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다
인간은 근원적 결핍을 가지고 태어난다.
태어날 때 어머니와의 분리에서 오는 근원적 결핍.
살면서 채워지고 비워가는 마음의 크기. 어떤 이는 결핍된 상태로, 어떤 이는 충만한 상태로 살아간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가족과의 관계는 인간 성격의 근본을 형성하는 무엇이 아닐까.
"언니, 외롭겠다"
딱히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아는 동생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그녀는 내가 그나마 가깝게 지내는 동네 엄마다. 애 때문에 어찌어찌 언니 동생하게 됐지만 그렇다고 하루가 멀다하게 자주 보거나 그러진 않는다. 가끔 일이 생기면 만나 차 한잔 마시는 정도다. 아이들이 어려서는 일이주에 한두번 만나다가 지금은 일년에 한두번 만날까 말까.
동생 말이 오지랖이라거나 선 넘었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친정이 가깝고, 친언니와 자주 시간을 보내는 그녀 눈에는 친정도 멀고, 속을 터놓을 친언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명절에나 가끔 본다는 남동생들이나, 그나마 시댁이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지만 딸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관계도 아닌 내가 그리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만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나 가족에서 파생된 관계보다는 사회생활하면서 맺어진 관계에 무게중심이 더 기울어진 나로써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끔 언니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풀릴 때가 있거든. 물론 진짜 속마음은 얘기 안해요."
나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바로 그녀가 말했다. 물론 미주알고주알 속내를 얘기하면서 감정이 해소되는 게 어떤 건지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한때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고, 지금도 얼마든지 그렇게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살다보니 그것 역시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체력과 시간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약속을 잡아 만나서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무했고, 내 일상에 지극히 제한적인 일이 된지 오래다.
"그냥 난 혼자서 TV보고 쉬고. 먹고 자고 그게 더 좋아."
"기본적으로 언니는 혼자를 좋아하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나라...맞는 말이다. 주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데에 에너지를 쏟는 편이 아니다. 연락을 먼저 하는 법이 거의 없고 리드해서 모임 자리를 만드는 경우도 없다. 연락이 오면 만나거나 그마저도 미루거나 소극적인 경향이 많다. 쉬는 날엔 집에 있는 게 최고의 휴식이다.
일종의 이것도 어떤 결핍일까. 그녀가 내게 바쁜데 연락을 하는 것 같아 자주 연락을 못하겠다고 했다. 편하게 곁은 주는 타입이 아니라는 뜻. 편하게 연락하라고 했지만, 그후로 그녀가 편하게 연락한 법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 내 잠재의식속에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게 두려워 거리를 두는건가. 연락해 거절당할까봐 두려워서, 모임 자리를 만들었는데 반응들이 별로일까봐 걱정돼서 아예 담을 쌓고 사는 건가 하는 생각.
하등의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걸 잘 알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언젠가 주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불안한 정서를 갖게 되는 건 유소년기 부모나 가까운 관계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일 수 있단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려서 내가 원하는 걸 요구했는데 들어주질 않아 포기하게 된 걸까. 그러다 엄마가 내게 들려준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엄마는 양가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했고, 시댁에선 집안이 기운다는 이유로, 친정에선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어찌어찌 시댁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일이년을 살았는데 그때 내가 태어났고 첫째가 딸이란 거에 실망한 할머니가 내가 울기만 하면 시끄럽다고 호통을 치시는 바람에 엄마가 나를 동구밖까지 안고 나갔다가 잠들면 다시 들어오곤 했단 얘기였다.
그 얘기 들을 때 그 시절 다 그랬지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는데, 갓난 아기가 환영받지 못했다는 걸 알았던 걸까. 엄마의 외로움이 고스란이 전해졌던 걸까. 인간에 대해 기대하거나 의지를 안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
물론 과학적으로 입증할 길은 없다. 또 지극히 극단적 상상일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굴레속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작은 영혼이 누구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굳건히 나홀로 서리라는 다짐을 해본 모습을 상상해본다. 기특하기도 하면서 짠하기도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