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환의 시선(유블리안)
‘스토리 캡처 사건’으로 한바탕 웃고 난 뒤, 우리는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공원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은하 씨는 내 엉뚱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었고, 나 역시 그녀의 웃음소리에 취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방금 전까지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아주던 달빛이 순식간에 먹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우르르- 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예고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 어머! 비다!”
“어? 갑자기 무슨 비가...”
가방 안에 우산 따위 있을 리 없었다. 비는 순식간에 폭우가 되어 내렸고, 우리가 대피할 곳은 공원 출구 쪽 상가 처마뿐이었다.
“은하 씨, 저기까지 뛰어요!
“네!”
하지만 빗줄기가 너무 굵었다. 그냥 뛰었다간 은하 씨가 비에 쫄딱 젖을 게 뻔했다. 나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었다.
“이거 써요!”
나는 점퍼를 활짝 펼쳐 은하 씨와 내 머리 위를 동시에 덮었다. 마치 영화 <클래식>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하나의 옷을 우산 삼아 빗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첨벙, 첨벙. 웅덩이를 밟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빗소리에 섞였다. 빗소리보다 은하 씨 숨소리가 더 가까웠다. 점퍼 하나에 몸을 구겨 넣느라 찰싹 달라붙은 그녀의 어깨. 점퍼 끝을 잡느라 겹쳐진 우리의 손. 그리고 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들리는 그녀의 숨결.
처마 밑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상반신이 젖어 있었고, 좁은 공간 때문에 우리는 정말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빗소리가 장면을 감싸듯 쏟아졌다. 마치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처럼.
“후아... 진짜 갑자기 무슨 비래요? 도환 씨, 다 젖었죠?”
은하 씨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를 보며 웃었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빗방울이 그녀의 속눈썹 끝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발그레 상기된 볼,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술.
순간, 내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아... 예쁘다.'
그 한 생각밖에 나지 나지 않았다.
“도환 씨? 많이 젖었죠? 어떡해요."
내가 넋을 놓고 바라보자, 은하 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는 순간 차가운 물기와 따뜻한 체온이 동시에 스쳤다.
“얼굴에 빗물이... 닦아 드릴게요.”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려다 말고, 잠시 멈칫하더니 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빗소리가 세상의 소음을 모두 삼켜버린 듯 고요해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쪽.
“......!”
오른쪽 볼에 깃털처럼 가볍고 말랑한 감촉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 얼어붙었다. 은하 씨가 내 볼에... 지금... 뽀뽀를?
“... 보답이에요. 우산 씌워준 거.”
은하 씨가 수줍게 웃으며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내 안의 이성이란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심장이 과열되어 터질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본능에 이끌리듯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은하 씨.”
“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동공 속에서 나를 향한 설렘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보답... 이걸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요. 흠흠..”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얼굴로 다가갔다. 은하 씨는 피하지 않고 사르르 눈을 감았다. 빗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젖은 옷의 차가움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다.
입술이 닿는 순간,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시작했다가,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듯 천천히 깊어졌다.
빗물 냄새, 그녀의 달콤한 향기, 젖은 옷의 차가움조차 설렘을 더 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차가운 빗줄기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온기만을 느끼며 뜨겁게 타올랐다. 이것은 사고였다.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린 탓이고,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던 탓이고, 점퍼가 좁았던 탓이다. 결정적으로 그녀가 너무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탓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고였다.
빗소리가 BGM처럼 흐르고
그녀의 향과 비 냄새가 뒤섞여
머릿속까지 쨍하게 차올랐다.
우리는 잠시 떨어졌다 다시 웃었고,
말 한마디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말했다.
오늘,
우리는 연애가 아니라 첫 장면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장면은 비 때문에
시작됐지만 끝은 서로의 마음으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