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중이라도 이혼녀는 이혼녀이니까요
서류만이라고 생각해 변함없던 우리 부모님들과는 달리
시부모님은 일년에 서너 번은 마주함에도
나를 며느리와 전며느리 사이의 취급 또는 대우를 하신다.
아이들만 모를 뿐 나와 남편의 이혼은 이미 양가에 모두 알려졌다.
하지만 코로나 핑계로 한동안 가족간의 왕래가 없었기에
이혼을 하고도 동거를 하는 우리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신다.
남편 4남매, 시아버지 7남매인 시댁에도 이혼 가정은 없다.
부끄럽게도 우리 부부가 양가의 첫 이혼이라 할 수 있다.
당신 아들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 부부가 이혼 했음을 아시기에,
시부모님이나 시댁 가족들이 이혼하겠다는 나를 말리지 못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의 부모님이자 내 전 시부모님은
혼인의 지속 여부와 상관없이 나를 남으로 대하셨다.
그들 앞에 그어진 선을 넘어 그들의 가족이 되는 건 10년 동안 불가능했다.
며느리인 나는 언제나 남이었다. 어쩌면 남보다 가까우면서도 멀게 대하는.
그 분들께 우리 부부의 이혼사유는 망한 사업으로 인한 돈이지,
그가 내게서 잃어버린 믿음과 신의 때문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으신다.
남편의 부모님에게는 당연히 애쓰고 용쓰는 나보다 잘못을 했어도 귀하고 중한게 당신 자식이다.
첫 아이 임신 8개월 차,
갓 퇴사를 하고 서울 신혼집에 있는 나를 김장에 오라며 어머니께서 호출하셨다.
안가고 싶었지만 부르시니까 가긴 갔다.
그때만해도 며느리의 도리로서 다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남편은 일을 갔기에 나 혼자 서울에서 경기도 동쪽 끝까지 60km를 넘게 운전해서 시댁 김장에 참석했다.
내가 그리 착한 며느리인 건 아닌게,
임산부니까 김장 같은 일은 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스커트를 입고 굽이 그리 높지 않은 부츠를 신고갔다.
결혼할 때에도 아무 것도 해준 것도 없으셨으면서
김장이라고 임신한 며느리를 부르는 것이 내 딴엔 이해가 안 가 나름 반항을 한 것이다.
다만 아직은 어리고 젊어 힘이 좋은 까닭에 김치통을 번쩍 번쩍 들어 옮기는 정도로 일하는 척은 했다.
애 내려온다고 주윗분들이 말리셨기에 그 마저도 몇 번 하지 않고 봉투를 드리고 김치를 받아왔다.
둘째까지 있었던 어느 해인가는,
시골집에서 김장을 하신다며 호출하셨다.
그때만해도 우리 관계는 아무 문제 없었기에 남편은 내게 같이 가자며 졸랐다.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강원도 시골까지 가야는데 혼자 가기는 싫다며.
나를 꼬시면서 한 말이 참 가관이었다.
사랑방에 뜨끈하게 군불을 지펴줄테니, 등을 지지고 편하게 누워 나더러 쉬기만 하라했다.
김장을 비롯한 모든 일은 자신이 다 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몇 번이고 나는 일 안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함께 시골에 갔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이 고무장갑을 끼자 어머니의 눈이 똥그래지셨다.
물에 손 한방울 닿지 않게 키운 귀한 아들이 당연히 방으로 들어갈 줄 아셨을테니.
그걸 지켜보며 나는 당당하게
"어머니, 오빠가 저는 애들보고 쉬기만 하고 일은 오빠가 다 한대요.
그래서 전 시골에 등 지지고 쉬러 온 거에요." 라고 말했다.
"오빠! 빨리 일 해! 나까지 일하게 만들지 말고." 하는 눈에 보이는 여우짓도 서슴치 않았다.
비록 사랑하는 내 남자에게는 곰보다 더한 미련탱이임에도
나는 내게 주어진 불의와 차별을 수긍할 만큼 착한 성정은 되지 못한다.
내가 관대한 것은 언제나 늘 그 하나 만이다.
우리 엄마는 연세가 많으신 시부모님을 돕지는 못할 망정 마음까지 무겁게 만드냐며 나를 혼내셨다.
하지만 나는 그깟 김치 내가 담궈서 먹을 수 있기에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 '느네 때문에 김장 한다'는 공치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버님 네는 사돈 댁에서 김치를 가져다 드셔서 어머니께서 내게 서운하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친정 김치 대신 가까운 거리를 핑계 삼아 어머니 김치를 가져다 먹었다.
그런데 김장의 이유가 어느순간 어머니 김치를 가져다 먹는 우리 식구가 되었다.
거기다 더해 어머니는 해마다 말씀하셨다.
고춧가루를 얼마 주고 샀고, 올해는 생새우가 올라서 비쌌다.
너네 먹이려고 양념에 사과도 갈고 배도 갈아 넣었다.
맵찌리인 나는 먹기 괴로울 정도로 매운 청양 고춧가루를 써가며 만든 김치를 주시면서 생색내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우리 부모님은 시댁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의 수십 수백배를 더 줌에도 더 못 줘 안달이셨다.
김치를 잘 먹는 내 어린 딸이 먹을 백김치 한 포기 담궈주지 않고,
매운 것이 맛있는 걸 줄 아는 당신 아들 입맛에 맞춘 김치를 내어주시면서 [느네]라니!
딸 가진 죄인이랍시고 우리 부모님은 늘 사위에게 지극정성이셨다.
일을 시키기는 커녕 부족한 딸을 잘 봐달라 당부하시고 편하게 해주셨다.
그렇게 매번 저자세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우리 시어머니는 딸랑 아들 하나 가진 것 치고는 너무 유세를 부리셨다.
그래서 더 나는 내 자존심이자 내 부모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처럼 모난 마음으로 반항을 했다.
거기다 결혼 전, 종갓집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의 김장 날에도 나는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나가 놀아버렸다.
엄마를 도와 배추를 절이고 씻고 무친 것은 내가 아닌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로 대하는 착한 내 남동생이었다.
내 엄마의 고생도 나 몰라라 했는데 당신 아들 먹이려고 김장하며 생색내는 시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릴 리가!
못된 짓, 못된 생각, 나쁜 마음, 바르지 못한 행동인 걸 알았지만.
나는 그 날 정말로 마늘까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효녀인 내 딸들이 엄마를 자주 자주 불러주어 더더욱 일에서 비켜날 수 있었다.
그 날, 남편에게도 시부모님에게도 나는 몸소 보여주었다.
'내가 이 집에 일 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 시집온 건 아니다' 라는 걸.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시부모님 생신상을 몇 번이나 챙기고
시댁 가족 수십명을 우리 집에 초대해 직접 차린 상으로 대접할 만큼
내가 나서야할 땐 앞뒤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불사른다.
늘 이렇게 경우없이 못되게 구는 것만은 아니다.
"엄마가 김장한다고 시간 나면 오래. 내일 나 혼자 후딱 갔다올게."
"애들 내일 오전이면 일정 다 끝나는데. 같이 가지? 오랜만에 애들 얼굴도 보여드리고."
사실 뵙고 온지 얼마 안되긴 했지만, 보고 또 봐도 보고싶은게 자식이고 손주 아닐까.
전 며느리인 나야 궁금하지도 보고싶지도 않으실 거지만
살아 계신 한 해야할 효도는 해보자 싶어 좋은 마음으로 대답을 했다.
"너도 같이 갈 거야? 너 안가면 애들 안데리고 갈래."
"나 안가면 애들 때문에 오빤 일도 못 할텐데. 같이 가야지."
"그럴까, 그럼?"
차마 김장에 같이 가자는 소리를 못하고 있던 그가, 함께 가자는 내 말에 웃음꽃을 피웠다.
내가 곁에 있어야 그는 이렇게 당당해지고 의기양양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김장 같은 집안의 큰 일이 있어도 이제 어머님은 나를 찾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혼을 한 이후로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게 전화조차도 걸지 않으신다.
대신 아들을 통해 연락을 하신다.
나 역시 전화를 드리더라도 남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고 혼자서는 연락하지 않는다.
이혼 직 후 달라진 당신들의 대우에 솔직히 조금 섭섭도 했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남편 또한 평소에 친정 부모님과 연락하고 지내지 않기에 나도 그의 부모님과 연락하지 않는다.
이혼을 하고 우리는 공평하게 효도는 셀프로 하는 중이다.
물론, 효도보다는 아직도 부모 마음을 쓰이게하는 한참 모자란 불효가 대부분이지만.
김장을 하러 갔더니 거의 다 시부모님 두분이서 해놓으셨다.
수육과 절인 배추에 식사를 하고 둘째 예삐가 시어머니를 도와 김치에 속을 넣었다.
시아버지는 큰 그릇들을 씻으셨고 남편은 김장통 정리를 했다.
나는 점심 먹은 설거지만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님의 공치사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뾰족하게 봐지지 않고 거북하지 않았다.
이혼녀가 되어 시어머님과 (법적으로) 완벽한 타인이 되고 나니 모났던 내 마음이 좀 둥글게 바뀐 것 같다.
'알아주길 바라시는 거구나, 저렇게 해서라도 나한테 인정 받고 싶으신거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 김치가 이렇게 맛있나봐요!" 라고 대꾸했다.
더이상 찾지 않는 전 며느리. 원래부터 일은 잘 하지 않는 전 며느리.
아무렴 어때요.
살아계신 동안 전남편과 동거를 하든 재혼을 하든 나 또한 어머님을 계속 뵙게 될 것을.
다만, 그어 놓은 어머니의 선 안으로 들어가보려 용을 썼던 과거 대신
선 밖에 머물면서 선선하게 바람도 통하고 물도 흐를 수 있는 적당한 관계로 지내고 싶다.
너무 가까워 태워져버리지도 않고
너무 멀어서 시린 관계가 아닌, 적당한 거리의 관계로.
그러면 지난 세월동안 쌓인 서운함도 더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