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해결은 사람이다.
입사 후 20년, 이제 회사라는 정글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던 때,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40대 중반을 넘어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보이지 않는 칼날이 목을 겨누는 듯한 압박이 시시때때로 느껴졌다. 패기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젊은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고, 어느새 나보다 어린 상사에게 보고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실력만으로 버티기에는 버거운 파도 속에서, 과도한 경쟁이 낳은 근거 없는 소문과 험담은 20년 넘게 쌓아온 내공마저 한순간에 무너뜨릴 기세로 나를 흔들었다.
직장인 익명게시판 '블**드'에는 나를 사칭해서 상사를 비방하는 글이 올라왔다. 누가 보더라도 내가 쓴 글인 것처럼 자세하게 썼다. 어디 지역 무슨 업무하고 있는데 상사가 힘들게 한다는 그런 내용이었고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상사를 적나라하게 씹는 그런 글이었다. 내가 봐도 기분 나쁜데 그 상사는 오죽했을까? 그 일을 계기로 팀장부터 팀원까지 모두가 나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점심시간이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를 홀로 남겨 두었다. 억울함을 해명하고 싶었지만 이미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을 때였다. 답답한 마음에 믿을 만한 후배에게만 몰래 휴대폰을 보여 주면서 결백을 토로했다. 그 후배는 나를 위해 나서 주었다.
"제가 그분 핸드폰 봤는데, 작성 기록 자체가 없었습니다. 글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거 보면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요?"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다른 사람 시켜서 썼겠지. 너 바보냐?" 결국 나를 변호하던 그 직원도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되었다.' '내 자리는 없는 걸까?' 하는 생각에 매일 밤 사직서를 떠올리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억울함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고, 불면증과 우울감, 소화불량으로 나는 그저 목숨만 붙어있는 송장 같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며칠 밤낮으로 매달렸던 작업에서 예상치 못한 실수가 터졌다. 이미 적지 않은 비용이 지출된 후였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조용히 덮고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솔직하게 보고 하고 책임을 질 것인가. 이대로 라면 얼마 남지 않은 회사 생활이 더 고달파질 게 뻔했다. 하지만 수십 번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젊음을 바친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비겁한 사람으로 남기는 싫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상사의 자리로 가서 사실대로 보고 했고 예상대로 불호령이 떨어졌고 잘 걸렸다 싶을 정도로 심하게 보복을 당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알아서 책임지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의 위기가 절벽 끝으로 나를 몰아세우는 듯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과 자책감으로 '정말 끝이구나'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가장 높은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고, 마지막으로 "저로 인해 발생한 비용은 제가 변상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그가 소리쳤다. "너는 진짜 나한테 제대로 혼나야겠어, 밖으로 나와!" 전 직원이 들으라는 듯한 호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직원들은 고소하다는 듯 비웃었고, 내 마음은 수치심과 함께 속이 바짝 타들어 갔으나 이미 마음을 정리한 상태라 표정은 담담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끌고 나가던 상사는 이미 모든 분위기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가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큰 소리를 치며 나를 데리고 나온 것이다. 이미 비웃고 있던 직원들의 얼굴도 다 봤던 것이었다. 우리는 회사 밖 조용한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 대리, 요즘 힘든 거 다 알아. 얼굴에 '나 곧 퇴사합니다' 쓰여 있더군. 나는 말이야, 일은 하는 척만 하고 뒤에서 남 험담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나도 들은 얘기가 많아서 처음엔 누가 문제인지 헷갈렸지만, 이제는 알 것 같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더 당당하게 할 일을 했으면 좋겠어."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오랫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던 억울함과 분노의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실수한 비용, 없던 걸로 해줄 테니 다시 잘해봐. 비싼 수업료 냈다 생각하고. 나한테 빚진 거야."
"네? 그 많은 비용을요..."
"나는 그런 거 수습하라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야. 무엇보다, 먼저 용기 내서 도움을 청한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거야. 같은 실수만 반복하지 않으면 돼. 실수가 두려워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다, 뭔가 해보려다 실수한 게 백번 낫지 않나? 이번 실수를 발판 삼아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봐."
"네! 정말 다시는 실수 없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 사무실 들어가서는 표정 관리 잘하고. ^^"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예전처럼 일에만 몰두했다. 주위 평판에 신경 쓰기보다 묵묵히 내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더 이상 나를 향한 이상한 말들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실수는 업무의 과정일 뿐, 중요한 것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용기였다. 그날 이후, 그 용기가 나의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 경험이 바로 27년간 나를 버티게 한 힘이었고, 앞으로 정년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이유다. 결국 모든 관계의 기반은, 그리고 이 정글 같은 회사 생활의 마지막 열쇠는 '신뢰'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위로받았던 지난 이야기.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는 '버틴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단순히 지지 않고 시간을 견디는 것, 혹은 상처를 끌어안고 묵묵히 나아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27년간의 시간 끝에서 제가 찾은 해답은, '버틴다는 것'이 나 자신과 내 삶을 지키는 가장 적극적인 싸움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존엄을 지키며 마침내 '나'로 남기 위한 여정, 그 대장정의 마지막 이야기를 곧 들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