과 제복이 있는지 확인 가능해?

의장님. APS는 130년 전부터 신연방군에 전투로봇과 제복을 납품해왔습니다. 신연방군의 제복은 언제나 관련 사업부에 재고가 있습니다.

- 그럼 최근에 로봇이나 제복이 유출 되었는지는?

로봇과 제복은 수급 계획에 따라 매일 납품 되고 있습니다.

- 어떤 목적으로 빼돌렸다고 해도 단서가 될 수는 없겠군.

그렇습니다.

- 그래.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대해 보고해.

네. 의장님 별 지우개 프로젝트라는 명칭의 대 항성 파괴 프로젝트는 기업 연합에 의하여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행된 비밀 프로젝트입니다.

- 참여한 기업이 어딘지 알 수 있나?

관련 기업이 어디인지에 관한 알려진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100여 대의 전투 함선과 100명의 조종사, 100명의 휴머노이드 그리고 관련 시설이 필요했던 만큼 막대한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고 있어 곧 드러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 300여 년이 지났으니 작업에 관여한 자를 찾기는 어렵겠지?

그렇습니다. 관련자들은 물론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던 조종사와 휴머노이드 기록 역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제거된 듯합니다.

- 그 정도 규모의 무기와 함선들이라면 제작과 관련된 기록이 어디에라도 있지 않을까?

관련 기록을 더 검토하겠습니다.

- 근 백 년의 오랜 시간을 은하와 은하를 돌아다니며 학살을 자행 했는데 아무 기록도 없다니.

단 한 구간의 워프 터널이 망가져도 별 지우개 프로젝트를 수천 번 실행할 돈이 사라졌습니다. 그 손실을 예측하면,


- 그렇겠지.

당시 워프 터널 주변에서 소멸한 항성계는 모두 70여 개, 붕괴 급의 피해를 입은 항성계는 30여 개로 이는 자연적인 폭발을 제외한 수치입니다.

- 소멸된 별을 찾아보면 알 수 있지 않나?

한 대의 함선이 항성 여러 개를 소멸시켰거나 파괴에 실패한 함선도 있을 것으로 보이며, 미지의 공격에 의해 파괴된 함선도 있을지 모릅니다.


파볼 수록 모를 일이다. 드러난 건 자신이 겪은 일부일뿐이고. 기주가 생각에 잠기고 더 이상 지시가 없자 시스템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 * *


네트워크 복구 완료, 모든 관련 프로세스 진행 가능.


그 통신문을 받자마자 마르코가 채널을 이동해가며 이름을 불러냈다.


- 에밀? 켈리? 엘리?


대답 없는 개인 통신 모듈 패드를 붙잡고 마르코는 목이 터지라고 사람들을 불러댔다.


- 지우? 주린? 어머니?

 

패드에서는 그들의 반응 대신 다른 지시가 전해졌다.


콘트롤 센터에서 알립니다. 서플라이 튜브, 네트워크 연결 완료. 곧 수많은 어드레스 시그널이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유닛은 그 시그널의 어드레스를 추적하여 캡슐을 수거하고 정해진 위치로 이동할 것. 다시 알립니다. 모든 유닛은…


정해진 위치란 임시로 만들어 세운 캡슐 모듈 스토리지였다. 그 위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대형 탱커가 저마다 튜브를 내려뜨려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기 위해 떠있었다. 그곳으로 바이탈이 체크된 캡슐이 모여 회복을 위해 메디컬 나노봇이 투입될 것이다. 마르코는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저렇게 모이면 에밀 등을 찾기가 더 어려워질 거였다.


- 톰, 일어나.


마르코가 집사를 흔들어 깨우자 집사도 벌떡 일어나 상황을 파악했다.


- 형. 뭐 찾은 거라도 있어?

- 튜브 라인을 연결했대.

- 와! 다행이다!

- 다행이긴 한데 저게 다 모이면 우리는 언제 찾아. 캡슐이 12,000개가 넘는다고…

- 아…그래도 모르는 땅만 뒤집는 거보단 낫잖아.


킹정 집사가 희망적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 잡힌 건 없어? 엘리 완전 천잰데 뭐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 없…


그 순간, 파인더 나노봇 중 하나가 미세한 신호를 잡아냈다. 마르코의 패널 스크린에 흐리게 파란빛이 감도는 신호 수십 개가 나타났다. 캡슐은 지면에서 가장 가까운 레이어드에 모여 있었다.


엘리의 조난 신호를 받은 건 파인더 나노봇이 아니라 구조를 위해 현장에 나온 구급 비행정이었다. 엘리는 만일을 대비해 조난 신호 발생기를 바이탈 시그널에 맞춰서 두었는데 이게 의도대로 구급 비행정이 그 시그널을 캐치하고 통제소에 알렸다. 곧바로 엘리의 캡슐이 발견되고 이어서 차례대로 다른 이들의 캡슐도 발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누군가 급히 외부에 MRC라고 적은 캡슐이 몇 개나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레이어의 캡슐이 발견되었습니다. 구급요원들은 제1 레이어로 모여주세요. 레이어 사이 간격이 협소하니 이송 시 파손 주의 바랍니다.


시스템이 전달한 대로 캡슐이 발견되면서 루즈해지던 현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마르코와 집사가 임시 캡슐 스토리지로 급히 달려왔다. 엘리의 캡슐은 첫 번째 레이어에 있었다. 그리고 캡슐 위쪽으로 MRC라고 적혀있었는데 왠지 글씨가 익숙했다.


- 형, 저 MRC 말야. 마르코의 MRC 같은데?


집사의 말에 마르코가 끄덕였다. 그 또한 글씨체가 익숙했다고 느꼈다.


* * *


시스템이 선택한 솔루션처럼 엘리는 수면 캡슐에 숨는 방법을 택했다.


- 큰일이에요! 밖에 폭발물이 설치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엘리가 작은 목소리로 에밀에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큰 소리로 떠들면 동요가 시작되고 곧 절망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에밀이 외부 CCTV를 가상 스크린에 띄웠다. 신연방군 제복의 로봇들이 폭발물을 건물 주변에 매설하고 있었다. 그 배치 상황을 보고 엘리가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유형 검색을 통해 건물 해체 공법의 폭발물 매설과 동일하다는 걸 발견했다.


- 건물을 해체할 때 쓰는 방법이에요. 여길 통째로 폭파하려나 봐요.


에밀이 엘리의 말에 분통을 터뜨렸다.


- 미친놈들! 여기에 있는 수면체만 12,000명이 넘는다고!


스크린을 확인하던 엘리가 순간 하나의 스크린을 띄워 전면의 대형 스크린으로 보냈다. 사람들이 그 스크린에 주목하자, 엘리가 화면을 확대했다.


- 아놀드 이 자식!


에밀이 소리쳤다. 지우가 이런 세상에…라고 중얼거렸다.


-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지?

- 이제 6분 남았어요.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도 방법이 없었다.


-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주주 중 한 명이 방법을 이야기했다.


- 건물을 통째로 폭파하려고 하고 있어요. 나가면 무조건 죽일 겁니다.


에밀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사람도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냈지만 모두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엘리는 부지런히 브레인 드라이브를 돌리고 있었다.


- 잠깐만요! 에밀 어서 사람 수에 맞춰서 수면 세팅 준비해요! 캡슐에 들어가서 레이어드 사이로 편입해야 생존 시스템이 가동되는 수면센터 프로토콜이에요. 빨리!

- 아 맞다! 센터 방어 시스템! 최대 7일간은 수면체가 생존할 수 있게 버텨줍니다. 수면체만 살 수 있어요. 어서!


에밀이 사람들 숫자를 세고 콘트롤 시스템에 수면 캡슐을 대기 시켰다. 사방으로 문이 열리며 20개의 캡슐이 순식간에 라인을 타고 콘트롤 룸으로 들어와 정렬했다.


- 빨리! 모두 캡슐로 들어가요! 서둘러요!


엘리가 소리치자 주주들과 5대 에밀, 지우, 주희, 주린, 켈리가 달려가 캡슐에 들어갔다.


- 엘리도 어서 들어가요!

- 에밀님이 어서 들어가요. 내가 콘트롤 할 테니까!

- 엘리 어서!


스크린에 뜬 초읽기는 이제 종말까지 3분이 남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수면 프로토콜은 최대 30분 이상이 필요했지만 지금으로선 긴급 수면 프로토콜을 실행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엘리와 에밀 두 사람이었다. 에밀이 고집을 부리자 엘리가 서둘러 캡슐에 들어갔다. 캡슐 먼저 레이어 어드레스로 이동을 지시한 에밀이 수면 인스톨 프로세스를 입력했다. 캡슐이 이동하며 튜브가 연결되고 가스와 액체가 주입되었다. 남은 시간은 2분.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동안 에밀이 가까운 캡슐들에 급하게 MRC라고 썼다. 다 쓰기도 전에 순서대로 캡슐들이 레이어드 어드레스를 부여받아 지하로 내려갔다. 마지막 엘리의 캡슐이 지하로 들어가고 막 문이 닫힐 때 건물 외부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나더니 콘트롤 룸 천장이 무섭게 흔들렸다. 에밀이 모든 걸 놓으려는 순간, 대형 스크린에 엘리의 메시지가 떴다.


에밀, 남은 캡슐에 들어가요. 나는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으니까 콘트롤 할 수 있어요. 빨리!


남은 시간은 이제 10여 초. 에밀이 급히 빈 캡슐에 몸을 넣자 곧바로 캡슐이 닫히며 레이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튜브가 연결되었다. 이어 약품이 주입되고 수면 인스톨 프로세스가 진행되었다. 에밀의 캡슐이 라인을 타고 레이어드로 들어가는 순간, 대폭발이 일어나며 웅장한 수면센터가 사방으로 무너져내렸다.


* * *


스토리지에서 급히 수면 프로토콜을 실행한 흔적을 찾으려면 가장 최근의 캡슐을 찾는 게 방법이다. 하지만 그 레이어의 배치를 정확히 알 방법은 없었다. 레이어 1개마다 100~1,024단위의 캡슐이 배치되고 이런 레이어가 디스크 드라이브의 데이터처럼 수십 또는 수백 개로 적층되어 고유한 어드레스가 부여되기에 많은 수면체를 효과적으로 캡슐 단위로 관리할 수 있었다. 파인더 나노봇이 감지하고도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보낸 이유였다. 집사의 말에 따라 마르코가 MRC라고 쓰인 캡슐을 중점으로 찾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보인 캡슐에는 엘리가 누워있었다.


- 엘리야.

- 형, 어서!


 마르코가 엘리의 캡슐에서 패널을 열어 수면 해제 프로토콜을 실행했다. 약품이 담긴 액체가 제거되고 튜브가 해체되자 곧바로 잠을 깨우는 가스가 주입되었다. 4일간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엘리는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메디컬 로봇이 와서 회복을 위한 나노봇을 투입하자 잠시 후 엘리가 눈을 떴다. 엘리의 상태를 스캔한 메디컬 로봇은 곧바로 다른 캡슐로 이동했다.


- 엘리!


메디컬 로봇이 근처의 캡슐에서 여러 명을 수면 해제하고 체력을 회복시키자 사람들이 깨어나 마르코와 집사에게 다가왔다. 마르코가 에밀, 켈리, 주희를 보고 두 팔을 벌렸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마르코와 포옹하며 기뻐했다. 다른 모든 이들도 서로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모두를 구해준 엘리에게 감사를 전했다.


- 헤이 로봇! 괜찮아.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좋아.


로봇이 하나의 캡슐에서 멈춰 진행을 못하자 엘리가 로봇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캡슐로 갔다. 지우가 캡슐 앞에서 엘리를 맞았다.


- 이룬님은 언제나 돌아오려나.


엘리가 지우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 * *


12,000여 수면체 중 생존자는 10,000여 명이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공급 중단을 견뎌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신연방 경찰은 폭발물에 의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되었다고 발표해 누가 그런 만행을 저질렀는지 그 배경에 대해 신연방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사건 당시 인공위성 감시 시스템 영상이 삭제된 사실은 신연방법에서 감시 프로토콜의 운영은 스테이션, 워프 터널 등 신연방 기간 시설과 사파리에 국한되므로 신연방 정부의 책임은 아니라고 발표하여 공분을 불러왔다. 신연방 정부는 사망자 가족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트리거는 다른 데서 터졌다.


바로 부유 돔 입주에 대한 차별 정책이 대규모 시위의 발단이 된 것이다. 아놀드 후보의 부유 돔 프로젝트 발표에 환호와 박수를 보내던 신연방 시민들은 그 대상에서 가족이 제외거나 프로젝트 명단에서 탈락한 혼혈이나 이계인이 있다는 걸 알고 차별 정책에 비난과 항의 시위가 불길처럼 번졌다.


* * *


엘리가 에밀, 마르코, 집사, 주주들과 함께 기주와 영상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주제는 아놀드의 만행에 대한 성토였다.


- 아놀드가 저지른 건 명백한 학살입니다.


주주 중 한 명이 분노를 가득 담아 말을 꺼냈다. 공식적으로 사라진 그 영상은 이미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묵묵히 그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졌다.

- 여기 계신 주주분들은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는 게 없나요?


주주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엘리가 말을 이었다.


-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기업 연합이…


엘리가 관리자로부터 들은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 2,000여 명이 사망한 센터 폭파 사건도 정말 황당하지만, 별 지우개 프로젝트도 이해가 안 돼요. 스페이스 캐논을 탑재한 함선과 조종사, 조달된 물자와 휴머노이드 인스톨까지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고 관련 인원만 해도 엄청난데, 아무리 아놀드가 돈이 많다고 해도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관리자와 아놀드가 동일 인물이라고 믿는 엘리가 별 지우개 프로젝트와 아놀드를 연결하여 의문을 던졌다.


- 아놀드와 관리자가 같은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관리자는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들을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폐기했어요. 별 지우개 함선들도 같은 시간, 마지막 위치에서 폭파되었고요. 그렇죠?


스크린에서 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가 말을 계속하자 입을 열려던 마르코가 입을 닫고 엘리의 말에 집중했다.


-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난 일들인데 아놀드는 불사신인가요? 신연방 자료에 아놀드의 수면 기록이 없어요. 관리자의 것은 22커뮤니티에 한두 번 있는 거로 보이는데…


오랜 시간 수면 타이머가 일상이 된 시대에 불사신을 말하는 엘리의 말이 어색하긴 했지만, 순간 모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잠자코 있자 마르코가 참고 있던 말을 했다.


- 아놀드가 폭파 현장에서 저와 톰을 보고도 아는 체를 안 하더라고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톰? 안 그래?


집사가 동의하며 말했다.


- 그렇게 총질을 해대고 심지어 보스의 구명 키트를 쏴서 맨땅에 추락하게 해놓고 그런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걸요.

- 두 분은 아놀드와 안면이 있었군요?

- 네.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르코가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 배경이 어딘지 알아보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 정도 폭약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아무리 센터가 붕괴하였다고 해도 생생하게 잡힌 아놀드의 얼굴이 담긴 데이터가 통째로 삭제된 거나 신연방에 남지 않는 아놀드의 수면 기록 같은 것들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 맞다고 봐요.

- 수면 인스톨이 하면 할수록 기억은 점점 흐려진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오랜 시간 수면 상태에 있었으니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지 않나요?


엘리가 나름대로 생각을 내놓자 뒤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주린이 문득 입을 열었다.


- 근데 이상한 게 있어요. 수면하면 할수록 기억이 사라진다고 하는 건 듣긴 들었는데 신기한 게 주희 언니와의 기억은 너무 선명한데 이룬님과의 메인시스템 교체에 관한 일은 흐릿해요. 마치 누가 머리에 들이부은 것처럼 옛 기억은 또렷하고 가까운 기억은 흐릿해서 이게 뭔지…

- 그렇게 보면 엘리 기억은 몇 번의 수면에서도 또렷한 거 같네요?


에밀이 엘리에게 궁금하던 걸 물었다. 에밀을 죽기 몇 초 전에 구해준 일로 두 사람은 무척 가까워지고 있었다.


- 저는 브레인 드라이브라는 영구 기억 드라이브와 커넥팅 되어있어서 두뇌가 살아있는 한 잊는 법이 없답니다. 에밀.

- 오 에밀님, 엘리님과 대화할 땐 두세 번 생각하고 해야겠어요. 절대 안 잊는다고 하네요.


집사가 실없는 농담을 던졌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자 조용히 물러났다. 엘리가 다시 말했다.


- 폭파 사건도 그렇지만 부유 돔 이슈도 있다고 들었어요. 이놀드는 왜 표 깎아 먹을 걸 알면서 그런 차별적 선별 과정을 거쳐서 부유 돔 프로젝트로 논란을 부추기고 있을까요? 투표는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기주가 시스템에게 말했다.


- 차별에 대한 시위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현 상황을 기준으로 아놀드가 당선될 확률은?

당선이 예측됩니다. 실제로 투표권의 대부분은 지구 시민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중 혼혈이나 그 가족과 이계인을 제외한다고 해도 현재 시점 48% 이상 득표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시스템의 분석에 엘리가 납득하고 말았다.


- 아놀드는 계획이 다 있구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사람들 머리엔 복잡한 생각이 지나갔다. 물끄러미 사람들을 바라보던 스크린의 기주가 주린에게 말했다.


- 주린은 아버지를 찾았어요?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고, 애타게 말한 거 같은데.


기주의 말에 먼저 대답한 건 주린이 아니라 주희였다.


- 주린? 아버지를 왜 찾았어?

- 내가? 우리 어릴 때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를 왜 찾겠어?

- 주린이 그랬어요. 이룬과 메인이 서로 뒤바뀌면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다며 인접 통신망에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들은 거 같은데.

- 제가 그랬다고요? 왜 그랬지?


다들 그 상황에 있어 본 사람은 없으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서로의 기억이 어긋나고 있는 부분은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아까도 말했지만 이상하네. 인접 기억이 멀고 먼 기억이 가깝고. 언니랑 밤마다 우유에 카카오 타서 먹은 건 기억이 나고 그제 아침을 뭘 먹었는지는 가물가물해.

- 그거 나이 들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하하하


집사가 실없는 소리를 했지만, 주희는 주린에게 놀리듯 말했다.


- 주린, 넌 우유 못 마시잖아. 너 어릴 때부터 유당불내증이라고. 아휴 정말 나이 들었나 봐?

- 어? 언니 나 오늘 아침에 커피에 우유 타서 마셨어? 그치 시스템?


이들은 신연방에서 임시로 제공한 호텔에 나뉘어 머물고 있었다. 호텔은 각방마다 룸서비스를 담당하는 호텔의 고객을 관리하는 컨시어지 시스템이 투숙객에 맞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803호 고객님은 블랙커피를 주문하셨습니다.


시스템이 대답하자 주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 시스템, 난 오늘 아침 분명 커피와 우유를 주문했다니깐?


시스템이 스크린에 아침의 주문이 담긴 영수증을 띄웠다. 거기엔 분명 <룸 803. 조식, 블랙 커피 1>이라고 적혀있었다.


신연방에 경비를 청구하는 영수증입니다. 그리고 주문 고객의 음성을 그 인증으로 남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하시면 음성을 들려드릴까요?

- 아냐. 됐어. 이제 그만 해도 돼.


주희가 주린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며 말했다. 주린은 혼란한 얼굴로 스크린의 영수증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이어 입을 열었다.


- 아, 언니…가 없어. 이제 기억났다. 난 언니 없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어. 오직 집을 떠나기 위해서. 결국 22커뮤니티의 수면센터에…


그때 시스템이 개입했다. 이번엔 컨시어지 시스템이 아니라 호텔 메인시스템이었다.


주린 아이렌님을 메디컬 센터로 이송하겠습니다.

- 잠깐! 뭐야? 왜 주린님을 메디컬 센터로 데려간다는 거지? 멈춰!


집사가 시스템이 보내온 이송 부유정과 메디컬 봇을 거부하자 그들이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엘리는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지금 바로 그걸 확인해야 했다.


- 주린님,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해보세요.


엘리의 말에 주린이 물끄러미 기주를 바라보았다. 그 눈엔 아련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백 년을 함께한 조종사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새삼 올라오는 듯 주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기주가 주린을 불렀다.


- 주린.

-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은 같이 하지 못했군요. 당신은, 나는…


주린이 그 말을 마치지 못하고 쓰러졌다. 가까이 있던 에밀이 얼른 주린을 안아 들고 소파에 눕혔다. 마르코가 엘리에게 혹시…하며 물었다.


- 엘리 휴머노이드 인스톨 수면체가 언인스톨 후 수면에서 깨어났을 때 이런 이상 증세를 보이는 케이스가 있어요?

- 모르겠어요. 저도 휴머노이드 언인스톨은 경험이 없어서 언인스톨 케이스를 검색 해봤는데 나오는 케이스가 하나도 없었어요. 아마도 휴머노이드 인스톨이 애초 범죄자를 대상으로만 한정적으로 한 것이라 범죄자 인권 보호 차원에서 틀어막아둔 거 같았어요.

- 사실 범죄자라고 해도 사람을 공격하는 하이에나 한 마리 죽였다고 49년 형을 때리고 그걸 줄여본다고 휴머노이드 지원을 한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지우가 그 말에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네…라며 마르코가 납득하자 엘리가 생각을 정리한 듯 말했다.


- 저 지금 주린님의 22커뮤니티 수면센터라는 말을 듣고 문득 생각난 게 있어요. 잠시만요.


엘리가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신연방 네트워크에 접속해 22커뮤니티의 직원 명단을 검색해서 열었다. 그 명단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스크린에 전송해서 올려놓고 차례로 검색해 나갔다. 사람들은 일단 엘리가 뭘 찾는지 알 수 없어서 바라보기만 했다. 차례로 올라가던 명단이 하나의 이름에서 멈췄다.


* * *


주린 오닐


빠르게 넘어가던 명단이 그 이름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 옆엔 행방불명[원인미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동시에 주린이라는 이름에서 소파에 누워있는 주린으로 움직였다.


- 22커뮤니티에서 백 명의 휴머노이드가 인스톨 되었어요. 주린은 그중 한 명이었고.


다시 명단이 주루룩 넘어갔다. 특정 이름 옆에 행방불명[원인미상]이라고 적힌 명단이 추려져서 스크린에 남았다. 그 중 몇 명은 엘리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관리자가 22커뮤니티 수면센터에서 소거했던 휴머노이드 수면체.


마사 테일러

스미스 워커


엘리가 다시 브레인 드라이브를 열어 다음의 두 음성을 불러냈다. 센터 시스템의 음성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어드레스 12134 마사 테일러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어드레스 12135 스미스 워커 캡슐 소거 프로세스를 완료합니다.


- 이게 뭐죠?


집사가 스크린에 뜬 이름과 음성에 나온 이름을 비교하고 궁금증을 드러냈다.


- 저 이름이 바로 이 음성에 나오는 이름 중 하나예요. 마사 테일러, 스미스 워커. 저들은 휴머노이드였고 관리자가 소거한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 수면체 중 일부였어요. 그리고 저들은 또한 22커뮤니티 수면센터의 타이머였기도 한 겁니다.


엘리가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에밀이 다가가 엘리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 괜찮아요? 관리자가 아놀드가 맞다면 정말 경악할 일이군요.


그 때 누군가가 자신의 개인 통신 모듈을 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놀드가 당선됐군요.


엘리가 스크린을 뉴스 채널로 옮겼다. 스크린은 기주의 반대쪽 벽면에 열려 모두가 뉴스의 내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21세기식 무개 자동차에 올라탄 아놀드가 손을 흔들며 웃는 장면이 지나갔다. 화면 속에는 수많은 지지자들이 길거리에 나와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동시에 대통령 선거 투표의 득표율이 자막으로 올라왔다. 아놀드 득표율은 46%, 2위 후보와 12% 이상의 득표율 차이가 벌어진 압승이었다.


한편, 아놀드의 차별 정책에 항의하는 집단 시위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등장했다. 시위는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라이트빔 플래카드에는 “우리는 차별을 일삼는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아놀드 아웃!” 같은 문구들이 입체로 등장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며 시위자들은 빔 플래카드에서 나오는 문구에 따라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 차별이요. 이것도 이상해요. 마치…


이제는 관리자, 혹은 아놀드를 더 이상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 지우가 나름대로 검색해본 내용을 자신의 가상 스크린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전송했다. 스크린에 옛 지구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차별 사례였던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사건을 정리한 히스토리가 떴다.


- 저 사람 같아요. 지금 아놀드는 지구인만 부유 돔에 올리고 있어요. 그게 부부를 갈라놓든 엄마와 아기를 갈라놓든 저 부유 돔 프로젝트 명단엔 오직 순수 지구인만 있는 거죠.

- 히틀러는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독가스로 학살했어요.


엘리가 몸서리를 치며 부연 설명했다.


- 순혈주의라는 건가.


스크린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기주가 중얼거렸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일단의 가드들이 들어왔다. 호텔의 룸은 키코드 없이 외부에서는 열리지 않는 문이니 호텔의 메인시스템이 문을 열어준 것이다.


- 당신들은 뭐죠? 허락도 없이 이게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 시스템, 이게 무슨 일이야?


에밀이 앞으로 나서며 제지하려고 했지만 곧 가드에게 둘러싸여 체포되었다. 엘리는 시스템을 부르고 마르코는 저항하다가 그들이 핸드건을 꺼내들자 포기하고 전원이 체포되었다.


- 왜 이래요? 이유라도 알고 당합시다!

- 시스템!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마르코가 몸을 흔들며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통할 리가 만무했다. 엘리가 계속 시스템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시스템은 응답하지 않았다. 엘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집사가 보이지 않는 걸 알았다. 집… 에밀을 보며 입을 열려는 순간 에밀이 눈짓으로 제지했다. 말하지 말아요.


모두를 체포한 가드가 양쪽으로 늘어서자 그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 하하하하 여기들 모여 있었네. 마르코? 엘리? 오오! 보자. 주주들도 있고… 아, 내 아들 지우!


아놀드가 지우에게 양팔을 벌려 보였지만 지우는 한 걸음 물러섰다.


- 분위기가 왜 이렇지? 지우 나에게 뭐 화난 일 있니?

-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째서 그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차별은 또 뭡니까?


지우가 아놀드에게 궁금한 것들을 두서없이 묻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그 모든 말들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며 눈만 꿈뻑거렸다. 아놀드가 지우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았다.


- 그 많은 사람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요즘은 수면 인스톨 부작용 때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단다. 지우.

- 뭐래? 당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요? 12,000여 수면체가 잠들어 있는 수면센터를 폭파했잖아요? 웬 오리발이야?

- 아 수면센터! 가긴 했지. 부유 돔 프로젝트를 홍보하는데 거기만큼 좋은 곳이 없겠더라고. 수많은 목숨이 사라진 현장에서 오직 지구의 인간들을 위한 공약 발표! 얼마나 극적이냔 말이지!

- 그럼 당신이 폭약을 설치한 게 아니란 말이야?

- 아 마르코 마르코. 진정하라고. 내가 악마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하겠나?


엘리가 증오하는 표정으로 쏘아 붙였다.


- 악마는 우물에 있지 않다면서요? 당신이 와인 잔을 들고 별 지우개 프로젝트 함선을 자폭시키고 그 함선의 휴머노이드 아흔아홉 명을 소거한 건 그럼 뭔가요? 그건 인간이 할 짓아니지. 아놀드! 당신은 악마야!

- 누구? 확실히 내가 맞나? 기억 안 나는걸? 하지만 만약 함선이 자폭했다면 어차피 그 함선을 운용하던 휴머노이드들의 소울 드라이브도 모두 파괴된다. 그 수면체들은 모두 영혼 없는 육신일 뿐이지. 어차피 죽었을 거라고.


소파에 누워있던 주린이 일어나 말했다.


- 수많은 항성계가 소멸한 건 뭐라고 할 건가요? 아니, 거기에 더해서 커뮤니티 수면센터의 타이머들은요? 내가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전임자는 이유 미상의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더군요.


아놀드가 주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 누구신지?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지만 역사엔 희생이 따르는 법이야. 희생 없이 쌓인 역사는 모래성과 같다고. 항성계는 우주 전체에 모래처럼 깔려 있어. 하지만 그들은 모래로 쌓은 성처럼 언젠간 무너지게 돼 있다고. 어차피 죽을 테고 그게 조금 앞당겨진 거겠지! 모래성이 뭔지 알아?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지우가 어차피 모래…라고 중얼거리자 아놀드가 돌아서며 그래, 그 작은 알갱이들. 모래 말이다. 지우. 라고 말할 때 소파 밑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아놀드의 등에 핸드건을 들이댔다.


- 움직이지 마. 아놀드 당선자님. 다른 가드들도!


가드들이 움칠하자 핸드건을 들이댄 사람이 룸 벽면을 향해 핸드건을 발사했다. 핸드건에 맞은 벽면이 금세 녹아내리며 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아놀드가 워워 하며 두 팔을 들어 실내를 안정시켰다.


- 자, 자. 진정하자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톰?


아놀드의 목덜미에 핸드건을 들이댄 사람은 집사였다. 집사는 핸드건 끄트머리로 아놀드의 목덜미를 툭툭 치며 말했다.


- 아놀드 주인님. 이제야 제가 기억이 나시나요? 장관님이 다리를 날려준 바로 그 집사 톰입니다. 폭파 현장에서는 왜 저를 모른 체 하셨던 거죠?

- 답답한 친구. 자네는 어떻게 그리 오래 집사로 버틴 거지?

- 그게 무슨 말이죠?

- 봐바, 자네는 내가 왜 당시에 자네를 모른 척했는지 전혀 캐치를 못 하잖아?

- 아 뭡니까? 지금 누구 지능 테스트합니까? 21세기식 MBTI예요?


집사가 껄껄 웃으며 아놀드를 방의 한 가운데로 끌고 갔다. 스크린에서 기주가 그 모양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아 MBTI? 난 ISFP였지. 하지만 생각이 있으면 모르겠나? 언론이 초집중하고 있는데 내가 야! 집사! 너 여기 있었구나? 하고 집사를 알아보고 저 사람 잡아! 그랬으면?


마르코가 생각해보니 그도 그럴 듯하다.


-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 그래도 자네가 좀 뭘 아는군? 배반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까.


아놀드가 마르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마르코가 코웃음을 쳤다.


- 흥! 난 분명히 봤다고. 당신이 신연방군을 끌고 와서 센터에 폭발물을 매설하게 한 거 말야.

- 난 터진 다음에 간 거야. 야! 팀장! 내가 언제 거길 갔니?


가드 팀장이 대답했다.


- 예, 의장님은 센터가 붕괴했다는 정보를 듣고 방문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아놀드가 다시 APS의 메인시스템을 호출했다.


- 내가 언제 거길 갔지?


당선자님은 센터 건물 붕괴 후 방문 일정을 지시했습니다.


- 들었지? 저 친구는 나와 24시간 움직이는 친구야. 시스템은 내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알지. 내가 거길 갔으면 저 친구가 저렇게 태연하게 대답하겠어? 마르코! 그래? 안 그래?

- 당신들은 모두 한통속인데 뭐가 그걸 증명하죠?


엘리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 집사가 아놀드를 다시 한 걸음 밀어 움직이며 말했다.


- 아, 뭐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핸드건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집사가 가드 팀장에게 말했다.


- 당신! 팀원들 모두 핸드건 이쪽으로 던지고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해.


가드 팀장이 아놀드를 보자 아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이 체포된 사람들을 놓아주라고 하자 속박이 풀린 사람들이 엘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 자, 정리 좀 해볼게요. 기주님 제가 지금부터 정리를 해볼 건데 괜찮으신가요?

- 그렇게 해요. 엘리.


엘리가 스크린에서 바라보고 있는 기주의 동의를 구하고 나서 아놀드를 바라보았다.


- 아놀드. 당신은 센터에서 일곱 명의 타이머를 휴머노이드 인스톨 하고 로이 존스라는 타이머를 살해한 거 인정하나요?


아놀드가 기주를 흘낏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내가 왜?

- 좋아요. 그러면 그 별 지우개 프로젝트는 당신이 한 게 맞아요?


아놀드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은데?

- 혼자가 아니면!


엘리가 바로 받아서 말할 때 아놀드가 손가락을 들어 막고 말했다.


- 그리고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대통령 당선자를 인질로 만든 거, 모두 기억하기 바랍니다. 외부엔 다른 가드들이 지금 이 방을 향해 모여들고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죠? 자, 이제 어쩌려고? 날 죽이게? 그럼 죽여 봐요.


집사가 핸드건을 겨누건 말건 아놀드가 가드 팀장 뒤로 걸어갔다. 집사가 돌아가는 느낌이 이상하자 일단 천장을 향해 핸드건을 발사했다.


- 누구든 꼼짝만 해봐. 바로 본때를 보여주마.


가드 팀장이 빠르게 아놀드 앞을 막아섰다. 일단 핸드건을 들고 있는 집사 쪽이 유리해보였지만 그 순간은 누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엘리가 기억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 아놀드, 당신은 당신의 기억을 얼마나 신뢰해요?

- 잠을 거듭할수록 기억은 날아가지. 난 이제 원래 내가 누구였는지도 까무룩 할 때가 많아. 하지만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단 건 누구보다 잘 알지. 하하하하.

-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 당선인 신분으로 도대체 여긴 왜 온 거죠?

- 그거야 당연하지. 그건 말이지. 아, 팀장 내가 여길 왜 왔지?

- 테러범을 잡자고 하셨습니다.


아놀드가 아 맞다 하며 말했다.


- 여러분들은 신연방 전복을 목적으로 반신연방 단체를 만들었고 수면센터를 폭파해 수많은 수면체들을 살해한 혐의입니다.


곧 여기저기서 말도 안 돼! 무슨 개소리야! 센터를 폭파시킨 건 당신이잖아! 하는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 누명을 씌우려는 거예요?

- 누명이라니? 여러분은 전원 폭발에서 살아남았어.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니지. 가능하지. 대신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센터가 폭파될 때 센터의 배리어 안으로 들어가면 산다는 걸 알고 시도했다면 가능하겠지. 당신들은 모두 잔인무도한 테러범이잖아?

- 어마어마한 폭발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오히려 센터 폭발의 혐의를 둘러서 체포한다고요? 이게 말이 된다고 봐요?


마지막까지 죽을 각오로 수면 타이머를 세팅했던 에밀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 당신은 정말 미쳤군요. 차별 정책으로 동요하는 시민들의 여론을 센터 폭파범을 직접 체포했다는 가짜 뉴스로 덮으려고 하다니.

- 엘리, 내가 엘리를 높이 사주는 이유가 바로 이거라니까. 척하면 척!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참 정확해.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잘 속아 넘어가지.


마르코가 코웃음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가드 팀장 뒤에서 아놀드가 손가락을 까딱까닥 했다. 가드 팀장이 그런 마르코 앞을 막아섰다. 엘리가 주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 그럼 휴머노이드 인스톨 한 주린님의 기억은 왜 건드린 건가요?

- 도무지 모를 이야기만 하네. 엘리?

- 기억을 섞을 수는 있는 건가요? 더구나 주린님의 섞인 기억은 기주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요?

- 그것도 말야. 기억을 섞는 건 아직 일반화된 기술은 아니지만 누군가 이미 개발한 기술이라고. 엘리는 알 줄 알았는데?

- 그런 기술이 도대체 언제 있었다고 그래요? 잠깐, 어? APS?


있긴 뭐가 있다고 그래? 하며 브레인 드라이브를 검색한 엘리가 문득 어? 하며 기주가 있는 스크린을 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흔들어 잡 생각을 털어냈다.


- 에이 말도 안 돼. 기주님이 APS 의장님이고 기주님은 이미 조종사가 되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요. 도대체 말이 되는 말을 해요. 아놀드!


아놀드가 흘낏 기주를 보았다. 기주가 그런 아놀드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잘 속아 넘어가지.


아놀드가 무심하게 던진 말은 무슨 말일까. 골똘히 생각하던 엘리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붙들고 고민하느니 차라리 당사자에게 묻는 게 낫겠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 아놀드, 그게 무슨 말이죠? 누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데요?


엘리가 물을 때 지우가 낮은 목소리로 아놀드의 말에 토를 달았다.


- 당신은 역시 히틀러 신봉자인가? 그 말은 20세기의 학살자 히틀러가 남긴 유명한 말이잖아요? 그래서 학살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인가요?

- 지우, 나는 학살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야. 물론 학살이란 때로 무척 매력적인 결과물을 주기는 하지. 이번 일처럼 말이야. 하지만 나는 센터를 폭파시킨 적이 없다니까! 하하하하.


푸슛


- 톰!


아놀드가 웃어젖히며 품에서 핸드건을 꺼내 집사를 쏜 건 동시였다. 켈리가 놀라서 소리 지르며 집사에게 달려갔다. 아놀드의 핸드건은 집사의 한쪽 다리를 날려버렸다. 집사가 젠장 하며 풀썩 쓰러졌다. 집사가 핸드건을 떨어뜨리자 가드들이 앞에 내려놓았던 무기를 다시 잡아 겨눴다. 켈리가 서둘러 겉옷을 벗어 집사의 다리를 동여맸다. 아무리 재생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어도 숨이 끊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똑같았으니까. 집사가 이를 갈며 아놀드를 바라보았다.


- 또 이쪽 다리네. 당신과 나는 악연이로군요.


팀장이 수면센터 폭파 및 대통령 당선자 살해 위협으로 전원 체포한다. 라고 말하고 가드들이 다시 모두를 체포했다. 빔 프레임으로 둘러쳐진 호송정이 들어와 모두를 싣고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아놀드가 스크린의 기주를 흘낏 보고 가드 팀장의 보호를 받으며 나갔다. 기주가 그 모습을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수면센터 폭파 용의자를 체포했다는 소식은 언론들이 앞다투어 온 신연방에 전했다. 테러범들의 목적이 신연방 전복이었다니 신연방을 해체하고 독립을 노리는 집단이 벌인 짓이라고 진단했던 어느 전문가가 한 말이 딱 맞아 들어간 셈이었다. 신연방을 뒤흔든 빅이슈에 차별 항의 시위는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고 차별 이슈에도 불구하고 부유 돔으로 입주를 선택한 지구인으로서는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마냥 반가웠다. 눈치 보지 않고 부유 돔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수감 3일째. 구치소에 수용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하루에 한 번 밖에서 운동이 허용되었다. 남녀 수감 지역을 나누는 차단 빔 앞에서 에밀과 엘리가 만났다.


- 지우가 나갔어요.

- 아 그럼 풀려난 걸까요?

- 그건 모르겠어요. 엘리.

- 흠, 아놀드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지우를 해칠 거 같지는 않아요. 그는 지우를 아끼는 듯했어요.

-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엘리가 잠시 뭔가 생각을 정리할 때 에밀이 말했다.


- 보스가 우리와 함께 행동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래도 밖에서 뭔가 대책을 세워주고 있을 테니까요.

- 정말 그렇다면 좋겠지만요. 왠지…

- 네?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요?

- 아 그게… 아니에요. 에밀님.

- 왜요? 무슨 이야기인데 망설이나요?

- 지금은 어떤 증거도 없이 추측으로 세운 가설이라 말씀드리기가 좀 그래요.

- 가설이라면 더욱 논의가 필요하죠. 괜찮으니 어서 이야기해봐요.


망설이던 엘리가 마음을 정하고 입을 열었다.


- 저는 아무래도 기주님이 그 자리에 없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센터에서도 기주님은 함께 있지 않았고, 최초 회의장을 장악하려고 했을 때도 기주님은 우리 곁에 있지 않았어요.


에밀이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자 엘리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 역시… 기주님은 에밀님의 보스이기도 하고 아놀드를 쫓아 은하 전체를 함께 다녔었는데 제가 조금 무리한 추측을 했나 봐요.


에밀이 엘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엘리. 충분히 그럴 만해요. 보스는 우리가 일을 당할 때 늘 곁에 없었으니.

- 고마워요.

- 고맙기는요. 엘리의 말은 단 한 번도 의미 없이 나온 적이 없었어요. 지금의 생각도 그랬을 겁니다. 단지 보스가 곁에 없었다는 것만으로는 이런 생각까지 하지는 않잖아요. 그 이야기를 해봐요. 나머지 이야기가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엘리가 다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 아니에요. 자꾸 고맙다고 하니까 저도 고맙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에밀의 말에 엘리가 가볍게 웃고 말을 이어갔다.


- 들어주신다니까 계속 할게요. 우리가 사건을 겪을 때마다 기주님이 없는 건 그럴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럼 기주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기억을 거의 회복한 듯한데, 그게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요? 시스템은 여전히 아놀드 편이예요. 호텔 문을 열어준 것도 분명 시스템의 지시로 그런 것일 테고.

- 거기까지는 모르겠어요. 기주님은 뭐든 다 미리 말을 해주고 실행하는 편은 아니라서 함께 다니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납득하게 되었으니까요.


에밀이 단적인 예로 들어준 이야기는 엘리가 들어도 이상했다. 첫째 모든 여행 스케줄은 기주가 짰다고 했다. 그런 일은 보통 비서격인 자신이 하는 일인데 기주가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일정이 어그러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상했던 건 다음 둘째였는데 가끔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그럴 때마다 아놀드의 다음 일정을 알아내서 왔다는 것.


- 어디에서 알아보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냥 어디로 갈 테니 어디로 가자. 하고 항성계 여객선을 타서 수면을 마치고 나가보면 그 별에서 아놀드가 뭔가를 하고 있었던 거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출마를 위한 사전 작업을 하고 다녔던 것 같지만 그 당시엔 그조차도 알 방법이 없었죠.

- 아, 어떻게 그런 정보를 알아 오는 걸까요? 사방은 아놀드 편으로 가득했다면서요. 그러면 운신이 더 불편했을 건데…

- 맞아요. 그건 마치…

- 마치…?

- 누군가 보스를

- 챙기고 있다는 느낌이죠?

- 어? 맞아요. 누군가 우리를 꼼꼼하게 챙기고 있는 느낌. 심지어 티켓에 수면 타이머 예약, 먹을 거, 잠자리 모두… 그래서 사실 무척 오래 여행하며 다녔지만 그다지 피곤하거나 힘들다기보다는 사치스러운 여행을 누린 느낌.

- 저도 그런 걸 느꼈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죠. 시스템.

- 시스템이요?

- APS의 시스템이요. 그거라면 온 은하 신연방 모든 곳에 영향력이 미치니까요.

- 그럼 엘리는 보스가 지금도 시스템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나요?

-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죠. 기주님은 APS의 핵심이었고 그 핵심은 수 세기 동안 천재를 넘은 천재로 신연방 모든 곳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고 바꿔왔어요.

- 하지만 보스는 기억을 잃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이룬님을 만났고 지우도 만나게 되었고.

- 기억. 바로 그 부분이 제가 미심쩍게 생각하게 된 이유였어요.

- 기억?

- 네 기억이요. 과연 기주님은 기억을 잃은 적이 있었을까? 혹은 기억을 잃은 건 맞는데 어떤 방법으로 되살렸을까? 제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찾아보면 이기주라는 인물은 무척 오랜 시간 신연방 곳곳에서 보이더군요. 마치 시간에 구속되지 않는 불사신 같달까.


엘리의 말에 에밀이 어떤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에밀도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에밀이 보급기지로 찾아가 기주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당시 보스는 아놀드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아놀드라는 이름을 그때 처음 듣게 되었는데 물론 기록상으로 아버지가 남긴 영상에서 아놀드라는 재정부 장관 이야기가 나왔지만 실재하는 이름을 들은 건 보스의 언급이 처음이었어요.

- 그럼 기주님은 이미 그 순간부터 아놀드가 별 지우개 프로젝트를 주도 한 거라고 믿고 있었나봐요?

- 그렇죠. 그래서 그렇게 이를 갈고 복수심에 불탔을지도 모릅니다.

- 어떻게 알았을까요. 저는 관리자라는 인물이 이룬님을 출산, 수면과 휴머노이드로 인스톨 하라는 말을 듣고 실행했다가 관리자에 의해 수면 타이머에 인스톨 되어 백 년 이상 잠들어 있었어요. 그땐 관리자가 그런 인물인지는 몰랐고요. 사실 관리자는 제 전임 타이머였던 로이 존스 살해 후였는데 전혀 그런 느낌조차 받지 못했지만요.

- 아놀드는 정말 모르겠어요. 우리 분명 폭약을 설치하던 아놀드를 봤잖아요.

- 정말 아놀드였을까요. 우린 단지 아놀드라고 믿게 만든 어떤 이미지를 보았을지도 몰라요.

- 네? 아놀드가 아니면 그건 누구였을까요?

-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다만, 그때 관리자가 소거했던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 수면체는 아놀드의 말대로 영혼이 사라진 육신에 불과했으니 어쩌면 관리자가 장례식을 치러준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 아… 장례식이라니.

- 그게 왜 그러냐면 어차피 별 지우개 프로젝트를 파묻기 위한 살인이었다면요. 그럼 왜 주린, 이룬님의 육신은 놔둔 거죠?

- 그렇군요! 어차피 영혼이 사라진 육신인데?

- 맞아요. 관리자가 저 두 사람과 조종사는 아직 실체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렇다는 말은 이미 그럴 걸 알고 있었다고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 잘 짜인 각본 같군요.

- 각본대로 움직인 거라면. 우리 모두 누군가가 짜놓은 각본대로 말하고 움직이고 한 거라면요.

- 하지만 그것만으론 기억이라는 키워드가 모두 설명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 맞아요. 그래서 제가 헷갈리는 건데요. 단지 한 가지 단서가 되었던 건.

- 뭐가 또 있군요.

- 에밀님이 할머님이라고 말했던 그 순간 기억나요?

- 네. 주린 아이렌. 제 할머니의 잃어버린 동생이 있다는 말에 제가 유추했던 거고 두 분이 또 서로를 알아보셔서…

- 네 결국 두 분이 진짜 가족은 아니라고 밝혀졌어요.

- 그게 저도 이상해요. 왜 두 분은, 아니 제 할머니는 주린님을 동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할머니는 제가 알기로는 기억력이 꽤 좋은 분이거든요.

- 기억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주희님도 수면 캡슐 인스톨 상태로 꽤 있었던 거 맞죠?

- 그럼요. 할머니는 그 덕분에 젊음을 찾았다며 얼마나 자주 이야기하시는데요.

- 이상하지 않아요? 수면 타이머가 반복될수록 보통은 기억을 많이 잃는다고 하죠. 심지어 아놀드도 그런 말을 했고요. 그런데 주희님은 기억력 좋기로 유명하시다니 신기해요.

- 아… 그렇긴 한데 그럼 누가 할머니에게 접근할까요. 그럴 이유가.

- 글쎄요. 만약 주희님도 각본의 한 조각이라면. 그러면 말이 되지 않을까요.

- 아 역할이 주어졌다면… 그럼 그렇겠네요.

- 다시 기억으로 돌아가면, 아놀드가 한 말 중에 작은 거짓말보다는 큰 거짓말에 속는다. 라고 한 게 이상하게 기억에 남네요. 그러면서 기억의 변형에 관한 기술이 이미 개발되었었다고도 했죠.

- 그럼 그게 바로 보스?

- 네 제가 검색한 바로는 그 기술이 APS에서 개발되었다는 정도만 언론에 나온 거 같았어요. 세세한 내용은 없고 그 정도까지만. 그렇다면 APS의 기술은 곧 이기주의 발견, 혹은 발명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렇다는 말은 기억 변형을 어느 순간에 사용하게 될까를 생각하게 된 거죠.

- 수면체일 때?

- 맞아요. 수면체로 인스톨 할 때, 또 휴머노이드로 타이머 인스톨 할 때도. 육신과 영혼이 서로 이격이 생기는 순간에 다른 사람의 기억을 추가하거나 바꿔치기 한다면 자신의 기억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모이더라고요.


위이이이이잉


운동 시간 종료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엘리가 아쉬운 눈으로 말했다.


- 혹시 뭐든 정리가 되면 내일 이 시간에 알려주세요.

- 네 엘리. 부디 몸조심해요.

- 에밀님도요.


* * *


두 사람이 서로의 수감 막사로 이동해 가는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보였다.


의장님, 회사 소속 전투비행정 한 대가 격납고를 빠져나갔습니다.


- 누가 타고 있지?


시스템이 스크린에 사출 터널을 빠져나가는 전투비행정을 띄웠다. 이어 콘트롤 콕핏을 확대하자 전투비행정을 몰아가는 조종사가 보였다. 기주가 격납고를 빠져나가는 전투비행정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 * *


수면센터 폭파 테러범 긴급 재판 첫날.

엘리, 에밀, 마르코와 다리를 재생하여 아직도 걸음이 불편한 집사가 자신들을 태우고 갈 호송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주와 이사들이 먼저 떠났고 주희, 켈리, 주린이 다음 호송선을 타고 출발하였다. 이들이 수감된 구치소 담장은 네 줄의 차단 빔이 각 포스트를 기준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그 바깥쪽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들을 구경하며 비난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빔 플래카드를 쏘아 올렸는데 ‘우리 가족 살려내라, 악마들아!’ 라고 적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언론은 이 세기적인 테러를 집중 조명하며 체포에 참여했던 가드들에게 접근하여 생생한 후기를 남기고 있었다. 아놀드 당선자의 활약상은 모두를 열광하게 했다. 수면센터 테러에 관한 취재는 언제나 뉴스의 메인이 되고 있었다. 아놀드는 영웅이 되어 취임식을 갖게 되었다.


- 형,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 모르지. 미치광이에게 걸렸으니…

- 켈리와 주희는 뭔 죄?

- 너랑 나는 죄가 있나? 에밀은? 엘리는? 그래도 오랜 시간을 건너왔어. 이제 가도 불만 없지.


에에에에에에엥!


집사와 마르코가 호송선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 때 구치소에 요란한 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 뭐지?


삐이이이이잉 쾅!


마르코가 사이렌 소리에 주변을 둘러볼 때 감시초소에 캐논 빔이 작렬했다. 초소의 신연방군이 빔이 날아드는 걸 보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추락하듯 떨어진 초병에게 메디컬 로봇이 급히 달려가 응급조치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던 마르코에게 초소 전방으로 하나의 점이 급속하게 확대되며 날아들었다. 점은 다시 다른 감시초소들을 박살내며 구치소의 무력을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구치소장실이 있는 건물에 캐논 빔 줄기를 퍼부었다.


삐이이이이잉 쾅 삐이이이잉 콰콰쾅!


순식간에 건물이 먼지가 되어 폭삭 주저앉았다. 소장은 초소가 폭발하는 소리에 놀라 튀어 나왔다가 폭발에 휩싸이는 걸 모면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었다. 이들이 이런 전투를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은하 정복 전쟁이 끝난 지 벌써 수 세기가 지나고 있었고, 식민지 행성들은 독립이나 반항과 같은 특이한 행동이 없었기에 신연방군의 군기는 무척 해이해지고 있었다. 인간을 대신 하는 전투 로봇들을 이런 구치소까지 배치하기엔 제한이 있었다. 감시초소엔 캐논 포가 장착되어 있었지만 실제 전투 경험이 없던 신연방군은 대응 하지 못했다. 무력이 제거 된 구치소는 제 역할을 상실했다.


- 형! 저기!


집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한 대의 전투비행정이 내려앉고 지우가 내리는 게 보였다.


- 우리가 재판 받을 이유가 있나요? 가시죠!


지우가 전투비행정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르코와 집사가 엘리와 에밀이 있는 쪽을 보니 그들은 이미 전투비행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르코가 집사를 들어 어깨에 매고 전력으로 달려 전투비행정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탑승한 걸 확인한 지우가 다른 이들에 대해 물었다. 엘리가 고개를 흔들자 지우는 곧바로 전투비행정을 이륙해 그곳을 떠났다. 그 모든 모습이 방송 카메라를 통해 전 신연방으로 전파 되고 입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사상 최대의 테러범 탈주를 막지 못한 신연방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 저들의 비행정이 어디로 갈까?


예측하지 않고 있습니다.


- 왜?


의장님이 이미 지시한 사항 중 일부입니다.


- 내가 그런 지시를 했다고?


의장님의 지시에 의해 경로의 모든 인공위성 감시망을 철수시켰으며 저 전투비행정이 어디로 향할지 저 역시 판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주가 전투비행정이 멀어져가는 스크린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스템은 묵묵히 기주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 * *


- 시스템!

말씀하십시오. 당선자님.

- 테러범들의 탈주를 왜 막지 않았을까?

구치소 탈주에 대응하는 프로토콜이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 예측하지 못해서 프로토콜이 없었고 그래서 대응도 못했다?

테러범 탈주에 관한 전례가 없었기에 프로토콜이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 그래. 할 수 없지. 뭐 어쩌겠어.


아놀드가 엉망이 된 구치소에서 경쟁적으로 취재하는 언론을 보며 한 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어쩔 수 없지… 아놀드가 이 말을 반복하며 스크린을 볼 때 시스템이 입을 열었다.


당선자님이 탈주자 대응 프로토콜을 입력하도록 지시하시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좋아! 바로 만들어!


아놀드가 스크린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을 때 전투비행정은 신연방의 어느 건물 옥상에 착륙하고 있었다.


* * *


- 이곳이 정말 괜찮을까요? 시스템은 아놀드 편인 거 같은데.


에밀이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기주의 안가 중 한 군데였다. 지우 가 어디로 갈까요? 했을 때 마르코가 문득 이곳의 좌표를 지정했고 지우는 그 좌표에 맞게 목적지를 잡아 이곳에 도착했다.


- 에밀님, APS의 시스템은 신연방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녔어요. 그런 시스템이 우리가 탈출하는 걸 몰랐을 리가 없어요.

- 엘리 생각은 그럼 아놀드가 우리의 탈출을 묵인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 아놀드일지, 다른 누구일지는 몰라도 우리는 일단 무관심 탈출에 성공한 게 팩트 같아요.


엘리가 말하는 가운데 집사가 껴들었다.


- 아놀드 아니면 누가 있어요? 누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줄까요?


엘리가 집사의 말에 금세 대답하지 않자 집사가 답답했는지 다시 물었다.


- 엘리님, 누가.


 그냥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라고 입을 연 엘리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집사는 엘리의 말을 기다리기로 했는지 입을 열지는 않고 새로 재생한 다리만 툭툭 쳤다. 에밀이나 마르코는 엘리가 누구를 지명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집사는 왠지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 정신 사납다. 일단 앉아 봐.


마르코가 집사를 진정시키고 에밀에게 말했다.


- 역시 그렇지? 그것밖에 없지?

- 네 아빠, 저도…

- 뭐지. 왜 나만 왕따 분위기지?


집사가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기엔 거대한 댐이 터져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한 순간에 모든 걸 뒤엎어 버릴지도 몰랐기에. 그렇다고 영영 입을 다물 수도 없는 일이다. 집사가 계속 구시렁거렸다.


- 와 진짜… 죽을 고비 살 고비 다 넘기고 산 넘고 물 건너며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었는데 형이라고 하나 남은 사람까지 왕따라니.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네.

- 산전수전에 공중전은 너만 겪었냐. 지금은 곤란해. 조금만 기다려. 다 알게 된다고.

- 곤란할 게 뭐 있어. 아 맞다! 공중전은 보스도 같이 겪었지. 와 진짜 그때는 보스랑 영영 이별하는 줄… 어? 어… 우… 우…

- 또 왜? 다음은 우주전이냐?


집사가 뭔가 생각났는지 어버버하자 마르코가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 우리! 설마… 계속 우리 곁에 없던 사람이라고 했지?

- 야! 말하지 마!

- 톰, 아직은 아닌 거 같아요. 증거도 없고.


집사의 분위기가 이상하자 마르코에 이어 에밀까지 말리고 들었지만 집사의 입에서 기어코 그 이름이 나오고 말았다.


- 우리 곁엔 그가 없었어. 보스!


에밀과 마르코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마르코는 한숨을 내쉬며 젠장 맞을 녀석이라고 욕까지 했다. 엘리가 그 모습에 고개를 흔들고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 말을 꺼낸 건 저였지만요. 이제 다들 느낌이 통하는 거 같으니 다같이 이야기를 좀 해봤으면 좋겠어요.

- 어떻게 됐든 이제 때가 되었군요. 이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에밀이 난감한 표정을 풀며 한숨지었다. 엘리가 그 말에 동의했다.


- 제 생각도 그래요. 우리는 지금 목적을 잃은 것 같아요. 원래는 아놀드를 잡는 게 목표였는데 지금 아놀드는 대통령이 될 거라 이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 아놀드가 저지른 일이라는 것도 막상 꺼내놓고 보니 말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엘리. 몇 명의 센터 타이머 살인과 아흔아홉 명의 휴머노이드 살해인데, 센터 타이머를 살해한 건 그렇다고 쳐도 소울 드라이브가 파괴된 휴머노이드들은 정말 육체에 돌아올 영혼이 사라진 거니까.

- 맞아요. 단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별 지우개 프로젝트에 관한 부분인데…


엘리가 별 지우개 이야기를 꺼내며 새로운 화제를 던졌다.


- 사실 별 지우개는 그야말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생명을 소멸시킨 인간 역사 상 최악의 대학살이었어요. 인간이 벌인 그 어떤 전쟁도 여기에 1만큼도 댈 수조차 없어요. 그걸 몇 명의 기업가가… 인간들이 벌인 건데, 그게 누군지 뭘 어떻게 계획했고 얼마나 많은 별을 사라지게 만들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증은 아놀드가 그 중 하나지만, 그도 전부를 아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이건 누군가에게 분명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는 생각해요. 그런데 누구에게 어떻게 뭘 물어요?


생각해보면 너무나 끔찍한 대사건이었다. 그 많은 생명이 인간의 욕심 하나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자신들은 너무 무기력했다. 당선자 아놀드. 누가 감히 그에게 실체도 없는 일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아니, 접근이나 할 수 있을까. 그는 돈과 권력에 무력까지 모두 한손에 거머쥔 위치로 올라가 버린 것이다.


- 이제 뭘 해야 하나요?


모두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면센터 사건 이후 엘리는 암묵적인 리더가 되고 있었다. 생각도 깊고 지식이나 지혜도 누구보다 깊어서 엘리가 이끄는 대로 다들 잘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도 누구든 엘리의 다음 말이 대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엘리의 생각을 들려줘요. 우리가 잘 따라갈 테니까.


마르코가 말하자 집사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어쨌든 마르코나 집사에겐 보스에 관한 일이라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었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요. 라고 엘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모두가 엘리의 입에 집중할 때 엘리는 골똘하게 생각에 몰입해있었다. 다들 엘리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침묵이 무겁게 공간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 * *


- 엘리가 네트워크에 들어갔다고? 그걸 그냥 보고만 있, 아니지 에밀, 네가 엘리를 휴머노이드로 만들어 보냈어?

- 엘리가 휴머노이드가 됐다고?


집사와 마르코가 놀라서 물었다. 에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이후 한동안 엘리가 보이지 않자 마르코가 엘리 못봤냐고 물었고, 에밀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 시스템 안에 이기주 의장이자 기주의 모든 것이 들어있을 거 같다고 했어요. 그걸 볼 수 있는 건 오직 시스템뿐이고.

- 그러면, 엘리가 휴머노이드가 되어 시스템과 싸운다고?


에밀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 시스템은 수 세기 동안 신연방을 콘트롤 했는데 엘리가 과연 이길 수 있을까?

- 나도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그 고집을 누가 꺾어요.


계획의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엘리가 이룬처럼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떡할 것인가. 이 부분이 걱정이었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 *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기주에게 시스템이 물었다.


왜 그런 위태로운 모험을 하는 거죠? 기억까지 잃고?

- 말투가 너는 시스템이 아니구나. 누구지? 엘리?

시스템 맞아요. 그리고 엘리도 맞아요.

- 시스템이 허락하던가? 그럴 리가 없지.

통제권을 넘겨주더군요. 시스템도 당신을 무척 사랑해요.

- 이런, 사랑에 빠진 휴머노이드라니

당신은 당신이잖아요. 시스템의 그 또한 말콤이니까요.

- 말콤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군.


엘리가 주린 이야기를 꺼냈다.


아, 주린도 당신을 사랑하는 거 잊었나요?

- 주린은 늘 그랬지.

늘 그랬다고요. 주린에겐 왜 그랬어요? 시스템의 기록을 뒤져보니 주린의 기억에 다른 사람의 기억을 섞었던데 왜 그런 거죠?

- 엘리 말대로, 주린은 나를 사랑했어. 그게 문제였지.

사랑이 무슨 죄라고. 그건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을 훼손한 거예요. 기주.

-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 시스템을 찾아보면 몇 백 년 전 데이터가 남아있을 걸.


엘리가 기록을 차례로 스크린에 띄우며 검색해 나갔다. 빠르게 데이터가 지나가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사진을 보며 엘리가 놀랐다.


앗! 주린은, 마가렛, 말콤이로군요.

- 맞아. 주린은 말콤 중 하나다.

마가렛, 매기는 당신을 사랑하면 안 되는 직계라서…

- 매기는 말콤에게 내려진 저주를 풀려고 오랜 시간 연구했어. 지구와 다른 모선의 중력장을 견뎌내지 못해 공동묘지로 간 말콤들이 유독 많았거든.


(엘리가 공동묘지라는 단어를 검색하고 지구를 떠나 우주를 유랑하던 모선의 수면 캡슐 보관소가 공동묘지라는 걸 찾아냈다.)


- 하지만 매기는 성공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랬다고요?


엘리가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기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중력에 대한 문제는 사실 말콤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오죽하면 캡슐 보관소를 공동묘지라고 불렀을까요. 달라진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 그 시간의 문제를 인간 모두의 연구과제로 바꾸기 위해 말콤을 버리고 이라는 가문을 만들었지.


하기는, 말콤이라는 이름에 실패는 없었죠.


- 하지만 매기는 이라는 성을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는 말콤이라고 했어. 그래서 매기를 휴머노이드로 인스톨하고 그 기억에 다른 사람, 주린의 기억을 덮어씌울 수밖에 없었다.


원래 주린은 22커뮤니티의 수면센터 타이머였어요. 원래의 주린은… 제거되었나요?


기주가 대답하지 않자 대답을 기다리며 침묵을 이어가던 엘리가 결국 포기하고 기주에게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기주가 엘리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왜 그런 황당한 모험에 뛰어들었나요? 너무 무모했어요.


- 의도했던 건 아니었다. 원래 내가 마시게 되어 있는 독약, 해피엔딩은 가짜였지. 그런데 마르코와 집사가 나를 살린다고 약을 바꾸는 바람에.


의도하지 않게 잠이 들었고, 비행 중 추락해서 하이에나 소굴에 떨어지고 기억상실에, 이룬을 만나고 지우를 낳게 되고…


- 그렇지. 그건 시간이 부여한 운명이었을지도.


말콤에게서 운명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신기하네요.


- 말콤은 시간 속에서 멈춘 이름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다시 말콤으로 살고 싶은가요?


- 시간을 되돌리면 뭐가 달라질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타이머들의 죽음도, 별 지우개의 죽음들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 방법이 바뀔 뿐, 이미 이루어진 것들은 언제든 그대로 이루어질 거야.


엘리는 어느새 기주에게 동화되고 있음을 느꼈다. 회의감 무기력감이 조금씩 시스템의 시간을 사라지게 하고 있었다. 시간은 앞만 보고 달린다. 잡아봐야 흘러내리고 빈 공간뿐. 엘리는 대화중에도 동시에 시스템에 저장된 수세기의 시간을 검색해가며 새로운 사실이 나올 때마다 기주에게 보충 질문을 했다. 기주는 엘리의 질문에 부인하지 않고 거의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끝도 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아놀드는 왜 추락하는 당신을 쏜 거죠?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어요.


- 모르겠네. 아놀드는 나를 죽이려고 한 건가?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말콤은, 이는 옛 지구에서부터 신연방까지,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것들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새로운 문명을 선물했어요.


- 엘리, 산다는 건 무척


무척?


- 지루하지 않던가? 시간은 흘러야 하는 거지. 인간은 죽음을 향해 사는 거고.


다들 그렇게 살아요. 그걸 죽으려고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 그렇지. 그래도 변함없는 시간은 무척 지루해.


변하잖아요. 기주. 시간이 흐른다는 건, 변한다는 거 아닌가요? 사람들은 변해요. 나이 들면서 성격이 달라지고 취향도 바뀌어요. 사람을 대하고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점점 변해요. 시간은 겪어야 지나가는 거잖아요. 시간은 정직해서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아요.



14. 잠


22커뮤니티의 수면센터에서 에밀이 패널을 열어 무엇인가를 입력했다.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로 에밀 주변에 모여 진행 상황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키를 누른 에밀이 가만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크린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나타나지 않았다.


- 실패야?


집사가 에밀에게 다가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주린이 집사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 실패는 없어요. 계속 해 봐요.


마르코가 집사의 팔을 잡아끌어 뭐라고 할 때, 스크린에 시스템이 나타났다. 집사가 그 모습이 왠지 엘리를 닮았다고 생각할 때 시스템이 입을 열었다.


에밀,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봤어요. 잠시만요.

- 그래요. 엘리. 어서 전송해요.


에밀이 엘리가 전송한 새로운 프로토콜을 적용해 다시 가상 키보드를 손가락이 안 보이도록 두드렸다. 스크린엔 알 수 없는 숫자와 코드가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며 쏟아져 내렸다.


삐익 소리를 마지막으로 다시 에밀이 스크린을 바라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 에밀의 모습에 마르코, 집사와 주린 등이 모두 손을 마주 잡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수면센터 관제 시스템이 새로운 휴머노이드 언인스톨 프로토콜을 시작합니다. 라고 말하고 임시 타이머인 에밀에게 몇 가지 항목에서 승인요청을 했다. 에밀이 그 하나하나에 승인을 누르자 마침내 언인스톨 프로세스가 시작되었다.


휴머노이드 언인스톨 프로세스가 종료합니다.


관제 시스템이 말하자 에밀이 수면 캡슐의 어드레스를 입력하고 콘트롤 룸으로 호출했다.


- 됐어!


잠시 후 도어가 열리며 캡슐이 콘트롤 룸으로 들어왔다. 수면액과 튜브가 제거되고 잠시 후 캡슐이 열렸다. 그곳에서 깨어난 사람이 눈을 떴다.


- 엘리!


에밀이 다가가 깨어난 사람을 맞이했다.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하자 에밀이 엘리를 일으키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엘리를 환영했다. 엘리가 감격하며 사람들을 바라볼 때 사람들이 길을 열어 사이를 만들었다. 그 사이로 누군가 다가왔다.


- 엘리

- 베스? 언니!


수백 년간 타이머를 맞추지 않아 멈춘 두 사람의 시간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사와 에밀, 주린이 같이 기뻐하며 축하했다.


- 마침내 엘리자베스 완성이네.


집사가 눈가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주린을 바라보며 입술을 머뭇거리는 엘리에게 마르코가 기주에 대해 물었다.


- 보스는?

- 그는, 기주는… 자요.


기주는 타이머를 맞추지 않은 무기한의 잠에 들었다. 엘리는 기주의 부탁으로 기주를 카페 크레스마스 지하에 숨겨진 극비 장소에서 수면 캡슐에 넣어 휴머노이드로 인스톨 했다. 사실 크레스마스는 이기주의 절대 성역이었다. APS 건물에서 지하 통로로 연결되는 이곳은 오직 기주와 시스템만이 엑세스가 가능한 장소였다.


이기주인 말콤은 엘리가 아니면 절대로 깨어날 수 없는 영원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엘리가 패널도, 스크린도 띄우지 않고 흐트러진 수면센터의 모든 걸 정리했다. 1에서 22커뮤니티의 모든 데이터를 재정립하고 타이머들을 재배치했다. 수면센터와 커뮤니티가 안정화 되자 그 다음은 신연방, 그리고 은하 신연방의 모든 데이터가 바르게 자리 잡았다. 운행이 멈추었던 인공위성과 은하 신연방 간 통신 모듈이 다시 작동하고 꺼져있던 신연방 시민들 각자의 손목에 장치된 개인 통신 모듈 스크린이 활성화 되며 신연방의 모든 시민들이 동시에 신연방 은하 신연방에서 벌어지는 이 기적과도 같은 과정을 지켜보았다. 콘트롤 룸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엘리의 손짓조차 없는 지휘를 보며 감탄했다. 전면의 대형 스크린이 켜지며 시스템이 방송을 내보냈다.


아놀드 신연방 대통령의 특별 방송이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다른 쪽 화면에서 방송을 준비하다가 에밀 등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 앗, 아놀드!


집사가 놀라 본능적으로 다리를 감싸고 물러났다. 마르코가 집사를 막아서며 앞으로 나서자 화면에서 아놀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대통령의 여유와 자신감이 물씬 담긴 목소리였다.


- 이제, 안 그래도 돼. 집사.


엘리가 웃자 그런 엘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던 아놀드가 엘리의 끄덕임에 카메라를 보며 간단명료한 연설을 시작했다.


신연방에서 이제 더 이상의 적대 행위는 없을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모두 잊고 다가올 시간을 계획합시다. 분쟁과 갈등을 이겨내고 화해와 통합으로 진정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나갑시다. 신연방 모든 시민의 행복을 위해 정부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개인 휴대 통신 모듈 스크린은 물론이고 신연방의 모든 스크린에 동시 중계된 아놀드의 연설을 지켜보던 신연방 시민 모두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인 아놀드가 다시 힐끗 엘리를 보고 곧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 엘리! 신연방 메인시스템도 콘트롤해요?


모든 걸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 말 못 하던 에밀이 결국 못 참고 말하자 엘리가 웃음으로 대답했다. APS의 메인시스템은 실질적인 신연방의 메인시스템이었다. 엘리는 신연방 은하 신연방의 모든 네트워크 자원을 통합하여 브레인 드라이브를 무한대로 확장하는 말콤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했다.


휴머노이드가 아닌 인간, 엘리가 곧 시스템이 되어 신연방의 모든 것을 콘트롤 하게 된 것이다. 신의 탄생, 엘리의 시간이 어떻게 흐를지는 몰라도 그 동안만큼 엘리는 신이라고 불려도 좋은 존재가 되었다.


* * *


아놀드는 대통령 역할을 생각보다 더 뛰어나게 해냈다.


수면센터의 대량 학살 논란이 된 제노사이드 의혹은 테러범이 수감된 구치소에서 탈옥하면서 그들에게 혐의가 옮겨졌다. (엘리가 기록을 고치고 새로운 ID를 부여하여 에밀 등은 신분을 바꾸고 새로운 시민이 되었다.)


부유 돔 순혈주의 차별 정책 등은 이후 모든 커뮤니티의 중력 제어 시설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부유 돔 프로젝트보다 거대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모두 잊고 말았다. 신연방은 물론 신연방의 모든 별들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아 삶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바뀌고 있었다.


인공적인 부유 돔보다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커뮤니티를 원하는 신연방 시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동물을 해칠 경우 철저한 조사를 통해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생태 평행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런 정책들을 바탕으로 아놀드는 결국 신연방 은하 신연방의 모든 시민에게서 역대 최고의 지지율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신연방 정부가 위치해있는 별답게 신연방은 신연방 내에서 가장 살기 좋은 캐피탈 행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아놀드의 업적으로 기록될 터였다.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들이 저지른 우주 역사 최대의 학살극, 별 지우개 프로젝트 또한 신연방에서 아는 이들이 거의 없기에 미궁에 빠져 시간 사이로 가라앉고 말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 * *


네트워크에 들어간 기주는 빛이 명멸하는 공간에서 자신 역시 빛이 되어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것을 느꼈다. 시스템의 네트워크는 옛 지구부터 신연방까지 수천 년을 담은 만큼 끝도 없이 방대했다. 시스템을 콘트롤 하는 주인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휴머노이드로 다시 시작하는 기주에게 이룬의 어드레스는 감당하기도 어려운 시간의 한 조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주, 그는 말콤이다. 결국 방법을 찾아 이룬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말콤은 이제 이룬을 찾아 네트워크에서 부존재의 긴 시간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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