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계절
누군가의 인생을 계절로 표현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제주도가 배경인만큼 폭싹 속았수다는 매우 고생했어 수고했어 뜻의 제주방언이란다.
중의로 사용할 수 있는 이 멋진 말을 제목으로 하다니.
작가님 천재인가봐!!
무튼 요즘 이 드라마덕분에 양관식이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너도 나도 김관식 이관식 송관식이란다.
우리집에도 자칭 관식이가 있다.
한때는 나의 남편이었던, 지금은 동거남인 그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지금 봄여름가을겨울 중 어디쯤일까?
덧붙은 말에 내 시선이 아니꼽다
가을쯤 될까? 하는데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가을은 추수의 계절인데 뭔 소리.
애셋 우리는 고생길이 아직도 구만리다.
막내가 이제 겨우 초등입학했는데.
참 정신 빠진 소리한다 싶었다!!!
우리 부부의 계절은 나이와 상관없이 여름이다 한여름!!!
햇볕에 까맣게 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 뼈 빠지게
부서져라 일 해야하는 여름.
앞으로 10년은 열심히 진짜 우와 싶게 많이 벌어도
손에 쥐는거도 남는거도 없이 쓰기만 하게 될 그런 나이.
그런데 가을 같은 여유로운 소리 라니.
빨리 죽고싶어? 아님 정신차려
내 대답에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가 되묻는다.
왜에?
우리가 함께한 지난 15년은 봄과 초여름이었다.
손에 남는 거 하나 없이 밭 갈고 논 매고를 퍽 열심히 했다.
그것만 했을까?
땅파기를 겨우 끝낸 후에 씨 뿌리고 물대기 바빴다.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못하던 봄이란 계절이 이제 막 지났다.
봄동안 신혼으로 서로에게 적응을 하고
허니문베이비를 시작으로 쉼 없이 애셋을 낳고 또 낳았다.
가진 게 없어 개처럼 사방팔방 뛰며 터를 잡느라 어지간히도 바쁘게 살았다.
이혼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우리의 계절은 한여름이지.
너와 나, 애셋 엄마아빠, 예비구혼부부인 우리는
이제야 뜨거운 햇살에 뭐라도 쑥쑥 자라는게 눈에 들어오는 여름을 맞이했다.
눈에 보이게 숭덩숭덩 크고 자라는 아이들을 가꾸고 지키기에 최선을 다해야하는 계절이다.
잠도 설치고 더위도 먹고 비에 젖어가며 말이다.
이런 덥고 고생스런 여름이 10년쯤 지나면
그제야 열매가 영글기 시작하는 늦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겠지.
그리고 눈 깜빡할 새가 지나면 겨울이 올 거고.
숙명같은 우리 아이 셋이 다 자라고나면
우리의 가을겨울은 좀 여유로워지겠지.
그땐 우리 정말 재혼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 가을에 접어들 즈음엔
그간의 고생이 묻은 늙고 주름진 손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이겠지?
서글프게도 상상이 된다.
아버님을 닮은 모습으로 늙은 당신과 엄마를 닮은 모습으로 늙어있는 내가.
아버님과 우리엄마는 어쩐지 생각만으로도 그림이 이상한데 우리는 그 모습일것 같다.
봄을 함께 보냈고 여름을 같이 맞이한 그대여.
곱지 않고 밉더라도 맞잡은 두 손을 붙들고 웃을 수 있게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건강하게 이 여름을 견뎌보자.
버리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나의 사랑인 남자야.
나보다 여섯살이나 나이 많은 당신덕에
내 결혼생활은 남보다 10년쯤 먼저 가는 것 같지만.
당신은 여섯살이나 어린 내 덕에
잠시 끊긴 결혼생활을 남보다 10년쯤 길게 가게 해줄게.
그때까지 건강하게 열심히 벌며 살아보자!!
아직 폭싹 속았수다는 우리에게 너무 먼 얘기야.