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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 당신이 없는 낮의 시간은 멈춰있다.

K가 없는 '초코'의 하루

by 유블리안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위화감이었다.

침대 헤드에 닿아야 할 정수리가 허전했고, 등 뒤에 느껴져야 할 매트리스의 감촉 대신 배 밑에서 올라오는 기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웅크린 몸. 척추가 둥글게 말려 있는 이 자세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마치 색보정이 잘못된 낡은 흑백 영화 속으로 던져진 기분.

아니,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건 시야의 높낮이였다.

평소라면 천장이 보여야 할 시선에 거대한 원목 다리가 기둥처럼 박혀 있었고, 익숙했던 거실의 TV 장식장은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

​상황을 파악하려 입을 열었지만, 목구멍에서는 언어 대신 "크응" 하는 짐승의 콧소리만 삐져 나왔다.

꿈인가? 가위에 눌린 건가?

나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내 의지와 달리 앞발이 미끄러지고 뒷다리가 제멋대로 엉켰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척추를 곧게 세우는 인간의 감각이 사라졌다.

대신 네 다리로 체중을 분산해야 하는 낯선 중력 법칙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헐떡이며 고개를 숙여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복슬복슬한 갈색 털로 뒤덮인 앞발.
발톱이 마룻바닥을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내 엉덩이 뒤에서 제멋대로 살랑거리는 갈색 털 뭉치가 보였다.

꼬리였다. 내 신경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자아를 가진 듯 움직이는 꼬리.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반려견 '초코'가 되었다.

​어젯밤, 거울 앞에서 "나로 사는 거, 진짜 지겹다."라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그냥 내가 힘들어서 혼자 내뱉은 말이었는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신이 내 푸념을 듣고 정말로 인간이라는 운명에서 나를 로그아웃시켜 버린 것인가.

혼란스러워야 마땅했지만, 기이하게도 내 뇌의 절반은 이 상황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포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감각의 폭격이었다.

시각이 퇴화한 자리를 후각이 무자비하게 점령했다.

거실 구석에 쌓인 먼지 냄새, 베란다 화분의 젖은 흙냄새, 소파 가죽 틈새에 낀 3년 묵은 과자 부스러기 냄새,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인 'K'[ 인간이었던 나]가 아침에 급하게 바르고 나간 스킨의 잔향까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수억 개의 냄새 분자가 고해상도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꽂혔다.

인간일 때는 맡을 수 없었던, 이 집의 민낯이 냄새로 다가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거실 한복판으로 걸어 나갔다.

발바닥 젤리에 닿는 마룻바닥의 냉기가 어색했다.

목이 말랐다. 습관처럼 냉장고로 걸어가려 했지만, 냉장고 손잡이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나는 좌절감에 주방 매트 위에 주저앉았다. 그때, 내 그릇[반려견 초코의 물그릇]에 담긴 물이 보였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바닥에 있는 물을 핥아먹으면 안 된다."라고 외쳤지만, 목마름이라는 본능은 이성보다 강했다.

나는 어느새 혀를 내밀어 물을 핥고 있었다.

챱, 챱, 챱. 적막한 거실에 물을 마시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수치심보다는 해갈의 기쁨이 더 컸다.

물을 마시고 나니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하지만 변기로 갈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치우지 않은 배변 패드가 말라붙어 있었고, 그 위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바로 좀 치우지.'

​그리고 찾아온 것은 '사무치는 고독'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거실 바닥에 턱을 괴고 엎드려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스마트폰을 볼 수도, 책을 읽을 수도, TV를 켤 수도 없었다.

나는 그저 엎드려 숨을 쉬는 것 외에는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인 '나'는 몰랐었다. 출근한 뒤 텅 빈 집에 남겨진 '초코'가 겪어야 하는 시간이 이렇게나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빈집의 정적은 생각보다 무겁고 끔찍했다.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웅-'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윗집에서 물을 내리는 배수관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시계 초침 소리가 똑, 딱, 똑, 딱 하며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공간을 쪼개고 있었다. 그 규칙적인 소리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던 네모난 햇살이 거실 바닥을 천천히 기어갔다.

나는 온기를 찾아 그 볕을 따라 엉덩이를 조금씩 옮겼다.

햇살이 길어지다 못해 붉게 물들고, 이내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해가 지고 있음을 알았다. 하루가 1년 같았다.

​'심심하다. 외롭다. 제발 소리라도 났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이성적인 사고는 점점 흐릿해지고, 원초적인 감정이 내면을 가득 채웠다. 이것이 초코의 마음이었을까.

나는 매일 아침 "다녀올게" 한마디만 남기고 이 지옥 같은 침묵의 감옥 속에 녀석을 가둬두었던 것이다.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라지는 햇볕을 따라 자리를 옮기며 현관문만 바라보는 것뿐이었는데.
​그때, 내 몸 안에 심어진 어떤 '기다림의 스위치'가 딸깍 하고 켜졌다.

저 멀리 복도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미세한 기계음이 들렸다. 인간의 귀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거리였다.

​쿵. 심장이 반응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또각, 또각.

아니다. 옆집 여자의 하이힐 소리였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기대감이 툭 끊어지며 꼬리가 바닥으로 축 처졌다. 다시 방석으로 돌아와 털썩 몸을 뉘었다.

실망감이 털끝 하나하나까지 무겁게 짓눌렀다.

​다시 10분 뒤, 엘리베이터 소리.

이번엔 묵직한 발소리다. 혹시 K일까? 나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꼬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투박. 무언가 문 앞에 던져지는 소리. 택배 기사였다.

그는 벨도 누르지 않고 상자만 던져둔 채 황급히 사라졌다.

문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조차 그리워서, 나는 닫힌 문에 젖은 코를 대고 한참을 킁킁거렸다.

낯선 사내의 땀 냄새가 섞인 먼지 냄새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희망과 절망이 반복되었다.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거실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나는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는 다시 방석으로 돌아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코끝이 시큰했다. 버려진 것만 같은 공포.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아니면 나를 잊어버린 걸까?'

​분리불안.

그 단어의 무게가 내 짓눌린 가슴을 파고들었다.

인간이었을 때는 "개가 유난을 떤다"라고 생각했던 그 감정.

하지만 직접 겪어본 분리불안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세상에 홀로 남겨진 존재가 느끼는 생존의 공포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문만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의 소리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발 와줘.

나를 혼자 두지 마.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 안에서만 맴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다음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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