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은 무조건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이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끔찍하든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라고 단호하게 작가의 신념을 나타낸 글 앞에서 나는 ‘아차’하고 말았다.
어떤 상황이든 담담하게 서술해 나가는 그의 글들이 좋았고, 잿빛 표지와 한 톤을 유지하는 단편들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좋았던 것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뿐이리라. 한 번뿐인 인생 앞에서 도덕은 무엇이며, 또 윤리란 무엇일까? 영범에게는 늘 그런 의문이 있었다. 열네 살 때부터 그는 자신의 친모란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느라 남편은 물론이거니와 아들까지 저버린 낯 두꺼운 여자라는 말을 줄기차게 들으면서 자랐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영범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불쾌감을 느꼈으나, 그걸 알아차리는 친가의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에 관한 한, 그들은 그들이 욕하던 윤경만큼이나 무책임했다. 그러니 그런 의문이란 그 무책임한, 마치 검은 폐수와도 같은 말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게 하나뿐인 인생이라면 한 사람의 선택보다 더 무거운 도덕이나 윤리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영범은 생각했다. 어처구니없는 선택으로 원치도 않았던 삶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그는 이미 자기 인생 앞에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인데, 거기다 대고 다시 뭐라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석에 주석을 다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는 시늉을 하네」_226)
쉽지 않았던 소설이다. 시점이 수도 없이 바뀌고 화자가 누군지 후반부에 와서 그제야 알 수 있었던 글도 있었고, 난해함을 남기고 단편을 끝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 곳에서 끊을 수 없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은 오래 묵은 선반 위에서 퍼즐을 꺼내 맞춰보는 것만 같다. 무심코 지나쳤던 어느 날의 기억을 상기시킬 하나의 단어나 장면으로 조각을 하나둘씩 꺼내 본다. 그래서 조각을 들어 올리는 순간은 현재가 되고 조각을 맞추는 순간은 과거가 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이 유난히 많았다. 열한 편의 단편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우는 시늉을 하네」도 비슷한 구조였다.
이혼한 아버지와 살았던 아들. ‘시간이 지나면 엄마가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할 만큼 어렸던 아들은 어느덧 아버지의 ‘흐린 굴곡을, 모나고 둥근 모서리를, 그리고 이제는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도 어쩐지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어른이 되었다. 투병 중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그는 작은 퍼즐 조각이 떠올라 그 조각을 맞추기 위해, 결혼 후 연락만 주고받던 이혼한 엄마를 찾아간다. 워낙 소설이라는 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말장난이나 떠들어대는 혓바닥 같은 거라서’ 본인과 맞지 않다던 아버지는 엄마와 재결합하기 위해 통영까지 내려가 한 권의 책을 읽는다. 마저 읽지 못하고 또 엄마와 만나지 못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 이혼 가정으로 살아왔던 아버지의 지나온 그림자를 아들은 이제야 밟는다.
윤경의 말이 옳았다. 가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진심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진심이라면 자기 자신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였다. 아버지의 삶이 실패하게 된 건 그 때문이었다. (_230)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행복으로 가득 찬 이야기들이 아니다. 병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와 이별에 대한 이야기, 죽음 그리고 의미조차 잊고 지내왔던 시간들을 상기시키는 기억의 조각 그런 것들이 나열된 글들이다. 작가는 어쩌면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자로써 그의 글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마침표로 끝낸 그의 글들에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보다 울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때로는 이유도 모른 채, 때로는 그냥 그렇게 ‘오래도록 지금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오히려 감동적이었다. 후회도 삼키고, 지나온 과거도 삼키고 인간이란 모순적인 행동도 삼킨 그의 글이 몹시도 좋았다.
작가에게 그의 색깔이 있다는 것이 칭찬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5년여의 시간에 걸쳐 쓴 열 한편의 단편 내내 확실히 김연수라는 작가의 문체가 느껴졌다. 단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쭙잖은 리뷰를 쓸 때, 꽤 애를 먹었지만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나쁘지 않았다.
이런 단편이라면 종종 마주해도 괜찮다 싶을 정도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