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언가에 홀린 듯 과감히 버릴 때
평범한 세일즈맨을 때려치우고 대중연설 강의를 시작해 일약 스타가 되었던 '데일카네기'는
젊은 시절 자신의 삶은 불행했다고 기억했다.
출근을 위해 넥타이를 들면 바퀴벌레가 득실대던 뉴욕 뒷골목 허름한 집 구석이 싫었고,
관심도 없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자신의 직업을 싫어했다.
그가 좋아하는 일은 가르치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무작정 직장을 때려치웠고,
시간당 수달러에서 수십만 달러를 받는 강연자로 성장했다.
케네디, 오바마, 워런 버핏이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는, 6천만부가 팔린 처세술 책을 세상에 선보이기도 했다.
이루고자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 나를 끌어내는 뭔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자신의 뭔가를 바쳐 충실히 목표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고 있는 중인가.
눈떠보니 부자가 되는 그런 허황된 꿈이 아닌,
지금의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진짜 꿈이 있는가...
나는 다소 늦은 나이인 서른에 국회라는 곳에서 조직생활을 시작했다.
순수 사회 초년생 대우를 받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고
동료나 선배들도 나이대가 비슷하니 처신이 쉽지 않았다.
바로 밑의 직급은 나이는 한 살 어렸으나 5년 이상 근무를 한 베테랑이었고,
또 다른 분은 직급은 낮아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분이었다.
다들 자신보다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입사를 했을 거라는 눈초리로 바라보니
빠른 시간 안에 뭔가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내 발로 그곳을 걸어나와야 할 형국이었다.
5년 정도의 작가 경력을 인정받아 채용이 되었지만, 그들의 눈에 나는 그곳과는 맞지 않는 이방인이요.
국회생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건강검진 등 채용 관련 서류를 완벽히 제출해야 된다는 말에,
"그건 제가 알아서 준비되면 낼께요."
"그럼, 연금 등에 불이익 있을 수 있으니 빨리 준비해서 내세요."
"그건 제가 불이익을 당하는 거니 제가 알아서 할께요."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얼마 뒤 수석보좌관에게서 "룰은 마음대로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한 소리를 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무엇을 하라고 할때 말끝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왜 해야하는지 부터 설명을 하셔야 하는 것 아니냐'며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으니, 머리 꽤나 지끈거렸을 것이다.
(구차하고 궁색하지만) 내 나름대로 그렇게 대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고, 내 글이 소용이 없으면 그만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PD들이 작가들과 일을 해보고 마음에 안들면 다시는 찾지 않는 것처럼.
정들기 전에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성과가 나기 전에는 채용 역시도 신중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나는 하고 있었다.
(채용이 됐는데, 채용이 신중해야 한다니, 그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라 까먹는 생각이었는지)
내 나름대로 얼떨결에 갑자기 시작된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전의 프리랜서 시절의 습관에 찌들어 있었고, 한 마디로 뭘 몰랐던 거다.
겉으로는 냉철한 척 했지만 사실상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하는 생각을 늘 속에 담고 있는,
그래서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슴에 담은 '을'의 삶에 주눅들어 있었던 것이다.
20년전 대한민국은 며칠 일해보고 마음에 안들면 그만 나가달라며 해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기에, 채용을 채용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건 순전히 내 탓만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자유롭게 지냈던 내가, 맨날 밤을 대낮처럼 지냈던 야행성의 내가,
틀에 박힌 생활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매일 매일이 고통스럽고,
내길이 아닌 것 같아 위축만 되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런 조직에서 한 달만 일하고 짤리는 거 아닌가 했던 내가,
한달이 두달이 되고, 두달이 석달, 석달이 여섯달이 되고, 여섯달이 1년,
1년이 2년.... 그리고 10년을 넘게 그 조직에 몸을 담았고, 또 5년 동안 또 다른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과거의 커리어라는 껍질을 과감히 버렸다.
5년간의 나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었다. 조금 더 하면 괜찮을 수 있을거라는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냥 국회라는 곳을 선택해버렸다.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뚜렷한 소명감 따위는 아니었다.
그냥 막연히 지금의 삶은 내가 가야할 삶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내가 살아있었으면 했다.
나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용기를 얻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을 가꾸었으면 했다.
비록 내가 능력이 모자라 아무것도 못할지언정 일단 부딪쳐 보고, 능력이 드러나면 그때가서 생각해보자는 생각이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나이 삼십을 앞두고 뭔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찾아왔다.
국회를 그만둔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고 되돌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과거의 반추로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새롭게 바라볼 힘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과거를 통해 본 현재는 곧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그때 왜 그렇게 뭔가에 홀린 듯 국회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어렴풋이 아마도 난 그때 뭔가에 목말라 있었을지도.
세상을 향해 내 뜨거운 열정을 바칠 뭔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