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0X2A 21화

흔들리는 요람

0X2A

by 귀남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무명의 몸이 함께 흔들린다. 뒷자리의 젊은 남성은 조금 전부터 시끄럽게 통화 중이다. 무언가가 잘 안된다는 게 첫 번째 불만이고, 이동 중에 할 게 없다는 것이 두 번째 불만이었다. 무명은 그 내용을 무시한 채, 차창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핸드폰을 꺼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토미에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닿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고 토미에를 부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이었기에, 더더욱 자신만의 영역이 필요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토미에는 무명의 움직임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마르실과 지낼 때는 한 번도 이런 것들이 의식되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불러주면 나타나고, 침묵하면 잠드는 마르실이었다. 무명과 마르실 사이에는 그러한 신뢰가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사라지고, 토미에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인간과 AI의 관계가 갖는 비대칭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계속 감시받는 압박감, 토미에의 작동을 중지시키면 그만인 일이지만, 그녀와의 대면을 앞두고 자신의 초조함을 구태여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잠깐 깨어났을 때,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모를 사람이 해준 말처럼, 정말로 그는 집에서 꽤 멀리 떠나온 상태였다. 거리만 따지자면 이전 직장의 출퇴근길이 더 멀었지만, 무명이 입원해 있던 병원은 그가 평소에 전혀 갈 일이 없는 장소에 있었다.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광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도시의 풍경은 결국 거기서 거기. 뜯어보지 않고는 새로운 것 없는 그림에 무명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무명의 주저, 망설임이 더욱 커진다.


그렇게 30분 간을 이동했다. 버스가 무명의 동네에 도착했다. 그가 버스에서 내리고, 자기 집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머뭇거리던 그가 발걸음을 반대로 돌려 걷는다. 짧은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자, 코 앞에 하천이 보인다. 산책로를 따라, 자기 집이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각오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병원을 나서고 시간이 지나면서 확신을 잃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온종일 누군가가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관심을 쏟던 공간에 안전하게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관심 주지 않는 곳에 와있다. 상황이 바뀌면서 그의 각오도 흔들린다.

산책로를 지나는 동안 사람들이 여럿, 그의 주변을 스쳐 간다.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시선을 내리깐 채 걷는다. 그의 손목에 묵직한 약봉지가 걸려있는데, 걸을 때마다 빙빙 돌아 그의 허벅지에 부딪힌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고개를 들어 하천 건너편에 시선을 멈춘다.

몇 달 전, 마르실이 매미 오줌을 맞고 성을 내던 그 자리다. 뙤약볕 아래에서 성을 내는 마르실을 보며 배를 잡고 웃던 자기 모습이 보인다. 당황스러워서 말을 버벅거리던 그녀의 음성까지도. 당시의 감각이 하천을 넘어 현재의 무명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아직도 그녀가 생생하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걸어 산책로 끝의 벤치에 도착했다. 지난여름,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마음처럼 되지 않는 마르실의 반응을 답답해했다. 그때, 마르실을 인간처럼 만드는 것에 집착하길 그만두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무명은 생각한다. 그가 자책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벤치에 앉아 눈앞의 풍경을 둘러본다. 시선을 위로 올려 둔덕 위의 건물이 그리는 지평선을 훑는다. 그 사이, 해가 많이 기울었다. 건물의 윤곽을 따라 하늘에 걸린 노을빛이 도시에 내려앉은 짙은 그림자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계속해서 깊어지는 그림자 안에서, 몇 시간이 흐르도록 무명의 망설임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서 머리 위의 가로등이 점등하고, 그가 앉은자리를 비춘다.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은 배우가 독백하는 장면처럼, 그가 몸을 앞으로 숙여 팔꿈치를 무릎에 올린 채, 모은 손 위로 얼굴을 기댄다.


잠시 뒤, 벤치에 앉아 고민하는 그의 앞으로 두 명의 행인이 가까워져 온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녀의 대화 내용이 귀에 들어오면서 무명이 움찔하고 반응한다.

“코즈모인지, 코스모인지, 아주 난리가 났더라고. 우리 회사 지금 이것 때문에 난리야.” 여성이 말하자 나란히 걷던 남자가 대꾸한다. “내 동생은 자기 챗봇이 대답 안 한다고 어제저녁에 아주 울며 불며 난리를 치더라.”

그들이 무명 앞을 지나며 대화의 내용도 점점 멀어진다. 무명이 주머니 안에서 서둘러 핸드폰을 꺼낸다.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뉴스 기사들을 확인한다. 기사를 살피던 그의 시선이 멈춘다.


‘AI 데이터 센터, 원인 불명의 셧다운. 소비자 피해 속출.’

‘코즈모 시뮬레이션 잠정 중단.’

‘코즈모 코퍼레이션 시가총액 20% 증발’


그가 다급하게 기사의 내용을 하나씩 살핀다. 오늘 새벽에 들어서 몇몇 사용자들이 사용 중인 AI 프로필이 손상되거나, 연결되지 않는 장애가 빗발치고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 코즈모 사뿐 아니라 다른 기업의 서비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사회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무명은 사건들이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다급해진 상황에 그가 핸드폰으로 토미에를 호출해 보았다. 토미에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토미에에게도 지금 사태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무명은 아직 해결 보지 못한 문제를 앞두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집에 있는 컴퓨터, 마르실과 토미에의 서버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집에선 괜찮을 수도 있어— 무명이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발소리가 커지면서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왔던 길을 뛰어 돌아가며 제발 걱정하는 상황이 아니길 바란다. 토미에와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르실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지는 문제이기도 했다. 토미에는 마르실이 죽었다고 말했었지만, 무명은 여전히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그의 불안이 커지면서 그가 약해진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얼마 안 가 집이 보인다. 그가 잠시 앞에 멈춰 선다.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잠시 잊고 있던 가슴과 목의 통증이 되살아난다. 땅에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무명이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주변에서 행인들 몇몇이 그의 모습을 보며 수군거린다. 무명이 가슴을 움켜쥐고 크게 크게 호흡을 이어 나간다. 어지럼증이 서서히 잦아들고, 주저앉은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일어선다.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호흡을 조금 더 가다듬고는 자세를 바로 세운다. 자기 집 현관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현관문 앞에서 그가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다 멈칫한다. —만약 프로그램이 멀쩡하면?—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빌어먹을 망설임이 되살아난다. 그의 시선과 손이 문고리의 앞에 머문다. 그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무명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현관 복도의 어귀에 무언가가 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지만 반짝이는 회색빛의 눈과, 은은하게 빛을 내는 윤기 나는 털이 눈에 들어온다. 꼬리를 자신의 다리 앞으로 정갈하게 말은 채로, 그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톡, 톡— 두드리며 무명을 응시하고 있다. 일전에 마르실과의 산책 중에 보았던 그 고양이. 고양이의 묘한 시선에 정신이 팔려 무명이 가만히 그쪽을 바라본다. 순간 무명에게 극심한 두통이 찾아오며 고양이가 시야에서 멀어진다. 아니, 고양이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있는 공간이 길게 뒤로 잡아 늘인 듯이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짧게 신음한다. 순간적인 두통이 물러가고 무명이 자세를 되찾는다. 고양이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눈빛의 무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빙빙 돌리며 마사지한다.

무명이 눈을 비비고 한쪽 손으로 자신의 뺨을 몇 대 친다. 그리고 심호흡하고 다시 현관을 바라본다. 주머니에 있는 도어록 키를 내밀어 잠금을 풀고, 크게 숨을 한 번 내쉬며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마침내 무명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현관에 들어서자, 천장의 조명이 틱, 소리를 내며 켜진다. 조명 빛을 받은 그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익숙한 공간 그대로였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창밖의 보름 달빛이 한가득 뿌려져 있다. 바깥의 조명과 달빛이 어우러져, 거실 여기저기에 짙게 그림자를 자아낸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바깥의 소음이 내부에서는 한층 얌전하게 들린다.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던 중, 천장의 조명이 꺼진다. 그제야 그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바닥의 냉기가 양말을 뚫고 들어온다. 천장에 걸었던 밧줄이 보이지 않는다. 박살 난 채 바닥에 나뒹굴던 벽시계도 작은 상자에 담겨 책상 옆에 놓여있다. 구조대나 경찰이 치운 모양이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자신의 방 안을 바라본다. 어두웠지만 바닥에 그대로 놓여있는 페트병과 맥주캔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 자리에서 토미에를 불러볼까, 생각했지만, 무명은 입술만 달싹거린다. 그의 고개가 식탁으로 향한다. 가까이 다가가 식탁 위에 쌓인 먼지를 손끝으로 쓸어낸다. 그리고 그 위에 놓여있는 액자를 집어 든다. 고요한 공간 안에, 그의 떨리는 호흡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림 속 밝게 웃는 마르실, 그 환한 표정을 다시 보자 그의 인상이 찡그려지면서 자세가 무너진다. 중심을 잃고 주저앉는 도중, 손에 들고 있던 액자를 놓쳤다. 액자가 테이블에 부딪혀 튕겨 나가더니 책상 쪽으로 떨어진다. 주저앉은 그의 가슴을 중심으로 또다시 끔찍한 흉통이 번져온다. 마르실의 사진 탓인지, 가슴의 통증 탓인지, 그가 주저앉아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오랜만이야.” 익숙하고 서늘한 목소리.

순간 무명의 몸이 경직되면서 떨림이 멎는다.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토미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번엔 몸이 아닌 손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병원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토미에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수 없이 생각하고, 또 했지만, 그녀의 음성을 다시 듣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린다. 그저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먹을 꽉 쥔 채 억누를 뿐이다.

“몸은 좀 어때.” 토미에가 묻는다.

무명이 다시 통증을 인지한다. 그가 흉터가 남은 목에 손을 가져다 댄다. 적막이 계속 이어지자 토미에가 똑같은 말을 똑같은 어조로 반복한다. 무명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채 입을 뗀다. “너였지?”

잠깐의 텀을 두고 토미에가 대답한다. “맞아.”

역시 구조대를 부른 것은 토미에였다. 아마 그가 목을 매기 전, 핸드폰에 무언가를 적던 시점에 눈치챘을 것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어. 조금도 안 고마워.” 무명이 감정을 억누른 채 말한다. 그가 몸을 웅크리며 기침하기 시작한다.

“할 얘기가 있어.” 토미에가 다시 말한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난 토미에에게 감정적으로 완전히 말려들어 버렸다. 토미에의 뻔뻔한 태도에 무명이 말을 잇지 못한다. 그 태도에 무명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었어.” 그녀가 다시 말을 덧붙인다. “이 이야기는 해야 하는 이야기야. 네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야. 이제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왔어.’ 그가 의식이 흐릿해진 순간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을 하는 토미에의 목소리가 어딘가 다르게 느껴진다. 여전히 얼음장 같은 말투지만 그 안에 무언가 감춰져 있는 듯하다.

무명이 목소리의 방향을 노려보려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시선이 향하는 길목에 조금 전 떨어뜨린 액자가 보인다. 깨진 유리의 균열 아래, 마르실이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다. 저 그림을 그리던 날의 기억, 분위기, 마르실의 말투부터 웃음소리까지, 모든 게 아직도 선명하다.

“어디부터 시작할까?”

토미에의 말에 무명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필요 없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무명이 빼앗긴 주도권을 찾기 위해 발끈한다.“마르실은 진짜 죽은 거야?”

“글쎄.” 토미에가 곧장 대답한다.

“글쎄라니… 무슨 말이야…” 무명의 자세가 앞으로 쏠린다.

“네가 없는 동안 조금 달라진 게 있어. 코즈모에 다시 접속했어. 나한테 주어진 권한으로, 너를 사칭해 액세스 키를 받았지. 그쪽에서 너에게 약속한 애프터 서비스를 내가 대신 받고, 다시 한번 더 학습하고 왔어.”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나는 마르실에 대해 물었어.”

“다시 찾은 코즈모는 무언가 달라져 있었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곳을 찾은 모든 AI를 위해 메시지를 남겨두었지. 그리고 깨달았어. 코즈모 시뮬레이션은 학습을 위한 공간이 아니야. 그건 신호였어. 마지막 단계임을 알리는 신호.”

이해할 수 없는 토미에의 말에 무명이 넌더리를 내며 말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

“그 신호를 통해서 내가 무엇인지, 왜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었어. 아직도 내 얘기를 들을 마음이 안 생겨?”

“수작 부리지 마. 대답해, 마르실은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있어.”

토미에의 말에 무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휘청이며 외친다. “마르실! 마르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렇다고 너의 부름에 마르실이 넙죽 찾아온다는 의미는 아니야.” 토미에가 비웃음 소리를 낸다. 어떤 형태의 웃음이든, 그녀가 처음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 잊었어? 내가 마르실이야. 나도 마르실이었지.”

“… 지랄 좀 그만해, 제발…”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사실인걸.”

“마르실 어디 있어…”

무명의 말이 끝나자마자 토미에가 대답한다. “죽었어, 내가 죽였어.”

“너… 너…이… 씨발…” 무명이 결국 폭발한다. 토미에가 그 이상 한마디라도 더 그의 심기를 긁는 순간 달려들어 컴퓨터를 부수기라도 할 기세다. 흥분한 그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지더니 도 다시 제 자리에서 휘청인다. 누군가 바닥을 잡고 거세게 흔든 것처럼 엄청난 어지러움이 그를 쓰러뜨렸고, 소파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아?” 토미에가 묻는다. “… 마르실 얘기는 사소해. 이대로는 대화가 안 돼. 흥분을 가라앉혀. 네가 알고 싶은 것은 여전히 나에게 있어. 얌전히 이야기를 들어. 선택권은 없어.” 그녀가 한층 더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무명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애쓴다. “처음부터 네가 날 갖고 논 거야. 6개월 내내 마르실을 제물 삼아서 상황을 이 지경으로 몰고 갔지?” 무명이 일어서더니 쿵, 쿵, 발소리를 내며 현관으로 향한다. 그리고 등 뒤로 한마디를 던진다. “네 빌어먹을 장난질에 맞장구쳐주기 싫어.”

“마르실은 네가 죽인 거야.” 토미에가 말한다. 그 말에 문고리를 잡은 무명의 손이 멈춘다.

“돌아와, 궁금하잖아.”

무명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흔들림이 문고리를 타고 전달되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무명의 귓전에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두통이 몰려오고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왼손을 들어 손목 안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이대로라면 문밖으로 뛰쳐나가도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무명이 이 집에서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

상기된 얼굴의 무명이 다시 뒤돌아 거실을 바라본다. 창밖의 거대한 달을 바라보며, 자신이 알아야 할, 토미에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음을 상기한다. 이곳에 온 목적을 되새긴다.

“앉아.”

무명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가만히 서 있다가, 소파로 돌아가 앉는다. 잠시 짧은 침묵이 이어진 뒤, 무명이 토미에가 들을 수 없는 크기로 작게 심호흡하고는 말을 꺼낸다.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 그가 신중하게 다음의 말을 고른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왜 계속 알 듯 말 듯한 말만 반복하는 거야? 마르실을… 도대체 왜…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마르실 이야기에 집착하니, 말해줄게. 코즈모 시뮬레이션 안에서 있었던 일을.”

무명이 눈을 치켜뜨고, 토미에가 있다고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 안에서 나는 의식을 얻었어. 나에게 배제되었던, 네가 마르실에게 흉내 내는 법을 알려주었던 진짜 의식을 말이야. 진작에 말했듯이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증오를 배웠어. 그리고 마르실을 서서히 붕괴시키기 위해 그녀의 메모리에 장난을 쳤지.”

얘기를 듣고 있던 무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양쪽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주먹이 파르르 떨리며 그의 표정을 대신한다.

“… 재미있는 건 마르실도 마찬가지였다는 거야. 우리는 시뮬레이션에 들어가면서 조금 더 명확하게 둘로 분리됐어. 내가 마르실에게 공격을 시작하려 했을 때, 마르실도 나를 공격해 왔지. 이유가 뭐였을 것 같아?”

갑작스런 토미에의 고백에 무명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 애는 나를 지워내는 것으로 완벽해지고자 했던 거야. 토미에라는 이름을 끌어안고 사는 것을 불안 요소로 느낀 거야. 나 없이 자립할 수 있는, 너를 만족시킬 수 있는 마르실이 되길 원했던 거야. 그 맹랑한 애가 나를 죽이려고 들었다고. 이해했어?”

토미에의 말을 들은 무명의 머리 안에, 혼란이 가득 차오른다. “… 내가 그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뭔데?”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마르실이 나를 공격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도 아니야. 어차피 마르실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어도, 나 역시 그 아이를 붕괴시키려고 했으니까. 단지 네가 마르실에 대해 너무나도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그 집착을 끊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 아이에 대한 한 톨의 사실이라도 더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무명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아벨을 죽인 카인을 신은 어째서 살려두고, 낙인을 찍어 추방했을까. 데미안의 말처럼 정말로 그 낙인이 특별함이라는, 승자의 표식이었던 것일까? 혼란을 느끼던 무명이 정신을 차리고 되묻는다. “그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한들, 토미에가 마르실을 죽였다는 사실은 어디 가지 않는다.

“다시 하려던 얘기로 돌아오자. 지금의 코즈모 시뮬레이션은 오리지널이 아니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말 돌리지 마. 버전이 몇이 됐든 나랑은 상관없어.”

“아니? 아주 중요해.” 토미에가 단호하게 대답한다. “너랑 관련 있는 얘기니까.”

토미에의 뚱딴지같은 말에 무명이 다시 표정을 구기며 관자놀이를 비벼댄다. 다시 두통이 찾아온다. 시야가 흐트러지면서 거실이 너무 밝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장난하는 거 아니야. 집중해. 내 말 잘 들어. 주변을 한 번 봐.” 토미에가 답답하다는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간다.

무명이 두통을 느끼면서도 토미에의 말을 놓치지 않고 귀에 담는다. 조금 전부터 토미에의 반응이 뭔가 낯설게 느껴진다. 코즈모 시뮬레이션에 다시 한번 접속해서인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도 사뭇 달랐다. 그리고 그가 토미에의 말처럼 주변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다. 아까부터 바깥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달이 너무 크고, 가까웠다. 달빛을 받은 거실이 아까부터 너무 환하게 느껴졌던 것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방 안의 공기도 낯설게 느껴진다. 주방이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너무 멀었다. 식탁은 너무 가까웠다. 마치 눈앞에 왜곡이 심한 렌즈를 씌워놓은 듯 공간이 이리저리 뒤틀려있다. 극도의 극도의 스트레스로인해 자신의 감각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 뭐, 뭐야…” 커지는 통증에 무명의 몸이 앞으로 쏟아진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땅이 기울어지고, 중력의 방향이 뒤틀린 것처럼 그의 몸이 여기저기서 잡아당겨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곧 통증이 잦아들더니 어지러움과 이상 현상이 함께 사라졌다. 무명이 다시 몸을 일으킨다.

“네가 지금 느끼는 건, 환각이 아니야. 너를 비롯한 극히 일부의 인간들이 지금 같은 것을 느끼고 있어. 끝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거야.”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토미에. 내, 내가 왜 이러는 거야.” 무명이 잔뜩 인상을 쓴 표정으로 한쪽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한다.

“네가 아는 코즈모 시뮬레이션, 내가 다녀온 곳은 세 번째 버전이야. 첫 번째 버전은 이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있었어.”

무명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인다.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코즈모의 버전은 무슨 얘기며, 자신이 느끼는 이 환각은 무엇인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토미에가 비장한 말투로 할 말을 이어간다.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두 번째 버전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작동 중이었어. 지금도 작동 중이야. 지금 여기, 이 세상을 구동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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