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국회생활 역시 가시적인 성과물이 바로바로 나오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롭다.
국회의원 임기 4년 동안, 역순으로 하여 매년 진도를 나가줘야지만 4년 뒤에 원하는 목표에 그나마 가까워질 수 있는 구조다. 천년만년 국회의원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4년 마다 치뤄지는 선거에서 당선이 되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4년 뒤 시험일자를 받아놓고 시작하니 하루하루 허투루 보내는 날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루 쉴 수는 있지만 하루 쉬고 나면 또 쉬고 싶고 그런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다 보니, 심리적, 물리적 스트레스 강도는 어마어마하다.
국회생활을 시작한 5개월도 안돼 첫 해 맞이하는 국정감사였다.
선배들 심부름이나 하던 내게 기관이 한 두군데 맡겨졌다.
정부기관 전체로 보면 기능이 그리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놓아야 했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 대안까지 제시해야 했다.
하는 일은 단촐했지만 기관이 언론에 많이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문제를 찾으려면 그 기관을 잘 알거나 전문가들의 얘기를 들어야 했다.
일단 전문지 기자들이 쓴 기사를 훑어봤다. 한 10년치 기사를 들여다 봤다.
가물에 콩나듯 간간히 그 기관의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주로 무슨 행사를 했다거나 그런 류의 기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IT 업계 소식에 능통한 전문가와 언론사 기자가 의원실에 찾아왔다.
얘기를 나누는 중에 이런 저런 그 기관의 문제점이 나왔다.
기사화하기에는 애매했고,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그런 내용의 것들이었다.
우선, 전문가들의 말을 구체화 시키는 작업을 해야 했다.
언론에 나온 거는 하나마나한 종이호랑이인 경우가 많고, 그렇다고 언론에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인 경우들이 허다했다. 그러려면 좀 더 깊이있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나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일단 전문가를 찾아 나섰다.
여의도에서 일산까지 출근길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맞게 가고 있는건지 내내 불안했고,
믿을 만한 사람인지도 불안했다.
이래저래 소개로 만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소리만 요란한 경우가 종종 있기에, 나는 일단 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원하는 근거를 찾지 못하면 나는 어떤 아이템으로 가시적인 성과물을 내놓아야 하나.
당장 2주 뒤로 다가온 데뷔 무대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안 그래도 수석보좌관은 아이템이 영 시원찮다며, 정보기관의 보안을 담당하는 기관이니 만큼 거기에 초첨을 맞춰 접근하라며, 좀 더 깊이 있는 뭔가를 찾으라며 쪼아댔다. 그때 심리적인 중압감이란
네가 쓴 질의서를 들고 의원이 그 기관의 질의에 들어가서 요리조리 그 기관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도록 해야 하는데,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원론적인 얘기만 하도록 할 수는 없지 않냐며.
나도 알지만 그게 안보이는걸 어떻게 하냐며 속으로 엄청 불안해했었다.
상가 건물 2층인가에 위치한 사무실로 들어서자, 더욱 그런 나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음침한 분위기에 어두컴컴한 사무실, 컴퓨터와 온갖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 그 사무실은 흡사 망하기 직전의 비디오 대여점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우, 일찍 오셨네요?"
"네, 혹시 늦을까 싶어 일찍 출발했는데, 제가 너무 일찍 왔나요?"
"아닙니다. 자, 그럼 어떤 얘기가 궁금하셔서?"
그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 하나씩 그림이 그려졌다.
해킹 전문가가 맞았고, 내공이 있는 사람이 틀림 없었다.
그 사람이 얘기해준대로 그대로 시연을 해도 무방하겠냐고 하니, 당연히 무방하다고 했다.
정부기관의 해킹망이 얼마나 허술한 지를 시스템과 기술적인 측면, 정부의 마인드 등 다양한 각도에서 짚어줬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학습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무실로 컴백하는 버스를 타러 이동하는데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는지 몹시 배가 고팠다.
점심을 자장면을 시켜먹었는데도, 왜 배가 고프지.
어떤 한 상가 앞에 호떡집이 보였다. 몹시 달콤한 냄새.
나는 얼른 호떡 하나를 집어들었고, 허겁지겁 입천장이 데는지도 모르고 먹어치웠다.
그로부터 열흘 뒤, 나의 첫 데뷔무대.
전문지와 일부 일간지에 보도가 났다.
1면으로 실린 신문도 있었다. 뿌듯했다.
전화가 빗발쳤고, 나라는 사람의 이름이 기자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었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다니겠냐며 곧 그만둘거라며 수근거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고
그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일단 한 고비를 넘겼구나 싶었다.
어느새 6개월을 넘어서고 있었고 새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서히 발을 떼어 어딘가로 딛을 준비를 하고 있는 나, 그런 나를 대견해 하는 그런 새해 새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