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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y 20. 2024

사돈팔촌, 4촌

- 남보다 못한 관계지만, 회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는 설, 추석 명절 두어 번 큰집 식구들 얼굴을 보곤 했지만, 직장을 갖고 먹고살기 바빠지니 핑계 같지만 큰집 식구들 얼굴은 거의 보지 못하고 살았다. 누군가 돌아가시거나 결혼을 하거나 경조사가 있어야 만났다. 그마저도 이제는 남은 어른들이 거의 안 계시고 결혼할 사람들은 다 해서 만날 기회도 쉽지 않다. 그저 잘 살아있겠거니 한다. 아마 길을 가다 마주쳐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스칠지도 모르겠다. 


이모의 형제들, 아버지 사촌의 자손들까지 두루두루 챙기는 남편을 보면 우리 집이 이상한 건가 싶지만, 가족이라고 다 같은 가족은 아니니 또 각자 말 못 한 사정과 사연으로 멀어지게 되고 안 만나게 되는 것이니 정답이 있겠나 싶다. 그럼에도, 문득 아쉽고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 전혀 모를 것 같은 사람들도 결국 한 다리 건너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네트워크의 세상, 어찌 우리 사촌들은 내 사정거리에서 가차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된 걸까 하고 말이다.


출처: 펙셀




꽤 오랜 세월 누적된 결과일지 모른다. 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큰어머님은 우리 엄마에게 그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 시켰고, 그때마다 엄마는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지만 그때 내게는 연년생 두 아들을 끔찍이 자랑하셨던 모습이 더 강렬히 남아 있다. 명문대를 갈 거라고 초중고 시절부터 그렇게 티를 내셨다. 방배동 이층 집 자기 방에서 스포츠카 미니어처와 외제 학용품 등을 보여줬던 오빠들은 허여멀건 얼굴로 자부심을 드러냈다. 


"넌 반에서 몇 등이야? 난 1등만 해."

"이거 갖고 싶어? 가져"


미니어처와 학용품을 받아 집으로 돌아와선 우리 형제는 그걸 갖는다고 쟁탈전을 벌이곤 했다. 심란해하는 엄마의 모습은 아랑곳없이.  누가 더 좋은 걸 갖냐고 옥신각신 하다 가위바위보를 해 우선권을 쥔 사람이 갖고 싶은 걸 갖곤 했다.  미니어처는 남동생들 몫이고 주로 학용품 중 일부는 내 차치였지만.


우리 집이 부유하지 못한 걸 부끄러워하거나 속상해한 적은 없다. 그저 오빠들 자랑만 하는 큰어머님, 위엄만 있는 할머니, 부유함을 뽐내던 큰아버지가 순수한 아이 눈에는 좀 멀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불편함은 어린 시절 내게 크게 자리한 감정이었던 같다. 




나와 네 살, 두 살 터울이었던 두 사촌 오빠들은 대학 입학 시기가 되었는데도 명문대를 갔다는 소식은 들려오질 않았다. 큰 오빠는 삼수, 사수까지 하다가 군대를 갔고 둘째 오빠는 어떻게 어떻게 전문대를 갔고, 나와 내 동생이 친척 오빠들보다는 더 좋은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을 때, 아마 그쯤부터 우리는 자주 안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똑똑하다, 서울대 갈 거다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선지, 나는 한 번도 오빠들의 인생을 암울하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잘 살겠거니 했다. 


내게 사촌 오빠 중 작은 오빠가 연락을 해온 건 내 나이 삼십 대 초반 무렵이었다. 보험회사를 다녔던 작은 오빠는 보험을 들어달라고 부탁을 하러 왔다. 나는 경기도에서 여의도 회사까지 찾아온 오빠에게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수십만 원 보험을 들어줬다. 

물론 흔쾌히 기쁜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이었다. 인생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그토록 잘난 오빠들이 어쩌다 본인들이 꿈꾸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씁쓸한 느낌이었고, 내 동생한테까지 보험을 들었다고 얘길 듣자, 조금 화도 나기도 했다. 하지만 감정도 금세 잊혔다.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치열한 삼십 대를 보냈다. 내 나이 사십 대 중반 무렵, 사촌 오빠가 직접 연락을 해온 건 아니고, 엄마를 통해서 다시금 연락이 왔다. 


"어쩌니. 니 사촌오빠 00, 죽었대."

"엄마 무슨 말이야? 왜?"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이렇다 할 직장도 없이 살다, 하루하루 알코올에 의존했던 사촌 큰 오빠는 결국 홀로 눈을 감았다. 재수, 삼수할 때까지 아니 오빠가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집안 형편은 나쁘지 않았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더니, 큰아버지가 사업에서 손을 뗀 뒤 얼마동안은 그럭저럭 큰어머니와 작은 오빠가 벌어 생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어머님도 몸이 불편해지면서, 큰 오빠가 사업한답시고 집까지 날리자 급격히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던 것 같다. 그 일로 큰 오빠는 신변을 비관했고 알코올 의존증이었던 큰 오빠는 그렇게 삶을 정리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달라졌을까.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는 있었을까. 

설령 해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달라졌을까. 

잘 났다, 잘 나야 한다는 주문 같은 말들이 쌓은 모래성을 공고히 할 재간이 과연 우리에겐 있었을까. 


몇 해 큰어머님이 톡을 보내오셨다. 너,  도통 연락도 하지 않고 차갑게 구니.라는 말이었다. 

느닷없이 이십 년 전 들었던 보험을 중도 해약한 걸 가지고 서운하다셨다. 

이리저리 나갈 덴 많고 보험료가 너무 많이 나가는 것 같아, 조정한 걸 그리 말씀하시니

그 정도는 아는 분한테 구구절절 설명을 드리는 건 아닌 것 같고

어려울 때 돕는 게 가족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거일 테니, 그저 듣기만 하다 죄송해요라는 

건성의 대답을 했다. 자잃은 부모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것이며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얘기는 들어줄 수 있는 거니깐. 


엄마는 내게 말은 안 했지만 큰어머니는 엄마에게 매달 얼마간 돈을 부쳐달라거나 빌려달라고 부탁을 하셨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몇 번 보내드린 같다. 그러다가 이건 아닌 같아 그만두셨던 것 같다.

호의가 권리가 되는 순간이 서서히 다가옴을 엄마도 직감했던 것 같다. 


이웃들도 안부를 묻고 시험 보는 아이를 위해 엿 한 뭉치를 건네기도 하는데, 

나는 그토록 잘 살던 큰집에서 미니어처나 학용품 외에 뭔가를 받아본 적이 없다. 받아본 거라면 똑똑한 오빠 덕을 네가 곧 볼 거라는 말들 뿐. 오빠들처럼 너도 잘 나야 한다는 말뿐. 

왜 평생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으니 동서가 보답을 할 차례라는 논리로 엄마에게 의무를 부과하려 하고 내게 느닷없이 전화해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고 하시는지. 

왜 이토록 불편함 마음을 갖게 하는 건지... 나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돈팔촌처럼 먼 관계가 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경제적인 차이인가, 장손 집안으로 할머니를 모신 집과 아닌 집의 차이인가...

잘난 아들이 잘나지 않아서인가, 잘 나지도 않았던 아이들이 잘 나게 컸기 때문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가족이 된 걸까. 

분명한 건 그 모든 복합적인 것들의 융합을 통해, 우리는 지금 아주 머나먼 가족이 되었다는 것 뿐. 

남과도 다를 바 없는 관계지만 회복하려 기를 쓰지 않는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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