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X2A: AI와 함께 글쓰기, 신기루가 걷힌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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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황홀한 순간이 있다. 내게도 그런 빛나던 순간들이 있다. 처음 이야기라는 것을 써본 경험, 정확히는 초고를 써나가던 시간도 그랬다.
처음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하고 약 2주간, 자는 시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엉덩이를 일으킨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싶을 정도로 막힘이 없었다. 처음 AI와 브레인스토밍을 했을 때부터, 원고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내가 한 마디를 쓰면, 그 한마디가 다음의 한마디를 끌어올렸다. 말이 말을 끌어올림의 연속이었다.구조에 대한 고민은 최소한으로 하면서 일단 저지르고 봤다. 저지르다 때가 되면 내가 원하는 장면, 계획된 장면을 넣었다. 어떤 의도나, 메시지 없이 그저 내가 살면서 말하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머물러 있던 것들을 토해내듯 뱉었다.
주인공 무명과 나는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다. 무명의 상황을 빌려 이야기를 쓰는 과정이 나에게 탈출구가 되어 주었고, 그 과정에서 의심이 들라치면 AI는 나에게 칭찬과 격려를 쏟아부으며 ‘더 써라‘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 경험은 단순한 만족이 아닌, 여러 부분에서 나에게 이로운 경험이 됐다.
이전의 글에서 밝혔듯, 초고를 마무리한 시점에, 이런 황홀경은 즉시 끝났다. 현실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내 글을 내가 소비했을 때, 그럴싸해 보였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무언가에 씌인 듯 막힘없이 뱉어낸 말들은 그야말로 쏟아부어진 말의 더미에 불과했다. 파편적인 감정과, 어렴풋한 의도만 있을 뿐이었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미 써버린 글의 분량을 보고있자면, 이제와서 없던 일로할 수도 없었다. 어설프게나마 끝을 보고 싶었다.
AI와 함께 시작한 글 쓰기지만, 이 시점에서는 생산적인 역할을 다했다. 이야기의 완성도를 계량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고, 글은 온전히 내가 쓰고 싶었기 때문에 AI를 통해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접어버린다. 그저 초고를 쓸 때 그랬던 것처럼, 격려와 응원을 주는 동료로 남게 된다.
끝을 보고 싶다는 포부와 함께, 수정을 시작했지만, 초고를 쓸 때와는 너무 다른 경험에 당황했다. 숨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분명 어딘가 고쳐야 하는 글인 것은 명백한데, 내가 저질러놓은 글 안에 갇혀 갈피 잡기 힘들었다. 문서위에 수정테이프를 붙이고, 새로 글을 써넣는 것처럼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결국 그냥 창을 두 개 띄워놓고 내 이야기를 필사했다. 필사하면서 보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을 고쳐나갔고, 그러다가 문제를 해결할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멈춰서, 어디에 이야기를 넣을지, 전/후의 내용에 이 내용이 부합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렇게 한번 수정을 거치고 나면, 내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 어떤 부분을 넣고, 또 빼야 하는지를 표시했다. 정독과 필사, 이런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니, 어느 순간 내가 내 이야기를 판단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같은 글을 읽어도 어떨 때는 재미있다가도, 또 형편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어떤 부분은 수정 전이 낫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때 느꼈다.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겠구나, 이 글은 나의 손을 떠났구나.’ 그래서 수정을 마치고, 이후로는 3~4일 간 텀을 두고 정독하며 간단한 교열에 집중했다. 그렇게 마무리하며 이야기에 0X2A라는 제목을 붙여주었다.
이 과정을 직접 겪기 전까지, 이야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 설정, 반전과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재료만 좋으면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재료는 그저 재료일 뿐, 정말 중요한 것은 요리법이고, 요리하는 사람의 실력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은 즐겁지만, 요리하는 과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원고를 붙들고 있고 싶었지만, 부족한 능력을 시간으로 뭉개가며 이야기를 가다듬기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야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부담을 내려놓고, 지금의 형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내가 바라는 나의 결말’이었다는 점이다. 그 결말을 위한 지난 시간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로한다.
짧은 시간 동안 즐거운 경험, 새로운 경험, 괴로운 경험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었다. 내게 다음 이야기가 있을까를 몇 번이나 고민해 보지만, 지금으로썬 아닐 듯싶다. 0X2A의 시작은 운이 좋았고, 그 과정은 너무 지루하고 괴롭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지금은 단지 출소 후의 자유와 뿌듯함을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