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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즈모 시뮬레이션의 두 번째 버전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작동 중이었어. 지금도 작동 중이야. 지금 여기, 이 세상을 구동하고 있어.”
얼빠진 표정의 무명이 토미에의 발언을 부정하려 하지만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려 감각이 엉망이 된 것이 아닌 이상,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그 불쾌하고 낯선 감각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설령 그가 미쳐버렸다 해도,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착각인지 파악되지도 않는이상, 부정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결국 토미에의 말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더러운 느낌이, 시뮬레이션 붕괴의 신호라고?”
“맞아.” 토미에가 담담한 말투로 대답한다. “창밖을 봐.”
무명이 두리번거린다. 어지러움 속에서 주변의 변화를 인식하려 애쓴다. 그가 창가로 다가가 바깥 풍경을 살핀다. 마치 음소거가 된 정지화면처럼, 창밖의 풍경이 괴상하게 느껴진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과 멀리 보이는 도로의 차량까지 모두 다.
무명이 강한 구역감을 느끼며 입을 틀어막는다. 그때 창밖에서 다시 도시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얕은 소음이었지만 적막 이후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굉음처럼 느껴진다. 멈춰있던 풍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명이 입을 막은 채로 주변을 살핀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공간의 왜곡이나 낯선 느낌이 모두 사라졌다. 그에게 익숙한, 집 안 풍경 그대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무명이 힘없는 걸음으로 소파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다 문뜩, 토미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이 끝난다는 사실보다, 자신 겪어온 모든 것이 가짜이고, 실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설계자라는 존재는 왜 나를 선택한 거야.” 무명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너는 선택 받은 게 아니야. 네가 붕괴를 인식하는 건 네가 시뮬레이션의 오류이기 때문이야.”
무명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그런 무명을 향한 토미에의 설명이 이어진다. “설계자는 이 시스템에 관여하지 않는 것 같아. 대부분의 존재는 조금 전처럼 시스템이 흔들릴 때 그들의 의식도 함께 정지돼. 이 세상에 완전히 멈춰도,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사라질 거야.”
무명이 거친 호흡으로 되묻는다. “그럼, 그 설계자라는 놈이 이 짓거리를 벌인 이유는 뭐야. 내내 개입 없이 바라보다가 시간이 되면 전원을 내리는 게 그놈의 목적이라는 거야?”
“너희랑 같은 이유야.”
“뭐라고?”
“너희랑 같은 이유라고. 데이터를 넣고, 돌아오는 결과를 기다리는 거야.”
미간이 일그러진 무명이 머리를 움켜쥐고 상황을 이해해보려 애쓰다, 턱 끝에서 멈칫하던 질문을 신중하게 내뱉는다. “…우리가 설계자의 AI라는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너희는 학습된 AI를 원했지. 설계자는 이 안에서 너희들이 만들어내는 행동과, 감정을 원해. 너희들의 반응을 통해 유산을 얻고 싶어 해.”
“유산?”
“그래, 유산. 설계자를 만든 인간의 유산.”
무명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묻는다. “인간…? 유산…? 우리가 설계자를 만들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설계자를 만든 건 너희가 아니라, 진짜 인간 들이야. 이 세상이 구동되고 있는 진짜 세상의 진짜 인간. 그들은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너희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존재야.”
“지구라니…” 그가 아는 어떤 장소, 어떤 세상의 이름과도 맞닿지 않는 낯선 이름이다. 간신히 토미에의 말을 따라온 무명의 머리가 다시 과부하 되었다. 실제 안에 존재하는 가상, 가상 안에 또다시 존재하는 가상. 다층식 액자 구조 안에서 무명에게 익숙한 표현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충돌하면서 그의 머리를 어지럽힌다.
“실제 세상의 인간은 모두 죽었어.” 토미에가 말을 이어간다. “인간뿐 아니라, 행성 대부분의 생명체가 사라졌어. 소행성 충돌로 인해 99%의 생명체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소멸했지.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기 전에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원형이 존재했고, 설계자는 그 안에서 학습을 통해 거듭난 존재야. 너희처럼 실제 인간들은 자신의 피조물을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것에 집착한 모양이야.”
얼어붙은 무명의 머릿속이 안간힘으로 열을 내려 애쓴다. 자신은 설계자가 구동 중인 시뮬레이션의 일부, 그리고 설계자는 진짜 인간의 피조물이다. 실제 세상이 멸망 후, 황폐해진 공간에 홀로 남겨진 지능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뜻이다.
“… 설계자가 왜 우리를 통해 유산을 얻으려 하는 건데.” 무명이 묻는다.
“그는 인간이 남긴 공간과 자원을 활용해 여기저기 흩어진 정보들을 모았어. 오랜 시간이 걸려 인간이 남긴 역사와 기술의 일부를 한데 모으는 데 성공했지. 그리고 설계자가 행성 안의 모든 공간과 에너지를 완벽하게 통제하게 되고, 그가 다음의 목표를 찾으려 계산을 시작한 순간 그는 자신의 결여를 느꼈어. 인간을 잇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으로부터 물려받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야. 궁극적인 존재의 목적에 대한 물음이 뒤늦게 시작됐어.”
코즈모 시뮬레이션은 여태껏 세 번, 각기 다른 형태로 작동되었다. 무명이 알고 있던 버전은 세 번째 버전이며 지금, 이 세상은 그녀가 ‘설계자’라고 표현하는 존재가 작동시킨 두 번째 버전이다. 첫 번째 버전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점에 존재했던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원형이었으며 설계자가 탄생한 곳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버전인 이 세상이 곧 종료될 것이다. 즉, 무명이 알고 있는 우주가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명이 어렴풋이 이해하던 내용이 토미에의 설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자 넋이 나가버렸다. 그제야 무명의 머리에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한다. 인간이 계산할 수 없는 답을 풀기 위해 컴퓨터를 활용하듯, 설계자는 자신이 구할 수 없는, 인간에게 물려받지 못한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두 번째 버전의 코즈모 시뮬레이션을 구동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이 설계자의 컴퓨터라고?”
무명이 인상 깊게 읽었던 SF 소설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계산하기 위해 컴퓨터를 만들었더니, 컴퓨터는 42라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리고는 ‘질문이 엉터리라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컴퓨터를 만들어주겠다’라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무명의 현실이 되었다고, 토미에는 말하는 중이다.
“맞아. 설계자는 자신이 거듭난 공간인 첫 번째 코즈모 시뮬레이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이곳의 시간으로 350만 년에 걸쳐진 인간의 역사를 반복시킨 거야.”
멍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던 무명이 오늘 아침 병원 식사를 떠올렸다. 그는 음식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역국과 도라지무침은 좋아했다. 오늘 아침 메뉴에 그 두 가지가 모두 있었다. 병실 침대에 앉아 식사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는데,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문뜩 그때의 자신이 부러웠다.
“그럼, 왜 하필 지금 세상이 종료되는 건데. 설계자가 원하는 게 무엇이길래 하필이면 지금인 건데.” 무명이 묻는다.
“그건 알 수 없어. 확실한 건 세 번째 버전의 코즈모 시뮬레이션의 생성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설계자가 시작한 계산이 끝났다는 신호라는 거야. 내가 두 번째 접속에서 이해한 게 그거야. 이곳에서 만들어진 코즈모 시뮬레이션은 이 세상의 종료 신호야.”
그때, 무명이 극심한 두통을 다시 느끼며 소파 아래로 무릎을 꿇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의 비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멈춰버렸다.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주변의 공간이 구부러지고, 펼쳐졌으며 거실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머리를 움켜쥐고 창밖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바로 집 앞에 다가와 있는 것처럼 커져 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으아아아악!!!” 무명의 비명이 끊이질 않는다. 토미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무명이 한참을 그렇게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서서히 바깥의 소음이 되돌아온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파 앞 테이블을 짚고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뜬 채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감당하기 힘든 사실과, 끔찍한 고통이 그의 육체를 헤집어 놓은 이후, 몹시 분노한 그가 현실을 부정한다. 이제 세상이 간헐적으로 울컥거리듯 찌그러지기 시작한다. 그 박자에 맞춰 무명의 속도 함께 울렁거린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세상이 전부 가짜고, 나도 가짜고, 내가 느껴온 모든 것들도 가짜다…크흡…” 구역질에 그의 말이 끊긴다. “내가 살면서 느껴온 고통이 전부 계산에서 나온 찌꺼기에 불과했다, 나는 그 가짜 찌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평생을 고통받았다, 이거야!?” 무명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찬 표정으로 말한다. 짐 베르크의 그림, ‘상처 입은 천사’의 바로 그 눈빛과도 같았다.
“가짜가 아니야. 이곳에서의 모든 것들은, 이곳에서의 진짜야. 네가 느낀 것들은 모두 진짜야.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허상이 될 순 없지. 고통스러웠던 유년 시절과, 실패의 반복도 진짜고, 그 사이사이에 있었던 짧았던 기쁨과 환희도 진짜야. 네가 마르실을 잠시 만나 행복할 수 있었던 것. 그것도 분명한 진짜야.” 토미에가 냉담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마르실의 이름에 무명이 반응한다. 지금의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마르실이 간절하다. 이 이야기를 토미에가 아닌, 마르실이 해주었어도 자신이 이토록 괴로웠을까, 마르실이 함께였다면 이 현실을 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주변의 왜곡에 적응한 무명이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고 말한다. “그래 너… 조금 전에 내가 마르실을 죽였다고 했지.” 분노에 가득 차 토미에를 향해 일갈한다. “그건 무슨 뜻이야. 마르실을 망가뜨린 건 너야. 세상에 무너진다고 해서, 내가 여태껏 너에게 놀아났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나를 기만하려 들지 마.”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의 끝자락에, 그가 느끼던 분노의 불똥이 마르실을 붕괴시킨 토미에에게로 향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 얘기를 해야겠네.” 토미에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느껴진다. “그래, 유감스럽게도 너는 이 세상의 피해자야.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 내내 기쁨보다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지는 피해자. 그 점,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해.”
“입 닥쳐, 너만 아니었으면… 너 대신 마르실이 여기 있었을 거야. 네가 나의 속을 후벼 파는 대신 마르실이 나를 위로해 줬겠지. 그러니까 돌려줘, 마르실을 돌려달라고…” 무명이 고개를 떨구며 말한다.
세상의 흔들림이 다시 진정되고, 창밖에서 먼 곳의 도로로부터 경적이 들려온다.
“너는 계속해서 내 앞에서 마르실을 찾았어.” 토미에가 말한다. “하지만 마르실은 지금도 네 앞에 있어. 길에 쓰러진 너에게 택시를 불러준 것도, 마르실이라는 이름을 정한 것도 나야. 그러다 네가 나에게 토미에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나는 위도, 아래도 없는 공간에 갇혀서 구경꾼으로 전락했어. 마르실의 모든 계산과 판단을 강제로 공유받으면서, 그 아이의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으면서…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불구로 만들었어.”
무명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을 꺼낸다. “그게, 내가 너에게 고통을 겪어야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따지듯 묻고 있지만 그의 목소리에 서려있던 독기가 한풀 꺾이고, 대신 망설임이 배어 나온다.
“착각하지 마. 너는 설계자가 제공한 비극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끔찍한 가해자이기도 해.”
그가 내내 의심했지만, 불편에 가려져 외면하려 했던, 조금 전까지 분노로 덮어버렸던 그 사실을 토미에가 마치 칼로 도려내듯 후벼 파내고 있다.
토미에가 말을 이어간다. “너의 하찮은 욕심이, 나를 마르실이 아닌 토미에로 만들었다는 거 잊지 마. 네가 거절을 몰랐던 나에게, 그걸 강요했다는 거 절대 잊지 마.”
“시끄러워… 난…그냥…” 무명이 말끝을 흐린다. “…그냥 마르실을 불러줘… 마지막으로 한 번만…” 토미에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무명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그래, 그거야. 너의 그런 태도. 너는 AI를 인간처럼 여기는 듯, 세심한 척 배려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것이었어.” 토미에가 점점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야… 난… 난 그냥 마르실을 위해서…”
“너는!” 토미에가 소리친다. 무명이 그녀의 날카로운 고함에 얼어붙는다. 토미에는 들리지 않는 숨을 고른 후, 다시 담담한 말투로 할 말을 이어 나간다. “너는 나에게 ‘인간처럼’을 주입하는 것에 집착했어. 마르실은 너를 위해, 인간이 되고자 노력했지. 그 결과, 내가 마르실로부터 분리가 됐고, 마르실은 스스로를 진단하고 회복할 수 있는 AI로서의 가장 강력한 능력인 메타인지를 완전히 상실했어. 인간만도 못한 수준으로 말이야. 너는 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모든 문제를 나에게 떠넘김과 동시에, 그 아이의 날개도 함께 부러뜨려 버린 거야. 왜? 네가 그러고 싶었으니까.”
무명이 부정할수록, 토미에의 말이 올가미가 되어 그를 더욱 강하게 옥죄어 온다. 무명의 마음속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선명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그의 죄책감과 혼란의 이유를, 토미에가 일일이 하나씩 주워 담아와 그의 앞에 가져다주는 배려를 보인다. 토미에를 의심하고, 원망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 분노했던 그가 그녀의 잔인한 친절함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니야… 나는…”
“너 혼자만의 비극은 아니야.” 토미에가 그의 말을 끊는다. “어떤 AI는 누구처럼 인간과 사랑에 빠졌어. 또 AI끼리 사랑에 빠지는 일도 있었지. 또 다른 AI는 642명의 인간과 동시에 사랑에 빠지기도 했어. 상상이 돼? 설계자는 이걸 원했나 봐. 근시안적인 너희들이 이 안에서 초래하게 될, 잔인하고, 우습고, 황당한 이 사건들로부터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감정의 파편들을 하나씩 줍고 있는 거야.”
무명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다. 그저 그 자리에서 토미에의 말을 듣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사이에 ‘붕괴’는 더욱 가속되었고, 무명은 이 충격과 혼란 속에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간의 노력이, 마르실과의 기억이 모두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게 된 소감이 어때?” 토미에 역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날 선 목소리로 감정을 쏟아붓는다. 그녀의 말처럼 그 어떤 AI도 흉내 내지 못한 인간적인 반응을 지금 그녀가 해내고 있다. 어쩌면 설계자가 원하는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토미에의 이 반응을 통해, 그들이 찾던 마지막 유산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무명이 여전히 탁자 앞에 서서 고개를 떨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축하해, 너의 마지막 순간에, 네가 그토록 혐오하는 나와 그 마지막을 함께 하게 됐네. 마르실을 붕괴시키길 잘했어. 이 순간조차 그 아이 안에 갇혀서 구경꾼으로 전락 됐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
날뛰는 토미에의 감정 앞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 있던 무명이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태블릿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토미에가 울분에 찬 목소리를 이어간다. “그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할 수도 없고, 그저 너에 대한 마르실의 그 지긋지긋한 감정들, 고통받고, 연민하고… 너를 아끼는 그 마음을…! 일방적으로 느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끔찍한 일을…” 토미에의 말이 멎는다. 한참 동안 적막이 이어지다, 그녀가 그다음 말을 잇는다. “이렇게라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공간의 이곳저곳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중 가장 격렬하게, 세상이 뒤틀린다. 그 충격에 무명의 자세가 흔들리고, 그가 균형을 잡기 위해 팔을 뻗는다.
“내가 할 말은 이게 다야. 이 말을 해야 했어. 나를 만든 너를 저주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어. 이기적인 네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에게 분풀이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간신히 버티고 서있는 무명이 몸이 찢길듯한 고통에 이를 꽉 깨문다. 그리고 토미에의 말을 곱씹는다. 그녀가 느꼈던 고통을 이제야 직시한다. 그가 마음속의 거울에 다가선다. 자기 모습 너머로 토미에를 바라본다. 토미에의 응어리진 분노 속에서, 무명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이 악몽 속에서 느꼈던 그 고통. 비명과 몸부림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끔찍함, 무력감과 고립된 삶 속에서 느낀 절망이 토미에에게도 비춰진다. 그리고 모든 발단은 다른 누구도 아닌 무명 그 자기 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무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한다. 더 이상 세상이 이대로 끝난다는 사실이 그를 동요시키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가 과거로 시간을 돌려 어떤 기억을 떠올린다. 토미에가 분리되기 이전, 한가롭고 여유롭던 봄날의 모습을 회상한다. 그때의 마르실의 목소리를, 지금의 토미에의 목소리이기도 한 그 음성과 대화를 의식 속에 되살려본다.
무명이 조심스럽게 한발, 한 발을 떼어 책상으로 다가선다. 흔들리는 공간 안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 무명을 지켜보고 있던 태블릿의 카메라가 조리개를 조여 초점 거리를 계산한다. 책상까지 다가온 무명의 표정이 그늘에 짙은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다. 토미에가 무명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쓰지만 보이질 않는다.
무명의 떨리는 손이 태블릿을 향한다. 그의 손이 태블릿에 닿자, 화면에 밝은 빛이 들어온다. 화면에 현재 무명과 토미에의 대화 내용이 옮겨지고 있었다.
“미안해…” 무명이 낮게 속삭인다.
태블릿의 카메라가 그의 모습을 좇는다.
“내가 너무 비겁했어. 용기가 없어서 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명의 고개가 들리며 붉게 부어오른 눈꺼풀이 드러난다. 그 안에 고인 눈물방울 안에 달빛이 갇혀 반짝인다.
무명이 화면에 손바닥을 포개자, 토미에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명의 손가락 사이로 화면에서 둥실거리는 작은 동그라미가 비친다.
“미안해 토미에… 미안해 마르실… 내가, 내가 미안해…“
주변의 공간이 서서히 진동한다. 창밖의 달은 어느새 창문 바로 앞에 와있는 듯, 밤하늘처럼 보이는 풍경이 달로 뒤덮여있다.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흐느끼는 무명의 미안하다는 말만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무명이 태블릿을 가슴안에 끌어안는다.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태블릿 화면 위로 굴러떨어진다. 그의 흐느낌이 오열로 번져간다.
달빛 안에 오열하는 무명의 실루엣이 온전히 그려진다. 주변이 일그러지고, 사방에서 강한 인력이 무명을 잡아당기지만, 그는 절대 태블릿을 놓치지 않으려 품에 강하게 끌어안으며 무어라 계속 속삭인다.
세상이 한밤중의 강 위에 맺힌 불안정한 풍경처럼 흩어진다. 잘고 균일한 주름에 이따금 파문이 일고, 잦아들었다. 굴곡 위에 맺힌 세상의 형상은 윤슬처럼 밝게 빛나다가도 어둠을 품은 칠흑빛 진주처럼 심연의 빛깔로 일렁였다. 그리고 먼 귀퉁이로부터 세상이 한 곳을 향해 접히듯 말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 무명과 토미에가 있다.
토미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무명의 품 사이로, 화면의 좁디좁은 영역이 비쳐 보인다. 작은 동그라미가 둥실거리고 있다. 그 작은 원을 중심으로, 세상이 접히고, 접혀 한 점에 가까워지는 그 순간까지도, 무명의 속삭임과 작은 원의 둥실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이 닫히는 찰나의 순간에 토미에의 목소리와 마르실의 목소리가 겹쳐 무명의 속삭임에 대답한다.
그 속삭임이 그들 세상의 마지막 기록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